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자강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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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자강회는 1906년 4월 4일 윤치호, 윤효정, 장지연 등이 헌정연구회의 이념을 계승하여 결성한 애국 계몽 단체이다. 의무 교육 실시, 악습 철폐, 식산흥업 등을 통해 민족 의식 고양과 독립을 모색했으며, 기관지 《대한자강회월보》를 발행했다. 고종의 퇴위에 반대하다 1907년 8월 21일 일본 통감부에 의해 강제 해산되었으며, 이후 대한협회 등 다른 단체에 그 이념이 계승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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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자강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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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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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성 | 1906년 7월 |
해산 | 1907년 8월 |
성격 | 정치 단체, 사회 단체 |
주요 인물 | 윤효정 장지연 오세창 유길준 이동휘 이갑 양기탁 안창호 이회영 이상재 박은식 신채호 |
상세 정보 | |
설립 배경 | 을사조약 이후 애국계몽운동의 일환 |
목표 | 국민의 자강력 배양 국권 회복 |
활동 | 교육 진흥 운동 산업 장려 운동 언론 활동 |
주요 활동 | 월간 잡지 '대한자강회월보' 발행 강연회 개최 학교 설립 지원 국산품 애용 운동 |
해산 이유 | 고종의 강제 퇴위 반대 운동 탄압 |
2. 결성 배경 및 설립
1905년 헌정연구회가 해산된 이후, 장지연, 윤효정 등은 애국계몽운동의 필요성을 느껴 1906년 한성부에서 대한자강회를 조직했다.[1] 이들은 창립취지서에서 "한국은 자강지술(스스로 강해지는 방법)을 강구하지 않아 인민은 우매하고 나라는 쇠퇴하여 마침내 이국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라고 분석했다. 이어 "그러나 만일 이제라도 우리가 분발하여 자강에 힘쓰고 단체를 만들어 힘을 합한다면 국권의 회복도 가능하고 부강한 앞날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2]
대한자강회는 의무 교육 실시, 악습·폐습 철폐, 유색 복장 착용, 단발령 시행 등을 한국 정부에 건의했다. 또한 교육과 殖産(산업을 일으켜 재산을 늘림)에 힘쓰며 민족 의식 고양과 독립을 모색했다. 일본의 통감부와의 마찰을 피하기 위해 일본인 오가키 다케오를 고문으로 영입하기도 했다.[1]
2. 1. 헌정연구회 계승
이준 등이 결성했다가 해산된 헌정연구회를 계승한 애국계몽 운동 단체이다.[1] 1906년 장지연, 윤효정 등이 중심이 되어 한성부에서 학술문화 단체를 표방하며 조직했고, 회장으로는 윤치호가 추대되었다.[1]2. 2. 설립 주도 인사
1906년 4월 4일 윤치호, 윤효정, 장지연 등이 이준이 결성했다가 해산된 헌정연구회를 계승하여 한성부에서 조직했다.[1] 회장으로는 윤치호가 추대되었다.3. 활동
이준이 결성했다가 해산된 헌정연구회를 계승한 애국계몽 운동 단체이다. 1906년 장지연, 윤효정 등이 중심이 되어 한성부에서 조직했으며, 회장으로는 윤치호가 추대되었다.[1]
1906년부터 1907년까지 자강운동을 주도하면서, 창립취지서에서 "한국은 자강지술을 강구하지 않아 인민은 우매하고 나라는 쇠퇴하여 마침내 이국의 보호를 받게 되었다"라고 분석하고, "그러나 만일 이제라도 우리가 분발하여 자강에 힘쓰고 단체를 만들어 힘을 합한다면 국권의 회복도 가능하고 부강한 앞날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2]
대한제국 고종의 강제 퇴위에 반대하다가 1907년 8월 21일 통감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당했다. 같은 해 11월 창립된 남궁억의 대한협회가 대한자강회의 이념을 일정 부분 계승하였다.
3. 1. 교육 및 계몽 운동
1906년 4월 4일 윤치호, 윤효정, 장지연 등이 대한자강회를 설립하였다. 이들은 의무 교육 실시, 악습·폐습 철폐, 유색 복장 착용, 단발령 시행 등을 한국 정부에 건의하는 한편, 교육과 殖産에 힘쓰며 민족 의식을 고양하고 독립을 모색했다. 기관지로 《대한자강회월보》를 발행하여 민족의식 고취와 계몽에 힘썼다.3. 1. 1. 대한자강회월보
《대한자강회월보》는 1906년 7월 31일 창간되어 1907년 7월 25일 통권 제13호까지 발행된 월간지이다. 대한자강회 인천지회장이 이완용 내각의 궁내부대신 박영효를 저격한 사건을 특집 기사로 크게 보도하였다.[3] 출판인 최덕교는 "한말의 유일한 정치 잡지"라고 평가하기도 했다.[3]대한자강회는 대한자강회 취지서중국어(대한자강회 월보 제1호, 1906년 7월)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3]
: 무릇 우리나라의 독립은 오직 자강의 여하에 있을 따름이다. 아한이 종전에 자강지술을 강구하지 않아 인민이 스스로 우매함에 묶여 있고 국력이 쇠퇴하여 마침내 금일의 곤람함에 다달아 결국 외인의 보호를 당하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자강 지도에 뜻을 다하지 않았던 까닭이다. 아직도 구습을 버리지 않고 지키며 자강의 방도를 강구하는데 힘쓰지 않으면 끝내는 멸망함에 이르게 될 뿐이니 어찌 오늘게 그치겠는가(..중략..)
