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은 4세기에 건설된 조지아 정교회 대성당으로, 므츠헤타에 위치해 있다. 조지아 기독교의 중요한 유적지이며, 조지아 왕들의 묘소이기도 하다. 11세기에 현재의 크로스 돔 양식으로 재건되었으며, 여러 차례 개축과 복원을 거쳤다. 대성당은 건축학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며, 내부에는 프레스코화와 성화, 그리고 14세기에 예루살렘의 성묘를 모방한 작은 교회가 있다. 유네스코는 대성당의 구조적 안정성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바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므츠헤타므티아네티주의 관광지 - 아르마지
아르마지는 고대 이베리아 왕국의 주요 도시이자 종교 중심지로, 요새화된 도시로 건설되어 로마 제국과의 관계 속에서 번성하며 고대 조지아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했으나, 수도 이전과 아랍의 침략으로 쇠퇴한 후 성녀 니노 수도원이 세워졌고 현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보호받는 고고학 유적지이다. - 조지아의 대성당 - 트빌리시 성 삼위일체 대성당
트빌리시 성 삼위일체 대성당은 조지아 정교회 자동두위 기념과 예수 탄생 기념을 위해 트빌리시에 건설된 대성당으로, 전통적인 조지아 건축 양식에 수직적 강조를 더했으며, 건설 부지 선정 및 성화 속 스탈린 묘사로 논란이 있었다. - 조지아의 대성당 - 바그라티 대성당
바그라티 대성당은 11세기 초 바그라트 3세 통치기에 건설된 조지아 정교회 성당으로,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서 제외되었지만 현재는 쿠타이시 대주교의 주교좌 성당이자 쿠타이시의 상징적인 관광 명소이다. - 조지아의 세계유산 - 므츠헤타
므츠헤타는 쿠라 강과 아라그비 강 합류 지점에 위치한 조지아의 도시로, 고대 이베리아 왕국의 수도였으며, 조지아 기독교 건축의 중요한 기념물들을 보유하여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조지아의 세계유산 - 바그라티 대성당
바그라티 대성당은 11세기 초 바그라트 3세 통치기에 건설된 조지아 정교회 성당으로, 유네스코 세계 유산에서 제외되었지만 현재는 쿠타이시 대주교의 주교좌 성당이자 쿠타이시의 상징적인 관광 명소이다.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 - [지명]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 | |
위치 | 므츠헤타, 므츠헤타-므티아네티 |
국가 | 조지아 |
종파 | 조지아 정교회 |
이전 종파 | 4세기 미리안 3세 왕 시대의 대성당 5세기 바크탕 1세 시대의 대성당 |
건축가 | 아르스키제 |
건축 양식 | 정방형 교차 |
착공 | 1010년 |
완공 | 1029년 (게오르게 1세 통치 기간) |
길이 | 57.7m |
너비 | 27m |
높이 | 49m |
돔 수량 | 1개 |
사용 재료 | 돌 |
역사적 지정 | |
문화유산 지정 | 세계유산: 므츠헤타 역사 기념물 (1994년, 18회 세계유산 위원회) https://whc.unesco.org/en/list/708 조지아 국가 중요 무형문화재: 스베티츠호벨리 복합 단지 (2006년 11월 7일 지정) https://memkvidreoba.gov.ge/objects/immovable/immovableObject?id=5080 (2007년 10월 3일 등재) |
2. 역사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은 4세기에 카르틀리(이베리아) 미리안 3세의 통치 기간 동안에 최초로 건축되었다. 성녀 니노가 조지아의 첫 번째 교회 부지를 아라그비 강과 므트크바리강(쿠라강)의 합류 지점으로 정했다고 전해진다.
