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나 마리아 에르되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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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안나 마리아 에르되디는 헝가리 왕국(현재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폰 니츠키 백작부인으로, 베토벤의 후원자이자 '불멸의 연인' 후보로 거론되는 인물이다. 1796년 페테르 에르되디 백작과 결혼하여 자녀를 두었으며, 1805년 남편과 헤어진 후에는 비서이자 음악 교사인 프란츠 크사버 브라우흘레와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에르되디는 베토벤에게 자신의 저택을 제공하고, 그가 오스트리아에 머물도록 돕는 등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베토벤은 그녀를 "고해신부"라고 부르며 피아노 삼중주, 첼로 소나타, 카논 등을 헌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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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마리아 에르되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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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안나 마리아 에르되디는 당시 헝가리 왕국의 일부였던 오늘날의 루마니아 아라드에서 폰 니츠키 백작부인으로 태어났다.[16] 1796년 6월 6일 헝가리/크로아티아 귀족 가문인 에르되디 가문의 일원인 모뇨로케레크와 몬테 클라우디오의 페테르 에르되디 백작과 결혼했다.[1][7] 그들은 마리, 프리데리케, 아우구스트, 애칭 미미, 프리치, 구스티의 두 딸과 한 아들을 두었다.[5] 1798년 5월 3일, 안나 마리아는 황실 별 십자 훈장에 서임되는 영예를 얻었다.[1][16]
1805년 남편과 헤어지게 되고, 나중에 작곡가로 거듭나게 되는 그녀의 오랜 비서이자 자녀들의 음악 교사인 프란츠 크사버 브라우흘레/Franz Xaver Brauchlede(1783년~1838년)와 사실혼 관계가 되었다.[16] 1815년부터는 거주지를 크로아티아의 파우코베츠를 정했고, 나중에 다시 파도바로 옮겼다. 그 후 그녀는 정치적인 솔직함으로 1823년 12월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되어 뮌헨으로 이주했으며, 그곳에서 여생을 보냈다.[2][1]
2. 1. 출생과 결혼
안나 마리아 에르되디는 당시 헝가리 왕국의 일부였던 오늘날의 루마니아 아라드에서 폰 니츠키 백작부인으로 태어났다.[16] 1796년 6월 6일 헝가리/크로아티아 귀족 가문인 에르되디 가문의 일원인 모뇨로케레크와 몬테 클라우디오의 페테르 에르되디 백작과 결혼했다.[1][7] 두 사람 사이에서는 마리, 프리데리케, 아우구스트, 애칭 미미, 프리치, 구스티의 두 딸과 한 아들이 있었다.[5] 1798년 5월 3일, 안나 마리아는 황실 별 십자 훈장에 서임되는 영예를 얻었다.[1][16]2. 2. 이혼과 이후의 삶
안나 마리아 에르되디는 1805년 남편과 헤어진 후, 오랜 비서이자 자녀들의 음악 교사인 프란츠 크사버 브라우흘레(1783년~1838년)와 사실혼 관계를 맺었다.[16][2][8][1] 1815년부터 크로아티아의 파우코베츠에서 거주했으며,[2][1] 이후 파도바를 거쳐[2][1] 1823년 12월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된 후[2][1] 뮌헨에서 여생을 보냈다.[2][1]3. 베토벤과의 관계
안나 마리아 에르되디는 베토벤의 훌륭한 후원자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베토벤과 종종 시간을 보냈고, 친구이자 심복이 되었으며, 베토벤은 마리를 자신의 "고해 신부"라고 칭했다.[4] 1808년부터 1809년까지 베토벤은 빈 크루거슈트라쎄 1074에 있는 그녀의 저택에 거주했다.[9][3][10] 그녀는 빈 근교 예들레제(Jedlesee)에도 작은 땅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 자리에는 현재 빈-플로리츠도르프 베토벤 기념관이 입주해 있다.
1807년 베스트팔렌의 왕이 된 나폴레옹의 막내동생 제롬은 베토벤에게 자신의 카셀 궁의 연주회와 공연을 총괄하는 카펠마이스터 자리를 제안했다. 이때 에르되디는 베토벤이 오스트리아 땅에 남도록 귀족들을 설득하여 연금을 받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0] 테이어는 "베토벤이 카셀에서의 제안을 거절하고 빈에 머물도록 계약에 대한 공식적인 조건을 마련하자는 제안은 에르되디 백작 부인에게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3] 그 결과, 베토벤은 로브코비츠, 킨스키, 루돌프 대공과 계약을 체결하여 평생 정기적인 급여를 받게 되었고,[9][10][12] 카셀의 직책을 거절하고, 1827년 사망할 때까지 빈에 머물게 되었다.
