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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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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는 1195년부터 1203년까지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다. 그는 이사키오스 2세의 형으로, 동생을 폐위시키고 황위에 올랐다. 알렉시오스 3세는 무능하고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재위 기간 동안 제국의 쇠퇴를 막지 못했다. 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압력에 굴복하여 과도한 세금을 징수하고, 십자군의 침공을 제대로 대비하지 못하여 결국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잃고 망명했다. 이후 제위 회복에 실패하고 니케아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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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알렉시오스 3세의 미니어처 초상화 ([[Mutinensis gr. 122|15세기 필사본]], [[요안네스 조나라스]]의
알렉시오스 3세 (요안네스 조나라스의 "역사 발췌"에 수록된 15세기 필사본의 미니어처 초상화)
전체 이름알렉시오스 앙겔로스
별칭알렉시오스 콤네노스
출생1153년경
사망1211년 (58세)
종교그리스 정교
통치
직위동로마 황제
재위 기간1195년 4월 8일 - 1203년 7월 18일
이전 통치자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
다음 통치자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
가족
왕조앙겔로스 왕조
아버지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앙겔로스
어머니에우프로시네 카스타모니티사
배우자에우프로시네 두카이나 카마테라
자녀에이리네 앙겔리나
안나 콤니니 앙겔리나
에우도키아 앙겔리나
입양아카이쿠스라우 1세
기타 정보
칭호로마인의 황제 및 전제자

2. 생애

알렉시오스는 전임황제 이사키오스의 형으로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앙겔로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동생이 불가리아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던 1195년 4월 8일 동생 황제 이사키우스를 마케도니아의 스타기라에서 체포해 장님으로 만들어 감옥에 가두고 군대에 의하여 황제로 선포되었다.

시대에 맞지 않고 무능하며 우유부단하기까지 하며 최악의 겁쟁이라는 비난을 받았는데 실제로 그의 치세 8년 동안 동로마 제국의 해제는 확실시되었다.[3]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6세는 자신의 새로운 십자군 원정을 위해 여러 가지 지원을 요구해 왔는데 알렉시오스는 이를 위해 ''독일세''(獨逸稅, ''Alamanikon'' )라는 세금을 징수하고 역대 황제의 무덤에서 귀중품을 파헤치기까지 하였다. 1196년 크리스마스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는 알렉시오스에게 5,000파운드(이후 1,600파운드로 조정)의 금을 조공으로 바치도록 강요하려 했고, 그렇지 않으면 침공하겠다고 위협했다. 알렉시오스는 성 사도 교회에 있는 황실 무덤을 약탈하고 ''알라마니콘''을 통해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이 돈을 마련했다.

발칸반도에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 또한 급속도로 상실되었다. 1196년 당시 평화롭게 있던 불가리아 원정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고 불가리아의 새 차르인 칼로얀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그늘에서 벗어났다. 동쪽에서는 제국이 셀주크 투르크에게 유린당했고, 북쪽에서는 헝가리 왕국과 반란을 일으킨 불가리아인과 블라흐족이 무자비하게 제국의 발칸 지방을 약탈하며 때로는 그리스까지 침투했다. 1197년, 지역 영주 도브로미르 크리소스는 바르다르 마케도니아 지역에 자리를 잡고 수년 동안 황실 권력에 반항했다. 알렉시오스 3세 재위 초, 비잔틴 제국과 세르비아의 관계는 그의 딸 유도키아 안젤리나가 세르비아 대공 스테판 네마니치 2세와 결혼하여 좋았으나, 1200년에 그 관계가 악화되었다.

1203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원을 받은 제4차 십자군들이 이사키우스 2세의 아들 알렉시오스 앙겔로스의 요청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하였다. 알렉시오스는 수많은 경고에도 불구하고 라틴인들의 침공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고 힘이 없는 제국은 속절없이 침공에 무너졌다. 알렉시오스는 많은 재물을 끌어모아 수도를 탈출해 트라키아로 도망쳤다. 1202년, 베네치아제4차 십자군을 발동하기 위해 병사들이 집결했다. 폐위된 이사악 2세의 아들인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는 십자군에게 도움을 호소하며, 동서 교회 대분열을 종식시키고, 그들의 수송 비용을 지불하며, 삼촌을 폐위시키고 아버지의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돕는다면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항로를 변경하도록 설득되었고, 1203년 6월에 도착하여 알렉시오스 4세를 황제로 선포하고 수도의 주민들에게 삼촌을 폐위시키라고 요청했다. 알렉시오스 3세의 실정으로 인해 비잔틴 해군은 십자군이 도착했을 때 20척의 벌레 먹은 선체만 남아 있었다. 7월에, 엔리코 단돌로가 이끄는 십자군은 성벽을 기어올라 도시의 주요 구역을 장악했다. 7월 17일, 알렉시오스 3세는 성 로마누스 문에서 17개 사단을 이끌고 나와 십자군보다 훨씬 우세한 병력을 배치했으나, 싸움도 없이 도시로 돌아갔다. 그날 밤 (7월 17/18일), 알렉시오스 3세는 궁전에 숨어 있다가, 그의 딸 아이리니와 함께, 그리고 그가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보물(금 1,000파운드)을 가지고 배를 타고 트라키아의 데벨토스로 탈출하였다. 비잔티움의 제위는 이제는 장님이 된 그의 동생 이사키우스에게 다시 돌아왔고 젊은 알렉시오스는 알렉시오스 4세로 공동황제가 되었다.

