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차 십자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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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4차 십자군은 13세기 초 유럽의 혼란스러운 상황을 배경으로, 교황 인노첸시오 3세의 주도로 결성되었으나, 당초 목표였던 예루살렘 대신 베네치아의 경제적 이익을 위해 헝가리의 자다르를 공격하고,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한 사건이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하고 라틴 제국을 세웠지만, 이는 동서 교회의 분열을 심화시키고 동로마 제국을 쇠퇴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베네치아는 이 사건으로 큰 이득을 얻었으며, 4차 십자군은 중세 유럽과 지중해 세계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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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차 십자군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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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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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쟁 개요 | |
일부 | 십자군 |
날짜 | 1202년–1204년 |
장소 | 발칸반도, 아나톨리아반도, 달마티아 |
결과 | 유럽: 십자군 승리, 성지: 무슬림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십자군 |
참여 국가 | 프랑스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
교전국 2 | 유럽 전선: 동로마 제국 유럽 전선: 헝가리 왕국 유럽 전선: 크로아티아 왕국 성지: 아이유브 왕조 |
지휘관 | |
십자군 지휘관 | 보니파시오 1세 엔리코 단돌로 티보 3세 (자연사) 보두앵 1세 루이 1세 외그 3세 콘라트 폰 크로스크 마르탱 드 파이리 코농 드 베튀느 알렉시우스 4세 앙겔로스 (처형) |
동로마 제국 지휘관 | 알렉시우스 3세 앙겔로스 알렉시우스 5세 두카스 (처형) |
아이유브 왕조 지휘관 | 알=아딜 |
병력 규모 | |
십자군 병력 | 기사: 4,000-5,000명 보병: 8,000명 공성 무기: 300대 수병: 10,000명 전투용 갤리선: 60척 군마 수송선: 100척 병력 수송선: 50척 |
동로마 제국 병력 | 보병 및 방어 부대: 10,000명 바랑기 친위대: 5,000명 전투용 갤리선: 20척 |
주요 전투 | |
주요 전투 목록 | 자다르 제1차 콘스탄티노폴리스 제2차 콘스탄티노폴리스 쿤투라스의 올리브 숲 |
기타 정보 | |
관련 정보 | 그 쇠퇴 쿠시 영주 앙게랑 3세 |
2. 배경
13세기 초, 유럽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신성로마제국은 시칠리아를 회수했고, 잉글랜드 왕국은 프랑스와 영토 분쟁 중이었으며, 독일은 내전에 휩싸였다.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새로운 십자군 원정을 주장했고, 1201년 빌라르두앵의 조프루아를 중심으로 기사들이 베네치아 공화국과 십자군 결성에 합의했다. 이 십자군에는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를 중심으로 플랑드르, 발루아, 신성로마제국, 베네치아 공화국이 참가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집트를 공격 목표로 삼았는데, 이는 성지 예루살렘과는 무관하게 베네치아의 이익만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십자군은 예상보다 적은 인원이 모여 도항비가 부족했고, 베네치아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 십자군을 떠나보낼 수 없다고 통보했다. 엔리코 단돌로는 도항비를 면제해주는 조건으로 십자군의 목표를 헝가리 왕국의 차라로 변경하도록 설득했고, 십자군은 이를 수락했다.[105][106]
2. 1. 십자군 운동의 전개와 성지 회복의 어려움
살라딘의 예루살렘 함락 이후, 레반트 지역에는 티르, 트리폴리, 안티오키아 세 개의 연안 도시만이 십자군 세력으로 남았다.[87] 제3차 십자군은 예루살렘 탈환에 실패했지만, 아크레, 야파 등 주요 연안 도시들을 점령하고 예루살렘 왕국을 재건했다.[88] 1192년 야파 조약으로 십자군과 살라딘 사이에 3년 8개월간의 평화가 유지되었다.[88]제3차 십자군은 동로마 제국과의 관계를 악화시켰다.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할 뻔했고, 잉글랜드 왕 리처드 1세는 키프로스를 점령했다.[91]
1193년 살라딘 사후 아이유브 왕조는 내분에 휩싸였고, 앙리 2세는 알-아지즈 우스만과 조약을 연장했다. 그러나 독일 십자군의 다마스쿠스 공격으로 평화가 깨졌고, 알-아딜의 야파 공격과 앙리 2세의 급사로 이어졌다.[88] 에메리 드 루지냥이 왕위를 계승하고 1198년 알-아딜과 5년 8개월간의 평화 조약을 체결했다. 야파는 아이유브 왕조, 베이루트는 십자군, 시돈은 공동 통치하기로 결정되었다.[88] 1204년 조약 만료 시점에 알-아딜은 이집트(1200년)와 알레포(1202년)를 통합하여 예루살렘 왕국을 포위하는 형세가 되었다.[88]
