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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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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남대문 전투는 1907년 8월 1일, 일본의 대한제국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일어난 대한제국 군인들의 봉기이다. 일본은 정미 7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하려 했고, 이에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이 자결하며 봉기가 시작되었다. 약 3시간 동안 남대문과 서소문 일대에서 일본군과 대한제국군 간의 시가전이 벌어졌으나, 화력의 열세로 인해 대한제국군은 패배하고 군대가 해산되었다. 남대문 전투는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멸망을 상징하며, 해산된 군인들이 정미의병에 합류하여 항일 투쟁을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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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대문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전투 정보
전투 이름남대문 전투 (남대문 싸움)
남대문 전투에 대한 프랑스 예술적 묘사, 한국군과 일본군이 치열하게 싸우는 모습
날짜1907년 8월 1일
장소한성부 남대문
결과일본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일본 제국
교전국 2대한제국
지휘관
일본군 지휘관이토 히로부미
한국군 지휘관남상덕 (전사)
병력
일본군 병력약 1,100명
한국군 병력약 1,200명 (시위 제1연대, 시위 제2연대 일부 병력 포함)
사상자
일본군 사상자사망 4명, 부상 40명
한국군 사상자사망 68명 (장교 13명, 병사 57명 포함), 부상 100명 이상, 포로 516명
관련 정보
배경대한제국군 해산
원인일본의 대한제국군 강제 해산 및 정미 7조약
영향대한제국 군대의 해산과 한일합방

2. 역사적 배경

1907년, 일본은 정미 7조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키려 하였다. 이는 대한제국의 국방력을 완전히 없애고, 저항의 여지를 없애려는 의도였다.[1]

이에 앞서 1906년,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대한제국 통감으로 임명되었다. 일본이 한국을 강제로 병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고종은 1907년 헤이그 밀사 사건을 통해 국제 사회에 도움을 요청하려 했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알아채고 친일 내각을 통해 고종을 압박하여 결국 왕위에서 물러나게 하였다.[8]

이러한 상황에서 일본은 대한제국 군대 해산을 강행하려 하였고, 이에 반발한 박승환 참령이 자결하면서 남대문 전투가 시작되었다.[9]

2. 1. 일본의 대한제국 군대 해산

1907년 7월 31일 발표된 군대 해산 명령서


해산 당시 일본군에 의해 무장해제되는 대한제국 군대


일본은 정미 7조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각종 권리를 박탈하고 자신들이 가져갔다. 조약의 시행을 위한 비밀조치서에는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킨다.'라는 조항이 있었다. 일본은 이를 통해 대한제국의 국방력을 상실시키고자 저항의 여지를 분쇄하려 군대 해산을 추진했다.[1]

1906년, 고종 44년에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대한제국 통감으로 임명되었다. 일본 제국이 한국을 완전히 병합하려는 움직임을 서두르자, 고종은 1907년 헤이그 특사 파견을 통해 세계 지도자들에게 호소하려 했다. 일본은 곧 고종의 계획을 알아챘고, 친일파 일진회와 연계된 친일 내각을 통해 고종에게 일본으로 가서 천황에게 사과하거나, 경복궁 앞에서 하세가와 장군에게 사과할 것을 강요했다. 친일 내각은 고종에게 을사늑약을 통해 국가를 안정시키고, 일본 천황에게 사과하며, 왕위에서 물러날 것을 요구했다. 고종은 여러 차례 사퇴를 거부했으나, 결국 자신의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줄 것이라고 선언했다. 퇴위식은 다음 날인 7월 20일에 거행되었다.[8]

1907년 7월 19일, 고종 황제의 퇴위에 반대하는 거대한 인파가 시위를 벌이던 종로에서, 명성이 높았고 친일 반대 부대로 지정되었던 정동위병대 제1대대 제3중대 소속 무장 군인 약 100명과 친일 반대 활동으로 알려진 임재덕이 지휘하는 제2대대 제3중대가 경호대에 합류했다. 그들은 종로경찰서를 공격하여 일본 경찰과 충돌했고, 많은 일본 경찰관과 약 10명의 일본 상인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이미 식민지 군대의 한계를 넘어 민족 의식이 투철한 애국 군대로 변모한 대한제국 군대가 일본의 침략을 저지할 수 있는 저항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1]

