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가사와라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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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가사와라 씨는 가이국에서 기원한 일본의 무가 씨족으로, 시나노를 중심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가마쿠라 막부, 무로마치 막부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고, 센고쿠 시대에는 분열과 갈등을 겪었다. 에도 시대에는 여러 다이묘 가문을 배출하며 번영을 누렸으며, 메이지 시대 이후에는 화족으로 지위를 얻었다. 교토 오가사와라 씨는 궁마술 예법의 중심이 되었으며, 오가사와라 제도의 발견과 관련된 설화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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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가사와라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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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가문명 | 오가사와라 씨 |
로마자 표기 | Ogasawara-shi |
가문 | 무가 |
출신지 | 가이국고마 군 오가사와라 |
근거지 | 시나노국, 부젠국 등, 도쿄부도쿄시 |
창시자 | 오가사와라 나가키요 |
설립 년도 | 13세기 |
해체 년도 | 현재 존속 |
가문 | 세이와 겐지 요시미쓰 류, 가이 겐지 |
부모 가문 | 다케다 씨 |
작위 | 슈고 다이묘 |
분가 | 미요시 씨 미즈카미 씨 도모노 씨 하야시 씨 (조자이) 아시 오가사와라 (무가, 자작) 가라쓰 오가사와라 (무가, 자작) 센조쿠 오가사와라 (무가, 자작) 가쓰야마 오가사와라 (무가, 자작) 미즈카미 씨 (무가) 반노 씨 (무가) 아토베 씨 (무가) 아카자와 씨 (무가) 미무라 씨 (무가) 하야시 씨 (무가) 아사바 씨 (무가) 오이 씨 (무가) 나가사카 씨 (무가) 오쿠라 씨 (무가) |
주요 인물 | |
주요 인물 | 오가사와라 사다무네 오가사와라 나가토키 오가사와라 나가토시 오가사와라 사다요시 오가사와라 사다카게 오가사와라 히데마사 오가사와라 다다자네 |
2. 가문의 기원과 초기 역사
오가사와라 씨의 가문명은 가이국고마군에서 유래했으며, 오가사와라 목장이나 야마오가사와라 장이 있었던 현재의 야마나시현호쿠토시 아케노초 오가사와라와 하라오가사와라 장이 있었던 현재의 야마나시현 미나미알프스시 오가사와라에 저택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현재의 연구에서는 하라오가사와라 장이 오가사와라 씨의 본관이었다고 생각된다.[19]
나가츠네의 자손 중에는 오가사와라 씨가 수호가 된 아와에 정착한 자들이 있어 #아와 오가사와라 씨가 된다. 또한, 아와 오가사와라 씨의 일부는 몽골의 일본 침략의 전공으로 이와미에 영지를 얻어 #이와미 오가사와라 씨가 된다.
2. 1. 가이 겐지 일족
신라 삼랑 요시미쓰를 시조로 하는 가이 겐지의 한 유파이며, 다케다 씨와는 동족이다.[18]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섬긴 나가키요가 가이 국 오가사와라(현 야마나시현미나미알프스시 오가사와라)에 살면서 오가사와라를 칭한 것에서 시작되었다.[18] 조큐의 난 이후 가마쿠라 막부의 아와 수호에 임명되었고, 이후 막부 멸망까지 그 지위를 세습했다.[18]
가마쿠라 말기의 당주 사다무네는 닛타 요시사다를 따라 도막에 참가하여, 겐무 신정 정부에서 무사소에 근무했다.[18] 남북조 시대에는 아시카가 다카우지에 속하여 시나노 수호에 임명되었다.[18] 에이쿄 12년(1440년)에 시나노를 평정한 마사야스의 사후, 일족은 후추(후카시) 오가사와라 가문과 이나(마쓰오) 오가사와라 가문으로 분열되어 대립했다.[18]
덴분 연간의 다케다 신겐의 침공으로 후추 오가사와라 가문의 나가토키는 시나노에서 쫓겨났지만, 그 아들 사다요시 대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고, 그 아들 히데마사가 시모사 고가에 3만 석을 받았다.[18]
오가사와라 씨의 시조인 나가키요는 타키구치 무사로서 고쿠라 천황을 섬긴 카가미 토오미츠의 차남으로 가이국에서 태어났다. 나가키요는 『헤이케 이야기』에 "카가미 코지로 나가키요"라는 이름으로 등장하며, 토오미츠의 영지인 가이국 오가사와라를 상속하여 오가사와라 씨를 칭했다. 난부 씨의 시조인 난부 미츠유키는 나가키요의 동생이다. 헤이케가 단노우라 전투에서 멸망한 겐랴쿠 2년·주에이 4년(1185년), 시나노국을 지행국으로 삼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에 의해 토오미츠는 시나노노카미로 임명되었지만, 나가키요는 이 기반을 이어받아 오가사와라 씨는 시나노에 정착해 갔다. 오가사와라 씨의 가문 문장인 삼계능은 원래 카가미 씨의 가문 문장이다 (현재는 토오미츠와 관련된 사찰만이 삼계능 안에 "왕"자를 넣은 원형을 사용하고 있다).
나가키요의 적남인 나가츠네는 가마쿠라 막부 제2대 쇼군 미나모토노 요리이에의 측근이 되었지만, 요리이에가 유력 고케닌들과 대립하여 히키 요시카즈의 난이 일어나자 요리이에와 함께 실각했다. 그러나, 그 후의 조큐의 난에서의 전공으로 아버지에게 주어진 아와국 수호의 지위를 잇는 것이 허락되었다.
3. 시나노 오가사와라 씨
12세기에 시나노 국에서 시작된 ''후다이'' 오가사와라 씨는[3] 다케다 요시키요와 세이와 겐지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1] 오가사와라 씨는 크게 마쓰오와 후카시 두 계보로 나뉘는데, 마쓰오 계통은 에치젠 오가사와라 씨를 낳았고, 후카시 계통은 분젠 오가사와라 씨에 정착했다.[4]
나가키요가 처음으로 오가사와라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그의 후손들이 시나노 국 전체를 통제했다.[5]
''후다이'' 오가사와라 씨의 분가에는 다음과 같은 가문이 있다.
