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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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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마지는 고대 이베리아의 도시로, 오늘날보다 훨씬 광범위한 지역을 아우르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다리알 협곡에 대한 접근성으로 인해 스키타이족의 침략을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이교주의의 성스러운 도시이자 므츠헤타의 방어 기지였다. 도시 이름은 이교도 판테온의 최고신 아르마지 또는 조로아스터교의 신 아르마즈드에서 유래된 것으로 추정된다.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전성기를 누렸으며, 베스파시아누스 황제는 이베리아 왕 미트리다테스 1세를 위해 아르마지를 요새화했다. 5세기 후반 또는 6세기 초에 트빌리시로 수도가 이전되면서 쇠퇴하기 시작했고, 736년 아랍 지휘관 마완 2세의 침략으로 파괴되었다. 이후 1150년에서 1178년 사이에 조지아 정교회의 성녀 니노 수도원이 세워졌다.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기원전 4세기부터 서기 6세기까지의 유물이 발견되었으며,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대므츠헤타 국영 고고학 박물관에서 관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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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마지
위치 정보
일반 정보
이름아르마지
로마자 표기Armazi
다른 이름아르마즈치헤
유적 정보
위치카르틀리, 조지아
종류정착지
상태폐허
역사
건설불명
폐기불명
고고학 정보
발굴진행 중
고고학자불명
이미지
아르마지 궁전의 6개 기둥 홀 유적 (기원전 1세기)
바기네티 산의 아르마지 궁전의 6개 기둥 홀 유적 (기원전 1세기)

2. 역사

고고학적 증거는 고대 아르마지가 오늘날보다 훨씬 더 광범위했음을 증명한다. 아르마지의 전략적 위치는 다리알 협곡에 대한 접근성이 용이하다는 점에 기인했는데, 이곳은 대 코카서스 산맥을 가로지르는 주요 도로였으며, 이를 통해 스키타이족이 고대 근동을 침략했다.

도시의 이름과 그 주요 아크로폴리스인 아르마즈-치케(문자 그대로 "아르마지 요새"; არმაზციხე)는 일반적으로 이교도 이베리아 판테온의 최고 인 아르마지에서 유래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는 조로아스터교의 신인 아르마즈드 또는 아후라 마즈다의 축약된 형태였다. 또는 산스크리트어로 달의 신을 의미하는 베다 신 아르마에서 유래되었다. 달의 신 유물이 발견되어 후자가 정확한 것으로 생각된다. 이 이름은 초기 중세 조지아 연대기에 처음 등장하지만, 고대 시대의 스트라보, 대 플리니우스, 프톨레마이오스, 디오 카시우스의 아르마스티카 또는 하르모지카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훨씬 더 오래된 것으로 보인다. 중세 조지아 연대기의 모음에 따르면, 아르마츠치케는 기원전 3세기에 이베리아의 파르나바즈 1세 왕에 의해, 이전에는 카르틀리로 알려진 장소에 세워졌다.[1] 이 요새는 오늘날의 바기네티 산에 위치해 있었으며, 므트크바리 강(쿠라 강)의 오른쪽 강둑, 아라그비 강과의 합류 지점에 있었다. 다른 요새인 치치아무리 (წიწამური) 또는 고전 작가들의 세브사모라는 아라그비 강 왼쪽 강둑에 맞은편에 위치해 있었으며 카즈베크 산으로 향하는 길을 통제했다.[1]

므츠헤타가 이베리아의 수도로 부상한 후에도 아르마지는 이베리아 이교주의의 성스러운 도시이자 므츠헤타의 방어 기지 중 하나로 남아 있었다.

== 로마 제국과의 관계 ==

므트크바리 강 위의 파괴된 구조물은 폼페이우스 시대의 것으로, "폼페이우스의 다리"라고 불린다.[1] 이베리아가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아르마지는 전성기를 맞았다. 베스파시아누스 아르마지 비석에 따르면,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는 75년에 이베리아 왕 미트리다테스 1세를 위해 아르마지를 요새화했다.[3] 이 방어벽은 다리알 협곡의 남쪽 출구를 막기 위해 건설되었는데, 이는 알란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3]

세라피트의 아르마지 비석.


