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스카키요미하라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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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스카키요미하라령은 덴무 천황이 시작하고 지토 천황과 구사카베 황자가 계승하여 689년에 반포된 일본의 율령으로, 율령제 도입을 위한 중요한 법적 토대를 마련했다. 덴지 천황의 오미령이 체계적인 법전이 아니었던 것과 달리, 아스카키요미하라령은 천황 호칭, 호적 제도, 지방 제도, 반전수수법 등 율령제의 골격을 제도화했다. 그러나 율은 제정되지 못하고 당률이 적용되었으며, 내용상 미비한 점이 있어 이후 다이호 율령으로 율령 편찬 사업이 완성되었다. 아스카키요미하라령은 일본 고대 율령제의 초석을 다지고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 확립에 기여했다는 의의를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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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호 율령은 701년 일본에서 당나라 율령을 토대로 제정된 법전으로, 율은 당나라 것을 따르고 령은 일본 실정에 맞게 수정되었으며, 천황 중심의 중앙 집권 체제 확립과 행정 효율성 및 투명성 증진, 그리고 통일 국가 건설의 기틀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지만, 원문은 전해지지 않고 양로령을 바탕으로 복원 중이다. - 일본의 율령 - 요로 율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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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무 천황은 덴지 천황의 뒤를 이어 임신의 난으로 즉위한 일본 제40대 천황(재위: 672년~686년)으로, 중앙 집권적 통치 강화, 율령 제정 추진, 신도와 불교 진흥, 일본 고유 문화 발굴 및 정비, "천황" 칭호와 "일본" 국호 최초 사용 등의 업적을 남겼다. - 지토 천황 - 야쿠시지
야쿠시지는 아스카 시대에 덴무 천황이 창건을 시작하여 헤이조쿄로 이전된 후 재건된 사찰로, 국보인 약사여래삼존상 등을 보유하며 다양한 문화재와 건축 양식을 보여주고 봉납 콘서트가 열리는 문화 공간으로 활용된다.
| 아스카키요미하라령 | |
|---|---|
| 개요 | |
| 이름 | 아스카 기요미하라 령 |
| 로마자 표기 | Asuka Kiyomihara-ryō |
| 종류 | 법전 |
| 제정 | 689년경 |
| 시행 | 689년 |
| 배경 | |
| 시대적 배경 | 7세기 후반의 일본 |
| 주요 목표 | 중앙 집권 체제 강화 |
| 영향 | 이후의 다이호 율령 체제의 기초 마련 |
| 내용 | |
| 주요 내용 | 관위 제도 행정 조직 세금 제도 |
| 특징 | 기존의 씨족 제도를 약화시키고, 국가 중심의 통치 체제 확립 백성들에게 균등한 토지를 분배하는 반전수수법 시행 |
| 역사적 의의 | |
| 평가 | 일본 최초의 본격적인 율령 체제 고대 일본 국가 발전의 중요한 계기 |
| 영향 | 이후의 율령 정치에 큰 영향 일본 사회의 중앙 집권화 촉진 |
| 기타 | |
| 참고 문헌 | 윌리엄 웨인 패리스, "Population, Disease, and Land in Early Japan, 645-900" |
2. 아스카 기요미하라령 제정 이전의 상황
덴지 천황이 668년에 제정한 것으로 여겨지는 오미령이 아스카키요미하라령에 앞서 제정된 율령법이다. 오미령의 존재에 대해서는 이설(異說)이 존재하나, 율령제를 지향하는 단행 법령들의 총칭이며, 체계적인 법전은 아니었다는 견해가 유력하다.[6]
668년에 덴지 천황이 제정한 것으로 여겨지는 오미령은 율령제를 지향하는 단행 법령들을 모은 것이었지만, 체계적인 법전은 아니었다는 견해가 널리 받아들여지고 있다.
3. 아스카 기요미하라령 제정 과정
아스카 기요미하라령으로 몇 가지 중요한 사항이 정해졌다. 천황 칭호는 이 령으로 규정되었다는 설이 있지만, 덴무 천황 시기에 이미 칭호가 제정되었고, 이 령을 통해 법전에 명기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 호적을 6년에 한 번 작성하는 것, 50호를 1리로 하는 지방 제도, 반전수수에 관한 규정 등 율령제의 골격이 이 령으로 제도화되었다고 여겨진다. 율도 함께 제정되었다는 설도 있으나, 율은 제정되지 않고 당률이 적용되었다는 설, 이 시기에는 율 편찬에 필요한 당률의 체계적인 전래가 없었고, 이를 이해하고 정리할 인재도 없었다는 설도 있다.[6]
아스카 기요미하라령은 급하게 시행되어 완성된 내용은 아니었다. 701년의 다이호 율령에 이르러서야 덴무 천황이 기획한 율령 편찬 사업이 완성되었다.
