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리 도라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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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마리 도라야스는 다케다 신겐을 섬긴 무장으로, 다케다 노부토라를 추방하는 데 기여했다. 그는 다케다 가문의 가신으로,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1548년 우에다하라 전투에서 전사했다. 그의 후손 중에는 정치인 아마리 아키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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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리 도라야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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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씨명 | 아마리 씨 |
이름 | 아마리 도라야스 |
일본어 표기 | 甘利 虎泰 |
로마자 표기 | Amari Torayasu |
출생 | 메이오 7년 (1498년)? |
사망 | 덴분 17년 2월 14일 (1548년 3월 23일) |
통칭 | 구에몬 |
관위 | 비젠노카미 |
주군 | 다케다 노부토라 → 신겐 |
씨족 | 아마리 씨 |
부모 | 불명 |
형제 | 도라야스、소시 도라타다 |
배우자 | 젠슌 |
자녀 | 노부미쓰、노부타다(마사타다)、노부야스、딸(아나카게 시게 후실)、딸(사카니시사에몬 실)、딸(호시나 마사노리 실)、딸(시즈메 고레자네 실) |
2. 생애
이타가키 노부카타, 오부 도라마사, 하라 도라타네 등과 함께 다케다 노부토라 시대부터 다케다 가문을 섬겼다.[6] 1541년 다케다 하루노부가 노부토라를 추방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으며, 다케다 가문의 슈쿠로로서, 《가이 국지(甲斐国志)》에 따르면 최고 직위인 '료시키(両職)'를 맡았던 후다이 가신(譜代家臣)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노부토라 시대의 이력이나 "료시키"로서의 활동을 보여주는 사료는 적다.
사료상 최초의 기록은 1540년 11월 20일이며, 고야산 세이케이인에서 아내의 어머니 "묘젠젠니"의 공양을 치른 것이다.[4] 1541년 4월 3일에도 아내의 아버지로 보이는 "젠유 우에자"의 공양을 세이케이인에서 치렀다.[4]
《고하쿠사이키(高白斎記)》에 따르면, 1542년 11월 19일 고후에 도라야스의 저택을 신축했다.[7][4] 이듬해 1543년 4월 2일 "묘오지 문서"에 따르면 묘오지[8]에 대해 금제를 내렸다.[4] 같은 해 4월 6일 도라야스는 가미이 세에모리・고마이 고하쿠사이와 함께 시나노 국스와군의 이타가키 노부카타에게 다케다 하루노부가 "스와군지(군대)"로 임명되었음을 알리는 명령을 전했다.[7][4] 스와 씨를 멸망시키고 스와군을 영토로 만든 다케다 씨는 우에하라성[9]을 거점으로 삼았고, 이타가키 노부카타는 우에하라성의 성대로 부임했다.
《고요군칸(甲陽軍鑑)》은 도라야스를 "오기와라 지카노스케[10]에 뒤지지 않는 굳센 무사"라고 평하고, 아시가루 다이쇼인 야마모토 간스케도 도라야스의 훌륭한 지휘에 감탄하고 있다. 《고요군칸》이나 《다케다 삼대 군략》 등의 군담물에 따르면, 1538년 스와씨, 오가사와라씨가 가이에 쳐들어온 니라사키 전투에서 두 번째 전투에서 공을 세웠고, 1542년 하루노부가 가문을 계승한 직후 스와씨・오가사와라씨・시나노 무라카미 씨가 침공해온 세자와 전투에서도 분전했지만, 이 전투들은 확실한 사료에서는 확인되지 않으며, 실존에 의문을 제기하는 설도 있다. 장남으로 여겨지는 노부마스(1518~1542)도 이때 전사했다고 한다. 1542년 9월 17일 고야산 인도인에서 아들 요주로 "코안 젠츄 다이젠테이몬"의 공양을 치렀다.[4]