조지아의 성인 열전에 따르면, 1세기 므츠헤타 출신의 엘리야라는 유대계 조지아인이 예수가 십자가에 못 박힐 때 예루살렘에 있었다. 엘리야는 골고타에서 로마 군인에게 예수의 옷을 사서 조지아로 가져왔다. 고국에서 그는 누이 시도니아를 만났는데, 그녀는 옷에 손이 닿자마자 성스러운 물건에 대한 격한 감정으로 즉사했다. 옷은 그녀의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옷과 함께 묻혔다.[9] 시도니아가 예수의 옷과 함께 묻힌 묘소는 대성당에 보존되어 있다. 그 후, 그녀의 묘소에서 거대한 삼나무가 자랐다. 성녀 니노는 교회를 짓기 위해 삼나무를 베라고 명령했고, 그 나무로 성당의 토대가 되는 일곱 기둥을 만들었다. 그러나 일곱 번째 기둥은 불가사의하게 공중에 떠올랐다가, 성녀 니노가 밤새도록 기도한 후에야 다시 나타났다. 이 신비한 기둥에서는 사람들의 모든 질병을 치유하는 성스러운 액체가 흘러나왔다고 한다.
조지아어로 ''스베티''는 "기둥", 츠코벨리는 "삶을 주는" 또는 "살아 있는"을 의미하여 성당의 이름이 되었다. 이 사건을 묘사한 성화는 입구 오른편의 두 번째 기둥에서 볼 수 있다. 조지아 전역에서 널리 재현된 이 성화에는 천당에서 천사가 된 시도니아가 기둥을 들고 있고, 성녀 니노, 미리안 왕과 그의 왕비 나나가 묘사되어 있다.[9] 조지아는 337년에 기독교를 국교로 채택했다.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은 4세기 건축 이후 아랍, 페르시아, 티무르 제국의 침략, 러시아 지배, 소련 시대, 지진 등으로 여러 차례 피해를 입었다.[1]
현재의 대성당은 1010년에서 1029년 사이 건축가 아르수키제가 조지아 카톨리코스 멜키세덱 1세의 요청으로 지었다. 당시 국왕은 조지 1세였다.[3] 14세기 말 티무르에 의해 파괴된 후 재건축되었고, 15세기 초 현재의 돔이 건설되었으며, 17세기 중반 다시 개축되었다.[4]
1970-71년 바흐탕 친친제(Vakhtang Tsintsadze) 복원 과정에서 바흐탕 고르가살리가 5세기 말에 지은 바실리카 기초가 발견되었다. 조지아 교회 건축 초기에는 바실리카 양식이 십자형 돔 양식 이전까지 지배적이었다.[2]
대성당은 1787년 에레클레 2세 치세에 돌과 벽돌로 지어진 방어벽으로 둘러싸여 있다.[5] 벽 상층부는 군사적 목적으로 설계되어 포좌가 설치되었다. 벽에는 원통형 6개, 사각형 2개, 총 8개의 탑이 있다. 1963년 고고학 발굴에서 벽 남쪽 부분에서 11세기 총대주교의 집, 교회 뜰 안에서는 안톤 2세 총대주교의 2층 궁전 유적이 발견되었다.[7]
1830년대 초, 러시아 제국 황제 방문 시 북, 서, 남쪽의 현관 갤러리가 철거되었다.[6]
2. 1. 초기 역사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은 4세기에 카르틀리(이베리아) 미리안 3세의 통치 기간 동안에 최초로 건축되었다. 성녀 니노가 조지아의 첫 번째 교회 부지를 아라그비 강이 므트크바리강(쿠라강)과 합류하는 지점으로 결정했다고 전해진다.
조지아의 성인 열전에 따르면 1세기에 이름이 엘리야인 유대계 조지아인이 므츠헤타를 떠나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실 때 예루살렘에 있었다고 한다. 엘리아는 골고타에 있는 로마의 군인에게서 예수의 옷을 사서 조지아로 가져왔다. 고국으로 돌아온 엘리아는 그의 누이 시도니아를 만났는데, 그녀는 그 옷이 손에 닿자마자 그 성스러운 물건이 감정을 격하게 하여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말았다. 그 옷은 그녀의 꽉쥔 손에서 떨어지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그 옷과 함께 땅에 묻혔다.[9] 시도니아가 예수의 옷과 함께 묻힌 묘소는 대성당에 보존되어 있다. 그 후에, 그녀의 묘소에서 거대한 삼나무가 자라났다. 성녀 니노는 교회를 짓기위해 그 삼나무를 베라고 명령했고, 그 나무로 성당의 토대가 되는 일곱 기둥들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 일곱 기둥은 불가사의한 힘으로 일어나더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성녀 니노가 밤새도록 기도를 한 다음에야 그 나무는 다시 나타났다. 게다가 그 신비한 일곱 기둥에서 사람들의 모든 질병을 치유해 주는 성스러운 액체가 넘쳐 나왔다고 전해진다.
