미즈노 다다아키라 (176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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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즈노 다다아키라(1763년)는 에도 시대 후기의 다이묘이자 막부의 로주였다. 1763년에 태어나, 1778년 미즈노 타다치카의 양자가 되었고, 1802년 누마즈번의 번주가 되었다. 이후 지샤부교, 와카도시요리, 소바요닌을 역임하며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측근으로 활약했다. 1817년 로주 수좌에 취임하여 분세이 코반의 개주를 통해 통화 발행 이익을 가져왔으나, 뇌물 정치가 횡행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1834년에 사망했으며, 아들 미즈노 타다요시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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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즈노 다다노리는 에도 시대 후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활동한 무사이자 다이묘, 화족으로, 누마즈 번 하타모토 출신으로 미즈노 다다자네의 양자가 되어 가문을 계승하고 보신 전쟁에서 메이지 신정부에 협력하여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그의 후손들은 화족의 지위를 유지했다. - 하마정 미즈노가 - 미즈노 다다히로 (1807년)
미즈노 다다히로는 에도 시대 후기 누마즈 번의 번주로, 쇼군 세습 문제에서 이이 나오스케를 지지하여 도쿠가와 이에모치 옹립에 기여하고 막부 요직을 역임했으나 사쿠라다몬 밖의 변 이후 실각하여 은거했다. - 누마즈번주 - 미즈노 다다노리 (1851년)
미즈노 다다노리는 에도 시대 후기부터 메이지 시대에 걸쳐 활동한 무사이자 다이묘, 화족으로, 누마즈 번 하타모토 출신으로 미즈노 다다자네의 양자가 되어 가문을 계승하고 보신 전쟁에서 메이지 신정부에 협력하여 자작 작위를 받았으며 그의 후손들은 화족의 지위를 유지했다. - 누마즈번주 - 미즈노 다다토모
미즈노 다다토모는 1731년에 태어나 1802년에 사망한 에도 시대의 다이묘이자 막부 관료로, 와카도시요리, 소바요닌, 로주 등을 역임하며 다누마 오키츠구의 정책을 지지하다가 실각 후 로주로 복귀하여 3만 석의 영지를 다스렸다. - 미즈노 데와노카미가 - 다누마 오키마사
다누마 오키마사는 에도 시대 인물로 다누마 오키쓰구의 아들이자 미즈노 다다토모의 양자이며, 아버지 실각 후 가문 재건을 위해 노력하여 옛 영지로 복귀했고 막부에서 오반가시라와 와카도시요리를 역임했다. - 미즈노 데와노카미가 - 기쿠마번
기쿠마번은 1868년 미즈노 다다노리에게 하사된 영지로 세워져 번청 건설과 번교 창설을 추진했으나 1871년 폐지되어 기사라즈 현에 통합되었다.
미즈노 다다아키라 (1763년) | |
---|---|
기본 정보 | |
씨명 | 오카노 씨(오카노 씨) → 미즈노 씨(미즈노 씨) |
이름 | 미즈노 다다아키라 |
![]() | |
시대 | 에도 시대 중기 - 후기 |
출생 | 호레키 12년 12월 1일(1763년1월 14일) |
사망 | 덴포 5년 2월 28일(1834년4월 6일) |
어릴적 이름 | 우시노스케, 도모고로 |
통칭 | 기치타로 |
계명 | 위덕원전광예성영융감대거사 |
묘소 | 시즈오카현누마즈시 데구치초의 센본산 승운사 |
관위 | 종5위 하, 야마토 수, 데와 수, 종4위 하, 시종 |
막부 | 에도 막부소자반, 사사 봉행, 와카도시요리, 소바요닌, 노중 |
번 | 스루가국누마즈번 번주 |
부모 | 아버지: 오카노 도모아키, 어머니: 오쿠다 다다히데의 딸 양아버지: 미즈노 다다치카, 미즈노 다다토모 |
형제 | 오카노 도모치카, 미즈노 다다아키라, 마미야 노부오키, 마쓰시타 무네타카 |
배우자 | 정실: 미즈노 다다치카의 양녀 계실: 야에히메(미즈노 다다토모의 딸) |
자녀 | 다다쓰구(차남, 하타모토 가문을 잇다), 다다요시(삼남, 누마즈 번주를 잇다) |
관직 계승 정보 | |
전임자 | 미즈노 다다토모 |
후임자 | 미즈노 다다요시 |
직책 | 누마즈번 번주 (미즈노가) |
대수 | 2 |
임기 | 1802년 ~ 1834년 |
소바요닌 | |
전임자 | 공석(도다 우지노리) |
후임자 | 공석(다누마 오키마사) |
직책 | 에도 막부 소바요닌 |
임기 | 1812년 ~ 1818년 |
2. 생애
1762년(보력 12년), 기하타 오카노 토모아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778년(안에이 7년) 2000석을 받는 분가 기하타 미즈노 타다치카(하마초 미즈노 가문)의 말기 양자가 되어, 다다치카의 양녀와 결혼하여 가문을 상속받았다. 처음 이름은 키치타로였다. 10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하루를 섬기며 코나도 역, 코쇼를 역임했고, 1785년(텐메이 5년) 종5위하 야마토노카미에 임관되었다. 이듬해 누마즈번주 미즈노 타다토모의 양자가 되어, 그의 딸 야에와 재혼하였다.