1544년 3월 2일 야마나시현후에후키시 이사와마치 마츠모토의 다이조쿄지에 전해지는 당우 건립에 관한 도다에 도라야스의 이름이 보인다.[4] 1545년 7월 5일 야마나시시 기타의 구보하치만 신사에 봉납하는 하루노부 친필의 36가선 와카를 받았다.[4]
《쇼잔기( ഷോസാൻകി)》에 따르면, 1547년 8월 시나노 사쿠군의 시가 성[11] 공격에 참가했고, 간토 간레이・우에스기 노리마사가 후즈메의 원군을 파견했기 때문에, 이타가키 노부카타와 함께 별동대를 편성하여 복병으로 오다이하라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이를 격파했다.[7][4]
《고하쿠사이키》, 《오다이기(応大記)》, 《고요군칸》에 따르면, 1548년 2월 14일 다케다 하루노부는 시나노 고우미군에 침공하여 무라카미 요시키요와 우에다하라 전투를 벌였고, 이타가키 노부카타를 전사시키고 기세가 오른 무라카미 세력으로부터 하루노부를 지키다 사이마 카와치・하츠카노 덴에몬 등과 함께 전사했다.[7]
2. 1. 초기 활동
이타가키 노부카타, 오부 도라마사, 하라 도라타네와 함께 다케다 노부토라에게 사관했다. 1541년(덴분 10년) 다케다 하루노부가 노부토라를 추방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한 다케다 가문의 슈쿠로로서, 《가이 국지(甲斐国志)》에 따르면 최고 직위인 '료시키(両職)'를 맡았던 후다이 가신(譜代家臣)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노부토라 시기의 내역이나 행정 책임자로서의 실무가 보이는 사료는 적다. 사료 상에서 처음 보이는 것은 《고하쿠사이키(高白斎記)》의 기사로 1542년(덴분 11년) 11월 고후(甲府)에 저택을 신축했을 때와 다음해인 1543년 (덴분 12년) 스와군 우에하라성 성주대리인 이타가키 노부카타에게 하루노부의 명령을 전하는 사자로 갔을 때, 니시 군(西郡) 다카오지(鷹尾寺, 미나미코마군 마스호 정)에 금제를 내릴 때의 문서가 보일 뿐이다.[6]《고요군칸(甲陽軍鑑)》은 도라야스를 '오기와라 히타치노스케(荻原常陸介, 노부토라의 군사)에게 뒤지지 않는 굳센 무사'라고 평하고 있고, 야마모토 간스케(山本勘助)도 도라야스의 훌륭한 지휘 모습을 감탄하고 있다. 《군칸》이나 《다케다 삼대 군략(武田三代軍略)》 등의 군기물에 의하면, 노부토라 시대인 1538년(덴분 7년)에 스와씨, 오가사와라씨가 가이에 침공했던 니라사키 전투(韮崎の戦い)에서 2번의 전투로 공적을 거두었고, 하루노부가 가독을 이은 직후에 스와 씨, 오가사와라 씨, 무라카미 씨가 침공해 온 1542년의 세자와 전투(瀬沢の戦い)에서도 분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전투는 실재 자체가 의심되고 있다.[7]
1547년(덴분 16년), 사쿠 군 북부의 시가 성 공격에 참가한다.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憲政)가 배후로 원군을 파견하자 도라야스는 이타가키 노부카타와 함께 별동대를 편성하여 영격하여, 오타이하라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어 이들을 물리쳤다.[4]
1548년(덴분 17년) 3월 23일 다케다 하루노부가 지이사가타 군에 침공하여 무라카미 요시키요와 싸운 우에다하라 전투에서, 이타가키 노부카타를 죽이고 기세가 오른 무라카미 군으로부터 하루노부를 지키다가 하지카네 덴에몬 등과 함께 전사했다.