십자군 본대는 베네치아에서 콘스탄티노폴리스로 향하던 중 여러 차례 이탈했다. 일부는 성지로 직행하거나 기독교도를 공격하는 지휘관들과 별도로 행동했다.[88][143] 스티븐 런시맨은 "극소수"만이 성지로 향했다고 했고, :en:Joshua Prawer는 "소수의 잔당"이라 칭했지만, 최근 연구는 상당한 규모의 병력이 성지로 향했음을 보여준다.[143] 프랑스 파벌의 영주들이 가장 높은 "탈주" 비율을 보였다.[143] 북프랑스에서 300명의 기사와 종자들이 성지로 향했다.[144]
풀크 드 누이가 모은 자금은 아크레의 성벽과 탑 등 방어 시설 수리에 사용되었다.[88] 1202년 여름, 일부 십자군은 피아첸차를 거쳐 남이탈리아 항구에서 직접 성지로 향했다. 예루살렘 왕 아멜리 드 루지냥은 이들의 규모가 작아 아이유브 왕조와의 휴전을 파기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143] 르나르 2세는 안티오키아 공국으로 갔다가 기습으로 전사자를 내고 포로가 되었다.[143]
자다르 포위전 이후에도 이탈자가 발생했다. 시몽 드 몽포르는 대규모 부대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을 거부하고 헝가리로 갔다.[145] 보두앵 1세는 군대를 둘로 나누어 일부는 자신이 이끌고, 다른 일부는 해로로 보냈다. 플랑드르 함대는 마르세유에서 겨울을 나고 성지로 향했다.[143] 플랑드르 함대의 일부는 키프로스 왕국에 들러 왕위 계승을 주장했으나 거부당하고 아르메니아 왕국으로 향했다.[147] 아크레에 도착한 플랑드르 함대는 예루살렘 왕과의 휴전 문제로 분열되어 일부는 안티오키아, 트리폴리로 향했다.[143] 1203년 11월 휴전이 실효되자 플랑드르 전사들은 예루살렘 왕국에 재집결했다.[143]
1204년 1월, 본대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에 집중하여 성지로 향하라는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143]
2. 2. 동로마 제국의 정치적 혼란
예루살렘 함락 이후 제3차 십자군이 실패로 끝나면서 동로마 제국과 서유럽 국가들 간의 관계는 크게 악화되었다.[89][90] 특히 신성 로마 황제 프리드리히 1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려 했으며, 잉글랜드의 리처드 1세는 키프로스를 점령하기도 했다.[91]이런 상황에서 1195년, 동로마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는 동생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의 쿠데타로 폐위되어 맹인이 된 채 추방당했다.[97] 알렉시오스 3세는 무능하고 사치스러운 통치로 국고를 낭비하여 제국의 방위력을 약화시켰다.[97] 특히, 그의 수석 함대 제독은 함대 장비까지 팔아 사익을 채웠다.[98][99]
이러한 동로마 제국의 정치적 혼란은 서유럽 세력,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에게는 좋은 기회였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무역로의 중심지였으며, 중국, 인도, 페르시아와의 무역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95][96]
2. 3. 베네치아 공화국의 역할
13세기 초,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새로운 십자군 원정을 주장했고, 1201년 빌라르두앵의 조프루아를 중심으로 기사들이 베네치아 공화국과 십자군 결성에 합의했다. 이 십자군에는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를 중심으로 플랑드르, 발루아, 신성로마제국, 베네치아 공화국이 참가했다.
당시 베네치아는 이집트를 목표로 삼았는데, 이는 성지 예루살렘과는 무관하게 베네치아의 수익만을 고려한 결정이었다. 베네치아는 제4차 십자군 창설에 가장 적극적으로 동참했다. 그러나 십자군은 예상보다 적은 인원이 모여 도항비가 부족했고, 베네치아는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 떠나보낼 수 없다고 통보했다.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도항비를 면제해주는 조건으로 십자군의 목표를 헝가리 왕국의 차라로 변경하도록 설득했고, 십자군은 이를 수락했다.
1200년, 보니파시오와 다른 지도자들은 이집트로의 병력 및 물자 수송을 위해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등에 사절을 파견했다. 조프루아 드 비유아르두앵도 사절 중 한 명이었다. 이전 십자군과 달리 이집트 공격은 해상 작전이 필요했고, 강력한 함대가 필요했다. 제노바는 관심을 보이지 않았지만, 1201년 3월 엔리코 단돌로가 이끄는 베네치아와 33,500명의 십자군 병사를 수송하는 계약이 체결되었다. 엔리코는 이 기회를 통해 부, 명성, 토지, 성지에서의 무역로를 획득하고자 했다. 베네치아는 1년간 함선 건조와 선원 훈련을 실시하고, 그 대가로 상업 활동이 제한되었다. 베네치아 함대는 4,500명의 기사(및 4,500필의 말), 9,000명의 종자, 20,000명의 보병을 수송할 예정이었다.[105]
1202년 10월 초 베네치아에서 출발한 십자군의 대부분은 프랑스 출신이었다. 블루아, 샹파뉴, 아미앵, 일드프랑스, 부르고뉴 등 프랑스 지역 외에도 플랑드르나 몬페라토 등 유럽 각지에서 부대가 파견되었다. 특히, 페리스 수도원의 수도원장 마르탱과 할버슈타트 주교 콘라트 폰 크로지크가 이끄는 신성 로마 제국령 출신 부대가 주목할 만하다. 이들은 베네치아군과 함께 1203년 6월 24일에 출항하여 카이로를 목표로 할 예정이었다. 이 합의는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에 의해 승인되었고, 기독교 국가 공격 금지 맹세가 이루어졌다.[106]
결과적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서방의 신생 국가들, 특히 베네치아 공화국에게 있어 경쟁자이자 매력적인 목표물이 되었다.
