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타한의 여왕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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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나타한의 여왕사건은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일본령이었던 아나타한섬에 고립된 일본인들의 기이한 생활을 다룬 사건이다. 32명의 일본인(남성 31명, 여성 1명)이 전쟁의 혼란 속에 섬에 고립되었고, 권총을 둘러싼 권력 다툼과 여성 히가 카즈코를 둘러싼 갈등으로 인해 여러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이 사건은 언론에 의해 선정적으로 보도되어 '아나타한 붐'을 일으켰으며, 카즈코는 '여왕벌'로 묘사되었다. 1951년 생존자들이 구출되었으나, 사건의 진상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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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나타한의 여왕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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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이름 | 아나타한의 여왕 사건 |
위치 | 현재: 북마리아나 제도 마리아나 제도 아나타한섬 |
날짜 | 1945년 - 1951년 6월 |
원인 | 외딴 섬에서의 공동생활 중 발생한 다툼 섬 내 유일한 여성을 둘러싼 남성들의 투쟁 이후 살인 사건으로 발전, 생존 경쟁 심화 |
사망자 | 실종자 포함 총 13명 (여성 관련 4명, 과로사 등 9명) |
상세 정보 | |
개요 | 고립된 섬에서의 공동 생활 중 다툼이 발생하고, 이후 살인으로 이어져 생존 경쟁이 벌어짐. |
수단 | 권총, 칼 |
2. 사건의 배경
2. 1. 일본의 남양 개발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남양흥발은 사이판섬 북쪽 약 117km에 위치한 아나타한섬에서 코코넛 농장 등을 운영했다.[2] 아나타한섬은 동서 길이 약 9km, 폭 3.7km의 작은 섬으로, 최고점은 해발 788m이며, 원래 거주자는 수십명에 불과한 화산섬이었다. 남양흥발 사원의 아내 히가 카즈코와 남편(당시에는 섬에 없었음)은 남양흥발 소속이었다.[2]
1944년 6월, 미군은 사이판섬 함락을 목표로 아나타한섬에도 격렬한 폭격을 가했고, 원래 거주자들은 모두 사이판섬으로 대피했지만, 일본인들은 섬에 남았다. 히가 카즈코와 같은 회사 상사인 키쿠이치로는 "부부"로서 남자들과 떨어져 동거했고, 31명의 남자들도 각각 집단을 이뤄 생활했다. 이후 1945년 8월 종전까지 여러 명의 실종자가 발생했다.[2]
2. 2. 제2차 세계 대전의 영향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남양흥발 사원의 아내 "히가 카즈코(比嘉和子)"와 상사 키쿠이치로, 징용선 선원과 해군 병사 등 31명의 일본인이 아나타한섬에 합류하여 공동 생활을 하고 있었다.[1] 1944년 6월, 미군의 공격으로 사이판이 함락되면서 아나타한섬은 고립되었고,[1] 징용선 침몰로 인해 많은 일본인이 섬에 표류하게 되었다.3. 섬에서의 생활 (1944~1951)
3. 1. 고립과 생존
제2차 세계 대전 말기, 남양흥발 사원의 아내 "히가 가즈코[2]"와 남성 상사 기쿠이치로(둘 다 오키나와 출신), 징용선 3척의 선원과 해군 병사 등 31명의 일본 남성들이 아나타한섬에 합류했다.[2] 이들은 남양흥발의 물자를 받으며 자급자족에 가까운 생활을 했다. 1944년 6월, 미국군의 폭격으로 원래 거주민들은 사이판섬으로 피난했지만, 일본인들은 섬에 남았다.[2]1945년 8월 종전 후, 미군은 확성기로 일본의 패전을 알렸으나, 섬에 남은 일본인들은 이를 믿지 않았다.[1] 이후 이들은 남양흥발의 지원이 끊기자 박쥐, 도마뱀 등을 잡아먹으며 연명했다.[1]
3. 2. 권력 투쟁과 폭력
1946년 8월, 산 중에 추락한 미군 보잉 B-29의 잔해와 낙하산이 발견되었다.[1] 이때 잔해 속에서 발견된 권총 4정을 재조립하여 만든 권총 2정이 그들의 손에 들어가면서 남자들의 역학관계에 변화가 생겼다.[1] 이후, 총기의 존재가 권력의 상징이 되었고, 히가 카즈코를 둘러싼 남성들 간의 갈등이 심화되어 살인 사건까지 발생했다.[1]먼저, 키쿠이치로가 변사했다.[1] 그 후 카즈코는 남자들의 리더가 뽑은 젊은 남자를 "남편"으로 삼고 살기 시작했는데, 그 남자도 변사했다.[1] 게다가, 그 다음 "남편" 역시 변사했다.[1]
4. 히가 카즈코를 둘러싼 갈등
1946년 8월, 산 중에 추락한 미군 보잉 B-29의 잔해와 낙하산이 발견되고, 이때 잔해 속에서 발견된 권총 4정을 재조립한 권총 2정이 그들의 손에 들어가면서 남자들의 역학관계에 변화가 생겼다.[1] 이후, 총기의 존재가 권력의 상징이 되었고, 이후 여성을 둘러싸고 남성들 사이에 공공연히 살인이 벌어지게 되었다.