1802년(교와 2년), 타다토모의 죽음으로 누마즈 번주를 잇고, 소자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는 지샤부교를 겸무했다. 이후, 와카도시요리, 소바요닌을 역임하여,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측근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
1817년(분카 14년) 마츠다이라 노부아키가 사망하자 로주 수좌에 취임했다. 타다나리는 이에나리로부터 정치를 위임받아 막정의 책임자가 되었고, 분세이 코반의 개주를 통해 통화 발행 이익을 가져와 디플레이션 불황에서 호경기로 이끌었지만, 그 부작용으로 타누마 시대를 훨씬 능가하는 전대미문의 뇌물 정치가 횡행했다고 한다.
1834년(덴포 5년) 2월, 73세로 사망했다. 삼남 타다요시가 뒤를 이었다.
2. 1. 출생과 가계
1762년(보력 12년), 기하타 오카노 토모아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778년(안에이 7년) 2000석을 받는 분가 기하타 미즈노 타다치카(하마초 미즈노 가문)의 말기 양자가 되어, 다다치카의 양녀와 결혼하여 가문을 상속받았다. 처음 이름은 키치타로였다. 10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하루를 섬기며 코나도 역, 코쇼를 역임했고, 1785년(텐메이 5년) 종5위하 야마토노카미에 임관되었다. 이듬해 누마즈번주 미즈노 타다토모의 양자가 되어, 그의 딸 야에와 재혼하였다.2. 2. 누마즈 번주 상속
안에이 7년(1778년)에 2000석을 받는 분가 기하타 미즈노 타다치카(하마초 미즈노 가문)의 말기 양자가 되어, 타다치카의 양녀와 결혼하여 가문을 상속받았다. 키치타로라고 칭했다. 10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하루를 섬기며, 코나도 역・코쇼를 역임, 텐메이 5년(1785년)에 종5위하 야마토노카미에 임관했다. 이듬해, 누마즈번주 미즈노 타다토모의 양자가 되어, 그 딸 야에와 재혼했다. 교와 2년(1802년), 타다토모의 죽음으로 누마즈 번주를 잇고, 소자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는 지샤부교를 겸무했다. 이후, 와카도시요리・소바요닌을 역임하여,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측근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2. 3. 막부 요직 역임
안에이 7년(1778년)에 2000석을 받는 분가 기하타 미즈노 타다치카(하마초 미즈노 가문)의 말기 양자가 되어 타다치카의 양녀와 결혼하여 가문을 상속받았다. 키치타로라고 칭했다. 10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하루를 섬기며 코나도 역, 코쇼를 역임하고 텐메이 5년(1785년)에 종5위하 야마토노카미에 임관했다. 이듬해 누마즈번주 미즈노 타다토모의 양자가 되어 그 딸 야에와 재혼했다. 교와 2년(1802년) 타다토모가 사망하자 누마즈 번주 자리를 이었고 소자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는 지샤부교를 겸무했다. 이후 와카도시요리, 소바요닌을 역임하여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측근으로서 두각을 나타냈다.분카 14년(1817년) 이른바 '간세이의 유로' 마츠다이라 노부아키가 사망하자 로주 수좌에 취임했다. 의부 타다토모는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와 대립한 타누마 오키츠구 파의 인물이었으며, 타다나리도 그 인맥에 속했다. 타다나리는 이에나리로부터 정치를 위임받아 막정의 책임자가 되었고, 분세이 코반의 개주를 통해 통화 발행 이익을 가져와 디플레이션 불황에서 호경기로 이끌었지만, 그 부속물로서 타누마 시대를 훨씬 능가하는 전대미문의 뇌물 정치가 횡행했다고 한다.