3.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
1203년 6월 24일,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당시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우스 3세는 무능했고, 앙겔루스 황조 치하에서 제국군의 전력은 약화된 상태였다. 십자군은 알렉시우스 앙겔루스를 내세워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의 지지를 요구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자 공격을 시작했다. 십자군은 금각만을 확보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해안 성벽을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171]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충분한 병력과 성벽을 갖추고 있었기에 십자군은 고전했다. 베네치아인들은 해안 성벽을 넘어 도시로 진입하려 했으나, 프랑크인들은 이를 두려워하여 거부했다. 결국 베네치아인들은 금각만 쪽에서, 프랑크인들은 육지 쪽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베네치아인들은 성벽을 넘어 도시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으나, 바랑인 친위대를 앞세운 동로마 군의 반격에 격퇴되었다. 육지 쪽의 십자군도 동로마 군에 밀려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렉시우스 3세는 수비군을 물렸고, 이에 동로마인들은 황제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알렉시우스 3세는 재물을 챙겨 도망갔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알렉시우스 4세를 맞이하여 십자군은 도시에 입성할 수 있었다.[171]
알렉시우스 4세는 이사키우스 2세를 복위시키고 공동 황제가 되었지만, 십자군과의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무리한 약속이었고, 알렉시우스 3세가 국고를 탕진했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는 약속은 이사키우스 2세조차 아들을 비난할 정도였다.[171]
알렉시우스 4세는 세금을 부과하고 귀중품을 수거했지만, 시민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내 이탈리아 상인들이 테러를 당하고 보복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또한 십자군 주둔 기간 연장 요구는 양측 모두의 불만을 샀고, 엔리코 단돌로는 추가 금액을 요구했다.[171]
알렉시우스 무르주플루스는 알렉시우스 4세에게 빚 상환 철회를 요구했고, 황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십자군은 항의했지만 무시당했고, 단돌로는 알렉시우스 4세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십자군과 반대파 간의 공격과 보복이 이어졌지만, 알렉시우스 4세는 소극적이었다.[171]
시민들은 성 소피아 성당을 점거하고 니콜라스 카나바우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알렉시우스 4세는 십자군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알렉시우스 무르주플루스가 알렉시우스 5세로 즉위하여 카나바우스를 살해하고 십자군을 공격했다가 패배했다. 알렉시우스 5세는 회담을 제의했지만, 십자군은 알렉시우스 4세의 복위를 요구했고, 알렉시우스 5세는 이사키우스 2세와 알렉시우스 4세를 살해했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두 번째 공격을 감행했다.[171]
십자군은 해안 쪽 성벽이 약점임을 알고 있었지만, 알렉시우스 5세는 목제 탑으로 보강했다. 4월 9일 십자군의 총공격은 실패했고, 첫날 전투는 비잔티움 군의 승리로 끝났다.[171]
다음 날, 십자군은 더 높은 곳에서 가교를 놓고, 탑 하나에 두 개의 가교를 놓는 작전을 펼쳤다. 한 프랑스 기사가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자, 수비군이 도망치면서 탑이 점령되었다. 십자군이 성벽에 구멍을 내고 진입하자, 동로마군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알렉시우스 5세는 저항하다가 트라키아로 도망쳤고, 동로마 측은 십자군 영주들을 새 황제로 맞이하려 했다.[171]
그러나 십자군 병사들은 굶주리고 지쳐 있었으며, 동로마인들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결국 도시에서는 십자군에 의한 학살, 화재, 약탈이 자행되었다. 신성모독이 자행되고, 문화재와 보물이 파괴되고 약탈되었다. 프랑크군은 파괴적인 약탈을, 베네치아인들은 보물을 빼돌렸다. 이때 네 마리의 청동 마상도 산마르코 대성당으로 옮겨졌다.[171]
이 약탈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역사상 가장 암울한 순간이었다. 오스만 투르크에게 함락될 때조차 이때만큼 암울하지 않았다.[172] 십자군은 약탈자로 변했다. 여성, 성직자, 귀족, 심지어 도시 내 거주하던 다른 국가 상인들조차 약탈, 폭력, 살육을 피하지 못했다. 약탈자들은 모든 건축물에서 약탈과 파괴를 저질렀고, 하기아 소피아 안으로 말이나 당나귀를 끌어들여 성물과 보물을 실어 날랐다.[173]
3. 1. 십자군의 목표 변경과 자라 점령