먼저, 키쿠이치로가 변사했다. 그 후 히가 카즈코는 남자들의 리더가 뽑은 젊은 남자를 "남편"으로 삼고 살기 시작했는데, 그 남자도 변사했다.
게다가, 그 다음 "남편" 역시 변사했다. "원흉은 카즈코"라는 분위기가 강해져, 생명의 위험을 느낀 카즈코는 혼자 미군에 투항했다. 이를 계기로 남자들도 구출 되었지만, 32명에서 20명으로 감소해있었다. 이 시점까지 사망한 남성은 실종을 포함 13명이나 되었다.
4. 1. '여왕벌' 이미지
1946년 8월, 아나타한섬에서 추락한 미군 보잉 B-29의 잔해 속에서 권총이 발견되면서, 이 권총을 차지하기 위한 남성들 간의 갈등이 시작되어 여러 명이 사망했다.[1] 히가 카즈코는 남자들의 리더가 뽑은 젊은 남자를 "남편"으로 삼고 살기 시작했는데, 그 남자도 변사했다.[1]
언론은 이 사건을 선정적으로 보도하며, 카즈코를 '여왕벌'에 비유했다. 주간 아사히는 1950년 10월 8일 호에 "남자 30명에 단 한 명, 고도(孤島)의 여왕벌 이야기 아나타한 섬에서 7년"이라는 제목으로, 카즈코를 얻으려는 다른 남자에게 "남편"이 살해당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1] 또한, "마치 꿀벌의 세계에서의 '여왕벌'처럼, 남자가 그녀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남자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식(食)과 성(性), 그 두 가지를 지배하는 여왕으로서, 카즈코 씨는 군림하게 되었다"라고도 기재되었다.[1]
4. 2. 투항과 구출
1945년 8월 종전 당시, 이 섬에 잔류한 일본인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 미군은 확성기로 섬 주민들에게 일본의 패전을 알렸지만, 아나타한섬의 일본인은 믿지 않고 섬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그 후 미군은 북마리아나 제도 일대의 신탁통치 이양 등에 시간이 걸렸고, 이 섬을 떠나지 않으려는 일본은 방치되었다.[1] 패전 후, 섬은 잊혀지게 되었고, 이들은 남양개발에서 준 식량을 다 먹고 고구마를 직접 재배하게 되기 전까지는 박쥐, 도마뱀 등을 잡아먹었다. 옷도 없이 나무를 비비고 불을 피우는 원시인과 같은 생활을 했다.1946년 8월, 산 중에 추락한 미군 보잉 B-29의 잔해와 낙하산이 발견되고, 이때 잔해 속에서 발견된 권총 4정을 재조립한 권총 2정이 그들의 손에 들어가면서 남자들의 역학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이후, 총기의 존재가 권력의 상징이 되었고, 이후 여성을 둘러싸고 남성들 사이에 공공연히 살인이 벌어지게 되었다.[1]
먼저, 키쿠이치로가 변사했다. 그 후 카즈코는 남자들의 리더가 뽑은 젊은 남자를 "남편"으로 삼고 살기 시작했는데, 그 남자도 변사했다. 게다가, 그 다음 "남편" 역시 변사했다. "원흉은 카즈코"라는 분위기가 강해져, 생명의 위험을 느낀 카즈코는 혼자 미군에 투항했다.
