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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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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동윤은 조선 후기 풍양 조씨 가문 출신으로, 대한제국 시기 무관으로 활동하며 일제강점기에는 남작 작위를 받은 인물이다. 1884년 갑신정변으로 아버지가 사망한 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 육군 참령, 육군무관학교 교장, 시종무관장 등을 역임했다. 대한제국 군부 군무국장과 제1시위대 사령관을 지냈으며, 1904년 태극훈장을, 1905년 서보장, 1907년 태극훈장, 1908년 욱일대수장을 받았다.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공헌하여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이후 영친왕과 이방자의 혼약 체결에 관여하고 고종의 장례에 부제관으로 참여하는 등 친일 행위를 했다. 1920년 일본 육군 중장으로 임명되었으며, 1923년 사망했다.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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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동윤
기본 정보
조동윤
한글조동윤
한자趙東潤
로마자 표기Jo Dong-yun (2000년식)
아호혜석 (혜석)
출생동치 10년 (1871년)
사망다이쇼 12년 (1923년)
본관풍양 조씨
배우자미상
자녀조중구
조녕하
경력
복무 기간1897년 ~ 1923년
최종 계급일본군 육군 중장

2. 생애

조동윤은 1871년 풍양 조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갑신정변 때 살해된 조영하였다.[1] 1887년 1월, 조동윤은 관료가 되었고 어린 학생들의 교사였다.[2]

1889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섰다. 그는 문과 시험에 급제했으나 이후 총어영군사마(摠禦營軍司馬) 등 무관 벼슬을 다수 역임했고, 1897년 육군 참령이 되어 육군법원장,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교장, 시종무관장 등을 지냈다.

한일 병합을 위해 군부를 먼저 장악하려는 일본의 계획에 따라 일본 육군을 여러 차례 시찰하고 훈장을 받는 등 친일 행위를 하였으며, 친일 단체 일진회에도 가입했다.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조약 체결에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그는 합병 이후에도 영친왕의 강제 결혼을 추진하는 데 윤덕영과 함께 앞장서는 등 친일 행위에 적극 나섰다. 고종이 사망했을 때는 일본인이 제관을 맡아 일본식으로 치른 장례의 부제관에 임명되기도 했다.[10]

다이쇼 9년(1920년) 4월 26일, 칙령 제118호에 따라 "조선 군인"의 육군 부장에서 일본 제국 육군 중장으로 전임, 조선군 사령부에 소속되었다.[7]

1923년 5월 21일에 사망했다. 그의 아들이 남작 작위를 물려받았다.[5]

2. 1. 초기 생애와 갑신정변

조동윤은 조선 후기 권세가였던 풍양 조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조영하신정왕후의 조카로, 고종의 즉위를 도와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판서를 지낸 인물이다.

1884년 조동윤이 십대 중반일 때 갑신정변이 일어났다. 이 정변으로 인해 수구파였던 조영하는 개화파에 의해 살해당했다. 당시 조동윤은 개화파의 거두였던 홍영식의 조카딸과 조혼한 상태였는데, 조영하가 살해당하고 갑신정변이 실패로 돌아가자 어린 부인은 집안의 원수라 하여 쫓겨났다. 이후 다른 사람과 결혼해 살다가 십여 년 후 갑오경장으로 개화파가 복권되자, 고종의 허락을 받고 첫 부인을 다시 맞아들여 두 명의 정식 부인과 살았다는 일화가 있다.[9]

1889년 조동윤은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섰다. 그는 문과 시험에 급제했으나 이후 총어영군사마(摠禦營軍司馬) 등 무관 벼슬을 다수 역임했다.

2. 2. 대한제국 시기 관료 및 군인 생활

조동윤은 조선 후기 풍양 조씨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조영하신정왕후의 조카로, 고종 즉위를 도와 흥선대원군 집권기에 판서를 지낸 인물이다.

1889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섰다. 문과 시험에 급제했으나 이후 총어영군사마(摠禦營軍司馬) 등 무관 벼슬을 다수 역임했다. 1897년 육군 참령이 되어 육군법원장,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교장, 시종무관장 등을 지냈다.[9]

광서 13년(1887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후, 총어영 군사마를 시작으로 건양 2년(1897년) 대한제국군참령으로 승진함과 동시에 친위 제3대대장이 되었다. 이후 원수부 군무국장, 육군법원장, 육군무관학교 교장, 시종무관장을 역임하는 등 무관으로서의 직무를 맡았다.

