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위대 (대한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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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시위대는 대한제국 시기 국왕 호위 및 서울 지역 방어를 담당했던 군대이다. 1895년 창설되었으나 을미사변 이후 해산되었다가, 1897년 러시아의 지원을 받아 재설치되었다. 러시아와 일본의 군사 고문단에게 훈련을 받았으며, 친위대와 통합 및 개편되기도 했다. 1907년 군대 해산령에 반발하여 시위대 일부가 무장 봉기하였고, 이는 전국적인 의병 투쟁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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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위대 (대한제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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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이름 | 시위대 |
원어 이름 | 侍衛隊 |
![]() | |
활동 기간 | 1895년 5월 25일 ~ 1905년 7월 31일 |
역할 | 덕수궁 경비 및 황제 호위 |
명령 체계 | 원수부 |
지휘관 |
2. 광무개혁과 시위대의 재창설
시위대는 조선 후기 국왕의 호위 군대로 조선 고종 32년(1895) 5월 25일 칙령 120호에 따라 편성된 군대이다. 군부대신의 감독 아래 궁내의 시위를 담당하였는데 그 편제는 1개 연대(2개 대대)•1개 대대(2개 중대)•1개 중대(3개 소대)였다. 창설 3개월 후인 8월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乙未事變)이 일어나자 이에 동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산되어 훈련대에 편입되었다가 고종이 아관파천(俄館播遷) 이후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중앙군(中央軍)을 러시아식으로 개편하면서 광무 원년(1897) 3월 시위대를 다시 설치하였다. 1896년 12월 10일 러시아 제국 해군부 보고서에 따르면, 러시아 제국 해군 순양함 아드미랄 코르닐로프(Russian cruiser ''Admiral Kornilov'')의 대위 흐멜레프가 시위대를 훈련시켰는데, 러시아의 수비대 교정을 한국어로 번역하고, 러시아 군사용어가 사용되었다.[2] 총원 1천 70인으로 2백 인을 1개 중대, 5개 중대를 1개 대대로 편제하였고 10월에는 1개 대대를 추가 편성하여 제1대대와 제2대대라 하였다.[3]
2. 1. 러시아 군사 고문단의 훈련
친위대가 창설된 후 친위대 병력 중 선발한 인원으로 시위대가 신설되었다. 시위대는 처음에 러시아인 군사 교관으로부터 훈련을 받다가 일본인 교관으로 바뀌었다. 처음 훈련을 담당한 러시아인 군사교관은 푸티아타(Putiata) 대령으로서 3명의 장교를 포함한 10명으로 구성되었다. 이들은 러시아제 베르당 소총으로 시위대를 무장시키고 훈련을 시작했다. 초기 시위대는 황궁 수비를 위한 보안대로 출발하였다. 그러나 아관파천 종료 후 대한제국과 러시아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러시아 군사 고문단은 철수하고 일본인으로 교체된다.2. 2. 일본 군사 고문단으로의 교체
친위대가 창설된 후 친위대 병력 중 선발한 인원으로 시위대가 신설되었다. 시위대는 처음에 러시아인 군사 교관으로부터 훈련을 받았다. 처음 훈련을 담당한 러시아인 군사교관은 푸티아타(Putiata) 대령으로서 3명의 장교를 포함한 10명으로 러시아제 베르당 소총으로 무장시키고 훈련을 시작했다. 처음 출발은 황궁 수비를 위한 보안대로 출발한 것이었다. 그러나 아관파천 종료 후 러시아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이들 교관들은 철수하고 일본인으로 교체된다.3. 시위대의 편제와 역할
3. 1. 친위대와의 통합 및 개편
친위대가 창설된 후 친위대 병력 중 선발한 인원으로 시위대가 신설되었다. 시위대는 처음에 러시아인 군사 교관으로부터 훈련을 받다가 아관파천 종료 후 러시아와의 관계가 소원해지면서 일본인 교관으로 바뀌었다. 처음 훈련을 담당한 러시아인 군사교관은 푸티아타(Putiata) 대령으로서 3명의 장교를 포함한 10명으로 러시아제 베르당 소총으로 무장시키고 훈련을 시작했다. 처음 출발은 황궁 수비를 위한 보안대로 출발한 것이었다. 시위대도 친위대처럼 서울 지역 방어를 위한 부대였다.1900년 9월 19일, 《제국신문(帝國新聞)》은 서울의 군인 수는 친위대(親衛隊) 3,000명, 시위대 2,000명, 평양병 1,000명, 포병 1,000명, 기병 1,000기라고 보도하였으나, 실제 전력은 미지수이다.
1902년 8월 25일에는 칙령 제15호로 임시혼성여단편제를 공포, 보병 2개 연대, 기병 1개 중대, 포병 1개 중대로 혼성여단을 편성하도록 하고, 기존 친위대와 시위대를 통합하여 1개 시위혼성여단을 만들게 된다. 같은 해 10월 30일에는 1개 연대(3개 대대) 규모였던 시위대와 친위대를 2개 연대으로 확장하기로 결정하고 각 1개 대대씩 증설하였다.