1202년 10월 8일, 십자군은 베네치아 공화국을 출발했지만, 원래 목표였던 이집트가 아닌 헝가리 왕국의 도시 차라로 향했다.[106] 차라는 원래 베네치아의 영향력 아래 있었으나, 얼마 전 베네치아의 통치를 거부하고 헝가리 왕의 통제 하에 들어간 달마티아의 해안 도시였다.[106]십자군이 차라에 도착했을 때, 차라 측은 항복 사절을 보냈다. 그러나 차라 측에서 교황의 사절이 도착하여 십자군에게 철군을 요구하자, 십자군은 갑자기 태도를 바꾸었다. 십자군 대표인 엔리코 단돌로는 교황의 명령을 무시하고 십자군에게 차라를 공격할 것을 선동했다. 결국 차라는 단 1주일 만에 십자군의 손에 함락되었다.[106] 엔리코 단돌로는 평소 베네치아에 지속적으로 반항해오던 차라를 철저히 짓밟을 목적으로 도시 대부분을 파괴하고 주민들을 쫓아냈다.[106]
이 소식을 접한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매우 격분하여 십자군의 행위를 비난하며 십자군 전체를 파문했다.[106]
한편, 동로마 제국의 알렉시우스 3세의 폭정에서 망명한 황자 알렉시우스 앙겔루스는 제4차 십자군의 대표인 보니파치오를 만나 자신의 아버지 이사키우스 2세의 제위를 되찾기 위한 제안을 했다. 알렉시우스 4세는 십자군이 자신의 큰아버지 알렉시우스 3세를 몰아내고 아버지의 제위를 되찾아 주면, 십자군의 이집트 정복을 위한 병사 1만 명과 기사 500명을 제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로마 가톨릭의 관할로 주겠다고 약속했다.[34]
그러나 이 제안은 이미 인노첸시오 3세가 같은 기독교 국가를 공격할 수 없다는 이유로 거절한 바 있었다.[34] 인노첸시오 3세는 십자군에게도 이 제안을 거부할 것을 명령했지만, 십자군은 이를 받아들였다. 가장 큰 이유는 십자군의 지도자인 보니파치오가 동로마 제국에 대해 원한이 있었기 때문이었다.[34]
이후 인노첸시오 3세는 이 일의 책임을 전적으로 베네치아와 엔리코 단돌로에게 돌렸지만, 이 원정이 실패할 경우 베네치아가 겪을 손실 또한 매우 컸기 때문에 전적으로 그의 주도하에 앙겔루스의 제안이 받아들여지진 않았다. 게다가 십자군은 지속적으로 물자 부족에 시달리고 있었고, 차라를 공격할 시점부터 십자군 내부 분열이 극심하여 탈영병이 속출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난공불락으로 유명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쉽게 함락할 수 있으리라고 예상하기도 어려웠다.[34]

베네치아 출항을 결정했던 십자군이었지만, 베네치아 출항을 강제하는 법적 구속력 있는 약정은 없었다. 따라서 참가자 중에는 플랑드르, 마르세유, 제노바 등 다른 항구 도시를 출발지로 선택하는 사람도 많았다.[107] 1202년 5월까지 많은 십자군 참가자들이 베네치아에 집결했지만, 그 수는 예상을 크게 밑돌았다. 예상은 33,500명이었지만, 실제로 모인 것은 약 12,000명(기사 4,000~5,000명, 보병 8,000명)에 불과했다.[107] 한편 베네치아 측은 약정대로 군함과 수병을 준비했다. 베네치아 항구에는 50척의 전투용 갤리선과 450척이나 되는 수송선이 대기하고 있었다.[108] 고령에다가 실명이었던 엔리코 단돌로는 이미 합의된 85,000장의 은화 지불이 이루어지지 않는 한 출항하지 않겠다고 했고, 이때 집결한 십자군은 35,000장만 지불할 수 있었다. 베네치아 측은 추가로 14,000장의 화폐가 지불될 때까지 십자군을 베네치아에 수용했다.[109] 베네치아는 1년 동안이나 상업 활동을 중단하고 함선 건조 등 원정 준비를 했기 때문에, 지불 지연은 베네치아에게도 사활 문제였다. 또한 이러한 함선을 조종하는 데에는 14,000명에서 2~3만 명의 인원이 필요했던 것(당시 베네치아 총인구는 6~10만 명)도 베네치아 공화국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108][110]
도제와 베네치아 공화국은 대응에 골몰했다. 십자군의 지불이 얼마나 부족하더라도, 십자군을 해산하면 베네치아의 우위가 상실되거나 경제적·무역적 손실을 입을 가능성도 있었다. 그래서 단돌로는 십자군에게 아드리아해 연안에 펼쳐진 항구 도시에 대한 전쟁에 참여함으로써 자금 부족분을 상쇄한다는 제안을 했다. 이 제안은 결과적으로 달마티아 지방의 항구 도시 자라 포위전으로 이어졌다.[111] 이 항구 도시는 12세기에 베네치아 공화국에 의해 경제적으로 지배를 받았지만, 1181년에 공화국에 반란을 일으켰고, 그 후 헝가리 국왕이자 크로아티아 왕이었던 임레 왕과 동맹을 맺었다.[111][112] 베네치아는 자다르 탈환을 계획했지만 실패했고, 1202년까지 이 도시는 임레 왕의 보호 아래 베네치아로부터 경제적으로 완전히 독립했다.[113]
자다르의 독립을 지원한 임레 왕은 가톨릭 신자였고, 그 자신도 1195년 또는 1196년에 십자군 참여를 선언했다. 그러한 임레 왕의 지배하에 있는 자다르를 공격한다는 제안에 많은 십자군 참가자들은 반감을 나타냈고, 레스터 백작 시몽 드 몽포르가 이끄는 부대는 자다르 공격에 참여하지 않고 고향으로 돌아갔거나, 혹은 스스로 성지로 진군했다. 교황 특사로 십자군에 파견되었던 추기경은 십자군 원정이 완전히 실패로 끝나는 것을 막기 위해 어쩔 수 없는 조치라고 이 움직임을 승인했지만, 로마 교황은 이러한 움직임에 대해 경고하고 십자군 지휘관들에게 파문을 언급하는 서한을 보냈다.[106]
1202년, 로마 가톨릭교회의 그리스 정교회에 대한 우위 유지를 열망했던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십자군에게 같은 기독교 지역에 대해 어떤 악행도 금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114] 그러나 이 포고령은 십자군이 자다르 공격을 시작하기 전에 도착하지 못했다. 1202년 11월 10일~11일에 십자군 대부분은 자다르 시가에 도착했고, 그 후 공격이 시작되었다. 자다르 시민들은 십자군에게 자신들이 가톨릭 신자임을 보이려고 시도하며 창문과 성벽에서 십자가가 그려진 깃발을 흔드는 등의 행위를 했지만, 효과가 없었고, 같은 해 11월 24일 포위전을 거쳐 시가는 함락되었다. 십자군 병사들과 베네치아인들은 도시 전체를 약탈했고, 두 세력은 전리품 분배를 둘러싸고 다툼을 벌이기까지 했다. 그 후 십자군 내의 군기는 회복되었고, 지휘관들은 자다르에서 겨울을 나기로 모두 동의했으며, 그 동안 이 원정에 대한 협의가 이루어지게 되었다.[115] 또한, 자다르의 방어 시설은 베네치아 군에 의해 파괴되었다.