갑작스러운 봉기에 놀란 일본군은 즉시 본국에 연락하여 제12사단의 전투 부대를 대구와 평양 등 주요 지역에 배치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한편, 그들은 전국적으로 제13사단을 서울에 집중 배치했다. 또한 인천에 순찰선 3척을 정박시키고 한국 해안을 따라 제2함대를 배치하여 7월 31일까지 한국 군대 해산을 위한 일본군 배치를 완료했다.[1]

1907년 7월 20일, 고종은 퇴위당했다.[2] 박용효, 이도재 등 일부 관료들은 퇴위를 주도한 이완용 내각 구성원을 암살하려 했다.[3] 퇴위 후 고종황제는 덕수궁에 억류되었고, 일본은 그의 아들 순종을 황제로 세웠다. 그 후 일본은 순종에게 1907년 정미조약에 서명하도록 강요했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의 군대, 즉 대한제국의 마지막 남은 군사력이 해체되었다.[4] 그리고 7월 31일 자정, 협상을 위협하는 가운데, 일본은 군대 해산을 명하는 칙령을 발표했고, 동시에 이완용의 이름으로 이토 히로부미에게 군대 해산 과정에서 발생할 수 있는 한국 군대의 잠재적인 반란을 철저히 진압하도록 임명했다.[1]

통감부는 시위대 병력 전부를 1907년 8월 1일자로 비무장 상태로 훈련원에 모이라고 공지했다. 여기서 해산식을 치를 예정이었는데, 반일 장교 중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울분을 못 이겨 권총 자살을 한다.[9] 그는 유서에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에 분격한 장병들이 대대 일부 장교들의 지휘에 따라 무기고를 부수고 총을 꺼내 일본군과의 교전을 시작하였다.[10] 시위대 이외 다른 연대에서도 반항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8월 1일 오전 8시, 동대문 훈련장에서 군대 해산식이 거행되었다. 그러나 군인들은 훈련장에서 무장 해제 훈련을 받는다고 속았다. 부대장과 일본 장교들의 지휘 아래, 그들은 무장 해제된 채 훈련장에 모였다. 그러나 제1대대 제1중대와 제2대대 제1중대는 결석했다. 사자들이 오가는 동안 남대문 쪽에서 총성이 들려 해산식이 서둘러 진행되었다. 더욱이 일본군은 군인들에게 "은사금"이라는 명목으로 소액의 지폐를 지급했다. 이 돈을 받고서야 군인들은 상황의 진실을 깨닫고 깊은 절망에 빠졌다. 그러나 이미 완전히 무장 해제된 상태였고, 사방에서 중무장한 일본군이 훈련장을 포위하고 있었기에 그들에게는 아무런 선택지도 없었다. 일본군은 이와 유사한 기만적인 방법을 사용하여 8월 3일부터 9월 3일까지 북청 주둔군을 시작으로 모든 지역 부대를 해산시켰다.[1]

2. 2. 대한제국 군대의 저항 움직임

정미 7조약 강요로 대한제국의 군대 해산이 결정되자, 이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대한제국군 내부에서 나타났다. 1907년 8월 1일, 통감부는 시위대 병력을 비무장 상태로 훈련원에 집결시켰다.[9] 이 자리에서 해산식이 거행될 예정이었으나,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은 이에 반발하여 권총으로 자결하였다.[9] 그는 "군인으로서 나라를 지키지 못하니 만 번 죽어도 아깝지 않다"라는 유서를 남겼다.[10]

남대문 전투의 시발점이 된 시위대 1연대 1대대장 박승환 참령. 사후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대통령장(복장)이 추서되었고, 2003년 8월의 호국인물로 선정되었다.


박승환의 자결을 그린 유화. 1976년 박기태 작


박승환의 자결은 대한제국 군인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그의 죽음에 분격한 시위대 1연대 1대대 장병들은 일부 장교들의 지휘 아래 무기고를 부수고 무기를 꺼내 일본군에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10]

숭례문 안에 있던 제2보병대대 1대대 역시 서소문 근처에서 박승환의 순국 소식을 듣고 봉기하였다. 이들은 며칠 전 이기표 전 대대장이 해임된 곳이었다.[5] 제2보병대대 병사들은 병기고를 파괴하고 무기를 탈취하여 병영 주변에 보초를 세우고 일본군에게 총격을 가했다.[5]

이처럼 시위대 1연대 1대대와 2연대 1대대의 봉기는 군대 해산에 대한 대한제국 군인들의 강한 저항 의지를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3. 남대문 전투 전개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 군대 해산에 반발한 시위대 제1연대 1대대 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자결하자, 이에 분노한 대대원들이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하여 봉기하였다. 마침 옆 병영에 있던 시위대 제2연대 1대대도 대대장 이기표 참령이 해임된 것에 격앙된 상태에서, 1연대 1대대의 봉기 소식을 듣고 무기고를 파괴하여 무장하고 일본군과의 전투에 합류하였다.

