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 제1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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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위 제1연대는 1898년 대한제국 고종의 칙령에 따라 창설된 군대로, 시위 제1대대와 시위 제2대대로 시작하여 포병대, 군악대 등을 추가 편성했다. 1905년 시위보병 제1연대로 개칭되었으며, 1907년 시위혼성여단으로 편제되었다가 대한제국 군대 해산과 함께 해체되었다. 연대본부, 보병대대, 포병대대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시위 제2연대로의 배속 전환, 부대 명칭 변경, 병력 규모의 변동 등 여러 차례 편성이 변경되었다. 초대 지휘관은 조동윤이며, 남대문 전투에서 일본군에 저항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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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 제1연대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
부대 정보 | |
활동 기간 | 1898년 5월 – 1907년 8월 |
해체 | 1907년 8월 |
국가 | 대한제국 |
소속 | 대한제국 육군 |
종류 | 보병 |
역할 | 왕궁 시위 (근위) |
규모 | 연대 |
명령 체계 | 원수부 |
본부 | 대한제국 한성부 |
지휘관 | |
지휘관 | 부령 조동윤 |
전투 및 훈장 | |
참전 | 남대문 전투 |
2. 연혁
- 1898년 5월 27일, 고종 35년, 광무 2년에 시위 제1대대와 시위 제2대대로 편성된 시위 제1연대가 창설되었다.[4]
- 1898년 7월 2일, 1개 포병대가 추가 편성되었다.
- 1899년 9월, 고종 36년, 광무 3년에 제3대대가 추가 편성되었다.
- 1899년 12월 19일, 2개 포병대대 및 1개 군악대가 추가 편성되었다. (기존 1개 포병대는 해체 후 증편)[1]
- 1902년 9월 12일, 고종 39년, 광무 6년에 제3대대, 제2포병대대, 군악대를 시위 제2연대로 배속 전환하였다. (시위 제2연대 창설)[5]
- 1904년 3월 12일, 고종 41년, 광무 8년에 군악대가 추가 편성되었다.
- 1905년 4월 14일, 고종 42년, 광무 9년에 부대 명칭을 '''시위보병 제1연대'''로 개칭하고 시위 제2연대로부터 1개 대대를 편입하였다. (시위 제2연대, 친위 제1연대, 친위 제2연대 해체)[6]
- 1907년 4월 22일, 고종 44년, 광무 11년에 시위혼성여단(侍衛混成旅團)으로 편제되었다.[7][8]
-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 해산으로 부대가 해체되었다.
3. 편성
1898년 5월 27일 고종의 칙령에 따라 시위 제1연대가 창설되었다. 연대에는 시위 제1대대와 시위 제2대대가 포함되었고, 대령 또는 중령이 연대장, 대위가 부관, 소위 또는 중위가 군수, 소위가 연대 기수를 관리했으며, 3명의 부사관이 연대에 배속되었다.[1] 연대를 위해 서양식 군악대가 창설되었고, 1902년 4월 5일부터 프란츠 에케르트가 군악대 교관을 맡았다.[1]
1907년 4월 22일, 시위 제1연대는 시위혼성여단으로 개편되었으며, 시위 제2연대, 시위 야전포병대대, 시위 기병대대, 시위 공병대대를 포함했다.[1]
3. 1. 창설 초기 (1898년 5월)
1898년 5월 27일 고종의 칙령에 따라 시위 제1연대가 창설되었다. 연대에는 시위 제1대대와 시위 제2대대가 포함되었다. 대령 또는 중령이 연대장, 대위가 부관, 소위 또는 중위가 군수, 소위가 연대 기수를 관리했다. 3명의 부사관이 연대에 배속되었다.[1]창설 당시 편성은 다음과 같다.[12]
구분 | 구성 |
---|---|
연대본부 | 연대장 등 7명 |
제1대대 | 5개 중대 (제1중대 ~ 제5중대) |
제2대대 | 5개 중대 (제1중대 ~ 제5중대) |
전체 병력은 약 2,000명 규모였다.