3. 1. 덴무 천황의 율령 편찬 시도
덴지 천황의 뒤를 이어 즉위한 덴무 천황은 황자들로 정권 중추를 채우는 황친 정치를 시작하여 전제적인 정치를 펼쳤다. 덴무 천황은 강력한 정치적 의지를 실행하기 위해 관료 제도와 그것을 규정하는 법령을 정비하고자 했다. 이러한 관료와 법률을 중시하는 지배 방침은 율령제의 도입으로 이어졌다. 덴무 10년 2월 25일, 덴무 천황은 황자와 신하들에게 율령 제정을 명하는 조서를 발령했다. 그러나 율령이 완성되기 전인 686년에 덴무 천황이 사망했기 때문에, 그의 황후인 우노노사라 여왕과 황태자인 구사카베 황자가 율령 사업을 계승했다.[6]
3. 2. 지토 천황의 율령 사업 계승
덴무 천황의 황후였던 우노노사라 여왕과 황태자 구사카베 황자가 율령 사업을 계승했다. 상복 기간이 끝난 후, 구사카베가 다음 천황으로 즉위할 예정이었으나, 지토 천황 3년 4월(689년)에 급사했다.[6]
아스카키요미하라령이 여러 관청에 반포된 것은 그 직후인 같은 해 6월이다. 율은 제정되지 않고 령만 갑작스럽게 반포되었는데, 이는 구사카베의 죽음으로 인한 정부 내 동요를 억제하고 덴무 천황의 유지를 계승함을 명시하기 위해 예정보다 앞당겨 령만 급히 공포한 것으로 생각된다.[6]
4. 아스카 기요미하라령의 내용
덴무 천황은 681년 황자와 신하들에게 율령 제정을 명하는 조서를 내렸으나, 686년 율령이 완성되기 전에 사망하였다. 이후 지토 천황과 구사카베 황자가 율령 사업을 계승하였으나, 689년 구사카베 황자가 급사하였다.
아스카 기요미하라령은 구사카베 황자가 사망한 직후인 689년 6월에 여러 관청에 반포되었다. 율은 제정되지 않고 령만 반포되었는데, 이는 구사카베 황자의 죽음으로 인한 정부 내의 동요를 억제하고, 덴무 천황의 유지를 계승함을 명시하기 위해 령만 급히 공포한 것으로 보인다.[6]
아스카 기요미하라령은 701년 다이호 율령이 완성되기 전까지 임시로 시행된 법령으로, 율령 편찬 작업은 그 후에도 계속되었다.
4. 1. 주요 내용
덴무 천황 시기에 제정된 천황 칭호를 법전에 명기한 것으로 보는 견해가 유력하다.[6] 호적은 6년에 한 번씩 작성하도록 규정하였으며, 50호를 1리로 하는 지방 제도를 확립하였다. 반전수수에 관한 규정도 마련하였다.5. 아스카 기요미하라령의 한계와 다이호 율령
689년에 급하게 시행된 아스카 기요미하라령은 내용상 미비한 점이 있었다. 율령 편찬 작업은 이후에도 계속되었고, 701년 다이호 율령으로 덴무 천황이 기획한 율령 편찬 사업이 완성되었다.[6]
6. 아스카 기요미하라령의 의의
덴무 천황은 황친 정치를 통해 전제적인 정치를 펼치며 관료 제도와 법령을 정비해 나갔고, 이는 율령제 도입으로 이어졌다. 681년 덴무 천황은 율령 제정을 명했으나, 686년 율령 완성 전에 사망하였다. 그의 황후 지토 천황과 황태자 구사카베 황자가 율령 사업을 계승했으나, 689년 구사카베 황자가 급사하였다.
아스카 기요미하라령은 구사카베 황자 사후, 정부 내 동요를 억제하고 덴무 천황의 유지를 계승하기 위해 령만 급히 공포된 것으로 추정된다. 아스카 기요미하라령은 천황 칭호 제정, 호적 작성 주기(6년), 지방 제도(50호를 1리로), 반전수수 규정 등 율령제의 골격을 제도화했다.[6] 율의 제정 여부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존재한다.
아스카 기요미하라령은 급하게 시행되어 불완전했기에, 701년 다이호 율령이 완성되며 덴무 천황의 율령 편찬 사업이 완료되었다.
참조
[1]
서적
Sacred Texts and Buried Treasures: Issues in the Historical Archaeology of Ancient Japan
https://books.google[...]
1998
[2]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Japan
https://books.google[...]
1993
[3]
서적
The Imperial House of Japan
1959
[4]
서적
A Chronicle of Gods and Sovereigns: "Jinnō Shōtōki" of Kitabatake Chikafusa
1980
[5]
서적
POPULATION, DISEASE, AND LAND IN EARLY JAPAN, 645-900
Council on East Asian Studies
199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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