2. 4. 로주 취임과 권력 장악
분카 14년(1817년), 간세이의 유로 마츠다이라 노부아키가 사망하자 로주 수좌에 취임하였다. 의부 타다토모는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와 대립한 타누마 오키츠구파의 인물이었으며, 다다나리도 그 인맥에 속하였다. 다다나리는 이에나리로부터 정치를 위임받아 막정의 책임자가 되었고, 분세이 코반을 개주하여 통화 발행 이익을 얻어 디플레이션 불황에서 호경기로 이끌었지만, 그 부작용으로 타누마 시대를 훨씬 능가하는 전대미문의 뇌물 정치가 횡행했다고 한다.2. 5. 분세이 코반 개주와 경제 정책
분카 14년(1817년), 간세이의 유로 마츠다이라 노부아키가 사망하자, 다다아키라는 로주 수좌에 취임한다. 다다아키라의 의붓아버지 타다토모는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와 대립한 타누마 오키츠구파의 인물이었으며, 다다아키라도 그 인맥에 속했다. 이에나리로부터 정치를 위임받아 막정의 책임자가 된 다다아키라는 분세이 코반 개주를 통해 통화 발행 이익을 얻어 디플레이션 불황을 호경기로 이끌었지만, 그 부작용으로 다누마 시대를 훨씬 능가하는 전대미문의 뇌물 정치가 횡행했다고 한다.[1]2. 6. 뇌물 정치와 비판
분카 14년(1817년), 이른바 "간세이의 유로" 마쓰다이라 노부아키가 사망하자, 로주 수좌에 취임하였다. 미즈노 다다아키라는 의부 다다토모와 마찬가지로 마쓰다이라 사다노부와 대립하던 다누마 오키쓰구파에 속했다. 이에나리로부터 정치를 위임받아 막정의 책임자가 되었고, 분세이 코반 개주를 통해 통화 발행 이익을 가져와 디플레이션 불황에서 호경기로 이끌었지만, 그 부작용으로 다누마 시대를 훨씬 능가하는 전대미문의 뇌물 정치가 횡행했다고 한다.[1]2. 7. 사망
1817년, 이른바 "간세이의 유로" 마츠다이라 노부아키가 사망하자 로주 수좌에 취임하였다. 의부 타다토모는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와 대립한 타누마 오키츠구파의 인물이었으며, 타다나리도 그 인맥에 속하였다. 타다나리는 이에나리에게서 정치를 위임받아 막정의 책임자가 되었고, 분세이 코반의 개주를 통해 통화 발행 이익을 가져와 디플레이션 불황에서 호경기로 이끌었지만, 그 부작용으로 타누마 시대를 훨씬 능가하는 전대미문의 뇌물 정치가 횡행했다고 한다. 1834년 2월, 73세로 사망하였고, 삼남 타다요시가 뒤를 이었다.3. 인물
누마즈 번 메츠케였던 이나가키 소헤이가 쓴 충성의 언행록에 《공덕변》이 있다. 이나가키는 분세이 연간에 2번 오시코미를 받았지만, 미즈노 가문에서는 상급 가신을 포함해 문헌 위반에 따른 처벌이 다수 있었다고 한다.
분세이 10년(1827년),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태정대신 임명일에 쓰가루 번주 쓰가루 노부나가(엣추노카미)가 멍에의 차를 타고 있어서 비색이 되었는데, 이는 원래 충성이 청탁을 받고 멍에의 차를 허락했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충성도 연좌를 면치 못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더 나아가 미즈노의 공용인이 할복했다는 유언비어가 퍼졌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들은 충성은 '엣추노카미의 비색은 자신이 명한 것이다(그래서 자신에게 나올 일은 없다). 뇌물을 받았다면 용서했을 텐데'라고 말하며 웃었다고 한다.[1]
충성이 세자 충의와 에도 성에 등성하는 도중, 도쿠가와 나리아키의 행렬과 만나 혼잡해졌다. 이때 누마즈 번의 공두 가토가 혼란을 제지하려다 타야스 가문 가신과 싸움이 붙었고, 그러나 장소를 고려해 저항하지 않은 가토는 타야스 가신에게 구덩이에 떨어져 부상을 입었다. 충의의 공두 쓰루미는 타야스 저택으로 연행되었고, 쓰루미가 가토의 무례를 사과하고 내제(화해)를 부탁하는 형태로 석방되어 누마즈 번 저택으로 돌아왔다. 충성은 타야스 가문의 무례에 격노하여 '내제를 거부하고 막부에 보고하라'고 가신에게 명령했고, 이 뜻을 쓰루미로부터 타야스 가문에 보고하게 했다. 이 보고를 받은 타야스 가문은 당황하여 사과하고, 오히려 내제를 부탁해 왔다.[2]
무저항으로 부상한 가토에 대해, 요닌이 온건하게 처리하려 했기에 부상당했으니 포상을 주는 것이 어떻겠냐고 제언하자, 충성은 '무사가 맞아서 상처를 입고 무저항이라니 말이 안 된다. 하물며 번의 명예와 관련된 공두라면 더욱 그렇다'고 화를 내며 '이번에는 넘어가 주겠지만, 겉으로 하는 이야기로 들었다면 무사도가 서지 않아 처벌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가토에게 포상은 주지 않았지만 처벌도 하지 않았다.[3]
《300번 가신 인명사전 1》에서는 분세이 10년에 사망한 센다이 번주 다테 나리요시의 후계자가 결정되지 않아, 그 죽음을 숨기고 있던 단계에서, 센다이 번의 가신 오조 미치나오를 불러내 이에나리의 아들과 나리요시의 정실을 결혼시켜 센다이 번의 후계자로 삼는 안을 제시했지만, 결국 거절당했다고 한다. 덧붙여 《센다이총서 제11권》(스즈키 쇼조, 센다이총서 간행회, 이 부분의 원전은 오노데라 호코쿠의 저작으로 한다)에서는 막부의 개인명은 게재되지 않았다.[4]
가로 히지카타 누이노스케는 민완가로 알려져, 쓰가루 번의 다이도지, 구보다 번의 히키타 사이와 함께 천하의 삼가로 불렸다.