이를 계기로 남자들도 구출 되었지만, 32명에서 20명으로 감소해있었다. 이 시점까지 사망한 남성은 실종을 포함 13명이나 되었다. 구출된 사람은 1951년 7월 7일에는 일본 본토에 상륙해 복귀 절차를 마치고 해산했으나, 일부는 이날 참의원 인양특별위원회에 초청돼 간담회를 가졌다고 한다.[3]
오키나와로 돌아간 카즈코가, 아직 섬에 남은 남자들의 구조를 호소하면서, 가족들이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하여, 1951년 5월 22일 중의원 외무위원회에서는, 3척의 징용선 중 1척인 "헤이스케마루"의 모항인 가나가와현미우라군미사키정(현 미우라시)의 정장 등이 제출한 "인양 촉진" 진정과 청원이 제출되었다. 그 결과, 6월 30일, 남자 19명이 "항복"하고, 7월 6일, 먼저 탈출했던 1명과 합쳐 20명이 미군기로 하네다 공항에 도착했다.

5. 사건의 전말과 일본 사회의 반응
5. 1. 언론 보도와 '아나타한 붐'
이 남녀의 공동 생활이라는 패전 비화는 언론에 의해 선정적으로 다루어졌으며, 전쟁에 싫증이 난 사람들의 호기심을 크게 자극했다.[1] 처음에 이 "사건"을 보도한 것은 1949년 2월 22일 아사히 신문 조간 사회면 최하단의 작은 칼럼 "청연필"이었다.[1] "사이판 섬에서 배로 하룻밤, 200마일 정도 북쪽에 '아나타바시 섬'이라고 불리는 수수께끼의 섬이 있다"고 섬의 이름도 부정확하게 사이판에서 귀국한 일본인의 "여행담"으로 소개되었지만, "일본군 생존자 28명과 여성 1명이 로빈슨 크루소 같은 생활을 하고 있다"고 전해졌다.[1] 그러나 1년 3개월 후인 1950년 5월 10일 오키나와 타임스가 "섬에 아직도 항복하지 않은 30명 히가 씨는 사망, 오키나와 어부 25명"이라는 제목으로 크게 다루었다.[1]1950년 8월 14일에는, 오키나와 타임스는 2면 톱으로 "종전을 모르고 'A 섬'에서 7년, 30명의 남자 속에 단 한 명의 여자 카즈코 씨, 공로 귀환"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했다.[1] 카즈코 본인과의 인터뷰 내용도 전하며, "마치 '원시 생활'이다, 여자도 나뭇잎으로 허리 치마", "투항을 결심하는 여자의 입장에서 이탈" 등 보도했다. 그룹 내에서 감정의 대립이 시작되어, 투쟁이 피를 보기에 이르렀고, 6명의 남자가 희생된 것이 처음으로 드러났다[1]。
주간 아사히는 1950년 10월 8일 호에 "남자 30명에 단 한 명, 고도(孤島)의 여왕벌 이야기 아나타한 섬에서 7년"이라는 제목으로 기사를 싣고, 리더의 지명으로 정해진 "남편"의 죽음에 대해, 카즈코를 얻으려는 다른 남자에게 살해당했을 가능성을 시사했다.[1] 또한, "마치 꿀벌의 세계에서의 '여왕벌'처럼, 남자가 그녀를 지배하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남자들을 지배하게 되었다", "식(食)과 성(性), 그 두 가지를 지배하는 여왕으로서, 카즈코 씨는 군림하게 되었다"라고도 기재되었다.[1] 1951년 7월 22일호는 「스무 명에게 기자 400명」이라는 제목을 달아 보도가 과열되었음을 알 수 있다. 보도 각사가 귀국한 남자들의 '스카우트 경쟁'에 불을 지폈다.[1] 카스토리 잡지는 노골적인 성 묘사의 읽을거리 소설을 삽화와 함께 게재했다. 「아나타한」은 '오랜만'을 의미하는 말로서 유행어가 되었다.[1]
이처럼 일련의 괴사건은 이후 대대적으로 보도되어, 일본 국내에서 '아나타한 붐'이 일어났으며, 여성의 브로마이드가 매우 잘 팔렸다.[1] 히가 카즈코는 '남자를 유혹하는 여자'로도 보도되어, 대중의 호기심에 노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영화화도 진행되었다.[1] 와타나베 츠네오는 당시 주간 타블로이드 신문이었던 요미우리 위클리의 젊은 기자 시절에, 아나타한에서 생활하는 일본인 정보를 가장 먼저 입수했으나, 특종을 놓치게 되었다.[4]
5. 2. 진상 규명과 논란
1945년 8월 종전 후, 미군은 아나타한섬에 잔류한 일본인들에게 일본의 패전을 알렸으나, 이들은 믿지 않고 섬을 떠나지 않았다. 북마리아나 제도 일대의 신탁통치 이양 등으로 인해 섬에 남은 일본인들은 방치되었고, 패전 후 잊혀진 채 원시적인 생활을 했다.1946년 8월, 추락한 미군 보잉 B-29의 잔해에서 발견된 권총 2정이 이들 손에 들어가면서 남자들 간의 역학 관계에 변화가 생겼다. 총기는 권력의 상징이 되었고, 여성을 둘러싼 살인이 벌어졌다. 키쿠이치로가 변사한 후, 카즈코는 남자들의 리더가 뽑은 젊은 남자를 "남편"으로 삼았으나, 그 남자 역시 변사했다.