가문 | 영지 및 전봉 과정 |
---|---|
오가사와라 씨 주류 | 후카시 다이묘 → 1617년 하리마 국 아카시 번 (12만 코쿠) → 1632년부터 1868년까지 분젠 국 고쿠라 번 (15만 코쿠)[7][3] → 1884년 "백작" 작위[8] |
오가사와라 씨 방계 (1) | 메이지 유신까지 분젠 국 치즈카 번 (1만 코쿠)[9] → 메이지 시대 "자작" 작위 |
오가사와라 씨 방계 (2) | 1617년 하리마 국 다쓰노 번 → 1632년 분젠 국 나카쓰 번 → 1716년부터 1868년까지 하리마 국 안시 번 (1만 코쿠)[9][3] → 메이지 시대 "자작" 작위 |
오가사와라 씨 방계 (3) | 1632년 분고 국 키즈키 번 → 1645년 미카와 국 요시다 번 → 1697년 무사시 국 이와쓰키 번 → 1711년 도토미 국 카케가와 번 → 1747년 무쓰 국 타나쿠라 번 → 1817년부터 1868년까지 히젠 국 카라쓰 번 (6만 코쿠)[9][3] → 메이지 시대 "자작" 작위 |
오가사와라 씨 방계 (4) | 다케다 요시키요와 오가사와라 사다무네의 후손[10] → 1590년 무사시 국 혼조 번 → 1608년 시모사 국 코가 번 → 1619년 세키야도 번 → 1637년 미노 국 타카스 번 → 1691년부터 1868년까지 에치젠 국 에치젠-카쓰야마 번 (2만 2천 코쿠)[11][3] → 메이지 시대 "자작" 작위 |
3. 1. 남북조 시대와 무로마치 시대
오가사와라 나가키요에서 오가사와라 나가쓰네에게 소료직이 계승되었지만, 히키 요시카즈의 변에 연좌되어 실각하고 서류인 반노 도키나가에게 넘어갔다. 나가쓰네는 조큐의 난의 공적으로 아와 국의 슈고에 임명되었으나, 도키나가의 손자가 시모츠키 소동에 휘말려 전사하면서 소료는 나가쓰네의 증손인 오가사와라 나가우지에게 돌아갔다.[23]나가우지는 조큐의 난 이후 시나노 국으로 귀국한 나가타다의 손자로 여겨지지만, 그의 아버지 나가마사는 교토의 로쿠하라 탄다이에서 효조슈를 맡았기에 교토가 거점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시나노 국 이가라 쇼 (현재의 나가노현 이이다시)도 호조 씨 멸망 후 오가사와라 씨에게 주어진 것으로 보여, 시나노 오가사와라 씨의 성립은 겐무 정권 시대에 해당할 가능성이 있다.[23] 호지 합전(1247년)에서는 나가쓰네의 장남 오가사와라 시치로 나가무라가 미우라 야스무라 편에 섰다가 패배했다. 겐지 원년(1275년) 5월의 『조 로쿠조 하치만 신궁 용도 지배 사항』에 따르면, 가마쿠라 중 오가사와라 입도 유적이 백 관을 납부하고 있다.[24]
오가사와라 사다무네는 가마쿠라 막부에 반기를 든 아시카가 타카우지를 따라 가마쿠라 전투에 출진, 겐무 원년 (1334년)에 시나노노카미(信濃守) 및 시나노 슈고에 임명되어 지쿠마군에 이카와관을 축조했다.
무로마치 시대에 오가사와라 일족은 막부의 호코슈 등이 되어 활약했다. 남북조 시대에 오가사와라 마사나가 (사다무네의 아들)는 북조에 속했지만, 이나 계곡은 호조 도키유키와 스와씨, 니시나씨 등 남조의 거점이 되었다. 사다무네의 뒤를 이은 오가사와라 나가모토는 어려서 우에스기씨나 시바씨가 시나노 슈고로 임명되었다. 나가모토는 1355년 기쿄가하라 전투에서 남조의 무네요시 친왕을 격파하고 요시노로 몰아내는 등 전공을 세워 시나노 슈고로 임명되었다.
1400년,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섬기던 오가사와라 나가히데 (나가모토의 차남)가 시나노노쿠니 슈고로 임명되었으나, 무라카미씨 등 시나노 국인들이 반발하여 다이토 합전을 일으켰다. 나가히데는 패배하여 교토로 도망쳤고, 이후 시나노 오가사와라 씨의 가독을 이은 나가히데의 동생 오가사와라 마사야스가 1425년에 시나노 슈고직에 임명되며 지위가 안정되었다.
시나노 오가사와라 씨가 여러 차례 슈고직에서 물러난 이유는 시나노가 무로마치 막부와 가마쿠라 부의 경계에 있었고, 자립성이 강한 시나노 국인이 슈고의 통치를 싫어했기 때문이다. 오에이 연간 말기, 무로마치 막부와 가마쿠라 부의 대립이 명확해지자 시나노는 막부 측 최전선이 되었고, 막부는 오가사와라 씨를 슈고로 삼아 가마쿠라 부에 대항하게 했다. 그러나 오가사와라 씨의 슈고직 복귀 후에도 시나노 국인과의 봉건적 주종 관계는 확립되지 못하고 슈고 권력은 약화된 상태였다.[25]
3. 2. 센고쿠 시대의 분열과 갈등
오가사와라 나가키요의 손자인 小笠原秀政|오가사와라 히데마사일본어(1569–1615)는 이에야스를 섬겼다.[1] 1590년, 히데마사는 시모사 국 고가 번 (2만 ''코쿠'')을 받았다.[1] 1601년, 이에야스는 히데마사를 시나노 이다 번 (5만 ''코쿠'')으로 옮겼고, 1613년에는 조상의 고향인 후카시 성 (8만 ''코쿠'')[1], 현재의 마쓰모토 성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6]무로마치 시대에도 오가사와라 일족은 막부의 호코슈 등이 되어 활약했고, 남북조 시대에는 사다무네의 아들 마사나가는 북조에 속했지만 이나 계곡은 호조 도키유키의 거점이었으며, 후에 스와 씨나 니시나 씨 등의 남조의 거점이 되었다. 이에 대해 사다무네의 뒤를 이은 나가모토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대신 우에스기 씨나 시바 씨가 시나노 슈고로 임명되었다. 나가모토는 1355년 4월 기쿄가하라 전투에서 남조의 무네요시 친왕을 격파하고 요시노로 몰아내는 등 전공을 세워 시나노 슈고로 임명되었다.