19세기 초의 에조치는 러시아의 남하에 대비할 필요가 있어, 능력 부족의 마쓰마에 번을 사실상의 개역 처분으로 하고, 막부의 직할지로 했다. 복령을 꾀하는 마쓰마에 가문(당시 당주는 마쓰마에 아키히로)은 미즈노 타다나리에게 거액의 뇌물 공세를 했다. 1821년, 미즈노는 장군에게 자문은 했지만, 거의 독단으로 복령을 결정했다. 그 후, 에조치는 다시 러시아의 남하 정책에 노출되어, 1855년에 막부는 다시 직할지화를 면치 못했다.
4. 평가
서민들은 "미즈노가 나타나 원래의 다누마로 돌아갔다", "비야봉을 불면 데와 씨, 데와 씨라고 돈이 말하는 세상" 등과 같이 비웃었다.[1] 미즈노 다다아키라가 집정하던 시기는 융성한 화정 문화의 전성기였으며, 쇼군 직에서 물러난 도쿠가와 이에나리가 방만한 낭비를 계속한 오고쇼 시대라고 불리는 대량 소비 시대이기도 했다.[1] 이에나리나 그의 생부인 하루사다(히토츠바시 도쿠가와 가 당주)에게 아첨하거나, 자녀가 많았던 이에나리의 자녀들을 여러 다이묘 가문에게 양자 보내는 것을 알선했으며, 후에 덴포의 개혁을 시행하는 동족인 미즈노 타다쿠니를 등용한 것이 실적으로 알려져 있다.[1] 또한, 막부 재정의 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양질의 화폐라고 불렸던 겐분 소판을 폐지하고 품위를 대폭 낮춘 분세이 소판을 발행했다.[1] 그 결과 화폐 유통량은 46%나 증가하여 막부는 5500000JPY에 달하는 차익 수입을 얻었지만, 격심한 인플레이션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었다.[1] 다다아키라는 주군 이에나리의 방탕함을 간하지 않고, 수뢰와 사적인 편애에 의한 정치를 행한 정치가로서, 전반적으로 후세의 평가는 낮다.[1]
5. 다누마 가문과의 관계
의붓아버지인 미즈노 다다토모는 원래 다누마 오키쓰구의 넷째 아들인 오키마사를 양자로 삼아(미즈노 다다노리를 칭하게 함) 다누마 파의 중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오키마사의 형인 다누마 오키치가 암살되고 쇼군 도쿠가와 이에하루가 사망하면서 오키쓰구가 급속도로 실각하자, 오키마사와의 양자 관계를 해소하고 파양하여 다누마 파에서 탈퇴했다. 그리고 새롭게 미즈노 다다나리를 사위로 맞이했다.