알렉시오스 3세는 망명지에서 자신의 제위를 회복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1204년 결국 동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라틴 제국이 성립되었다. 그는 알렉시오스 무르주플루스와 합류했으나, 딸 에우도키아 앙겔리나와 결혼한 알렉시오스 5세는 장인에게 버림받고 장님이 되었다. 알렉시오스 3세는 십자군을 피해 테살리아로 도망쳐 몽페라토의 보니파체에게 항복했다.

1205년 알렉시오스 3세는 보니파체의 "보호"에서 벗어나 에피루스 전제공국의 미하일 1세 콤네노스 두카스에게 피신을 시도했으나 붙잡혀 몬페라토를 거쳐 테살로니카로 끌려갔다. 이후 미하일 1세가 몸값을 지불하여 풀려난 그는 소아시아로 가서 니케아 황제인 사위 테오도루스 라스카리스에게 의탁했다.

알렉시오스 3세는 테오도루스에게 황위를 요구하며 룸 술탄국의 카이호스로 1세와 협력했으나, 1211년 안티오크 전투 (멘데르 강)에서 술탄은 패배하고 전사했다. 알렉시오스 3세는 테오도루스에게 사로잡혀 니케아의 수도원에 유폐되었고, 1211년 말 그곳에서 사망했다.

아스프론 트라키와 콘스탄티누스 1세.

2. 1. 초기 생애와 즉위

알렉시오스는 전임황제 이사키오스의 형으로 안드로니코스 두카스 앙겔로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콤네노스 왕조의 먼 친척으로, 안드로니코스 1세에게 암살당할 뻔하여 안티오키아로 도망쳤으나 이슬람 측의 공격을 받아 포로가 되었다. 하지만 형 이사키오스 2세가 안드로니코스 1세를 타도하고 황제가 되자 막대한 몸값을 지불하고 석방되었다. 이후 제국의 재상, 원수에 임명되어 형의 치세를 보좌했지만, 점차 형과 대립했다.

1195년 4월 8일, 동생 이사키오스 2세가 불가리아 원정을 준비하던 중 마케도니아 지방의 스타기라에서 이사키오스 2세를 체포해 장님으로 만들고 감옥에 가둔 뒤 군대에 의해 황제로 선포되었다.

2. 2. 통치 기간 (1195년 ~ 1203년)

알렉시오스 3세는 전임 황제 이사키오스 2세의 형으로, 1195년 4월 8일 동생을 마케도니아 지방의 스타기라에서 체포하여 장님으로 만들고 황제로 즉위했다.[3] 그는 시대에 뒤떨어지고 무능하며 우유부단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실제로 그의 8년 통치 기간 동안 동로마 제국의 쇠퇴가 가속화되었다.[3]

신성로마제국의 하인리히 6세는 새로운 십자군 원정을 위한 지원을 요구하며 알렉시오스 3세에게 '독일세'(''Alamanikon'')라는 세금을 징수하게 하고, 역대 황제의 무덤을 파헤치게까지 하였다. 1196년 크리스마스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하인리히 6세는 알렉시오스에게 5,000파운드(이후 1,600파운드로 조정)의 금을 조공으로 바치도록 강요하려 했고, 그렇지 않으면 침공하겠다고 위협했다. 알렉시오스는 성 사도 교회에 있는 황실 무덤을 약탈하고 ''알라마니콘''을 통해 백성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이 돈을 마련했다.[3]

발칸반도에서 동로마 제국의 영향력은 급속히 상실되었다. 1196년 불가리아 원정은 실패로 끝났고, 칼로얀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영향력에서 벗어났다. 동쪽에서는 제국이 셀주크 투르크에게 유린당했고, 북쪽에서는 헝가리 왕국과 반란을 일으킨 불가리아인과 블라흐족이 제국의 발칸 지방을 약탈했다. 1197년, 지역 영주 도브로미르 크리소스는 바르다르 마케도니아 지역에 자리를 잡고 수년 동안 황실 권력에 반항했다. 알렉시오스 3세 재위 초, 비잔틴 제국과 세르비아의 관계는 그의 딸 유도키아 안젤리나가 세르비아 대공 스테판 네마니치 2세와 결혼하여 좋았으나, 1200년에 그 관계가 악화되었다.