1400년, 아시카가 요시미쓰를 섬기며 바사라였던 나가히데 (나가모토의 차남)가 시나노노쿠니 슈고로 임명되어 입국하자, 무라카미 씨, 니시나 씨, 스와 씨, 시게노 씨, 타카나시 씨, 이노우에 씨 등 시나노 국인의 대다수가 반발하여 다이토 합전을 일으켰고, 이에 대패한 나가히데는 교토로 도망쳐 슈고직에서 면직되었다. 시나노 슈고직은 시바 씨를 거쳐 무로마치 막부의 료코쿠(직접 통치)가 되었지만, 나가히데의 동생인 마사야스가 1425년에 시나노 슈고직에 임명된 이후 시나노 오가사와라 씨의 슈고직 지위가 안정되었다.
마쓰오 오가사와라 씨를 추방함으로써, 후추 오가사와라 씨의 나가무네가 오가사와라 일족을 통일하고, 시나노 수호로서 안정된 지위를 획득한다. 오랫동안 괴롭혀 왔던 국중과의 대립도 스와 씨와 화해하고, 기타시나노의 무라카미 요시키요와 미나미시나노의 후지사와 요리치카에게 딸을 시집보내 동맹을 맺는 데 성공한다. 그러나, 1542년에는 병사하여, 장남인 나가토키가 뒤를 잇게 된다.
나가토키 시대에 들어서자, 가이 국의 다케다 하루노부 (신겐)가 시나노를 침공했고, 나가토키는 무라카미 요시키요 등과 연계하여 저항했지만, 1550년에는 본거지인 하야시 성이 함락되면서 시나노에서 축출된다 (『고하쿠사이키』).
이 무렵 중앙에서는 제13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테루를 옹립하는 미요시 나가요시가 세력을 가졌는데, 미요시 씨는 오가사와라 일족을 칭하며 나가토키를 보호했고, 나가토키와 셋째 아들 사다요시는 미요시 씨나 교토 오가사와라 씨 등 동족 간의 연락 거점으로 삼기 위해 교토에 머물며 재경 봉공을 한다. 1561년에는 우에스기 겐신에게 나가토키의 귀국 지원이 명령되었지만, 가와나카지마 전투는 1561년을 기점으로 수습되었고, 나가토키의 귀국은 실현되지 않았다.
그 후에는 쇼군 요시테루의 몰락과 오타테의 난으로 인해 나가토키는 아이즈로 도망친다. 1582년, 덴쇼 임오의 난에서는 나가토키의 동생인 도세쓰사이가 에치고 우에스기 씨의 지원을 받아, 오가사와라 구신들의 도움을 받아 기소 요시마사로부터 후카시 성(마쓰모토 성)을 탈환한다. 도세쓰사이는 우에스기 씨의 괴뢰였다고 하며, 나가토키의 셋째 아들 사다요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고, 오가사와라 구신들의 지지를 받아 후카시 성을 탈환한다.
1590년에는 사다요시의 장남 히데마사가 시모사고가 (현재의 이바라키현고가시) 3만 석을 하사받았고,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는 동군에 속했으며, 1601년에는 시나노 국 이이다 (현재의 나가노현이이다시) 5만 석으로 가증된 후 전봉된다.
3. 3. 에도 시대의 번영
시나노 국에서 시작된 ''후다이'' 오가사와라 씨는 12세기에 다케다 요시키요와 세이와 겐지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3][1] 오가사와라 씨는 크게 마쓰오와 후카시의 두 계보로 나뉘는데, 마쓰오 계통은 에치젠 오가사와라 씨를 낳았고, 후카시 계통은 분젠 오가사와라 씨에 정착했다.[4]요시키요의 증손자인 나가키요가 처음으로 오가사와라라는 이름을 사용했고, 그의 후손들이 시나노 국 전체를 통제했다.[5]
나가키요의 손자인 小笠原秀政|오가사와라 히데마사일본어(1569–1615)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다. 1590년, 히데마사는 시모사 국의 코가 번 (2만 ''코쿠'')을 받았다. 1601년, 이에야스는 히데마사를 시나노의 이다 번 (5만 ''코쿠'')으로 옮겼고, 1613년에는 조상의 고향인 후카시 성 (8만 ''코쿠'')[1], 현재의 마쓰모토 성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6]
''후다이'' 오가사와라 씨의 분가는 다음과 같다.
- 오가사와라 씨의 주류는 처음부터 후카시의 ''다이묘''였고, 1617년에는 ''다이묘''가 하리마 국의 아카시 번 (12만 ''코쿠'')으로 옮겨졌다. 1632년부터 1868년까지 이 오가사와라 씨의 후손들은 분젠 국의 고쿠라 번 (15만 ''코쿠'')[7]의 ''다이묘''였다.[3] 이 가문의 수장은 1884년에 "백작"으로 귀족 작위를 받았다.[8]
- 오가사와라 씨의 방계는 메이지 유신까지 분젠 국의 치즈카 번 (1만 ''코쿠'')[9]의 ''다이묘''였다. 이 가문의 수장은 메이지 시대에 "자작"으로 귀족 작위를 받았다.
- 오가사와라 씨의 방계는 1617년 하리마 국의 다쓰노 번의 ''다이묘''였고, 1632년에는 분젠 국의 나카쓰 번으로 옮겨졌다. 1716년부터 1868년까지 이 오가사와라 씨의 후손들은 하리마 국의 안시 번 (1만 ''코쿠'')[9]의 ''다이묘''였다.[3] 이 가문의 수장은 메이지 시대에 "자작"으로 귀족 작위를 받았다.
- 오가사와라 씨의 방계는 1632년 분고 국의 키즈키 번의 ''다이묘''였고, 1645년에는 미카와 국의 요시다 번, 1697년에는 무사시 국의 이와쓰키 번, 1711년에는 도토미 국의 카케가와 번, 1747년에는 무쓰 국의 타나쿠라 번의 ''다이묘''였다. 마지막으로, 1817년부터 1868년까지 이 오가사와라 씨의 후손들은 히젠 국의 카라쓰 번 (6만 ''코쿠'')[9]의 ''다이묘''였다.[3] 이 가문의 수장은 메이지 시대에 "자작"으로 귀족 작위를 받았다.