조지아어로 ''스베티''는 "기둥"을 의미하며 츠코벨리는 "삶을 주는" 또는 "살아 있는"을 의미하므로, 그 성당의 이름이 되었다. 그 사건을 표현한 성화는 입구 오른편의 두 번째 기둥에서 볼 수 있다. 조지아 전역에서 널리 재연된 그 성화에서는 천당에서 천사가 된 시도니아가 기둥을 들어 올리고 있다. 성녀 니노가 전경에 있고, 미리안 왕과 그의 왕비 나나는 오른쪽과 왼쪽에 있다.[9] 조지아는 337년에 기독교를 공식적인 국교로 채택했다.
2. 2. 중세와 현시대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은 4세기에 처음 건축되었으며, 역사 속에서 여러 차례 피해를 입었다. 특히 아랍, 페르시아, 티무르 제국의 침략과 러시아의 지배, 소련 시대에 피해를 보았으며, 지진으로 인해 건물에 손상을 입기도 했다.[1]현재의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은 1010년에서 1029년 사이에 건축가 아르수키제가 조지아 카톨리코스 멜키세덱 1세의 요청으로 지었다. 당시 조지아의 국왕은 조지 1세였다.[3] 14세기 말 티무르에 의해 파괴된 후 재건축이 이루어졌고, 15세기 초에 현재의 돔이 건설되었으며, 17세기 중반에 다시 개축되었다.[4]
1970-71년 바흐탕 친친제(Vakhtang Tsintsadze)가 주관한 복원 과정에서 성 니노의 원래 교회 이후 국왕 바흐탕 고르가살리가 5세기 말에 지은 바실리카의 기초가 발견되었다. 조지아 교회가 처음 건설될 당시 바실리카는 십자형 돔 양식이 등장하기 전까지 조지아 교회 건축의 지배적인 유형이었다.[2]
대성당은 1787년 에레클레 2세 국왕 치세에 돌과 벽돌로 지어진 방어벽으로 둘러싸여 있다.[5] 벽의 꼭대기 층은 군사적인 목적으로 설계되었고 포좌가 설치되어 있었다. 벽에는 8개의 탑이 있는데, 그 중에 6개는 원통형이고 2개는 사각형이다. 1963년 고고학 발굴에서 벽 남쪽 부분에서 11세기 총대주교의 집이 발견되었다. 교회 뜰 안에서는 안톤 2세 총대주교의 2층 궁전 유적이 발견되었다.[7]
1830년대 초, 러시아 제국 황제가 대성당을 방문했을 때, 북쪽, 서쪽, 남쪽에서 교회를 둘러싸고 있었지만 상태가 좋지 않았던 현관 갤러리가 철거되었다.[6]
3. 건축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은 4세기에 처음 건축되었으나, 시간이 흐르면서 아랍, 페르시아, 티무르의 침입과 러시아 제국, 소비에트 연방 시대에 큰 피해를 입었고, 지진으로도 타격을 받았다.[6]
1970~1971년 V. 친차제의 복원 작업 때, 5세기 바크탕 고르가살리 왕이 지은 바실리카 기초가 발견되었다. 이는 조지아 교회 건축 초기, 크로스 돔 양식 이전에 유행했던 양식이다.
현재의 대성당은 11세기(1010~1029년)에 건축가 아르수키제에 의해 크로스 돔 양식으로 재건축되었으며, 당시 왕은 기오르기 1세였다.
1787년 에레클레 2세 왕은 성당 보호를 위해 석조와 벽돌로 된 방벽을 세웠다. 꼭대기 층은 군사용으로 설계되어 포좌가 설치되었고, 벽에는 8개의 탑(원통형 6개, 사각형 2개)이 있다. 1763년 고고학 탐험대는 총대주교 가옥과 안톤 2세의 2층 저택 흔적을 발견했다.
