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라 쵸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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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라 쵸뵤는 교사 출신으로, 류큐 정부 행정 수반과 오키나와현 지사를 역임한 인물이다. 1968년 류큐 입법 선거에서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반환"을 주장하며 당선되었고, 미군 기지 축소를 요구하며 오키나와의 일본 반환을 추진했다. 행정 수반 재임 중에는 통상산업성과 갈등을 겪었으며, 1972년 오키나와현 지사로 선출되어 1976년까지 재임했다. 지사 퇴임 후에는 혁신 진영을 지지하며 활동하다가 199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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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야라 쵸뵤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기본 정보 | |
![]() | |
| 원어 이름 | 屋良 朝苗 (야라 쵸뵤) |
| 출생일 | 1902년 12월 13일 |
| 출생지 | 요미탄, 일본 제국 |
| 사망일 | 1997년 2월 14일 |
| 사망지 | 나하, 일본 |
| 정당 | 무소속 |
| 학력 | 히로시마 대학교 |
| 경력 | |
| 직책 | 초대 오키나와현 지사 |
| 임기 시작 | 1972년 5월 15일 |
| 임기 종료 | 1976년 6월 14일 |
| 전임 | 제임스 벤자민 램퍼트 (미국 류큐 열도 행정부 고등판무관) 자신 (류큐 열도 행정부 주석) |
| 후임 | 고이치 다이라 |
| 직책 | 류큐 정부 주석 |
| 임기 시작 | 1968년 11월 15일 |
| 임기 종료 | 1972년 5월 14일 |
| 전임 | 세이호 마쓰오카 |
| 후임 | 자신 (오키나와현 지사) |
2. 생애
야라 쵸뵤는 교사 출신으로, 미국 점령 하 류큐 정부의 행정 수반으로 선출될 당시 오키나와 교원 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있었다.[1] 그는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반환"을 요구하며 선거 운동에서 승리하였다.[2]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1902년 12월 13일 오키나와현 나카가미군 요미탄촌에서 태어났다.[12] 오키나와현 사범학교를 거쳐 1930년 히로시마 고등사범학교(현재의 히로시마 대학)를 졸업했다.[6] 졸업 후 오키나와현 여자사범학교, 오키나와현립 제1고등여학교, 타이베이 제1사범학교, 주립 타이난 제2중 등에서 교직을 맡았다.[7] 타이베이 제1사범학교 제자 중에는 야마나카 사다노리가 있으며, 훗날 오키나와 개발청 장관을 역임했다.2. 2. 정치 입문
오키나와 전투 이후, 오키나와 군도 정부 문교부장, 오키나와 교직원회 회장 등을 역임했다.[12] 1968년 행정수반 선거에서 혁신 공동 후보로 출마하여 보수계 니시메 쥰지를 누르고 당선되었다.[8][9] 이 선거에서 야라는 본토로의 조기 복귀를 호소하여 유권자들의 지지를 얻었다.2. 3. 행정수반 재임
1968년 류큐 입법 선거에서 승리한 후,[2] 같은 해 12월 사토 에이사쿠 총리와 만나 오키나와의 즉각적인 일본 반환에 대해 논의했다.[1] 행정수반 재임 중에는 오키나와 반환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 미일 양국 정부와 협상을 진행했으며,[8][9] 복귀 전 해에 "기지가 없는 평화의 섬"을 요구하는 건의서를 작성했다.[12]1970년에는 "외국 자본 도입에 있어서, 우리는 오키나와 현의 이익을 우선시할 것이며 본토 정부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발언하여 통상산업성(MITI)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5] 야라는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가해지는 경제적, 환경적 스트레스를 이유로 미군 기지 축소를 촉구했다.[3][4]
야라는 비교적 온건한 성향을 가지고 있었고, 본토 정부의 양보를 조건으로 급진적인 오키나와 활동가들에게 제안된 총파업을 철회하도록 설득하기 위해 자신의 영향력을 사용하라는 일본 정부의 요청에 협력했다.[1]
2. 4. 오키나와현 지사 재임
1972년 오키나와현 지사 선거에서 재선되어 1976년까지 오키나와현 지사로 2기 재임했다.[12] 오키나와 반환식에서 일부 현민이나 활동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천황 폐하 만세를 삼창한 것은 물의를 빚었다.[12] 같은 해 선거에 출마 요청을 받았으나, 고사하고 퇴임했다.[12]지사 재임 중 1975년 7월 17일 오키나와현 이토만시에서 황족을 대상으로 한 화염병 테러 사건 (히메유리탑 사건)이 발생했다.[10][11] 야라 쵸뵤는 사전에 경비 당국의 우려에도 "경찰은 화염병이 날아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라며 경비를 삭감했다. 또한, 반 천황제·반일 오키나와 해방 활동가가 잠복해 있던 지하호 내부를 황태자 및 황태자비 방문에 앞서 안전 확인하자는 경비진의 주장에 "'성역'에 맨발로 들어가는 것은 현민 감정을 거스른다"라며 실시하지 않았다.[10][11] (후에 현지에서 취재 중이던 오키나와 타임스 기자가 TBS 프로그램에서 "수상한 남자가 있어서 주목하고 있었습니다"라고 발언한 것처럼, 사전 확인을 했더라면 미연에 방지할 수 있었을 가능성이 높았다.)[10][11]
식수 축제, 오키나와 특별 국체, 오키나와 해양 박람회 등 "복귀 3대 사업"을 완수했다.[12]
2. 5. 퇴임 이후
야라 쵸뵤는 지사 퇴임 후에도 오키나와의 보혁 대립 속에서 혁신 진영의 상징적인 존재로 남아 혁신 공투 회의를 이끌었다. 또한 후임 지사 후보로 타이라 코이치를 지지하는 등 활동을 이어갔다.[12]회담 등에서 직접 메모를 하는 열정적인 모습을 보였으며, 그의 메모와 일지는 사후 요미탄촌에 기증되었다. 이 자료들의 복제본은 오키나와현 공문서관에서 순차적으로 공개되고 있다.[12]
1997년 2월 14일, 야라 쵸뵤는 자택에서 나하시의 오키나와 적십자 병원으로 옮겨졌으나 심부전으로 사망했다.[13]
3. 평가
야라 쵸뵤는 오키나와 반환과 전후 오키나와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는다. 그는 교사 출신으로, 오키나와 교원 협회 회장을 역임하던 중 류큐 정부의 행정 수반으로 선출되었다.[1] 1968년 류큐 열도 입법 선거에서 "즉각적이고 무조건적인 반환"을 주장하며 당선된 후,[2] 일본 정부와 협력하여 오키나와의 조기 반환을 추진했다.