- 오가사와라 씨의 방계는 다케다 요시키요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며, 또한 14세기에 가마쿠라에서 호조 씨를 전복하는 데 닛타 요시사다에 합류했던 오가사와라 사다무네의 후손이라고 주장한다. 이 사다무네는 아시카가 타카우지 휘하의 장군이었다.[10] 이 오가사와라 씨는 1590년 무사시 국의 혼조 번에, 1608년에는 시모사 국의 코가 번, 1619년에는 시모사 국의 세키야도 번, 1637년에는 미노 국의 타카스 번에 정착했다. 1691년부터 1868년까지 이 오가사와라 씨는 에치젠 국의 에치젠-카쓰야마 번 (2만 2천 ''코쿠'')[11]의 ''다이묘''였다.[3] 이 가문의 수장은 메이지 시대에 "자작"으로 귀족 작위를 받았다.
에도 시대에는 후추 오가사와라 씨에서 4 가문이 다이묘가 되었다(모두 후다이 다이묘). 후추 오가사와라 씨에서는 오가사와라 히데마사가 마쓰다이라 노부야스의 딸 도쿠히메와 결혼하여 유력한 후다이 다이묘가 되었다. 히데마사는 시모후사국 후루카와에서 시나노국 이이다를 거쳐 게이초 18년(1613년)에는 부조의 연고지인 시나노국 마쓰모토 (현재의 나가노현마쓰모토시) 8만 석으로 전봉되었다. 히데마사와 장남 타다나가는 게이초 20년(1615년)의 오사카 여름 전투에서 전사했고, 타다나가의 장남 나가쓰구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히데마사의 차남 타다자네가 가독을 상속했다. 타다자네는 겐나 3년(1617년)에 하리마국아카시 (현재의 효고현아카시시) 10만 석으로 전봉되었다.
간에이 9년(1632년)에 부젠국고쿠라 (현재의 후쿠오카현기타큐슈시) 15만 석으로 전봉되었다. 동시에 히데마사의 삼남 타다토모에게는 분고국기쓰키 (현재의 오이타현기쓰키시) 4만 석(호소카와 씨가 부젠국 주였을 때의 고쿠라번 비지)이, 타다나가의 장남 나가쓰구에게는 부젠의 남쪽 절반에 해당하는 부젠국 나카쓰 (현재의 오이타현나카쓰시) 8만 석이 주어졌으며, 게다가 히데마사의 사남으로 노미 마쓰다이라 가문을 잇고 있던 마쓰다이라 시게나오가 부젠국 류오 (현재의 오이타현우사시) 3만 7천 석으로 전봉되어 일족으로 부젠 주변을 굳혔다. 또한 간분 11년(1671년)에는 타다자네의 사남 마사카타가 형 타다오로부터 1만 석을 분여받아 고쿠라 신덴번(센조쿠번)을 입번했다.
타다자네 계는 막말까지 고쿠라번주로서 지속, 타다토모 계는 전봉을 거듭하여 최종적으로는 히젠국가라쓰 (현재의 사가현가라쓰시) 6만 석에, 나가쓰구 계는 악정과 무후로 인한 개역으로 최종적으로는 하리마국 안시 (현재의 효고현 히메지시) 1만 석으로 옮겨졌다. 나가쓰구 계의 역대 당주는 오가사와라 히데마사의 연고인 시나노노카미를 칭했다.
가문 | 전봉 과정 및 영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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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데마사 계(후추 오가사와라) | |
타다자네 계 | 시나노 마쓰모토번 (타다자네) → 하리마 아카시번 (타다자네) → 부젠 고쿠라번 (타다자네, 타다오, 타다모토, 타다후사, 타다나에, 타다카타, 타다아키라, 타다요시, 타다모토, 타다치카) |
나가쓰구 계 | 하리마 다쓰노번 (나가쓰구) → 부젠 나카쓰번 (나가쓰구, 나가카쓰, 나가타네, 나가마루, 나가야스) → 하리마 안시번 (나가오키, 나가미치, 나가타메, 나가사다, 나가타케, 사다모토, 사다후) |
마사카타 (타다자네 사남) 계 | 부젠 고쿠라 신덴번 (센조쿠번) (마사카타, 사다미치, 사다아키, 사다아쓰, 사다테쓰, 사다겐, 사다요시, 사다야스, 사다마사) |
타다토모 계 | 분고 기쓰키번 (타다토모) → 미카와 요시다번 (타다토모, 나가노리, 나가스케, 나가시게) → 무사시 이와쓰키번 (나가시게, 나가히로) → 도토미 가케가와번 (나가히로, 나가야스, 나가야스) → 리쿠 다나쿠라번 (나가야스, 나가타카, 나가마사) → 히젠 가라쓰번 (나가마사, 나가야스, 나가카이, 나가카즈, 나가쿠니) |
노부유키 계(마쓰오 오가사와라) | 무사시 혼조번 (노부유키)→시모사 고가번 (노부유키, 마사노부)→시모사 세키야도번 (마사노부, 사다노부)→미노 다카스번 (사다노부)→에치젠 가쓰야마번 (사다노부, 노부타쓰, 노부나리, 노부타네, 노부후사, 나가노리, 나가타카, 나가모리) |
4. 아와 오가사와라 씨
아와 오가사와라 씨는 오가사와라 나가쓰네의 차남 나가후사를 시조로 한다. 1221년 조큐의 난 이후 아와 국 수호직을 두고 형 나가타다와 갈등이 있었으나, 결국 나가후사가 수호직을 맡게 되었다. 나가후사는 1267년 다이라 모리타카를 토벌한 공으로 미마 군과 미요시 군에 넓은 영지를 하사받고 이와쿠라 성을 거점으로 삼았다.
남북조 시대에 남조에 속했던 아와 오가사와라 씨는 무로마치 시대에 이르러 국인화되었고, 아와 수호 호소카와 씨를 섬겼다. 미요시 씨, 아타기 씨, 이치노미야 씨 (오가사와라 나리요시), 오니시 씨 (오니시 카쿠요), 아카자와 씨 (아카자와 소덴) 등이 대표적인 분가이다. 그 외에도 시치조 씨, 고시 씨 등이 아와 오가사와라 씨의 지류로 알려져 있다.