이 시기 아르마지는 세습 피티아크쉬가 다스렸는데, 이들은 왕 다음 가는 권력을 누렸다.[4] 왕조의 세습 묘지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는 아스파루크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 시대)와 제바크(150년경)의 초상이 새겨진 보석 세공품이 있는데, 이는 기독교 이전 조지아 초상화의 희귀한 예이다.[4] 아람어 비문에는 왕실 건축가와 실장도 언급되어 있다. 아르마지에서 발견된 비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 문자-아람어 이중 언어 묘비 비문으로, 아르마지 문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 쇠퇴와 파괴 ==

아르마지 요새 유적


5세기 후반 혹은 6세기 초에 조지아의 수도가 트빌리시로 이전되면서 아르마지는 점차 쇠퇴했다.[5][1] 545년에도 여전히 특정 위스탐이 그 지역의 고위급 사령관직을 맡고 있었다.

아르마지는 전략적 요충지 였으나, 736년 아랍 지휘관 마완 이븐 무함마드(후일에 우마이야조 칼리프 마완 2세)의 침략으로 도시는 결국 파괴되었고 흙 속으로 파묻혔다.[5][1] 이후 아르마지는 재건되지 못했지만, 1150~1178년 사이에 조지아 정교회의 성녀 니노 수도원이 축조되었다. 그 곳에는 6 애프스가 있는 홀 교회가 있으며, 12세기 벽화 조각들 몇 점이 보존되어 있다.[1]

2. 1. 로마 제국과의 관계

므트크바리 강 위의 파괴된 구조물은 폼페이우스 시대의 것으로, "폼페이우스의 다리"라고 불린다.[1] 이베리아가 로마 제국과 동맹을 맺으면서 아르마지는 전성기를 맞았다. 베스파시아누스 아르마지 비석에 따르면, 로마 황제 베스파시아누스는 75년에 이베리아 왕 미트리다테스 1세를 위해 아르마지를 요새화했다.[3] 이 방어벽은 다리알 협곡의 남쪽 출구를 막기 위해 건설되었는데, 이는 알란족의 침입을 막기 위한 조치였다.[3]

이 시기 아르마지는 세습 피티아크쉬가 통치했는데, 이들은 왕 다음 가는 권력을 누렸다.[4] 왕조의 세습 묘지에서 발굴된 유물 중에는 아스파루크 (로마 황제 하드리아누스 시대)와 제바크(150년경)의 초상이 새겨진 보석 세공품이 있는데, 이는 기독교 이전 조지아 초상화의 희귀한 예이다.[4] 아람어 비문에는 왕실 건축가와 실장도 언급되어 있다. 아르마지에서 발견된 비문 중 가장 중요한 것은 그리스 문자-아람어 이중 언어 묘비 비문으로, 아르마지 문자로 알려지게 되었다.

2. 2. 쇠퇴와 파괴



5세기 후반 혹은 6세기 초에 조지아의 수도가 트빌리시로 이전되면서 아르마지는 점차 쇠퇴했다.[5][1] 545년에도 여전히 특정 위스탐이 그 지역의 고위급 사령관직을 맡고 있었다.