3. 1. 구조
1970~1971년 복원 기간 동안, 성녀 니노의 최초 교회 이후 바크탕 고르가살리가 건축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3층 구조의 바실리카 지반이 발견되었다.
현재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의 건축 양식은 약 1020년의 양식으로, 조지아 중세 초기에 나타나 바그라트 3세에 의해 조지아가 정치적으로 통합된 이후 기본 양식이 된 크로스 돔 양식에 기반한다. 이 양식의 특징은 교회의 4측 모두에 돔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 구조는 훌륭한 음향 효과를 내기에 충분하다. 스베티츠코벨리의 돔은 교회의 양호한 상태를 보존하기 위해 수세기에 걸쳐 복원되었다.
성당에 사용된 기본 석재는 수평으로 다듬어진 황사석이며, 앱스 창에는 적석이 사용되었다. 큐볼라 원통부에 사용된 녹암은 17세기의 것이다. 성당 곳곳에 있는 아치형 장식의 굽은 가리개들은 11세기의 것으로 개조되지 않았다.[6]
큰 창은 대부분 교회 서쪽 꼭대기 층에서 나타난다. 그 장식에서는 그리스도가 앉아 있고 그 양측에 천사가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 벽면에 있던 원본 조각품은 보존되지 못했지만, 여러 차례, 특히 19세기에 대부분 복원되었다.

thumb

thumb
3층 바실리카 기초는 성 니노의 원래 교회 이후 바흐탕 고르가살리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며, 1970~71년 복원 과정에서 고고학자들에 의해 발견되었다. 잔해는 서쪽과 남동쪽 부분, 바닥 아래 기둥 아래에서 볼 수 있다. 훨씬 더 오래된 목조 교회의 잔해도 십자가 남쪽 팔 안에서 발견되었다.
현재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 건축 양식은 1020년경에 시작되었으며, 중세 초기 조지아에서 등장하여 바그라트 3세 (978-1014)에 의해 조지아가 정치적으로 통일된 후 주요 양식이 된 십자형 돔 양식을 기반으로 한다. 이 양식의 특징은 돔이 교회의 네 면 모두에 걸쳐 있다는 것이다. 원래는 남쪽, 서쪽, 북쪽에서 출입하는 세 단계의 보다 조화로운 실루엣을 가지고 있었다. 북쪽과 남쪽 출입구는 1830년대에 철거되었다. 현재 대성당 입구는 서쪽에 있다.
교회 구조는 좋은 음향을 보장하도록 설계되었다. 돔과 벽의 큰 창문은 상당한 양의 빛을 제공한다. 평면에서 교회는 짧은 가로축과 긴 세로축을 가진 십자가 형태이다. 동쪽 끝에는 앱스가 있다. 스베티츠호벨리의 돔은 수세기에 걸쳐 여러 번 재건되어 교회를 좋은 상태로 유지했다. 현재 돔은 15세기에 지어졌으며, 17세기에 상부가 재건되었고, 원래 크기를 잃고 높이가 감소했다.
대성당에 사용된 기본 돌은 황갈색 사암이며, 앱스 창 주변에는 붉은 돌이 사용되었다. 돔 드럼에 사용된 녹색 돌은 17세기 것이다.
교회 외관은 풍부하게 장식되어 있다. 11세기부터 변함없이 유지된 아치형 블라인드 아케이드는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 아치는 외관의 해당 부분 높이에 따라 실제로 올라가거나 내려가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인상을 준다.[6] 동쪽 외관의 두 개 높고 깊은 틈새는 주변의 밝은 벽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각 창문은 장식 줄무늬와 스타일화된 공작새 꼬리 모양 장식으로 둘러싸여 있다. 유사한 장식은 동쪽 틈새 상단 부분에서도 발견된다. 동쪽 외관 창문 위에는 교회가 멜키세덱 1세에 의해 지어졌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그 위에는 두 개의 부조, 날개를 펼친 독수리와 그 아래 사자가 지붕 아래 세 개의 더 최근에 만들어진 보조 창 남쪽에 놓여 있다.