4. 1. 아와 국으로의 이주
오가사와라 씨의 방계 가문인 다이묘 미요시 씨는 세이와 겐지 미나모토 씨의 후손이었다.[12] 14세기 초, 오가사와라 나가후사는 시코쿠에 정착했고, 그의 8대손 중 한 명인 요시나가는 아와 국 (도쿠시마현 미요시)에 정착했다.오가사와라 요시나가는 미요시 요시나가라는 이름을 사용했으며, 당시 섬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호소카와 씨의 가신이 되었다. 16세기 말의 기록에는 미요시 조케이의 조카이자 양자인 미요시 요시쓰구에 대한 언급이 있다. 오가사와라 씨의 미요시 가문 잔존 세력은 조소카베 씨가 시코쿠 섬 전체를 점차 장악하면서 멸망했을 것으로 보인다.[12]
아와 오가사와라 씨의 시조는 오가사와라 나가쓰네의 차남인 나가후사이다. 조큐 3년(1221년) 조큐의 난 이후, 형 나가타다가 아와 국 수호로 임명되었지만, 나가타다가 본국인 시나노 국으로 귀국을 희망했기 때문에 나가후사가 대신 수호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의 연구에서는 실제로는 나가후사가 장남이고 나가타다는 삼남이었다는 설이 있으며, 나가타다의 계통은 교토를 활동 중심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23]
분에이 4년(1267년) 막부의 명령을 받들어 미요시 군군령・다이라 모리타카를 토벌하고, 포상으로 미마 군과 미요시 군에 26,000정(町)여의 소령을 받아 이와쿠라 성을 거점으로 삼았다.
아와 오가사와라 씨는 남북조 시대에는 남조에 속했다고 하며, 그 자손의 대부분은 무로마치 시대에 국인화하여 아와 수호를 맡은 호소카와 씨를 섬겼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미요시 씨, 아타기 씨, 이치노미야 씨 (오가사와라 나리요시), 오니시 씨 (오니시 카쿠요), 아카자와 씨 (아카자와 소덴) 등이 있다 (단, 각각의 출자에는 여러 설이 있다).

4. 2. 미요시 씨의 등장
세이와 겐지 미나모토 씨의 후손인 미요시 씨는 오가사와라 나가후사가 시코쿠에 정착한 후, 그의 8대손 요시나가가 아와 국 (도쿠시마현 미요시)에 정착하면서 시작되었다.[12] 오가사와라 요시나가는 미요시 요시나가로 이름을 바꾸고 당시 섬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이었던 호소카와 씨의 가신이 되었다. 16세기 말 기록에는 미요시 조케이의 조카이자 양자인 미요시 요시쓰구가 언급되어 있다. 오가사와라 씨의 미요시 가문 잔존 세력은 조소카베 씨가 시코쿠 섬 전체를 점차 장악하면서 멸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12]아와 오가사와라 씨의 시조는 오가사와라 나가쓰네의 차남인 나가후사이다. 1221년 조큐의 난 이후, 형 나가타다가 아와 국 수호로 임명되었으나, 나가타다가 본국인 시나노 국으로 귀국을 원하여 대신 나가후사가 수호가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오늘날 연구에 따르면 실제로는 나가후사가 장남이고 나가타다는 삼남이었다는 설이 있으며, 나가타다의 계통은 교토를 활동 중심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높다.[23]
1267년 막부 명령으로 미요시 군군령・다이라 모리타카를 토벌하고, 포상으로 미마 군과 미요시 군에 26000ha의 소령을 받아 이와쿠라 성을 거점으로 삼았다.
아와 오가사와라 씨는 남북조 시대에 남조에 속했으며, 그 자손 대부분은 무로마치 시대에 국인화하여 아와 수호인 호소카와 씨를 섬겼다고 한다. 대표적인 예로 미요시 씨, 아타기 씨, 이치노미야 씨 (오가사와라 나리요시), 오니시 씨 (오니시 카쿠요), 아카자와 씨 (아카자와 소덴) 등이 있다(단, 각각의 출자에는 여러 설이 있다). 아와 오가사와라 씨 자손인 미요시 씨 등에 대해서는 각각 기사를 참조하라.
그 외 아와 오가사와라 씨 지류에는 시치조 씨, 고시 씨 등이 있다.
5. 이와미 오가사와라 씨
오가사와라 나가후사의 아들 나가치카는 홍안의 역에서 공을 세워 이와미국 오치군 무라노고를 받고 이주하였다. 나가치카는 지역 유력 국인인 마스다씨 당주 카네토키의 딸과 결혼하여, 홍안의 역 이후 불안정한 이와미국 주변 해안을 경호했다. 남북조 시대 당주 오가사와라 나가타네는 무가 측에 가담하여 활동했고, 카와모토 온센성을 거점으로 삼았다. 센고쿠 시대에 이와미 은광 지배를 둘러싸고 오우치씨와 아마고씨가 대립하는 가운데, 당주 오가사와라 나가오는 양측 사이를 오가다가 결국 오우치씨의 뒤를 이은 모리씨를 섬겼다.
덴쇼 20년 (1592년) 이즈모국칸몬군 칸자이로 영지가 바뀌면서 이와미국을 떠났다. 게이초 5년 (1600년) 세키가하라 전투 이후 모리씨가 보쵸로 이봉될 때 잠시 모리씨를 떠났지만, 이후 다시 귀환하여 이와미 오가사와라씨는 조슈 번사로서 메이지 시대를 맞이했다.[1]
6. 교토 오가사와라 씨
신라 삼랑 요시미쓰를 시조로 하는 가이 겐지의 한 유파인 오가사와라씨는 다케다 씨와 동족이다.[18]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를 섬긴 나가키요가 가이 국 오가사와라(현 야마나시현미나미알프스시 오가사와라)에 살면서 오가사와라를 칭한 것에서 시작되었다.[18]
교토 오가사와라 씨는 사다무네의 동생인 사다나가의 계통이다. 사다나가는 닛타 요시사다와 싸워 전사했고, 아들 다카나가는 교토에서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궁마 사범이었다고 전해지나, 사실 여부는 불확실하다. 이후 교토 오가사와라 씨는 막부의 호공중으로 섬겼다. 사다나가의 계통은 형 사다무네의 계통(시나노 오가사와라 씨)과 구별된다.