나중에 자다르에서의 참극 소식을 들은 로마 교황은 십자군 지휘관들에게 파문 선고를 하고, 성지를 탈환하기 위한 예루살렘으로의 진군을 계속하라는 서한을 보냈다. 교황의 편지를 받은 지휘관들은 이 파문 선고가 십자군 병사들의 사기를 떨어뜨려 해산으로 이어질 가능성을 우려하여 병사들에게 편지 내용을 전달하지 않았다. 이듬해 2월, 십자군은 베네치아에 의해 자다르 공격을 강요당했다는 이유로 베네치아인이 아닌 십자군 참가자에 대한 파문 선고는 철회되었다.[116]
베네치아 공화국은 동로마 제국과 경제적으로 대립하고 있었고, 1182년에는 라틴인 학살 사건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발생했던 것 때문에 베네치아인들의 비잔티움 제국 및 그 주민들에 대한 적개심은 더욱 깊어지고 있었다. 노브고로드 제1년대기에 따르면,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1171년, 사절단의 일원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문했을 때 황제 마누엘 1세 콤네누스에 의해 실명당했다고 전해지며, 이 사건으로 단돌로 자신도 비잔티움 제국에 대해 강한 적의를 품고 있었다고 전해진다.[117]
한편, 십자군 총사령관 보니파시오 1세는 십자군이 베네치아를 출항하기 전에 베네치아를 떠나 사촌인 슈바벤 공작 필리프를 방문하고 있었다. 방문 이유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이 있다. 베네치아인의 책략을 간파하고 파문을 막기 위해 본대에서 일부러 떨어졌다는 설과, 필리프 공작 휘하에 당시 망명해 있던 동로마 황족 알렉시오스(알렉시오스는 필리프의 의형제였고, 폐위된 황제 이사키오스 2세 앙겔로스의 아들이었다.)와의 면회를 원했기 때문이라는 설이 존재한다. 알렉시오스는 1202년에 공작 휘하로 도망쳐 왔을 뿐이었지만, 그 사건이 보니파시오의 귀에 들어왔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알렉시오스 황태자는 십자군에게 진 빚을 모두 떠맡고, 20만 장의 은화를 지불하며, 1만 명의 동로마 정규군을 제공하고, 성지에서 500명의 기사를 유지하고 이집트로 병사를 수송하기 위한 해상 수송을 도맡아, 그리스 정교회의 가톨릭에 대한 복종 등의 조건을 제시하고, 그 대가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정과 자신의 즉위를 위한 알렉시오스 3세 앙겔로스에 대한 군사 원정에 대한 협력을 십자군에게 요구했다. 1203년 1월 1일, 자다르에서 동계 중이던 십자군 본대에도 이 매력적인 조건이 전해졌다.[118]
도제 단돌로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정 계획의 열렬한 지지자였지만, 과거 제국에 대한 사절 참가 경험에서 제국의 정치 상황을 이해하고 있던 단돌로는 알렉시오스 황태자가 제시한 조건의 실현은 거의 기대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보니파시오는 황태자와의 거래에 동의했고, 보니파시오 후작과 황태자는 케르키라 섬에 정박하고 있던 십자군 함대 쪽으로 향했다.(함대는 이미 자다르를 출항하고 있었다.) 다른 십자군 지휘관들 또한 단돌로로부터 뇌물을 받았기 때문에[116] 황태자와의 거래에 최종적으로 동의했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정이 결정된 직후, 십자군에서는 새로운 문제가 발생했다. 십자군의 일부 부대가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정에 참가를 거부하고, 단독으로 시리아를 향해 출항한 것이다.[116] 남은 십자군 본대는 1203년 4월경, 60척의 갤리선, 100척의 군마 수송선, 50척의 대형 수송선(모두 1만 명의 베네치아인 수병에 의해 조종되었다.)이라는 구성으로 케르키라 섬을 출항했다.[119] 또 도중에 300대의 공성 병기가 선박에 탑재되었다.[120]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원정 계획이 실행에 옮겨졌다는 보고를 받은 교황은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십자군에 대해서는 십자군의 서약을 이행하는 데 적극적인 방해가 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같은 기독교도를 공격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을 내렸지만, 명백하게 그들의 계획을 비난하지는 않았다.[121]
3. 2. 콘스탄티노폴리스로의 진군
1202년 10월 8일 십자군은 베네치아를 출발했지만, 원래 목표인 이집트가 아니라 헝가리 왕국의 도시 차라로 향했다. 차라는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었으나, 베네치아의 통치를 거부하고 헝가리 왕의 통제 하에 들어간 달마티아의 해안 도시였다. 십자군은 차라를 공격하여 점령했고, 이 소식을 들은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십자군 전체를 파문했다.한편, 동로마 제국의 황자 알렉시우스 앙겔루스는 십자군의 대표인 보니파치오를 만나 자신의 아버지 이사키우스 2세의 복위를 돕는 대가로 십자군에게 병력과 자금, 그리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로마 가톨릭 관할로 넘기겠다는 제안을 했다. 교황은 이전에 같은 기독교 국가 공격은 불가하다는 이유로 이 제안을 거절했지만, 십자군은 이를 받아들였다. 보니파치오는 동로마 제국에 대한 원한이 있었고, 십자군은 물자 부족과 탈영병 문제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1203년 6월 24일,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도착했다. 