2. 2. 군사적 활약
1541년(덴분 10년) 다케다 하루노부가 노부토라를 추방할 때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이후, 다케다 가문의 슈쿠로로서 군사적 활약을 시작했다.[6] 《가이 국지(甲斐国志)》에 따르면, 최고 직위인 '료시키(両職)'를 맡았던 후다이 가신(譜代家臣)으로 여겨진다.[6]《고요군칸(甲陽軍鑑)》은 도라야스를 '오기와라 히타치노스케(荻原常陸介, 노부토라의 군사)에게 뒤지지 않는 굳센 무사'라고 평하고 있으며, 야마모토 간스케(山本勘助)도 도라야스의 훌륭한 지휘에 감탄했다고 전한다. 《군칸》이나 《다케다 삼대 군략(武田三代軍略)》 등의 군기물에 따르면, 1538년(덴분 7년) 스와씨, 오가사와라씨가 가이에 침공했던 니라사키 전투(韮崎の戦い)에서 공을 세웠고, 1542년 세자와 전투(瀬沢の戦い)에서도 분전했다고 한다. 그러나 이들 전투는 실제로 일어났는지 의심스럽다는 견해도 있다.[7]
1547년(덴분 16년), 사쿠 군 북부의 시가 성 공격에 참가하여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노리마사(上杉憲政)가 보낸 원군을 오타이하라 전투에서 격파하는 큰 공을 세웠다.[7]
1548년(덴분 17년) 우에다하라 전투에서 이타가키 노부카타를 죽이고 사기가 오른 무라카미 요시키요의 군대로부터 다케다 하루노부를 보호하다가 하지카네 덴에몬 등과 함께 전사했다.[7]
2. 3. 우에다하라 전투와 죽음
1547년(덴분 16년), 사쿠 군 북부 시가 성 공격에 참가했다.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노리마사가 배후에 원군을 파견하자, 이타가키 노부카타와 함께 별동대를 편성해 오타이하라 전투에서 이들을 격파했다.[7][4]1548년(덴분 17년) 3월 23일, 다케다 하루노부가 지이사가타 군에 침공하여 무라카미 요시키요와 우에다하라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이타가키 노부카타가 전사하고 기세가 오른 무라카미 군으로부터 하루노부를 지키다 하지카네 덴에몬 등과 함께 전사했다.[7]
3. 후손
호태의 아들로는 노부타다(쇼추)와 노부야스가 있으며, 노부타다가 가독을 상속했다.[4] 노부타다는 에이로쿠 10년(1567년)에 사망했고, 노부타다의 아들인 노부요리가 어렸기 때문에 노부야스나 요네쿠라 단고노카미가 명대가 되어 보좌했다. 한편, 노부야스는 덴쇼 3년(1575년) 5월 21일 나가시노 전투에서 전사했다. 『고란키』에 따르면, 덴쇼 10년(1582년) 3월 오다·도쿠가와 연합군의 다케다령 침공 때 "아마리사에몬노조"가 다케다 가문에서 이반했는데, 이것이 노부요리에 해당한다고도 생각된다. 그 후 노부요리의 행방은 불명이다.
호태의 딸로는, 『계도총요』, 『고요군감』에 따르면 안나카 카게시게의 후실, 사카니시자에몬의 처가 있다.[4] 『호시나 고지레키』에 따르면 호시나 마사노리의 처라고 하지만, 세대 문제로 인해 부정되고 있다.[4]
=== 현대의 후손 ===
아마리 아키라는 자민당 소속 중의원 의원으로, 아소 내각에서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을 역임하였다.
3. 1. 현대의 후손
아마리 아키라는 자민당 소속 중의원 의원으로, 아소 내각에서 내각부 특명담당대신을 역임하였다.4. 평가 및 등장 작품
아마리 도라야스에 대한 평가는 전해지지 않는다.
4. 1. 등장 작품
참조
[1]
웹사이트
武家家伝_甘利氏
http://www2.harimaya[...]
[2]
서적
The Samurai banner of Furin Kazan
https://books.google[...]
[3]
웹사이트
Profile
http://www.amari-aki[...]
Akira Amari Official Site
2014-05-07
[4]
서적
[5]
문서
山梨県韮崎市旭町付近
[6]
문서
名前の「虎」字は信虎から偏諱として与えられたもの。
[7]
서적
[8]
문서
山梨県南巨摩郡富士川町舂米。
[9]
문서
長野県茅野市茅野上原。
[10]
문서
『甲陽軍鑑』において信虎の軍師とされる人物。
[11]
문서
長野県佐久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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