남대문(숭례문)에서 서소문(소의문)에 이르는 지역에서 대한제국군 2개 대대와 일본군 사이에 약 3시간 동안 시가전이 벌어졌다. 오전 9시부터 11시 50분까지 이어진 전투에서 대한제국군은 일본군의 압도적인 화력에 밀려 결국 패배했다.

일본군은 호치키스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있었고, 남대문 문루에 기관총을 설치하여 대한제국군 병영을 제압 사격했다. 일본군 9중대는 10시 20분경 기관총을 앞세워 2연대 1대대 병영 뒷문을 공격했고, 12중대와 7중대를 증파하여 2연대 1대대를 집중 공격했다. 9중대장 가지와라는 전사했지만, 일본 공병대가 설치한 폭약이 터지면서 2연대 1대대는 10시 50분에 함락되었다.

일본군은 1연대 1대대로 총구를 돌려 총공세를 시작했다. 1연대 1대대는 분투했지만, 병력과 탄약 부족으로 11시 50분에 병영을 점령당했다.

이 전투로 대한제국군은 68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516명이 포로로 잡혔다. 일본군은 전사자 4명을 포함해 30~4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살아남은 대한제국군 병사들은 정미의병에 합류하여 항일 투쟁을 이어갔다.

3. 1. 대한제국군의 봉기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군 군대 해산에 반발한 시위대 제1연대 1대대 대대장 박승환 참령이 자결하자, 이에 분노한 대대원들이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하여 봉기하였다. 마침 옆 병영에 있던 시위대 제2연대 1대대도 대대장 이기표 참령이 해임된 것에 격앙된 상태에서, 1연대 1대대의 봉기 소식을 듣고 무기고를 파괴하여 무장하고 일본군과의 전투에 합류하였다.[1][5]

두 대대 외에도 300여 명의 다른 부대 병사들이 항전에 참여하면서, 남대문(숭례문)에서 서소문(소의문)에 이르는 지역에서 대한제국군 2개 대대와 일본군 사이에 약 3시간 동안 시가전이 벌어졌다.

일본군은 대한제국군 해산 시 소요 사태를 예상하고 감시 병력을 배치했지만, 각 대대에 1개 중대만 배치하였다. 대신 호치키스 기관총으로 화력 우세를 확보하고 있었다. 1연대 1대대와 2연대 1대대에는 각각 일본군 10중대와 9중대가 배치되었고, 공병대와 기관총 부대가 추가되었다.[5]

일본군은 신속하게 투입되었으나, 대한제국군은 맹렬한 사격으로 일본군 선두 부대의 접근을 저지했다. 오전 9시 30분, 일본군은 10중대 전 병력을 투입했지만, 1연대 1대대는 10시부터 오히려 총공세를 펼쳐 일본군을 대치 상태로 몰아넣었다.

일본군은 남대문(숭례문) 문루 위에 기관총 2정을 설치하고 대한제국군 병영을 제압 사격했다. 이는 남대문과 동대문(흥인지문)이 당시 서울에서 가장 높은 건물이었기 때문에 대한제국군에게 매우 불리하게 작용했다.[5]

일본군 9중대는 10시 20분경 기관총을 앞세워 2연대 1대대 병영 뒷문을 공격했다. 대한제국군은 벽과 철문을 이용해 방어하며 집중 사격으로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냈다. 일본군은 12중대와 7중대를 증파하여 2연대 1대대를 집중 공격했다.