당시 비잔티움 황제 알렉시우스 3세는 무능했고, 앙겔루스 황조 치하에서 제국군의 전력은 약화된 상태였다. 십자군은 알렉시우스 앙겔루스를 내세워 콘스탄티노폴리스 시민들의 지지를 요구했으나, 호응을 얻지 못하자 공격을 시작했다. 십자군은 금각만을 확보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해안 성벽을 공격할 수 있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충분한 병력과 성벽을 갖추고 있었기에 십자군은 고전했다. 베네치아인들은 해안 성벽을 넘어 도시로 진입하려 했으나, 프랑크인들은 이를 두려워하여 거부했다. 결국 베네치아인들은 금각만 쪽에서, 프랑크인들은 육지 쪽에서 공격하기로 했다. 베네치아인들은 성벽을 넘어 도시로 진입하는 데 성공했으나, 바랑인 친위대를 앞세운 동로마 군의 반격에 격퇴되었다. 육지 쪽의 십자군도 동로마 군에 밀려 최후의 일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러나 알렉시우스 3세는 수비군을 물렸고, 이에 동로마인들은 황제에게 불만을 터뜨렸다. 알렉시우스 3세는 재물을 챙겨 도망갔고,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알렉시우스 4세를 맞이하여 십자군은 도시에 입성할 수 있었다.[171]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십자군 원정의 목표가 변질되고, 기독교 도시인 콘스탄티노폴리스가 공격받는 비극적인 결과를 초래했다.
3. 3.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1204년)
1203년 알렉시우스 4세는 십자군과의 약속대로 실명한 채 감옥에 있던 아버지 이사키우스 2세를 복위시키고 자신도 공동 황제가 되었지만,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애초에 무리한 약속이었고, 알렉시우스 3세가 이미 국고를 탕진했기 때문이다.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겠다는 약속은 이사키우스 2세조차 아들을 비난할 정도였다.[171]알렉시우스 4세는 엄청난 세금을 부과하고 귀중품을 수거했지만, 이는 시민들의 반발을 불러왔다. 콘스탄티노폴리스 내 이탈리아 상인들이 테러를 당하고 보복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또한 십자군 주둔 기간 연장 요구는 십자군과 시민 양측 모두의 불만을 샀고, 엔리코 단돌로는 추가 금액을 요구했다.[171]
알렉시우스 무르주플루스는 알렉시우스 4세에게 빚 상환 철회를 요구했고, 황제는 이를 받아들였다. 십자군은 항의했지만 무시당했고, 단돌로는 알렉시우스 4세에게 폭언을 퍼부었다. 십자군과 반대파 간의 공격과 보복이 이어졌지만, 알렉시우스 4세는 소극적이었다.[171]
시민들은 성 소피아 성당을 점거하고 니콜라스 카나바우스를 황제로 추대했다. 알렉시우스 4세는 십자군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알렉시우스 무르주플루스가 알렉시우스 5세로 즉위하여 카나바우스를 살해하고 십자군을 공격했다가 패배했다. 알렉시우스 5세는 회담을 제의했지만, 십자군은 알렉시우스 4세의 복위를 요구했고, 알렉시우스 5세는 이사키우스 2세와 알렉시우스 4세를 살해했다.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대한 두 번째 공격을 감행했다.[171]
십자군은 해안 쪽 성벽이 약점임을 알고 있었지만, 알렉시우스 5세는 목제 탑으로 보강했다. 4월 9일 십자군의 총공격은 실패했고, 첫날 전투는 비잔티움 군의 승리로 끝났다.[171]
다음 날, 십자군은 더 높은 곳에서 가교를 놓고, 탑 하나에 두 개의 가교를 놓는 작전을 펼쳤다. 한 프랑스 기사가 쓰러졌다가 다시 일어나자, 수비군이 도망치면서 탑이 점령되었다. 십자군이 성벽에 구멍을 내고 진입하자, 동로마군은 도망치기 시작했다. 알렉시우스 5세는 저항하다가 트라키아로 도망쳤고, 동로마 측은 십자군 영주들을 새 황제로 맞이하려 했다.[171]
그러나 십자군 병사들은 굶주리고 지쳐 있었으며, 동로마인들에 대한 증오심을 품고 있었다. 결국 도시에서는 십자군에 의한 학살, 화재, 약탈이 자행되었다. 신성모독이 자행되고, 문화재와 보물이 파괴되고 약탈되었다. 프랑크군은 파괴적인 약탈을, 베네치아인들은 보물을 빼돌렸다. 이때 네 마리의 청동 마상도 산마르코 대성당으로 옮겨졌다.[171]
이 약탈은 콘스탄티노폴리스 역사상 가장 암울한 순간이었다. 오스만 투르크에게 함락될 때조차 이때만큼 암울하지 않았다.[172] 십자군은 약탈자로 변했다. 여성, 성직자, 귀족, 심지어 도시 내 거주하던 다른 국가 상인들조차 약탈, 폭력, 살육을 피하지 못했다. 약탈자들은 모든 건축물에서 약탈과 파괴를 저질렀고, 하기아 소피아 안으로 말이나 당나귀를 끌어들여 성물과 보물을 실어 날랐다.[173]
4. 십자군 이후의 상황
1204년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약탈한 후, 약탈품은 새 황제에게 4분의 1, 나머지는 프랑크군과 베네치아군이 절반씩 나누어 가졌다.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가 아닌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이 엔리코 단돌로의 반대를 무릅쓰고 새 황제로 선출되어, 5월 12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즉위식을 갖고 라틴 제국을 건국했다. 교황은 이를 승인하고 예루살렘 원정을 요청했으나 실시되지 않았다.