1203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원을 받은 제4차 십자군이 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 알렉시오스 앙겔로스의 요청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했다. 알렉시오스 3세는 십자군의 침공에 대한 대비를 하지 않았고, 결국 많은 재물을 가지고 수도를 탈출해 트라키아로 도망쳤다. 1202년, 베네치아제4차 십자군을 발동하기 위해 병사들이 집결했다. 폐위된 이사악 2세의 아들인 알렉시오스 4세 앙겔로스는 십자군에게 도움을 호소하며, 동서 교회 대분열을 종식시키고, 그들의 수송 비용을 지불하며, 삼촌을 폐위시키고 아버지의 왕위에 오르는 것을 돕는다면 군사적 지원을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항로를 변경하도록 설득되었고, 1203년 6월에 도착하여 알렉시오스 4세를 황제로 선포하고 수도의 주민들에게 삼촌을 폐위시키라고 요청했다. 알렉시오스 3세의 실정으로 인해 비잔틴 해군은 십자군이 도착했을 때 20척의 벌레 먹은 선체만 남아 있었다. 7월에, 엔리코 단돌로가 이끄는 십자군은 성벽을 기어올라 도시의 주요 구역을 장악했다. 7월 17일, 알렉시오스 3세는 성 로마누스 문에서 17개 사단을 이끌고 나와 십자군보다 훨씬 우세한 병력을 배치했으나, 싸움도 없이 도시로 돌아갔다. 그날 밤 (7월 17/18일), 알렉시오스 3세는 궁전에 숨어 있다가, 그의 딸 아이리니와 함께, 그리고 그가 모을 수 있는 최대한의 보물(금 1,000파운드)을 가지고 배를 타고 트라키아의 데벨토스로 탈출하였다.

알렉시오스 3세는 형보다 무능하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하인리히 6세의 압력에 굴복하여 역대 황제의 묘소를 파헤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또한 베네치아 공화국과의 관계를 냉각시키고, 오히려 제노바 공화국이나 피사 공화국 등과 같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적대 관계에 있던 도시들을 우대하는 등 대외적으로 많은 적을 만들었다.

2. 3. 망명과 최후

알렉시오스 3세는 1203년 베네치아 공화국의 지원을 받은 제4차 십자군이사키오스 2세의 아들 알렉시오스 앙겔로스의 요청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하자, 많은 재물을 가지고 수도를 탈출해 트라키아로 도망쳤다.[3] 비잔티움 제위는 장님이 된 그의 동생 이사키오스에게 돌아갔고, 알렉시오스 4세가 공동 황제가 되었다.

알렉시오스 3세는 망명지에서 제위를 회복하려 노력했으나 실패했고,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로 동로마 제국은 멸망하고 라틴 제국이 성립되었다.[3] 그는 알렉시오스 무르주플루스와 합류했으나, 딸 에우도키아 앙겔리나와 결혼한 알렉시오스 5세는 장인에게 버림받고 장님이 되었다. 알렉시오스 3세는 십자군을 피해 테살리아로 도망쳐 몽페라토의 보니파체에게 항복했다.

1205년 알렉시오스 3세는 보니파체의 "보호"에서 벗어나 에피루스 전제공국의 미하일 1세 콤네노스 두카스에게 피신을 시도했으나 붙잡혀 몬페라토를 거쳐 테살로니카로 끌려갔다. 이후 미하일 1세가 몸값을 지불하여 풀려난 그는 소아시아로 가서 니케아 황제인 사위 테오도루스 라스카리스에게 의탁했다.

알렉시오스 3세는 테오도루스에게 황위를 요구하며 룸 술탄국의 카이호스로 1세와 협력했으나, 1211년 안티오크 전투 (멘데르 강)에서 술탄은 패배하고 전사했다. 알렉시오스 3세는 테오도루스에게 사로잡혀 니케아의 수도원에 유폐되었고, 1211년 말 그곳에서 사망했다.

3. 가족 관계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는 에우프로시네 두카이나 카마테라와의 결혼을 통해 세 딸을 두었다.


  • 이레네 안젤리나: 안드로니코스 콘토스테파노스와 결혼했고, 이후 알렉시오스 팔레올로고스와 결혼하여, 미카엘 8세 팔레올로고스 황제의 할머니가 되었다.
  • 안나 콤네네 안젤리나: 마누엘 1세 콤네노스의 증손자인 ''세바스토크라토르'' 이삭 콤네노스와 결혼했고, 이후 테오도르 1세 라스카리스와 결혼했다.
  • 유도키아 안젤리나: 세르비아 왕 스테판 네마니치와 결혼했고, 이후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 황제와 결혼했으며, 레오 스구로스와 결혼했다.


그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 증조부: 알렉시오스 1세 콤네노스
  • 조부: 콘스탄티노스 앙겔로스
  • 조모: 테오도라 콤네나
  • 삼촌(아버지의 동생): 요안니스 앙겔로스 두카스
  • 삼촌의 서자: 미카엘 1세 콤네노스 두카스
  • 부: 안드로니코스 앙겔로스
  • 모: 에우프로시네(Euphrosyne Kastamonitissa)
  • 황후: 에우프로시네 두카이나 카마테라
  • 공주: 에이레네
  • 공주: 안나
  • 공주: 에우도키아

4. 평가

4. 1. 유산

참조

[1] 서적 Byzantium and the Turks in the Thirteenth Century Oxford 2014
[2] 웹사이트 Verisys https://web.archive.[...] 2016-04-29
[3] 서적 비잔티움 연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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