:
: 지금 우리 한국은 3천리 강토가 흠이 없고 2천만 동포가 자재하니 참으로 자강하기에 힘을 써서 단체를 모두 합치면 부강의 앞길을 바랄 수 있고 국권의 회복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 자강의 방법을 생각해 보면 다름 아니라 교육을 진작합과 식산흥업에 있다. 무릇 교육이 일어나지 못하면 국민의 지혜가 열리지 못하고 산업이 늘지 못하지 못하면 국부가 증가하지 못한다. 그러한즉 국민의 지혜를 개발하고 국력을 기르는 길은 무엇보다도 교육과 산업의 발달에 있지 않겠는가. 이는 교육과 산업의 발달이 곧 단 하나의 자강지술임을 알려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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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만일 이 자강의 목적을 관철하기를 바랄진댄 부득불 먼저 그 국민의 정신을 배양하여 단군 기자 이래 사천 년 한국의 정신으로 이천만 모든 사람의 머리 속에 흐르도록 하여 한번 숨을 들이고 내쉬는 시간에도 자기 나라의 정신을 잊지 않게 만든 연후에야 바야흐로 자강의 마음을 단련하고 국권회복의 기회를 만들게 될 것이니 안으로 조국의 정신을 양성하며 밖으로 문명의 학술을 흡수함이 곧 금일 시국의 급무일 새, 이것이 자강회의 발기하는 소이이다.
3. 2. 식산흥업 운동
대한자강회는 무릇 우리나라의 독립은 오직 스스로 강해지는 '자강'에 달려있다는 인식 아래, 자강의 방법으로 교육 진흥과 더불어 식산흥업을 제시하였다. 즉, 산업이 발전하지 못하면 국가의 부가 증가하지 못하고, 결국 국력 강화로 이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3] 대한자강회는 교육과 산업의 발달이야말로 자강술의 핵심이라는 점을 강조했다.[3]3. 3. 기타
일본인 오가키 다케오를 고문으로 영입하여 통감부와의 마찰을 피하려 했다.[1]4. 강제 해산 및 영향
대한자강회는 대한제국 고종의 강제 퇴위에 반대하다가 1907년 8월 21일 통감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2] 비록 일본인 고문을 추대하고 온건한 실력양성론을 펴는 등 개량적인 성격도 보였으나, 고종 퇴위 반대 운동으로 인해 해산되었다. 이후 1907년 11월 창립된 남궁억의 대한협회가 대한자강회의 이념을 일정 부분 계승하였다.[2]
4. 1. 강제 해산
대한자강회는 대한제국 고종의 강제 퇴위에 반대하여 1907년 8월 21일 통감부에 의해 강제로 해산되었다.[2] 대한자강회는 통감부와의 마찰을 피하고자 일본인 오가키 다케오를 고문으로 영입하기도 했으나, 고종 퇴위 반대 운동으로 인해 결국 해산되었다.4. 2. 영향
1907년 11월에 창립된 남궁억의 대한협회가 대한자강회의 이념을 일정 부분 계승하였다.[2]5. 평가 및 한계
대한자강회는 일제강점기 초기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한 단체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교육과 식산흥업 운동을 통해 민족의 힘을 키우려 노력했고, 대한제국 고종 강제 퇴위 반대 운동을 벌여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고자 했다. 그러나 일제의 탄압으로 강제 해산되는 한계를 겪었다.[1][2]
5. 1. 긍정적 평가
대한자강회는 교육 및 식산흥업 운동 등을 통해 민족 역량 강화에 기여했으며, 대한제국 고종 강제 퇴위 반대 운동을 통해 민족의 자주성을 옹호했다.[1] 대한자강회는 일제에 의해 탄압받고 강제로 해산되었으며, 일제 강점기 주요 항일 운동 단체 중 하나이다.[2]참조
[1]
서적
청소년을 위한 한국 근현대사
두리미디어
2006-03-16
[2]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4 (개화기편, 러일전쟁에서 한국군 해산까지)
인물과사상사
2007-11-19
[3]
서적
한국 근대사 산책 4 (개화기편, 러일전쟁에서 한국군 해산까지)
인물과사상사
2007-11-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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