6. 1. 무로마치 막부의 중신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궁마 사범이었던 다카나가 이후, 오가사와라 씨는 막부에서 호공중(奉公衆)으로 섬겼다. 교토에 살았던 다카나가의 계통은 형인 사다무네의 계통(시나노 오가사와라 씨)과 구별하여 교토 오가사와라 씨라고 불린다.[20]교토 오가사와라 씨 일족은 장군 측근의 유력 무장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으며, 막부 초창기부터 마토 하지메 등의 막부 의례에 참가했다. 6대 쇼군인 아시카가 요시노리 시대에는 쇼군가의 "궁마 사범"으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여, 이후 마토 하지메, 우마 하지메 등 막부의 공식 의례를 주관하며, 당시 무가의 유직고실의 중심적 존재가 되었다. 호공중이라고는 해도 일반 반중(番衆)과는 구별되어, 서찰례에서는 "오가사와라 님의 일은, 궁마 사범이므로, 어떻게든 감상하고 경외하여 삼가 말씀드립니다."라고 했다(『다이칸 조코 서찰초』).[20]
쇼군가의 궁마 사범은 시나노 오가사와라 씨가 맡았다고 하거나, 사다무네가 고다이고 천황의 사범, 다카나가가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사범을 맡았다는 등의 설이 유포되었지만, 이는 후세의 부회(附會)에 지나지 않고 사료적 뒷받침이 부족하다. 오가사와라 씨가 쇼군가 궁마 사범이라는 지위를 얻는 것은 아시카가 요시노리 시대에 이르러서이며, 시나노 오가사와라 씨가 아니라 교토 오가사와라 씨였다. 시나노 오가사와라 씨가 무가 고실에 관여하는 것은 오가사와라 나가토키, 사다요시 부자의 시대에 이르러서이다.[20] 다만, 시나노 오가사와라 씨도 궁마 사범은 아니었지만, 승마에 통달한 것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20]
오가사와라 마사키요는 같은 막신이었던 이세 모리토키(호조 소운)에게 딸을 시집보냈으며, 그녀의 소생으로 여겨지는 호조 우지쓰나 이후의 고호조 씨 역대 당주는 교토 오가사와라 씨의 혈통을 이었다.
교토 오가사와라 씨의 일족 중, 적류는 막신으로 이어졌지만, 오가사와라 쇼쿠모리가 1565년 에이로쿠의 변에서 장군 아시카가 요시테루와 함께 죽자, 쇼쿠모리의 아들 히데키요(쇼사이)는 낭인이 되어, 후에 호소카와 씨(후의 구마모토 번주 호소카와 씨)를 섬겼다.[22] 히데키요는 세키가하라 전투 때 호소카와 가라샤의 개갹을 맡아 순사했고, 히데키요의 자손은 에도 시대에는 구마모토 번의 가로를 맡았다. 서류(庶流)인 오가사와라 겐조쿠는 장군 아시카가 요시즈미의 사망 후 막부를 떠나, 인척인 고호조 씨를 의지했다. 겐조쿠의 아들 야스히로는 호조 우지야스의 사위가 되었다. 오다와라 정벌에서 고호조 씨의 적류가 멸망하자, 야스히로의 아들 나가후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 되어, 자손은 하타모토로서 존속하며, 에도 시대의 역대 당주는 봉전조를 칭했다.
하타모토가 된 오가사와라 나가후사의 자손은 녹봉 780석여, 봉전조를 칭한 당주가 많기 때문에 봉전조의 집이라고도 불린다. 나가후사의 증손인 모치히로는 1716년에 장군 도쿠가와 요시무네의 명에 의해 가전의 서적 91부와 미나모토노 요리토모의 유가케(유가케)를 대람에 제공했다. 요시무네가 사례나 이누오이모노 등 궁마의 고식 부흥에 열심이었고 여러 집안의 기록을 조사했기 때문이며, "세상에 드문 서적이므로 영원히 비장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이 있었다고 한다. 후에 요시무네는 측근 신하들을 모치히로의 제자로 하여 사례를 배우게 했다. 모치히로는 궁마시(마토 하지메)의 의식에 시후하는 동시에, 소적, 초록, 도궁, 원물, 백적 등을 상람에 넣는 등 했다.
자손도 비슷한 역할을 맡았고, 막말에는 오가사와라 쇼지 로가 고부쇼에서 궁술 교수를 맡았지만, 이 집안은 유신기에 단절된다. 무로마치 막부 이래 가장 오랫동안 예법을 전하는 가계는 현대에는 이어지지 않고, 봉전조의 집과 함께 도쿠가와 막부의 사범가가 되어 있던 하타모토 오가사와라 헤이베이의 집(아카자와 씨)가, 현대에는 오가사와라 류(궁마술 예법 오가사와라 교장) 종가가 되어 있다.
6. 2. 호소카와 씨, 고호조 씨와의 관계
교토 오가사와라 씨는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을 섬기며 궁마 사범 지위를 확립했고, 무가의 예법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들은 호소카와 씨 및 고호조 씨와도 깊은 관계를 맺었다.오가사와라 마사키요는 막신 이세 모리토키(호조 소운)에게 딸을 시집보냈고, 그녀의 아들로 여겨지는 호조 우지쓰나 이후의 고호조 씨 역대 당주는 교토 오가사와라 씨의 혈통을 이었다.[20]
오가사와라 쇼쿠모리는 1565년 에이로쿠의 변에서 아시카가 요시테루와 함께 죽었고, 아들 오가사와라 히데키요(쇼사이)는 낭인이 되었다가 호소카와 씨(구마모토 번주 호소카와 씨)를 섬겼다.[22] 히데키요는 세키가하라 전투 때 호소카와 가라샤의 개갹을 맡아 순사했고, 자손은 에도 시대에 구마모토 번의 가로를 맡았다.
서류였던 오가사와라 겐조쿠는 아시카가 요시즈미 사망 후 막부를 떠나 인척인 고호조 씨를 의지했다. 겐조쿠의 아들 야스히로는 호조 우지야스의 사위가 되었다. 오다와라 정벌에서 고호조 씨 적류가 멸망하자, 야스히로의 아들 나가후사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가신이 되어 하타모토로 존속했다.