야라는 온건하고 현실적인 노선을 추구하며 일본 정부와 협력하는 한편, 오키나와 주민들의 경제적, 환경적 어려움을 이유로 미군 기지 축소를 강력하게 요구했다.[3][4] 1970년에는 "외국 자본 도입에 있어서, 오키나와 현의 이익을 우선시할 것이며 본토 정부에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발언하며 통상산업성(MITI)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5]
행정수반 재임 기간 동안 야라는 미일 양국 정부와의 어려운 협상을 진행하며 "세로 주름의 야라"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로 고뇌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는 오키나와 반환을 원활하게 추진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기지가 없는 평화의 섬"을 요구하는 건의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1972년 오키나와현 지사 선거에서 재선되어 1976년까지 2기 동안 오키나와현 지사를 역임했다.
그러나 야라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도 존재한다. 특히 1975년 히메유리탑 사건 당시 경비 당국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그런 일은 절대 없습니다"라며 경비를 삭감하고, 황태자 부부 방문 전 안전 확인을 주장하는 경비진에게 "'성역'에 맨발로 들어가는 것은 현민 감정을 거스른다"라며 제지한 점은 비판을 받았다.[10][11]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라는 식수 축제, 오키나와 특별 국체, 오키나와 해양 박람회 등 "복귀 3대 사업"을 성공적으로 완수하며 오키나와 발전에 기여했다. 지사 퇴임 후에도 혁신 진영의 상징적인 존재로서 활동하며 오키나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4. 저서
屋良朝苗|야라 쵸뵤일본어가 국립정보학연구소에 수록한 논문은 다음과 같다.[1]
| 논문 제목 | 게재지 | 발행년도 |
|---|---|---|
| 沖縄地域社会における社会運動の展開過程 | 琉大社会論叢 | 1970 |
| 沖縄の毒ガス移送問題をめぐって | アジア・アフリカ研究 | 1971 |
| 沖縄における主席公選問題 | 琉大沖縄問題研究 | 1968 |
| 沖縄の復帰問題と住民運動 | アジア・アフリカ研究 | 1968 |
| 沖縄の日本復帰と私 | 国際学論集 | 1995 |
참조
[1]
학술지
Okinawa and the 'Homeland'
https://www.jstor.or[...]
1969-01-01
[2]
학술지
THE SATO GOVERNMENT AND THE OKINAWA PROBLEM
https://www.jstor.or[...]
1971-01-01
[3]
학술지
Okinawa Confidential, 1969: Exploring the Linkage between the Nuclear Issue and the Base Issue
https://www.jstor.or[...]
2013-01-01
[4]
학술지
Okinawan Reversion in Retrospect
https://www.jstor.or[...]
1975-01-01
[5]
학술지
FORECLOSING A JAPANESE HONG KONG: OKINAWA, 1967-1972
https://www.jstor.or[...]
2000-01-01
[6]
기타
『広島文理科大学・広島高等師範学校・第二臨時教員養成所一覧 自昭和5年至昭和6年』廣島文理科大学、1930年12月、p.417
https://dl.ndl.go.jp[...]
1930-12-01
[7]
웹사이트
復帰の象徴 屋良朝苗氏の業績
http://ryukyushimpo.[...]
琉球新報
1997-02-14
[8]
웹사이트
日米、琉球主席公選で裏工作 沖縄返還前の68年
http://ryukyushimpo.[...]
琉球新報
2010-12-22
[9]
웹사이트
琉球主席公選で裏工作 日米、自前候補の当選狙う - 沖縄返還前の68年 外交文書公開
http://www.okinawati[...]
沖縄タイムス
2010-12-22
[10]
서적
わが上司 後藤田正晴
文春文庫
2002-01-01
[11]
서적
菊のご紋章と火炎ビン
文藝春秋
[12]
웹사이트
屋良朝苗日誌
http://www.archives.[...]
沖縄県公文書館
[13]
웹사이트
屋良朝苗・元知事が死去 悲願の本土復帰を実現
http://ryukyushimpo.[...]
琉球新報
1997-0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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