아르마지는 전략적 요충지 였으나, 736년 아랍 지휘관 마완 이븐 무함마드(후일에 우마이야조 칼리프 마완 2세)의 침략으로 도시는 결국 파괴되었고 흙 속으로 파묻혔다.[5][1] 이후 아르마지는 재건되지 못했지만, 1150~1178년 사이에 조지아 정교회의 성녀 니노 수도원이 축조되었다. 그 곳에는 6 애프스가 있는 홀 교회가 있으며, 12세기 벽화 조각들 몇 점이 보존되어 있다.[1]

3. 고고학적 발견

1890년대에 소규모 발굴을 통해 돌계단 형태를 띈 징두리 벽돌로 만들어진 마을 가옥 벽, 투룸 구조 가옥, 1세기 여성 토르소 조각 등이 발견되었다.[5][1] 1943~1948년 조지아 과학 아카데미의 안드리아 아파키제가 주도한 대규모 발굴 작업이 1985년에 재개되어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5][1]

발굴 결과, 아르마지 유적은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까지 세 시기로 구분된다.[5][1]


  • 아르마지 1기 (기원전 4~3세기): 튼튼한 거벽돌을 기반으로 덜 튼튼한 진흙 벽돌로 마감한 구조이다. 6개의 기둥에 기와 지붕을 올린 커다란 방이 특징이다.[5][1]
  • 아르마지 2기 (기원전 3~1세기): 애프스가 있는 신전이 특징이다.[5][1]
  • 아르마지 3기 (1~6세기): 가장 부유했던 시기로, 정교하게 절단한 벽돌을 석회 모르타르와 금속 죔쇠로 연결하여 건축했다. 왕궁, 화려하게 장식된 묘소들, 목욕탕, 작은 석묘 등이 남아있다.[5][1]

마기네티 산에 있는 (기원전 1세기의) 아르마지 궁전 터의 6 기둥 홀의 폐허.


이 유적은 현재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대므츠헤타 국영 고고학 박물관의 보존 영역의 일부로 관리되고 있다.[5][2]

3. 1. 주요 유적

1890년대에 소규모 발굴을 통해 돌계단 형태를 띈 징두리 벽돌로 만들어진 마을 가옥 벽, 투룸 구조 가옥, 1세기 여성 토르소 조각 등이 발견되었다.[5][1] 1943~1948년 조지아 과학 아카데미의 안드리아 아파키제가 주도한 대규모 발굴 작업이 1985년에 재개되어 현재까지 진행 중이다.[5][1]

발굴 결과, 아르마지 유적은 기원전 4세기부터 기원후 6세기까지 세 시기로 구분된다.[5][1]

  • 아르마지 1기 (기원전 4~3세기): 튼튼한 거벽돌을 기반으로 덜 튼튼한 진흙 벽돌로 마감한 구조이다. 6개의 기둥에 기와 지붕을 올린 커다란 방이 특징이다.[5][1]
  • 아르마지 2기 (기원전 3~1세기): 애프스가 있는 신전이 특징이다.[5][1]
  • 아르마지 3기 (1~6세기): 가장 부유했던 시기로, 정교하게 절단한 벽돌을 석회 모르타르와 금속 죔쇠로 연결하여 건축했다. 왕궁, 화려하게 장식된 묘소들, 목욕탕, 작은 석묘 등이 남아있다.[5][1]


이 유적은 현재 국보로 지정되었으며, 대므츠헤타 국영 고고학 박물관의 보존 영역의 일부로 관리되고 있다.[5][2]

3. 2. 아르마지 이중 언어 비문

4. 문화

5. 현대의 아르마지

참조

[1] 웹사이트 Armazi http://www.iranicaon[...] 2007-09-13
[2] 웹사이트 Georgian Museums: National Archaeology Museum-Reserve of Greater Mtskheta http://www.georgianm[...] 2007-09-13
[3] 서적 The Roman Empire: Augustus to Hadri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4] 웹사이트 Asparukh http://www.iranica.c[...] 2007-09-13
[5] 웹사이트 Armazi http://www.iranica.c[...] 2007-09-13
[6] 웹사이트 Georgian Museums: National Archaeology Museum-Reserve of Greater Mtskheta http://www.georgianm[...] 2007-09-13
[7] 서적 The Roman Empire: Augustus to Hadri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
[8] 웹사이트 Asparukh http://www.iranica.c[...] 2007-09-13
[9]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Iran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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