교회 서쪽 상단에는 큰 창문이 있다. 이 장식은 예수의 승천을 묘사하며, 그리스도는 왕좌에 앉아 있고 두 천사가 양쪽에 있다. 이 삼각형 모양 장식은 처마 장식의 삼각형과 그 아래 아치와 조화롭게 어울린다. 벽에 있는 원래 조각은 남아 있지 않지만, 여러 번 복원되었으며, 가장 최근에는 19세기에 복원되었다.
3. 2. 외관
현재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의 건축 양식은 바그라트 3세에 의해 조지아가 정치적 통합을 이룬 후인 1020년경의 양식으로, 크로스 돔 양식이 그 기반이다. 이 양식의 특징은 교회의 4 측 모두에 돔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스베티츠코벨리의 돔은 교회의 양호한 상태를 보존하기 위해서 수세기에 걸쳐서 복원되었다.
성당에 사용된 기본 석재는 수평으로 다듬어진 황사석이며, 앱스 창에는 적석이 사용되었다. 큐볼라의 원통부에 사용된 녹암은 17세기의 것이다. 성당 곳곳에 있는 아치형 장식의 굽은 가리개들은 11세기의 것들로 개조되지 않았다.[6]
교회 외관은 풍부하게 장식되어 있다. 11세기부터 변함없이 유지된 아치형 블라인드 아케이드는 전체적으로 볼 수 있다. 아치는 외관의 해당 부분의 높이에 따라 실제로 올라가거나 내려가며, 끊임없이 움직이는 인상을 준다. 동쪽 외관의 두 개의 높고 깊은 틈새는 주변의 밝은 벽과 뚜렷한 대조를 이룬다. 각 창문은 장식 줄무늬와 스타일화된 공작새 꼬리 모양 장식으로 둘러싸여 있다. 유사한 장식은 동쪽 틈새의 상단 부분에서도 발견된다. 동쪽 외관 창문 위에는 교회가 멜키세덱 1세에 의해 지어졌다는 글이 새겨져 있다. 그 위에는 두 개의 부조, 날개를 펼친 독수리와 그 아래 사자가 지붕 아래 세 개의 더 최근에 만들어진 보조 창의 남쪽에 놓여 있다.
교회 서쪽 상단에는 큰 창문이 있다. 그 장식에서는 예수의 승천을 묘사하며, 그리스도는 왕좌에 앉아 있고 두 천사가 양쪽에 있다. 벽면에 있던 원본 조각품은 보존되지 못했지만, 여러 번, 특히 19세기에 대부분 복원되었다.
3. 3. 건축가 아르수키제
북쪽 외벽에 있는 구원 조각상에는 전설이 있다. 조각상의 오른손에는 석공을 상징하는 끌이 들려 있고, 다음과 같은 비문이 새겨져 있다.[1]:''아르수키제의 손,
하느님의 종,
그의 용서를 바라며''
동쪽 비문은 아르수키제가 1029년에 그의 걸작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1]
:''성당은 당신의 불쌍한 종, 아르수키제의 손에서 지어졌습니다.
오 주여, 그의 영혼이 이 곳에서 안식을 누릴 수 있게 해 주소서.''