증원된 일본군은 계속해서 밀어붙였고, 9중대장 가지와라는 2연대 1대대 병영 돌파에 성공했지만, 대한제국군의 집중 사격에 전사했다. 일본 공병대가 설치한 폭약이 터지면서 혼란이 발생했고, 이 틈을 타 일본군 7중대와 12중대가 병영 안으로 돌입하여 10시 50분에 2연대 1대대를 함락시켰다.[5]

일본군은 1연대 1대대로 총구를 돌렸고, 10중대는 총공세를 시작했다. 1연대 1대대는 분투했지만, 병력과 탄약 부족으로 11시 50분에 병영을 점령당했다.[5]

3. 2. 일본군의 반격과 진압

1907년 8월 9일 경향신문에 실린 남대문 전투 관련 기사 발췌


대한제국군 시위대의 봉기를 진압하고 병영을 점령한 일본군


1연대 1대대가 봉기할 당시, 바로 옆 병영에 있던 2연대 1대대는 무기를 반납하고 해산식장으로 향하려던 참이었다. 마침 제2연대 1대대는 대대장 이기표 참령이 군 통제 회의에서 해임되어 격앙된 상태였다. 이때 이웃 대대로부터 총성과 함성이 들려왔고, 1연대 1대대원 세 명이 총을 쏘며 달려왔다. 곧바로 제2연대 1대대 병사들도 무기고를 파괴하고 무기를 되찾은 후 일본군과 격전에 대비하였다. 이때부터 제1연대 1대대와 제2연대 1대대원들은 일본군과 전면전에 돌입했다. 두 대대 외에도 300여 명의 다른 부대원들도 항전에 참여하면서, 두 대대의 병영이 있던 남대문에서 소의문(서소문)에 걸친 지역에서 대한제국군 2개 대대와 이들을 진압하려는 일본군 사이에 약 3시간에 걸친 시가전이 벌어졌다. 전투는 오전 9시에 시작되어 1연대 1대대의 병영이 함락된 11시 50분까지 이어졌다.

일본군은 대한제국군 해산 시 약간의 소요 사태를 예상하고 감시 병력을 배치했지만, 한국군 각 대대에 겨우 1개 중대만 배치했다. 그러나 호치키스 기관총을 배치해 압도적인 화력 우세를 확보하고 있었다. 1연대 1대대와 2연대 1대대에는 각각 10중대와 9중대가 배치되었고, 공병대와 기관총 부대가 추가로 투입되었다.

일본군은 신속하게 투입되었다. 대한제국군은 일본군 선두의 접근을 감지하고 맹렬한 화력을 퍼부었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일본군은 즉각 증원군을 요청했고, 9시 30분 대기 중이던 10중대 전 병력을 투입했다. 하지만 일본군의 공세를 막아낸 1연대 1대대는 오히려 10시부터 맹렬한 기세로 일본군에 총공세를 가했다. 이때부터 일본군 10중대는 공격을 멈추고 대치 상태에 들어갔다.

한편, 일본군은 남대문(숭례문) 문루 위에 2정의 기관총을 설치하고 병영에 대한 제압 사격을 실시하였다. 당시 서울에서 남대문과 흥인지문(동대문)이 가장 높은 건물이었기 때문에, 남대문 근처에 병영이 있던 한국군에게는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일본군 9중대는 10시 20분경부터 기관총을 앞세우고 제2연대 1대대 병영 뒷문을 향해 총공격을 감행했다. 한국군은 벽과 철문을 이용해 방어하며 집중 사격했고, 일본군의 기관총 엄호 돌격을 막아냈다. 고전이 계속되자 일본군 지도부는 12중대와 7중대 병력을 증파했다. 증원 부대인 12중대는 9중대와 함께 제2연대 1대대를 집중 공격했다.

증원군을 받은 일본군은 계속해서 밀어붙였고, 9중대 가지와라 중대장은 2연대 1대대 병영 돌파에 성공했다. 그러나 가지와라와 함께 영내에 돌입한 9중대는 한국군의 집중 사격에 노출되었고, 가지와라는 전사했다. 그때 병영 벽에서 일본 공병대가 설치한 폭약이 터지는 큰 소리가 들려왔다. 화염과 연기에 한국군은 순간적으로 당황했고, 이 틈을 타 일본군 7중대와 12중대가 잇따라 병영 안으로 돌입했다. 한국군은 마지막 저항을 했지만, 2연대 1대대는 10시 50분에 일본군에 함락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1연대 1대대뿐이었다. 방금 전까지 2연대 1대대의 병영을 공격하던 일본군 제7, 9, 12중대와 공병대는 1연대 1대대 쪽으로 총부리를 돌렸다. 아직 대치 중이던 10중대는 마지막 총공세를 시작했다. 1연대 1대대 병사들은 마지막까지 용감하게 싸웠지만, 밀려오는 병력 수와 탄약 부족으로 결국 11시 50분 병영을 점령당했다.