7. 오가사와라 제도와의 관계
오가사와라씨는 오가사와라 제도(보닌 제도)의 발견 및 일본의 영유권 주장과 관련이 있다. 오가사와라 제도는 보닌 제도(Bonin Islands)라고도 불리는데, 이는 무인(ぶにん)도의 변형된 발음이다.[35]
7. 1. 발견 전승과 진위 논란
분로쿠 원년(1592년), 오가사와라 사다요리가 오가사와라 제도를 발견했다는 주장을 펼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해당 영토를 그의 영지로 수여했으나,[16] 이는 거짓으로 드러나 오가사와라는 추방되었다.신슈 마쓰모토 성주 오가사와라 사다요리라는 인물이 임진왜란에서 돌아온 후인 분로쿠 2년(159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서 적절한 섬이 있다면 차지해도 좋다는 증서를 받고 이즈 국 시모다에서 출항하여 오가사와라 제도를 발견했다는 전승이 있다. 이 전승에 따르면, 이에야스가 오가사와라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허락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이를 인정하여 오가사와라 제도라고 명명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사실은 확실한 사료에서 확인되지 않으며, 발견 시기에도 모순이 있고, 오가사와라 사다요리라는 인물 역시 오가사와라 가문의 계보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신빙성이 부족하다.[35][36]
간분 10년(1670년), 규슈에서 에도로 향하던 일본 배가 폭풍으로 항로를 이탈하면서 이 제도를 발견했다.[17] 엔포 3년(1675년), 막부 원정대가 간분 10년의 "발견"에 따라 이 제도를 탐사하고 일본 영토로 선포했다.[17] 분큐 원년(1862년 1월), 간분 10년(1670년)의 제도 "발견"과 엔포 3년(1675년)의 막부 원정대 파견을 근거로, 이 제도가 일본 영토임을 재확인했다.[17]
한편, 오가사와라 제도의 또 다른 이름인 보닌 제도(Bonin Islands)는 무인(ぶにん)도의 변형된 발음으로 알려져 있다.[35]
7. 2. 일본의 영유권 주장
분로쿠 1년(1592년), 오가사와라 사다요리는 오가사와라 제도를 발견했다고 주장하며, 해당 영토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에 의해 그의 영지로 수여되었다.[16] 그러나 이 주장은 나중에 거짓으로 밝혀져 오가사와라는 추방되었다. 신슈 마쓰모토 성주 오가사와라 사다요리라는 인물이 임진왜란에서 귀환한 후인 분로쿠 2년(1593년),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 적절한 섬이 있다면 차지해도 좋다는 증서를 얻어 이즈 국 시모다에서 출항하여 오가사와라 제도를 발견했다는 전승이 있다. 이에야스가 오가사와라라는 이름을 붙이는 것을 허락하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로부터도 안도받아 오가사와라 제도라고 명명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확실한 사료에는 그러한 사실이 확인되지 않고, 발견 시기에도 모순이 있으며, 오가사와라 사다요리라는 인물도 오가사와라 가문의 계보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신빙성이 부족하다.[35][36]간분 10년(1670년), 규슈에서 에도로 향하던 배가 폭풍으로 항로를 이탈하면서 일본이 이 제도를 발견했다.[17]
엔포 3년(1675년), 막부 원정대가 간분 10년에 이루어진 "발견"에 따라 이 제도를 탐사하고 일본 영토로 주장했다.[17]
분큐 1년(1862년 1월), 간분 10년(1670년)의 제도 "발견"과 엔포 3년(1675년)의 막부 원정대 파견에 따라, 이 제도가 일본 영토임을 재확인했다.[17]
덧붙여 이 제도의 다른 이름인 보닌 제도(Bonin Islands)는 무인(ぶにん)도의 변형어이다.[35]
8. 메이지 유신 이후
다케다 신겐의 침공으로 후추 오가사와라 가문의 나가토키는 시나노에서 쫓겨났지만, 그 아들 사다요시 대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섬겼고, 히데마사가 시모사 고가에 3만 석을 받았다.[18] 간에이 9년(1632년) 이후 부젠고쿠라 번의 번주 가문으로 이어졌으며, 안지번, 센조쿠번, 가라쓰번 3개의 분가 다이묘가 있었다.[18] 메이지 유신 이후 구 고쿠라 번주 가문의 종가는 백작 가문이 되었고, 분가 3가는 자작 가문에 올랐다.
이나 오가사와라 가문은 다케다 신겐을 섬긴 후 오다 노부나가와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따랐으며, 에도 시대에는 에치젠가쓰야마번 번주 가문으로 이어졌다.[18] 메이지 유신 이후에는 자작 가문에 올랐다.