그 후 다누마 가문은 몰락하여 도토미 사가라 5만 7000석에서 무쓰 시모무라 1만 석으로 감봉되었다. 이윽고 오키치의 유자들이 사망한 후 오키마사가 가문을 잇게 된다. 다다나리는 노중이 되자 오키마사를 와카도시요리로 발탁하여, 다누마 가문을 옛 영지인 도토미 사가라로 복귀시켰다.[1]
6. 계보
항목 | 내용 |
---|---|
친부 | 오카노 치교 |
친모 | 오쿠다 타다히데의 딸 |
양부 | 미즈노 타다치카[3], 미즈노 타다토모[4] |
정실 | 미즈노 타다치카의 양녀 |
계실 | 야에히메 - 미즈노 타다토모의 딸 |
차남 | 미즈노 타다츠구 |
삼남 | 미즈노 타다요시 (생모는 야에히메) |
실가인 오카노 가는 집권 호조 씨의 자손으로 여겨지는 이타베오카 고세쓰사이를 시조로 한다. 또한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이복 동생 마쓰다이라 야스모토의 여자계 자손이며, 그들의 생모 오다이노 가타까지 거슬러 올라가면 미즈노 씨와도 연결된다.
미즈노 다다마사 - 오다이노 가타 - 마쓰다이라 야스모토 - 다다요시 - 야스히사 - 정원 - 오카노 나리쓰네의 처 - 오카노 지교 - 미즈노 타다나리
7. 경력
1762년(보력 12년), 기하타 오카노 토모아키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778년(안에이 7년) 2000석을 받는 분가 기하타 미즈노 타다치카(하마초 미즈노 가문)의 말기 양자가 되어, 타다치카의 양녀와 결혼하여 가문을 상속받았다. 키치타로라고 칭했다. 10대 장군 도쿠가와 이에하루를 섬기며, 코나도 역과 코쇼를 역임, 1785년(텐메이 5년)에 종5위하 야마토노카미에 임관했다. 이듬해, 누마즈번주 미즈노 타다토모의 양자가 되어, 그 딸 야에와 재혼한다.
1802년(교와 2년), 타다토모의 죽음으로 누마즈 번주를 잇고, 소자반에 임명되었다. 이듬해에는 지샤부교를 겸무했다. 이후, 와카도시요리와 소바요닌을 역임하여, 11대 쇼군 도쿠가와 이에나리의 측근으로서 두각을 나타낸다.
1817년(분카 14년), 이른바 "간세이의 유로" 마츠다이라 노부아키의 사망을 계기로, 로주 수좌에 취임한다. 의부 타다토모는 마츠다이라 사다노부와 대립한 타누마 오키츠구파의 인물이었으며, 타다나리도 그 인맥에 속한다. 타다나리는 이에나리로부터 정치를 위임받아 막정의 책임자가 되었고, 분세이 코반의 개주를 통해 통화 발행 이익을 가져와 디플레이션 불황에서 호경기로 이끌었지만, 그 부속물로서 타누마 시대를 훨씬 능가하는 전대미문의 뇌물 정치가 횡행했다고 한다.
1834년(덴포 5년) 2월, 73세로 사망했다. 삼남 타다요시가 뒤를 이었다.
미즈노 다다아키라의 경력은 다음과 같다.
연도 | 사건 |
---|---|
1763년(보력 12년) 12월 1일 | 탄생 |
1786년(텐메이 5년) 12월 8일 | 종5위하 야마토노카미에 서임(무가 관위) |
1787년(텐메이 6년) 12월 18일 | 미즈노 타다토모의 양자가 됨 |
1802년(교와 2년) 11월 | 가독을 상속하여 누마즈번주가 됨 |
1802년(교와 2년) 12월 4일 | 주자반에 취임 |
1803년(교와 3년) 8월 9일 | 지샤 봉행을 겸임. 데와노카미(무가 관위) |
1806년(분카 3년) 10월 12일 | 와카도시요리에 취임 |
1806년(분카 3년) 12월 15일 | 종4위하(무가 관위) |
1812년(분카 9년) 4월 4일 | 소바요닌이 됨 |
1817년(분카 14년) 8월 3일 | 소바요닌 겸임 상태로 로주격이 됨. 오쿠즈토메에도 임명됨 |
1817년(분카 14년) 10월 15일 | 시지주 겸임(무가 관위) |
1818년(분세이 원년) 2월 | 캇테가카리가 됨 |
1818년(분세이 원년) 8월 2일 | 로주에 취임 |
1821년(분세이 4년) 11월 11일 | 1만 석 가증 |
1829년(분세이 11년) 11월 26일 | 1만 석 가증 |
1834년(덴포 5년) 2월 28일 | 사망. 향년 73세. 법명은 위덕원전광예성영융감대거사. 묘소는 시즈오카현 누마즈시 데구치정의 센본산 조운지. |
참조
[1]
서적
参河志 下巻
参河志再版刊行会
1934
[2]
뉴스
松前藩復領の経緯
http://www.lib-hkd.j[...]
函館市
2014-12-13
[3]
문서
浜町水野家
[4]
문서
沼津藩主水野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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