3. 3. 전투의 결과

대한제국군과 일본군은 전력 차이가 컸다. 대한제국군은 기관총 등 중화기를 보유하고 있었지만, 일본군이 통제하는 다른 병영에 있어 사용할 수 없었다. 소총도 베르단 등 후장식 단발소총이라 연사력이 떨어지는 5연발 38식 아리사카 소총을 사용하는 일본군에 비해 열세였다.[1]

가장 큰 문제는 화력이었다. 포나 기관총 같은 중화기는 일본군이 장악한 무기고에 있었고, 소총 탄약도 개인당 10~15발뿐이어서 저항에 한계가 있었다. 탄약이 바닥나자 일본군에 대한 저항은 불가능했다. 기관총 제압사격과 견제로 인해 병영 밖으로 나갈 수도 없었다.[1]

전투 결과는 기록에 따라 다르지만, 일본 측 기록에 따르면 일본군은 전사자 4명을 포함해 30~4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반면 대한제국군은 68명이 전사하고 100여 명이 부상당했으며, 516명이 포로로 잡혔다.[6]

2개 대대 정원이 총 1,224명임을 감안하면 최대 550명 가량이 서소문을 통해 탈출에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 다수는 후에 정미의병에 참가하여 항일 투쟁을 벌였다.[1]

이 교전에서 일본군이 사용한 소총탄은 보병 7,215발, 공병 350발, 기병/포병 8발, 기관총탄 1,138발, 황색화약 1.6kg이었다. 일본군이 노획한 한국군 무기는 소총 74정과 실탄 3,305발이었다.[1]

항쟁 후 세브란스병원에는 한국군 부상병들이 몰려들었다. 이들은 미국인 의사 올리버 에비슨이 운영하는 의료진에 의해 치료를 받았다.[7]

4. 전투의 영향

남대문 전투는 한국 사회와 역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정미의병 확산: 남대문 전투는 1907년 군대 해산에 대한 저항 의지를 불러일으켰고, 이는 정미의병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해산된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의 전투력이 강화되었다.[1]
  • 독립운동 전환점: 군대 해산은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멸망을 상징했지만, 항일 독립운동의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해산된 군인들의 의병 합류는 의병 활동 지역 확장, 의병 부대 성격 변화, 전투 기술 향상으로 이어져 일본에 대한 본격적인 무장 투쟁의 발판을 마련했다.[1]

4. 1. 정미의병으로의 확산

1907년 7월 19일, 고종의 퇴위에 반대하는 시위가 종로에서 벌어졌다. 이 시위에는 정동위병대 제1대대 제3중대 소속 군인 약 100명과, 친일 반대 활동으로 알려진 임재덕이 지휘하는 제2대대 제3중대가 합류했다. 이들은 종로경찰서를 공격하여 일본 경찰과 충돌했고, 많은 일본 경찰관과 약 10명의 일본 상인이 사망했다.[1] 이는 대한제국 군대가 일본의 침략에 저항할 수 있는 세력으로 성장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1]

1907년 7월 20일, 고종은 강제로 퇴위당했다.[2] 이후 일본은 순종에게 1907년 정미조약(한일신협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다.[4] 8월 1일, 남대문 전투에서 박승환 참령의 자결과 함께 대한제국 군인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5]

서울 시위대 제1사단의 저항은 하루 만에 끝났지만, 남대문 전투는 조선군 해산에 대한 저항 의지를 불러일으켰다. 이 소식은 지방 군대에 퍼져 상황을 악화시켰다.[5] 원주 진위대 사령관 홍우형은 도망쳤지만, 다른 진위대 장교 민긍호는 250명의 병력을 이끌고 일본군과 싸웠으며, 관동의용병(관동 의병)의 핵심 세력이 되었다.[1] 강화 진위대는 서울에서 해산 소식을 듣고 강화의 자강회 회원들과 협력했다. 유명규, 연기우, 지홍윤 등은 일본 경찰서를 공격하고 일진회 인물들을 암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해서와 경기 지역 의병들의 중요한 세력이 되었다.[1]

남대문 전투 이전 의병은 주로 농민, 어부, 사냥꾼 등으로 구성되었지만, 남대문 전투 이후 많은 정규군 병사들이 1907년 의병(정미의병)에 합류했다. 이들은 함께 1907년 의병 전투의 기반을 다졌고, 이는 의병의 항일 전쟁으로 이어졌다.[1]