이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방전에 대해서는 십자군 측 빌라르두앵의 조프루아와 동로마 측 니케타스 코니아테스가 기록을 남겨 중요한 역사적 자료가 되고 있다.
십자군은 보스포루스 해협을 건너 갈라타 탑을 점령하고 황금각으로 진입했다. 시민들은 알렉시오스 4세를 보여주는 십자군을 조롱했다.[47] 블라케르나이 궁전 맞은편에서 첫 공격은 실패했지만, 베네치아 함대가 해상 성벽의 25개 탑을 점령했다. 화재로 도시의 120acre가 파괴되고 2만 명이 집을 잃었다.[48]
알렉시오스 3세는 공격 실패 후 모시노폴리스로 도망쳤고,[50] 이사악 2세가 복위되고 알렉시오스 4세가 공동 황제가 되었다.[50] 알렉시오스 4세는 성상 파괴를 통해 자금을 조달하려 했으나,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는 이를 "로마 제국의 몰락으로의 전환점"으로 규정했다.[135]
알렉시오스 4세는 십자군과 협정 기간을 연장했지만, 반란으로 많은 라틴인들이 학살당했고, 십자군은 모스크를 공격하고 시가지에 불을 질러 10만 명이 집을 잃었다.
1204년 1월, 이사키오스 2세 사망 후, 동로마 상원은 니콜라오스 카나보스를 황제로 선출했으나 그는 거부했다. 알렉시오스 5세 두카스는 알렉시오스 4세를 처형하고 황제가 되어 콘스탄티노폴리스 방어 시설을 강화했다.[137]
4. 1. 라틴 제국의 성립과 동로마 제국의 분열
1202년 십자군이 베네치아를 출발한 이후, 알렉시우스 4세의 제안을 받아들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여 함락시켰다. 1204년 4월 13일,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완전히 함락시켰다.[55]
후속 조약에 따라 제국은 베네치아와 십자군 지도자들 사이에 분할되었고,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라틴 제국이 수립되었다.[55] 플랑드르 백작 보두앵이 황제로 선출되어, 5월 12일 하기아 소피아에서 즉위식을 갖고 라틴 제국을 건국했다.
몬페라토의 보니파치오는 새로운 라틴 제국의 속국인 테살로니키 왕국을 건국했다. 베네치아인들은 에게 해에 키클라데스 공국을 세웠다. 한편, 비잔티움 난민들은 테오도로스 1세 라스카리스가 이끄는 니케아 제국, 트라페주스 제국, 에페이로스 데스포타트 등의 잔존 국가를 세웠다.[55]
베네치아 공화국은 그리스에 여러 식민지를 확보하였고, 이는 마르 주(Stato da Màr)의 일부를 이루었다. 그중 일부는 1797년 공화국의 멸망까지 존속하였다. 주요 거점은 다음과 같다.
영토 | 통치 기간 | 설명 |
---|---|---|
크레타 (칸디아) | 1211년–1669년[65] | 공화국의 가장 중요한 해외 영토 중 하나였으나, 크레타 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에 함락[66] |
코르푸 | 1207년–1214년 및 1386년–1797년 | 4차 십자군 직후 제노바 지배자로부터 점령, 1258년 시칠리아 왕국에 점령, 1386년 베네치아 재점령 |
레프카다 | 1684년–1797년 | 모레아 전쟁 중 베네치아인들에게 정복 |
자킨토스 | 1479년–1797년 | 1479년 베네치아에 함락 |
케팔로니아와 이타카 | 1500년–1797년 | 1500년 12월 베네치아인들에게 정복 |
티노스와 미코노스 | 1390년–1797년 | 1390년 베네치아에 유증 |
펠로폰네소스 반도와 그리스 본토의 여러 해안 요새 | - | 메소니, 코로니, 나프플리오, 아르고스, 아테네, 파르가, 레판토, 파트라스, 모네엠바시아, 보니차, 프레베자 등 |
북부 스포라데스 제도 (스키아토스, 스코펠로스, 알로니소스) | 1453년–1538년 |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 후 베네치아 지배, 1538년 오스만 제국에 점령 |
4. 2. 동서 교회의 분열 심화
제4차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하고 약탈한 사건은 동서 교회 분열을 심화시키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십자군은 3일 동안 도시를 약탈하며 수많은 종교 시설을 파괴하고 성물을 훼손하는 만행을 저질렀다.[106] 니케타스 코니아테스를 비롯한 동시대 역사가들은 십자군의 만행을 비난하며, 이 사건이 동서 교회 간의 증오와 불신을 깊게 만들었다고 기록했다.[160]당시 교황 인노켄티우스 3세는 십자군의 행동에 분노하며, "그리스 교회가 라틴인들에게서 멸망과 어둠의 행위만을 보았는데, 어떻게 교회의 일치와 사도좌에 대한 헌신으로 돌아갈 수 있겠는가?"라고 한탄했다.[148] 그는 십자군이 종교, 나이, 성별을 가리지 않고 약탈과 폭력을 자행했으며, 심지어 교회의 보물까지 약탈했다고 비난했다.