광무 2년(1898년) 6월 2일 부령이 되었고,[7] 같은 해 11월 6일 참장으로 승진했다.[7] 광무 3년(1899년) 8월 21일에는 부장으로 승진했다.[7]

대한제국 선포 이후인 1898년, 군부의 군무국장으로 무관청에 참여했으며, 중령으로 제1시위대의 초대 사령관을 맡았다. 1898년 11월 소장, 이듬해에는 중장으로 진급했다. 이후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교장과 1903년 11월 군법부 총장을 역임했다.[5]

광무 8년(1904년) 훈2등 태극장을 받았고,[2] 이듬해 일본 제국 육군을 시찰했다. 일본 정부로부터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아 일본과 깊은 관계를 맺었고, 일진회에도 가입했다. 1905년 일본 육군성을 방문했고, 같은 해 8월 17일 서보장 1등급을 받았다. 1907년에는 태극훈장 1등급을 받았다.[2]

2. 3. 친일 행적과 한일 병합

1884년 갑신정변 때 아버지가 살해당하고, 1889년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들어섰다. 이후 총어영군사마(摠禦營軍司馬) 등 무관 벼슬들을 역임했고, 1897년 육군 참령이 되어 육군법원장, 대한제국 육군무관학교 교장, 시종무관장 등을 지냈다.

한일 병합을 위해 군부를 먼저 장악하려는 일본의 계획에 따라 일본 육군을 여러 차례 시찰하고 훈장을 받는 등 친일 행위를 하였으며, 친일 단체 일진회에도 가입했다. 1904년 훈2등 태극장을 수여받았고, 1905년에는 일본 육군성을 방문하고 서보장 1등급을 받았다. 1908년에는 욱일대수장 1등급을 받았다.[2]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10] 그는 합병 이후에도 영친왕의 강제 결혼을 추진하는 데 윤덕영과 함께 앞장서는 등 친일 행위에 적극 가담했다. 고종이 사망했을 때는 일본인이 제관을 맡아 일본식으로 치른 장례의 부제관에 임명되기도 했다.[10] 1911년 1월 13일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25000JPY을 받았다.[5]

2. 4. 한일 병합 이후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에 세운 공로를 인정받아 10월 16일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10] 그는 합병 이후에도 영친왕의 강제 결혼을 추진하는 데 윤덕영과 함께 앞장서는 등 친일 행위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고종이 사망했을 때는 일본인이 제관을 맡아 일본식으로 치른 장례의 부제관에 임명되기도 했다.[10]

조동윤은 일본 제국 육군 중장이 되었고, 1911년 1월 13일에는 일본 정부로부터 25000JPY을 받았다. 그는 고종의 장례 행렬과 도쿄에서 열린 영친왕의 결혼식을 도왔다.[5] 다이쇼 천황 즉위식에 한국-일본 귀족 대표로 참여하기도 했다.[5]

다이쇼 9년(1920년) 4월 26일, 칙령 제118호에 따라 "조선 군인"의 육군 부장에서 일본 제국 육군 중장으로 전임, 조선군 사령부에 소속되었다.[7]

만년에 조동윤의 집안은 재산 파탄 위기에 놓였다. 당시 조선군 사령관 기쿠치 신노스케는 조동윤 집안의 어려운 처지를 깊이 동정하여, 조선총독 사이토 마코토와 상의하여 재산 정리 위원회를 설치하기도 했다.

3. 최후

조동윤은 1923년 5월 21일에 사망했고, 그의 아들이 남작 작위를 물려받았다.[5]

4. 사후

그의 작위는 아들 조중구가 습작했다.[12] 조동윤 사후에 후손들은 사치와 낭비로 경제적 파산 지경에 이르렀는데, 1926년 의복 값 1300JPY, 쇠고기 값 1600JPY, 약 값 1100JPY 등 생활비로 부채가 14000JPY에 달했다. 조동윤은 서화에 뛰어났다고 하며, 특히 잘 그렸다는 난(蘭) 그림 작품이 남아 있다.

4. 1. 친일반민족행위 평가

2002년 발표된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에서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11]

5. 훈장

수여 국가훈장등급비고
태극훈장2등급(1904), 1등급(1907)
서보장1급
욱일장1급
대례기념장1915년(다이쇼 4년) 11월 10일 수여[8]


참조

[1] 웹사이트 (12) 官吏進退에 관한 件·雜件 https://db.history.g[...] 2022-08-04
[2] 웹사이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 2022-03-20
[3]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2-03-20
[4] 웹사이트 조선왕조실록 http://sillok.histor[...] 2022-03-20
[5] 웹사이트 조동윤(趙東潤) https://encykorea.ak[...] 2022-03-20
[6] 웹사이트 조동윤(趙東潤) http://encykorea.aks[...] 2022-08-24
[7] 웹사이트 陸軍現役将校同相当官実役停年名簿. 大正9年9月1日調 https://dl.ndl.go.jp[...] 国立国会図書館デジタルコレクション 2019-04-22
[8] 문서 『官報』第1310号・付録、「辞令」1916年12月13日
[9] 서적 독립신문 다시 읽기 푸른역사 2004-05-28
[10] 뉴스 `마지막 황실 … ` 사진전 서울대 박물관서 열려 http://article.joins[...] 중앙일보 2006-05-26
[11] 뉴스 "매국노 이완용은 `조선의 현금왕'"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08-07-12
[12] 웹인용 혜석 조동윤 필묵란 https://web.archive.[...] 대한민국 육군박물관 2008-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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