4. 2. 대한제국 멸망과 독립운동의 전환점

1907년 7월 20일, 고종은 강제로 퇴위당했다.[2] 이후 일본은 순종을 황제로 세우고 정미조약을 강요하여 대한제국의 군대를 해산시켰다.[4]

군대 해산은 대한제국의 실질적인 멸망을 상징하는 사건이었지만, 이는 항일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 각 지역 진위대의 해산은 의병 활동 지역 확장을 가져왔다.
  • 하급 군인 출신 의병 지휘자들이 등장하며 의병 부대 성격이 변화했다.
  • 해산된 군인들의 전략적 지휘 아래 의병의 전투 기술이 향상되어 일본군에 큰 타격을 입혔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에 대한 본격적인 무장 투쟁으로 이어졌다.[1]

5. 남대문 전투의 현대적 의의

남대문 전투는 민족 자결주의와 국권 수호의 중요성을 보여주며, 불의에 맞서는 용기와 희생정신을 기리는 계기가 되었다.

5. 1. 역사적 교훈



남대문 전투는 민족 자결주의와 국권 수호의 중요성을 보여주며, 불의에 맞서는 용기와 희생정신을 기리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군은 가지하라 대위, 구마모토 특수작전대장, 하라노 상사를 포함한 4명이 사망하고 40명이 부상당했다. 한국군은 장교 13명과 병사 57명이 전사했다. 하지만 한국 측의 많은 사상자는 전투 자체가 아니라 수색 작전 중에 발생했다. 여러 자료에 따르면 68명의 병사가 사망하고 100명 이상이 부상당했으며, 516명이 포로가 되었다. 해산된 병사들을 지휘했던 남상덕은 사망했다. 일본군은 민가에 숨어 있는 한국군을 수색했고, 이 과정에서 수백 채의 집이 불타는 피해를 입었다.[6] 서울 혼란기에 많은 잔혹 행위와 만행이 자행되었다. 포탄이 민간인에게 떨어졌고, 소서문 지역의 한국군 병사 한 명은 20번 이상 총검에 찔린 것으로 알려졌다. 모든 한국군 병사가 화기를 소지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5]

당시 몇 안 되는 의료 기관 중 하나였던 세브란스병원에는 한국군 부상병들이 몰려들었다. 부상병들은 미국인 의사 올리버 에비슨이 운영하는 의료진에 의해 치료를 받았다.[7] 전투가 끝난 지 며칠 후 이토 히로부미는 병원을 방문했고, 이후 일본군으로부터 부상자들을 일본 병원으로 이송하라는 통보를 받았다. 에비슨은 "부상당한 병사들과 한국 간호사들 모두 두려워했다"고 말했다.[8]

5. 2. 문화적 재조명

대한제국 군대의 시위대 제2대대 병영이 있던 숭례문(남대문) 남동쪽은 현재 대한상공회의소 건물이 위치한다.[1] 숭례문은 당시 대한제국 군대와 일본군 사이에 격렬한 거리 전투가 벌어진 곳이다.

참조

[1] 웹사이트 군대해산 (軍隊解散) https://encykorea.ak[...]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2] 웹사이트 고종(高宗) https://encykorea.ak[...] 2023-08-25
[3] 웹사이트 (18) [한국 주재 외신기자가 외국 신문사와 發·受信한 通牒 전보내용 보고 件] https://db.history.g[...]
[4] 서적 A History of Korea: From Antiquity to the Present https://books.google[...] Rowman & Littlefield Publishers 2010-10-16
[5] 웹사이트 (3) 남대문 전투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6] 웹사이트 해산된 대한제국의 군대, 전국적인 저항으로 답하다 http://contents.hist[...] National Institute of Korean History
[7] 웹사이트 절망 속에 당긴 방아쇠 - 대한제국군 남대문 전투(완결) http://jeongchi.com/[...] jeongchi.com
[8] 웹사이트 [박종인의 땅의 歷史] 1907년 남대문, 누가 박승환 대대장을 죽였나 https://www.chosun.c[...] Chosun
[9] 이미지 경성신문 남대문 전투 관련 기사 (1907년 8월 9일) https://commons.wiki[...]
[10] 뉴스 8월 호국인물 박승환 참령 https://news.naver.c[...] 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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