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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유키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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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마토 유키하라는 1912년 시라세 노부의 남극 탐험 당시 일본 제국령으로 선포된 남극 지역의 명칭이다. 시라세는 로스 빙붕에 도달하여 일본 국기를 게양하고, 그곳에서 바라본 설원을 야마토 유키하라라고 명명했다. 하지만 일본은 후속 탐험대를 파견하지 않아 해당 지역의 범위는 불분명해졌고,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남극 영유권을 포기하면서 야마토 유키하라에 대한 영유권 주장도 무효화되었다. 현재 야마토 유키하라는 루스벨트 섬 남쪽의 로스 빙붕 위에 위치한 것으로 밝혀졌으며, 2012년 일본 국립극지연구소에 의해 정식 지명으로 채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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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마토 유키하라 - [옛 나라]에 관한 문서
지리 정보
기본 정보
현지 이름야마토 유키하라
야마토 세츠겐
역사
존속 기간 시작1912년
존속 기간 끝1952년?
선행 국가로스 속령
사건영유권 주장
사건 1원정대의 요코하마 복귀
사건 2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발효
사건 날짜1912년 1월 28일
사건 날짜 11912년 6월 20일
사건 날짜 21952년 4월 28일
정치
정치 체제일본 제국의 영유권 주장 지역
기타 정보
국기 그림Flag of the Imperial Japanese Antarctic Expedition.svg
국기 이름원정대 기

2. 발견과 명명

1912년 1월, 시라세 노부는 카이난마루를 통해 로스 빙붕에 접근하여 고래만 근처 작은 만(시라세는 이 만을 카이난 만이라고 명명)에 정박한 후, 그곳에서 빙벽에 올라 본거지를 건설했다. 1월 20일, 돌진대원 4명(다케다 테이타로 학술부장, 미이소 키요조 위생부장, 야마베 야스노스케, 하나모리 신키치)와 함께 남극점을 목표로 출발했지만, 결국 1월 28일에 도달한 남위 80도 05분 서경 156도 37분 지점이 가장 남쪽이었다. 시라세는 그 지점에 일장기를 게양했다. 그곳에서 보이는 한계를 "야마토 유키하라"(야마토 유키하라/大和雪原일본어)라고 명명하고 일본 제국 영토임을 선언했다.

먼저 텐트 옆에 구멍을 파고, 가지고 온 명부와 구리 상자를 묻었다. 그 옆에 1칸 정도 길이의 대나무 장대를 세우고, 그 위에 미리 준비한 대국기를 꽂고, 거기에 빨간 페인트로 칠한 삼각형 양철 회전 깃발을 세우고, 그 깃발 혀에 돌진대원 전원이 정렬했다. 이때 시라세 대장은 국기 아래에서 엄숙하게 일반 동정자에게 감사의 뜻을 표하는 식사를 하고, 삼가 황제의 만세를 삼창했다. 일행은 이에 화답하여 만세를 삼창했고, 그것이 끝나자 대장은 이 야영지를 중심으로 눈에 보이는 한계, 아득하고 끝없는 대설원에 야마토 유키하라라고 명명했다.

시라세 남극 탐험대 탐험 후 즉시 일본의 후속 탐험대가 보내지지 않아 야마토 유키하라의 범위는 명확히 정의되지 않았다. 또한 현재 야마토 유키하라는 육지가 아닌, 루스벨트 섬 남쪽의 로스 빙붕 위에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 시라세는 남극 대륙에 상륙했음에도 불구하고, 조그만 암석조차 가져오지 못한 것을 후회했다고 한다.

시라세는 1931년 (쇼와 6년)과 1938년 (쇼와 13년)에 정부에 기부 원서를 제출했지만, 정부는 1939년 (쇼와 14년) 3월 22일의 답변서에서 "제반 사정을 고려하여 적절한 방안을 충분히 연구한 후, 선처할 의향"이라고 답변하며 영토로 주장하는 데 소극적이었다. 또한, 1942년 (쇼와 19년)에는 영국이 로스 해 속령의 영유권을 선언한 것에 대한 대항 조치와 관련하여 니시 하루히코 외무차관이 "영토 획득에는 그 의지와 그것을 실효적으로 만들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며, 단순한 영유권 선언 또는 통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통설"이며 "일본이 지금 이러한 선언을 하는 것도 그 외의 토지를 타국의 영토로 인정하는 것과 같은 역효과를 발생시킬 우려도 있으며, 그 시기에 대해서도 고려해야 한다"라고 귀족원에서 답변했다. 시라세는 제2차 세계 대전 후에도 1946년(쇼와 21년)에도 남극에서의 일본의 영유권 확인 서한을 보냈지만, 결국 1951년에 서명되어 1952년에 발효된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 제2조에서 일본국 정부는 남극 지역의 영유권을 포기했고, 일본 영토 선언은 무효가 되었다.

일본 국내에서 사용되던 지명이었지만, 2012년 6월, 다시 일본 국립 극지 연구소 남극 지명 위원회는, 시라세 노부의 남극 탐험 100주년을 기념하여 "야마토 유키하라"(やまとゆきはら Yamato Yukihara)라는 지명을 정식으로 부여하기로 했다.