연대를 위해 서양식 군악대가 창설되었다. 1902년 4월 5일부터 프란츠 에케르트가 군악대 교관을 맡았다.[1]
3. 2. 1900년 12월
1900년 12월 당시 시위 제1연대의 편성은 다음과 같았으며, 전체 병력은 약 3,750명 규모였다.구분 | 구성 |
---|---|
연대본부 | |
제1대대 | 5개 중대 (제1중대 ~ 제5중대) |
제2대대 | 5개 중대 (제1중대 ~ 제5중대) |
제3대대 | 5개 중대 (제1중대 ~ 제5중대) |
포병 제1대대 | 3개 중대 (산포 1중대, 산포 2중대, 야포 중대) |
포병 제2대대 | 3개 중대 (산포 1중대, 산포 2중대, 야포 중대) |
군악대 |
3. 3. 1902년 10월
1902년 10월 당시 편성은 다음과 같았다. 전체 병력은 약 2,300명 규모였다.- 연대본부
- 제1대대 (5개 중대, 제1중대 ~ 제5중대)
- 제2대대 (5개 중대, 제1중대 ~ 제5중대)
- 포병대대 (3개 중대, 산포 1중대, 산포 2중대, 야포 중대)
3. 4. 시위보병 제1연대 시기 (1905년 4월)
1905년 4월 당시 시위보병 제1연대 편성은 아래와 같았으며, 이 편제는 부대 해체 직전까지 이어졌다. 전체 병력은 1905년 4월에 약 2,500명 규모였다가 1907년 5월에 약 1,850명으로 축소되었다.[13]구분 | 구성 |
---|---|
연대본부 | 연대장 등 11명 |
제1대대 | 제1중대 ~ 제4중대 (4개 중대) |
제2대대 | 제1중대 ~ 제4중대 (4개 중대) |
제3대대 | 제1중대 ~ 제4중대 (4개 중대) |
4. 지휘관
이름 | 계급 | 기간 |
---|---|---|
조동윤[9] | 부령 | 1898년 6월 2일 ~ 1898년 11월 11일 |
권용국 | 부령 (서리) | 1898년 11월 18일 당시 |
권용국 | 부령 | 1898년 11월 30일 ~ 1899년 8월 4일 (휴직) |
김승규[10] | 정령 | 1899년 8월 18일 ~ 1899년 11월 8일 (휴직) |
이기동 | 부령 | 1899년 11월 8일 ~ 1900년 11월 20일 (면직) |
이태래(李泰來) | 참령 (서리) | 1900년 1월 9일 당시 |
구영조(具永祖) | 부령 | 1900년 11월 26일 ~ 1901년 3월 1일 (면직) |
구영조(具永祖) | 부령 | 1902년 4월 8일 ~ ? |
양성환 | 부령 | 1903년 5월 12일 ~ 1903년 10월 6일 (면직) |
양성환 | 부령 (서리) | 1903년 10월 6일 ~ 1903년 11월 11일 |
양성환 | 부령 | 1903년 11월 11일 ~ 1904년 4월 12일 (면직) |
이근형 | 부령 | 1904년 4월 11일 ~ 1904년 4월 11일 (면직) |
이근형 | 부령 | 1904년 8월 19일 ~ |
이근형 | 정령 | 1905년 4월 18일[11] ~ |
이근형 | 정령 | 1907년 4월 30일 ~ |
5. 부관
6. 남대문 전투
1907년 군대 해산에 즈음하여 시위 제1연대 제1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자결하였고, 이에 제1대대 장병과 인접한 시위 제2연대 제1대대 장병들이 남대문 전투를 벌였다.[1]
1907년 한일 신협약 이후, 시위 제1연대는 해산될 예정이었다. 이로 인해 박승환 참령은 자결했다. 이 사건으로 시위 제1연대 소속 군인들은 해산식에 참여하지 않고 전투를 시작했다. 이미 무기를 반납한 다른 연대와 대대 소속의 많은 군인들 또한 무기를 다시 찾아 일본 제국 육군에 맞서 싸웠다.[1] 시위 제2연대도 시위 제1연대와 함께 전투에 참여했다. 전투는 4시간 동안 지속되었지만, 일본군은 훨씬 더 진보된 무기를 사용했기 때문에 전투는 일본의 승리로 끝났다.[2]
참조
[1]
웹사이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
2022-03-27
[2]
웹사이트
우리역사넷
http://contents.hist[...]
2022-03-27
[3]
문서
대한제국 부령(副領)은 현재의 중령 계급이다.
[4]
간행물
광무 2년 칙령 제13호 〈시위제1연대편제〉
대한제국 《관보》 제962호
1898-05-30
[5]
간행물
광무 6년 칙령 제16호 〈시위제1연대편제〉
대한제국 《관보》 제2346호
1902-11-01
[6]
문서
2개 대대 편성에서 3개 대대 편성으로 개편하는 동시에 각 대대 편성을 기존 러시아식(1개 대대=5개 중대)에서 일본군 방식(1개 대대=4개 중대)으로 개편하였다. 이러한 개편은 지방의 진위대대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7]
간행물
광무 11년 칙령 제22호 〈시위혼성여단사령부관제(侍衛混成旅團司令部官制)〉, 칙령 제23호 〈시위보병연대편제건(侍衛步兵聯隊編制件)〉
《고종실록》 제48권
1907-04-22
[8]
문서
1907년 5월 1일자로 시행된 부대 개편에 따라 시위보병 제1연대는 시위보병 제2연대, 시위야전포병대(중대급), 시위기병대(중대급), 시위공병대(증강된 중대급)와 함께 시위혼성여단(侍衛混成旅團)을 구성하였다.
[9]
문서
1898년 9월 24일(양력 11월 7일)에 참장(參將, 준장)으로 진급하였다.
[10]
문서
대한제국 정령(正領)은 현재의 대령 계급이다.
[11]
문서
시위 제2연대 해체 및 시위 제1연대의 시위보병 제1연대 개편일
[12]
문서
연대장을 제외한 연대본부 부대원은 본부대(本部隊)에 해당하는 '연대부(聯隊附)'에 편성되었다.
[13]
문서
1개 중대당 인원이 기존 206명에서 151명으로 55명 감소하였기 때문에 1개 연대에 편성된 중대 숫자가 12개로 동일함에도 전체 병력이 약 650명 줄어들었다. 다만, 연대 숫자가 기존 1개에서 2개로 늘었으므로 전체 시위대 병력은 2,300명에서 3,700명으로 일시 증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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