8. 1. 화족으로서의 지위
가쓰야마 번의 마지막 번주였던 오가사와라 나가모리는 1869년 판적봉환으로 가쓰야마 지사에 임명됨과 동시에 화족이 되었으나, 1871년 6월에 지사직에서 물러났다. 그의 아들 나가야스가 마지막 번 지사가 되었고, 같은 해 7월 14일 폐번치현을 맞이했다[35]。1884년 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면서 나가야스는 구 소번 지사[36]로 자작에 봉해졌다。나가야스의 장남인 2대 자작 오가사와라 게이이치는 귀족원의 자작 의원에 당선되어 역임했다。가쓰야마 오가사와라 자작가의 저택은 쇼와 시대 전기에 도쿄시 우시고메구 이케부쿠로정에 있었으며, 종교는 린자이종이었다。
고쿠라 번의 마지막 번주였던 오가사와라 타다자네는 1868년 보신 전쟁에서 관군을 따라 동북 지방을 전전했고, 그 공으로 1869년에 상전록 5000석을 받았다。같은 해 번 이름을 도요쓰 번으로 바꾸고 판적봉환으로 도요쓰 번 지사에 임명됨과 동시에 화족이 되었으며, 1871년 7월 14일 폐번치현까지 번 지사를 역임했다。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된 후, 나가오 대의 1884년 7월 8일에 구 중번 지사로서 백작이 되었다。
2대 백작 나가모토는 식부관을 거쳐 귀족원 백작 의원에 당선되어 역임했고, 원내 회파 연구회의 영수로 활동했다. 그동안 육군성 참사관, 국세원 총재, 행정심의회 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실업가로도 활약하며 도쿄부의 다액 납세자였다。4대 백작이었던 오가사와라 타다무네는 전후 일본국 헌법에 의해 작위를 상실한 후 1980년에 도쿄에서 오가사와라 종령가 예법 연구소를 설립하여, "반 봉건적 도덕"으로서 전후 교육에서 배제되어 소멸 위기에 처해 있던 오가사와라류를 남기기 위해 노력했다[34]。오가사와라 백작가의 저택은 쇼와 시대 전기 도쿄시 우시고메구 이치가야 가와다초에 있었으며, 종교는 불교였다。
마지막 안지 번주였던 오가사와라 사다치카는 1869년 판적봉환으로 안지 번 지사에 임명됨과 동시에 화족이 되었고, 1871년 7월 14일 폐번치현까지 번 지사를 맡았다。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면서 1884년 7월 8일에 사다치카는 구 소번 지사로 자작이 되었다。2대 자작 오가사와라 나가히로는 본가의 오가사와라 나가모토 백작의 동생으로 사다치카의 양자로 들어가 자작위를 계승했다. 도쿄 시립 제일 중학교와 호세이 대학 상업학교의 강사를 맡았다。안지 오가사와라 자작가의 저택은 쇼와 시대 전기에는 도쿄시 우시고메구 이치가야 가와다초에 있었으며, 종교는 불교였다。
마지막 가라쓰번 번주였던 오가사와라 나가쿠니의 양자 나가유키는 막말에 막부 로주가 되어 구 막부 세력과 함께 정부에 반역하여 고료카쿠까지 싸웠기 때문에 죄를 물어 관위가 박탈되었지만, 나가쿠니 자신은 관군에 속했기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았다. 1869년 판적봉환으로 가라쓰번 지사로 임명됨과 동시에 화족에 포함되었고, 1871년 7월 14일 폐번치현까지 번 지사를 역임했다。1873년에 나가쿠니가 은거한 후에는 나가유키의 장남 나가나리가 가독을 상속했다。화족령 시행으로 화족이 오작제가 되자, 1884년 7월 8일에 나가나리가 구 소번 지사로 자작에 봉해졌다。나가나리는 해군 중장까지 승진한 해군 군인이었다。가라쓰 오가사와라 자작가의 저택은 쇼와 시대 전기에는 도쿄시 세타가야구 다이다에 있었으며, 종지는 닛렌종이었다。
8. 2. 근현대 오가사와라 씨
가쓰야마 번의 마지막 번주 오가사와라 나가모리는 1869년(메이지 2년) 판적봉환으로 가쓰야마 지사에 임명되어 화족이 되었으나, 1871년(메이지 4년) 6월에 사임하였다. 아들인 나가야스가 마지막 번 지사를 맡아 같은 해 7월 14일 폐번치현을 맞이했다. 1884년(메이지 17년) 7월 8일 나가야스는 구 소번 지사로서 자작에 봉해졌다.나가야스의 장남인 2대 자작 오가사와라 게이이치는 귀족원 자작 의원을 역임했다. 가쓰야마 오가사와라 자작가의 저택은 쇼와 시대 전기에 도쿄시 우시고메구 이케부쿠로정에 있었으며, 종교는 린자이종이었다.
고쿠라 번의 마지막 번주였던 오가사와라 타다자네는 1868년(메이지 원년) 보신 전쟁에서 관군을 따라 동북 지방을 전전한 공으로 1869년(메이지 2년) 상전록 5000석을 받았다. 메이지 2년에 번 이름을 도요쓰 번으로 바꾸고 판적봉환으로 도요쓰 번 지사에 임명되어 화족이 되었으며, 1871년(메이지 4년) 7월 14일 폐번치현까지 번 지사를 역임했다.
화족령 시행 후, 나가오 대의 1884년(메이지 17년) 7월 8일에 구 중번 지사로서 백작에 봉해졌다.
2대 백작 나가모토는 연구회의 영수로 활동했다. 그는 육군성 참사관, 국세원 총재, 행정심의회 위원 등을 역임했으며, 실업가로도 활약하며 도쿄부의 다액 납세자였다.
4대 백작이었던 오가사와라 타다무네는 쇼와 55년(1980년)에 도쿄에서 오가사와라 종령가 예법 연구소를 설립하여, 오가사와라류를 남기기 위해 노력했다.[34]
오가사와라 백작가의 저택은 쇼와 시대 전기에 도쿄시 우시고메구 이치가와 가와다초에 있었으며, 종교는 불교였다.
마지막 안지 번주였던 오가사와라 사다치카는 1869년(메이지 2년) 판적봉환으로 안지 번 지사에 임명되어 화족이 되었고, 1871년(메이지 4년) 7월 14일 폐번치현까지 번 지사를 맡았다.
1884년(메이지 17년) 7월 8일에 사다치카는 구 소번 지사로서 자작에 봉해졌다.
2대 자작 오가사와라 나가히로는 본가의 오가사와라 나가모토 백작의 동생으로 사다치카의 양자가 되어 자작위를 계승했다. 그는 도쿄 시립 제일 중학교와 호세이 대학 상업학교의 강사를 맡았다.
안지 오가사와라 자작가의 저택은 쇼와 시대 전기에 도쿄시 우시고메구 이치가야 가와다초에 있었으며, 종교는 불교였다.
마지막 가라쓰번 번주였던 오가사와라 나가쿠니의 양자 나가유키는 막말에 막부 로주가 되어 구 막부 세력과 함께 정부에 반역하여 고료카쿠까지 싸웠기 때문에 죄를 물어 관위가 박탈되었지만, 나가쿠니 자신은 관군에 속했기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았고, 1869년(메이지 2년) 판적봉환으로 가라쓰번 지사로 임명되어 화족이 되었으며, 1871년(메이지 4년) 7월 14일 폐번치현까지 번 지사를 역임했다.
1873년(메이지 6년)에 나가쿠니가 은거한 후에는 나가유키의 장남 나가나리가 가독을 상속했다. 화족령 시행 후, 1884년(메이지 17년) 7월 8일에 나가나리는 구 소번 지사로서 자작에 봉해졌다. 나가나리는 해군 중장까지 승진한 해군 군인이었다.
가라쓰 오가사와라 자작가의 저택은 쇼와 시대 전기에 도쿄시 세타가야구 다이다에 있었으며, 종지는 닛렌종이었다.
9. 오가사와라 류 예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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