그러나 친위대 및 시위대는 의병 운동 진압을 위해 지방으로 출동하는 경우가 많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3. 2. 지방 진위대와의 관계
4. 시위대의 해산과 남대문 전투
1905년 4월, 친위대는 일본에 의한 군제 개혁으로 해산되었고, 1907년 7월 31일 시위대가 해산되면서, 극히 소수의 황실 경비병을 제외한 대한제국의 군대는 모두 해산되었다. 서울 지역의 시위대에 이어 8월 및 9월에 걸쳐 진위대도 해산되었다.
하지만 군대 해산은 순순히 이루어지지 않았다. 군대 해산령에 반발하여 박승환 참령(시위 제1연대 1대대장, 현 소령)이 자결하자, 1연대 1대대 및 2연대 1대대 병력들이 해산을 거부하고 서울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이들은 일본군에 밀려 지방 의병들에 합류하였고, 지방의 진위대도 함께 의병에 합류하였다. 비록 수는 적었지만, 정규 군사 훈련을 받은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이는 일제의 침략에 맞선 대한제국 군인들의 숭고한 저항 정신을 보여주는 사례이며, 이후 의병 항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4. 1. 박승환 참령의 자결과 항전
1907년 7월 31일, 시위대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 이 과정에서 박승환 참령(시위제1연대 1대대장, 현 소령)이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자결하였다. 이에 시위제1연대 1대대 및 2연대 1대대 병력들이 해산을 거부하고 서울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일본군에 밀려 후퇴한 시위대는 지방 의병들에 합류하였고, 지방의 진위대도 이에 동참하였다. 비록 소수였지만, 정규 군사 훈련을 받은 군인들의 합류로 의병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4. 2. 해산된 시위대의 의병 합류
1905년 4월, 친위대는 일본에 의한 군제 개혁으로 해산되었고, 1907년 7월 31일 시위대가 해산되면서, 극히 소수의 황실 경비병을 제외한 대한제국의 군대는 모두 해산되었다. 서울 지역의 시위대에 이어 8월 및 9월에 걸쳐 진위대도 해산되었다.군대 해산령에 반발하여 박승환 참령(시위 제1연대 1대대장, 현 소령)이 자결하자, 1연대 1대대 및 2연대 1대대 병력들이 해산을 거부하고 서울에서 시가전을 벌였다. 이들은 일본군에 밀려 지방 의병들에 합류하였고, 지방의 진위대도 함께 의병에 합류하였다. 비록 수는 적었지만, 정규 군사 훈련을 받은 군인들이 의병에 합류하면서 의병 활동은 더욱 활발해졌다.
5. 역사적 평가
대한제국 군대 해산은 1907년 7월 20일 고종의 강제 퇴위와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일제가 강행한 조치였다. 7월 24일에는 한일신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했다. 일제는 군대 해산이 필요하다고 판단, 8월 1일 군대 해산을 단행했다.
군대 해산 조치는 대한제국 군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시위대 제1대대 대대장 박승환 참령은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자결하였다. 박승환의 자결은 시위대 군인들의 항쟁에 불을 붙였고, 이는 전국적인 의병 봉기로 이어졌다.
일제는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함으로써 군사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을 억누르려 했다. 이는 대한제국의 주권을 짓밟는 명백한 침략 행위였다.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이에 반발한 시위대는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시위대의 해산은 전국적인 항일 의병 투쟁의 기폭제가 되었다.
5. 1. 대한제국 군대 해산의 시발점
대한제국 군대 해산은 1907년 7월 20일 고종의 강제 퇴위와 헤이그 특사 파견을 빌미로 일제가 강행한 조치였다. 7월 24일에는 한일신협약을 강제로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을 장악했다. 일제는 군대 해산이 필요하다고 판단, 8월 1일 군대 해산을 단행했다.군대 해산 조치는 대한제국 군인들의 격렬한 저항을 불러일으켰다. 특히 시위대 제1대대 대대장 박승환 참령은 군대 해산에 반발하여 자결하였다. 박승환의 자결은 시위대 군인들의 항쟁에 불을 붙였고, 이는 전국적인 의병 봉기로 이어졌다.
일제는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함으로써 군사력을 완전히 장악하고, 식민지배에 대한 저항을 억누르려 했다. 이는 대한제국의 주권을 짓밟는 명백한 침략 행위였다.
5. 2. 항일 의병 투쟁의 기폭제
1907년 8월 1일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되자 이에 반발한 시위대는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시위대의 해산은 전국적인 항일 의병 투쟁의 기폭제가 되었다.참조
[1]
웹인용
제32주차 시사안보 - 대한제국 군대해산과 민긍호 의병장
http://kookbang.dema[...]
국방일보
2015-04-08
[2]
웹인용
태평양 분함대 사령관의 탐사보고서
https://db.history.g[...]
2022-07-20
[3]
뉴스
경남도민일보, 시위대 진위대 친위대
http://gn.urinews.c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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