베토벤은 《피아노 삼중주 5번》, 《6번》, 요제프 링케를 위해 작곡한 《첼로 소나타 4번》, 《5번》, 그리고 3성부의 카논 《축하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WoO 176》을 에르되디에게 헌정했다.[5][6]
3. 1. 초기 관계와 후원
안나 마리아 에르되디는 베토벤의 훌륭한 후원자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베토벤과 종종 시간을 보냈고, 친구이자 심복이 되었으며, 베토벤은 마리를 자신의 "고해 신부"라고 칭했다.[4] 1808년부터 1809년까지 베토벤은 빈 크루거슈트라쎄 1074에 있는 그녀의 저택에 거주했다.[9][3][10]1807년 베스트팔렌의 왕이 된 나폴레옹의 막내동생 제롬은 베토벤에게 자신의 카셀 궁의 연주회와 공연을 총괄하는 카펠마이스터 자리를 제안했다. 이때 에르되디는 베토벤이 오스트리아 땅에 남도록 귀족들을 설득하여 연금을 받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10] 테이어는 "베토벤이 카셀에서의 제안을 거절하고 빈에 머물도록 계약에 대한 공식적인 조건을 마련하자는 제안은 에르되디 백작 부인에게서 나온 것으로 보인다."라고 말했다.[3] 그 결과, 베토벤은 로브코비츠, 킨스키, 루돌프 대공과 계약을 체결하여 평생 정기적인 급여를 받게 되었고,[9][10][12] 카셀의 직책을 거절하고, 1827년 사망할 때까지 빈에 머물게 되었다.
베토벤은 《피아노 삼중주 5번》, 《6번》, 요제프 링케를 위해 작곡한 《첼로 소나타 4번》, 《5번》, 그리고 3성부의 카논 《축하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WoO 176》을 에르되디에게 헌정했다.[5][6]
3. 2. 베토벤의 헌정
안나 마리아 에르되디는 베토벤의 훌륭한 후원자 중 한 명이었다. 그녀는 베토벤과 자주 시간을 보냈고, 베토벤은 그녀를 "고해신부"라고 칭했다.[4] 베토벤은 1808년부터 1809년까지 빈 크루거슈트라쎄 1074번지에 있는 에르되디의 저택에서 거주했다.[9][3][10]1807년 베스트팔렌의 왕이 된 나폴레옹의 막내동생 제롬은 베토벤에게 카펠마이스터 자리를 제안했다. 이때 에르되디는 베토벤이 오스트리아 땅에 남도록 오스트리아 제국 귀족들이 베토벤에게 평생 연금을 지급하도록 설득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10]
베토벤은 《피아노 삼중주 5번》, 《6번》, 요제프 링케를 위해 작곡한 《첼로 소나타 4번》, 《5번》, 그리고 3성부의 카논 《축하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WoO 176》을 에르되디에게 헌정했다.[5][6]
3. 3. "불멸의 연인" 후보
베토벤 학자 게일 S. 알트만은 자신의 저서에서 에르되디를 베토벤의 "불멸의 연인"으로 지목했다.[2][9] 알트만은 "불멸의 연인" 편지에 나오는 장소 "K"가 카를로비바리가 아닌 클로스터노이부르크를 가리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13] 1808년 이후 두 사람이 매우 친밀한 관계였다는 점과[14][2] 마리가 1805년에 남편과 별거했다는 사실을 그 근거로 제시했다.음악학자 배리 쿠퍼는 예들제가 도나우강 동쪽에, 클로스터노이부르크는 서쪽에 있어 강을 건널 수 없다는 점을 들어 알트만의 주장에 의문을 제기했다.[15] 하지만 알트만은 1812년 당시 마리가 도나우강 서쪽 헤르날스에 있었다고 반박하며,[2] 베토벤이 1812년 9월에 헤르날스를 방문하여 "그녀에게 보낸 편지에서 언급했듯이 자신의 연인을 만났다"고 결론지었다.[2]
에르되디는 1808년부터 1809년까지 베토벤이 빈 크루거슈트라쎄 1074에 있는 자신의 저택에 거주하도록 했으며, 베토벤은 그녀를 "고해신부"라고 부를 정도로 친밀한 관계였다. 베토벤은 《피아노 삼중주 5번》, 《6번》, 《첼로 소나타 4번》, 《5번》, 3성부 카논 《축하합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WoO 176》 등을 에르되디에게 헌정했다.


참조
[1]
서적
Anna Maria Gräfin Erdödy
Katzbichler, München
1992
[2]
서적
Beethoven: A Man of His Word – Undisclosed Evidence for his Immortal Beloved
Anubian Press
1996
[3]
서적
Thayer's Life of Beethoven
G. Schirmer, Inc., New York
1921
[4]
서적
The Letters of Beethoven
Macmillan Press, London
1986
[5]
서적
Beethoven
Oxford University Press
2008
[6]
서적
Beethoven
2001
[7]
간행물
Das Testament der Gräfin Maria Erdödy, geb. Niczky
Vienna
1981
[8]
간행물
Gräfin Erdödy und J. X. Brauchle
Leipzig
1927
[9]
서적
Beethoven
Schirmer Books
2001
[10]
서적
Beethoven: Anguish and Triumph
Houghton Mifflin, Harcourt
2014
[11]
문서
The princes Kinsky, Lobkowitz and the Archduke Rudolf
[12]
문서
A Dictionary of Music and Musicians
1900
[13]
웹사이트
Klosterneuburg, Hernals, Jedlesee – relative positions.
https://www.google.c[...]
2019-01-28
[14]
서적
Briefe von Beethoven an Marie Gräfin Erdödy, geb. Gräfin Niszky, und Mag. Brauchle
https://books.google[...]
Leipzig
1867
[15]
논문
Beethoven’s Immortal Beloved and Countess Erdödy: A Case of Mistaken Identity?
1996
[16]
서적
안나 마리아 에르되디 백작 부인
1992년 뮌헨 캣츠비클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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