콘스탄티네 감사쿠르디아의 조지아 소설 "위대한 스승의 손"은 이 전설을 소재로 하지만, 문서적 근거는 없다. 전설에 따르면, 아르수키제의 후원자이자 스승이었던 사제가 그의 성공을 시기하여 왕에게 아르수키제의 오른손을 자르게 했다고 한다. 소설에서는 게오르게 왕이 아르수키제의 연인인 쇼레나를 흠모하여 질투했다고 한다.[1]
3. 4. 내부
현재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의 건축 양식은 1020년경 바그라트 3세에 의해 조지아가 정치적 통합을 이룬 이후에 기본 양식이 된 크로스 돔 양식이다. 이 양식의 특징은 교회의 4 측 모두에 돔이 자리하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 구조는 훌륭한 음향 효과를 내기에 충분하다. 스베티츠코벨리의 돔은 교회의 양호한 상태를 보존하기 위해서 수세기에 걸쳐서 복원되었다.[10]성당에 사용된 기본 석재는 수평으로 다듬어진 황사석이며, 앱스 창에는 적석이 사용되었다. 큐볼라의 원통부에 사용된 녹암은 17세기의 것이다. 성당 곳곳에 있는 아치형 장식의 굽은 가리개들은 11세기의 것으로 개조되지 않았다.[10]
큰 창은 대부분 교회의 서쪽 꼭대기 층에서 나타난다. 그 장식에서는 그리스도께서 앉아 계시고 그 양측에 천사가 있는 모습을 나타낸다. 벽면에 있던 원본 조각품은 보존되지 못했지만, 여러 시간에 걸쳐, 특히 19세기에 대부분 복원되었다.[10]
내부 벽에는 프레스코화들이 그려져 있는데, 그림들 대부분은 원본 상태가 보존되지 못했다. 1830년대 차르 니콜라이 1세가 므츠헤타를 방문하여 프레스코화에 모두 백색 도료를 칠할 예정이었지만, 끝내 한 번도 들르지 않았고, 매우 정성들인 복구 작업 이후 묵시록의 짐승과 황도대 묘사의 13세기 작품들을 포함한 몇 점들만이 복구되었다.[10],[4]
조지아 정교회의 많은 성화상들로 장식된 벽의 작품들은 대부분 원본이 아니다(원본들은 조지아 국립 방물관에 있다.). 그 교회의 석조 미술은 포도가 조각된 특징도 들 수 있다(조지아에 있는 다른 많은 교회들도 그러하다.). 그 특징은 고대 조지아의 와인 생산 전통을 반영한다. 제대에 있는 예수를 그린 거대한 그림은 19세기에 러시아 화가가 그린 작품이다. 대부분의 성화들은 20세기에 들어 그 곳에 놓이게 되었다. 그 중 몇 가지는 조지아 전역에 있는 다른 교회들의 성화과 프레스코화들을 본뜬 것들이다.[10]
대성당 내부 벽은 한때 중세 프레스코화로 완전히 장식되었지만, 그중 많은 수가 남아 있지 않다. 1830년대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1세가 므츠헤타를 방문할 예정이었을 때, 러시아 당국은 대성당을 "더 깔끔하게 보이게" 하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회랑을 철거하고 세월이 흘러도 변치 않는 프레스코화를 하얗게 칠했다. 결국 황제는 오지도 않았다. 오늘날, 많은 주의 깊은 복원 작업을 거쳐, "묵시록의 짐승"을 묘사한 13세기 그림과 황도대의 인물을 포함한 몇몇 프레스코화가 남아 있다.[4]
벽은 많은 정교회 성상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대부분이 원본은 아니다(원본은 조지아 국립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교회의 석조 장식에는 조지아의 많은 교회에서 볼 수 있듯이, 국가의 고대 포도주 양조 전통을 반영하는 조각된 포도도 포함되어 있다. 제단에 있는 예수의 큰 형상은 19세기에 러시아 예술가가 그렸습니다. 이곳의 대부분의 성상은 20세기에 제작되었다. 일부는 조지아 전역의 다른 교회에서 가져온 오래된 성상과 프레스코화를 복사한 것이다.[4]
5세기 교회의 잔해인 동쪽 파사드의 두 개의 황소 머리는 초기 시대의 기독교 도상학에 대한 민속적 영향을 증명한다.[4]
3. 5. 기타 시설
대성당 입구 오른쪽에는 4세기경의 석조 세례반이 있다. 이는 미리안 3세와 나나 여왕의 세례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1] 세례반 바로 뒤에는 북쪽 정면에 있는 아르수키제의 오른손과 경사면 부조의 복제품이 있다.[1]
대성당 안 남쪽에는 작은 석조 교회가 있다. 이곳은 예루살렘의 성묘 예배당을 상징적으로 모방한 것으로, 13세기 말과 14세기 초에 지어졌다.[2] 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겉옷 덕분에 스베티츠호벨리를 예루살렘 교회 다음으로 세계에서 두 번째로 신성한 장소로 만들기 위해 세워졌다.[2] 이 석조 예배당 앞, 통로와 본당 사이의 기둥과 일직선상에 있는 가장 서쪽 구조물은 시도니아의 무덤을 나타낸다.[2] 생명을 주는 원래 기둥의 잔해도 이곳에 있으며, 17세기에 지어졌다.[2] 그 당시 G. Gulzhavarashvili는 미르안 왕과 나나 여왕의 삶의 장면과 최초의 기독교 비잔틴 제국 황제인 콘스탄티누스 1세와 그의 어머니 헬레나의 초상화를 그렸다.[2] 4세기 교회의 기초 흔적이 이곳에서 발견되었다.[2]