이러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2004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스 1세에게 제4차 십자군의 만행에 대해 공식적으로 사과하고, 동서 교회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노력을 촉구했다.
4. 3. 제4차 십자군의 역사적 영향과 평가
제4차 십자군은 중세 유럽과 지중해 세계에 광범위하고 장기적인 영향을 미쳤다. 십자군 운동의 본래 종교적 명분을 퇴색시키고 변질시켰으며,[151] 동로마 제국의 쇠퇴를 가속화하여 결국 오스만 제국의 발흥에 간접적인 영향을 미쳤다.[165]==== 십자군 운동의 변질 ====
제4차 십자군은 본래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목표로 했으나, 베네치아 공화국의 영향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하고 함락시켰다. 이는 기독교 세계에 큰 충격을 주었으며, 십자군의 종교적 명분에 대한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151]
- 교황의 권위 약화: 교황 인노첸시오 3세는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을 반대하고 파문하겠다고 위협했지만, 십자군은 이를 무시했다.[75] 이는 교황의 권위가 세속 권력에 의해 도전받을 수 있음을 보여주었다.
- 종교적 명분 퇴색: 십자군이 같은 기독교 국가인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고 약탈한 것은 십자군의 종교적 정당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155] 이후 십자군 운동은 종교적 열정보다는 세속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해졌다.
==== 동로마 제국의 쇠퇴와 오스만 제국의 발흥 ====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은 동로마 제국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 제국은 여러 개의 작은 국가로 분열되었고, 이는 결국 오스만 제국의 발칸 반도 진출을 용이하게 했다.[165]
- 동로마 제국의 분열: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라틴 제국을 세웠고, 동로마 제국은 니케아 제국, 에피로스 데스포타트, 트라페주스 제국 등 여러 개의 작은 국가로 분열되었다.[152]
- 경제적 쇠퇴: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동서 무역의 중심지였으나, 십자군의 약탈로 인해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153]
- 오스만 제국의 발흥: 동로마 제국의 약화는 오스만 제국이 발칸 반도와 소아시아 지역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데 유리한 환경을 제공했다.[165]
==== 동서 교회의 분열 심화 ====
제4차 십자군은 동서 교회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켰다. 콘스탄티노폴리스 약탈 과정에서 발생한 폭력과 약탈은 동방 그리스 정교회 신자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서방 로마 가톨릭 교회에 대한 불신을 증폭시켰다.[151]
- 종교적 갈등 심화: 십자군은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교회와 수도원을 약탈하고 성직자들을 살해하는 등 만행을 저질렀다.[58] 이는 동서 교회 간의 종교적 갈등을 더욱 심화시켰다.
- 화해의 어려움: 십자군의 만행은 동방 교회 신자들에게 깊은 상처를 남겼고, 서방 교회와의 화해를 더욱 어렵게 만들었다.[160]
==== 현대의 역사적 평가와 논쟁 ====
제4차 십자군에 대한 현대의 역사적 평가는 다양하며, 특히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의 의도성을 둘러싼 논쟁이 존재한다.
- 의도적 공격설: 전통적인 견해는 십자군이 처음부터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격할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고 주장한다.[164] 이들은 베네치아의 상업적 이익과 십자군 지도자들의 야망이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의 주요 원인이었다고 본다.
- 우발적 사건설: 일부 역사가들은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이 십자군의 원래 계획이 아니라, 일련의 우발적인 사건들의 결과였다고 주장한다.[164] 이들은 십자군의 재정적 어려움, 동로마 제국의 내부 혼란, 베네치아의 영향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 공격으로 이어졌다고 본다.
제4차 십자군은 중세 유럽 역사에서 중요한 전환점이었으며, 그 영향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십자군 운동의 변질, 동로마 제국의 쇠퇴, 동서 교회의 분열 심화 등 제4차 십자군이 남긴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역사적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다.
5. 한국의 관점에서의 제4차 십자군
제4차 십자군은 서유럽의 기독교 국가들이 이슬람 세력으로부터 성지를 탈환하기 위해 시작되었지만, 실제로는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함락시키고 약탈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십자군의 변질은 종교적 명분 아래 숨겨진 정치적, 경제적 욕망이 어떻게 역사를 왜곡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한국사에서도 이와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임진왜란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명나라를 정복하겠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제로는 일본 내부의 불만을 잠재우고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려는 목적이 있었다. 이처럼 명분과 실제 목적이 다른 전쟁은 백성들에게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제4차 십자군의 사례는 우리에게 명분 뒤에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고, 역사를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비판적 시각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특히, 강대국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고, 우리 자신의 주체적인 관점을 확립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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