이후 카즈코는 "원흉"으로 지목되어 생명의 위협을 느끼고 미군에 투항했고, 남자들도 구출되었지만 32명에서 20명으로 줄어 있었다. 사망하거나 실종된 남성은 13명에 달했다. 1951년 7월 7일, 구출된 사람들은 일본 본토에 상륙해 복귀 절차를 마쳤고, 일부는 참의원 인양특별위원회에 초청되어 간담회를 가졌다.
이처럼 사건의 진상은 명확히 밝혀지지 않았고, 사망 사건의 원인을 둘러싼 논란은 계속되었다.
5. 3. 관련 작품
이 사건은 소설, 영화, 연극 등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마루야마 미치로의 르포르타주 '아나타한'(1951)과 '아나타한의 고백'(1952)이 출간되었고, 이와사키 사카에의 소설 '아나타한'(1953)과 오노 카오루의 소설 '절해 밀실'(1998)도 발표되었다.모리노 지로 감독의 영화 '아나타한 섬의 진상은 이것이다!!'(1953)는 사건을 엽기적으로 다룬 작품으로, 카즈코 본인이 출연했다. 요제프 폰 스텐버그 감독의 영화 '아나타한''(1953)이 대표적이다. 이이자와 쿄시 각본, 나가오카 테루코 연출의 희곡 '야자수와 여자'(1956)는 사건을 모티브로 한 코미디 작품이다. 타니 켄이치 각본, 타나자와 타카요시 연출의 희곡 '여왕이라 불린 여자'(2017)도 초연되었다.[5]
키리노 나쓰오의 소설 '도쿄 섬'(2008)은 무대를 현대로 옮겨 사건을 재구성했다. 마키코의 만화 'QUEEN BEE'(1993)도 이 사건을 다루고 있다. 가와시마 유지 감독의 영화 '그라마 섬의 유혹'(1959)은 희곡 '야자수와 여자'를 영화화한 것이며, 시노자키 마코토 감독의 영화 '도쿄 섬'(2010)은 소설 '도쿄 섬'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차이이린(조린 린)의 곡 '너도 오늘'(Karma) 뮤직비디오(2019)도 이 사건에서 영감을 받았다.[6]
6. 사건 이후
일본인들이 떠난 후, 원주민들이 아나타한 섬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1990년 4월에 섬에서 화산성 지진이 다수 발생하여, 섬 주민 22명 전원이 사이판 섬으로 대피했다.
7. 한국의 시각에서 본 아나타한섬 사건
참조
[1]
웹사이트
終戦後、孤島に32人の男と1人の女が……「アナタハンの女王」事件に日本中が熱狂するまで
https://bunshun.jp/a[...]
文春オンライン
2020-06-24
[2]
문서
[3]
뉴스
孤島におくった七年 アナタハンから20名帰る 引揚復員
朝日新聞
1951-07-07
[4]
서적
君命も受けざる所あり
日本経済新聞出版社
2007
[5]
웹사이트
女王と呼ばれた女 | 新宿村LIVE
http://www.shinjukum[...]
[6]
뉴스
解密!蔡依林新歌《你也有今天》藏歷史 改編真實戰後傳奇
https://www.setn.com[...]
三立新聞
2019-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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