17세기에 남쪽 통로의 기둥과 일치하도록 세워진 두 번째 구조물은 카톨리코스 디아사미제(Catholicos Diasamidze)의 왕좌로 사용되었다.[3] 현재의 전통에 따르면 조지아 총대주교의 왕좌는 교회의 중앙에 위치해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이 기능을 수행하지 않는다.[3]


대성당은 18세기에 지어진 탑이 있는 높은 벽으로 둘러싸인 넓은 안뜰 중앙에 위치해 있다.[4] 꼭대기 층은 군사적 목적으로 설계되었으며, 총안이 설치되어 있다.[4] 벽에서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입구는 서쪽에 있다.[4] 벽에는 8개의 탑이 있는데, 6개는 원통형이고 2개는 사각형이다.[4] 안뜰의 남서쪽 부분에는 궁전의 잔해와 11세기 2층 탑이 있다.[4] 탑은 돌로 마감되었으며, 서쪽 정면에는 아치와 두 개의 황소 머리가 있고, 1층에는 볼트가 있는 통로가 있다.[4] 이 탑은 멜키세덱 카톨리코스에 의해 건설되었다는 글이 적혀 있다.[4]
4. 묘소
스베티츠호벨리는 조지아 왕들의 즉위식 장소였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묘소이기도 했다. 제대 앞쪽으로 여섯 묘소만 발견되었지만, 열 명의 왕이 그곳에 묻혔다고 알려졌다. 바크탕 고르가살리 왕의 묘비는 앞에 놓인 작은 등불이었던 요새와 동일시 될 수 있다. 에레클레 2세 왕의 묘비는 그의 검과 방패와 동일시된다. 그의 아들 게오르게 12세는 조지아의 마지막 왕이며, 그의 대리석 묘비는 부친의 묘 바로 옆에 있다. 제대 앞쪽에는 다비트 6세, 게오르게 8세, 루아르삽 1세의 묘비도 있으며, 타마르와, 1684년에 조지아어(아솜타브룰리)와 아랍어의 2개국어 비문이 새겨진 게오르게 11세의 첫 번째 왕비를 포함한 바그라티오니 왕가 사람들의 묘비들 또한 그곳에 있다.
5. 현대의 위협
유네스코는 최근에 스베티츠호벨리 대성당의 전반에 걸쳐 구조적인 물리적 위험성을 제기하는 보고서를 발간했다.[11] 2010년 유네스코 보고서에 따르면 구조적인 문제가 성당의 전반적인 안정성을 위협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7]
참조
[1]
웹사이트
Historical Monuments of Mtskheta
https://whc.unesco.o[...]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2022-02-27
[2]
서적
Sketches of Georgian Church History
[3]
웹사이트
List of World Heritage in Danger
https://whc.unesco.o[...]
2016-06-01
[4]
뉴스
The Treasures of Tbilisi
https://www.nytimes.[...]
New York Times
1990-09-30
[5]
서적
Georgia: A Sovereign Country of the Caucasus
Odyssey Publications
1999
[6]
서적
Памятники Восточной Грузии
Искусство, Москва
1983
[7]
웹사이트
UNESCO Report on the Mission to Historical Monuments of Mtskheta and Bagrati Cathedral and Gelati Monastery, Georgia, June 2-10, 2008
https://whc.unesco.o[...]
2019-12-26
[8]
서적
Sketches of Georgian Church History
[9]
서적
Georgia: A Sovereign Country of the Caucasus
Odyssey Publications
1999
[10]
뉴스
The Treasures of Tbilisi
New York Times
1990-09-30
[11]
보고서
UNESCO Report on the Mission to Historical Monuments of Mtskheta and Bagrati Cathedral and Gelati Monastery, Georgia, June 2-10, 2008
http://whc.unesco.or[...]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