2. 1. 시라세 노부의 남극 탐험

1912년 1월, 시라세 노부는 카이난마루를 통해 로스 빙붕에 접근하여 고래만 근처 작은 만(카이난 만)에 근거지를 건설하고, 1월 20일 대원들과 함께 남극점을 향해 출발했다. 하지만 1월 28일에 도달한 남위 80도 05분, 서경 156도 37분이 그들이 도달한 가장 남쪽 지점이었다. 시라세는 이 지점에서 일장기를 게양하고, 그곳에서 바라본 남극 일대를 '''야마토 유키하라'''(大和雪原)로 명명하며 일본 제국령으로 선포하였다.

당시 시라세 노부 탐험대는 텐트 옆에 구멍을 파고 명부와 구리 상자를 묻은 뒤, 대나무 장대 위에 일장기와 깃발을 세우고 일왕의 만세를 삼창하며 야마토 유키하라를 명명했다.

이후 일본이 즉시 후속 탐험대를 보내지 않아 야마토 유키하라의 범위는 명확하게 정의되지 않았다. 또한 현재는 야마토 유키하라가 육지가 아닌, 루스벨트 섬 남쪽 로스 빙붕에 위치한 것으로 밝혀졌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패배하고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발효되면서 일본은 남극 지역의 영유권을 포기했고, 야마토 유키하라에 대한 영유권 주장도 무효화되었다.[4]

2. 2. 야마토 유키하라의 범위와 현재 위치

1912년 시라세 노부는 로스 빙붕에 접근하여 일본의 국기를 게양하고 그곳에서 바라본 남극 일대를 야마토 유키하라(야마토 유키하라/大和雪原일본어)라고 명명하며 일본 제국령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후 일본 탐사대를 보내지 않아 야마토 유키하라의 범위는 명확하지 않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패배하고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발효되면서 영유권 주장은 포기되었다.

현재는 야마토 유키하라가 육지가 아닌, 루스벨트 섬 남쪽 로스 빙붕 위에 위치한 것으로 밝혀졌다. 시라세 노부는 남극에 상륙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조각의 암석도 가져가지 못한 것을 한탄했는데, 그가 도달한 곳은 빙붕 위였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였다.

3. 일본의 영유권 주장과 포기

시라세 노부는 1931년1938년에 정부에 기부 원서를 제출했지만, 일본 정부는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2] 1942년에는 영국이 로스 해 속령의 영유권을 선언한 것에 대한 대항 조치와 관련하여 니시 하루히코 외무차관이 "영토 획득에는 그 의지와 그것을 실효적으로 만들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며, 단순한 영유권 선언 또는 통고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언급했다.[3] 시라세는 제2차 세계 대전 후인 1946년에도 남극에서의 일본 영유권 확인 서한을 보냈지만[4], 1952년 샌프란시스코 평화 조약이 발효되면서 일본은 남극 지역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포기했고, 야마토 유키하라에 대한 영토 선언은 무효가 되었다.

3. 1. 일본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

1939년 일본 정부는 "제반 사정을 고려하여 적절한 방안을 충분히 연구한 후, 선처할 의향"이라고 답변하며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1942년, 영국이 로스 해 속령의 영유권을 선언한 것에 대한 대응과 관련하여, 일본 외무차관은 "영토 획득에는 실효적인 조치가 필요하며, 단순한 영유권 선언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언급하며 신중한 입장을 취했다.

3. 2.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과 영유권 포기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발효되면서 일본은 남극 지역에 대한 영유권 주장을 공식적으로 포기했고, 야마토 유키하라에 대한 영유권 선언은 무효가 되었다.[4] 일본은 1939년 정부 답변서에서 "제반 사정을 고려하여 적절한 방안을 충분히 연구한 후, 선처할 의향"이라고 답변하며 영토 주장에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2] 또한 1942년 영국이 로스 해 속령 영유권을 선언한 것에 대한 대항 조치와 관련하여 니시 하루히코 외무차관은 "영토 획득에는 그 의지와 그것을 실효적으로 만들기 위한 조치가 필요하며, 단순한 영유권 선언 또는 통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이 통설"이라고 언급했다.[3]

4. 2012년 정식 지명 채택

1912년 1월, 시라세 노부는 가이난마루(開南丸)를 통해 로스 빙붕에 접근하여 고래만 근처 작은 만에 근거지를 건설하였다. 1월 20일 대원들과 함께 남극점을 향해 출발했지만 좌초되고, 1월 28일에 도달한 남위 80도 05분 서경 156도 37분이 그들이 도달한 가장 남쪽인 지점이었다. 시라세는 이 지점에서 일본 국기를 게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바라본 남극 일대를 '''야마토 유키하라'''(やまとゆきはら)라고 명명하고 일본 제국령으로 선포하였다.

이후 일본은 탐사대를 보내지 않아 야마토 유키하라의 범위는 명확하지 않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 제국이 패배하고 1952년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이 발효되면서 영유권 주장은 포기되었다.

현재는 야마토 유키하라가 육상이 아니라, 루스벨트 섬 남쪽 로스 빙붕으로 판명되었다. 시라세 노부는 남극에 상륙했음에도 불구하고 한 조각의 암석도 가져가지 못한 것을 한탄했는데, 그가 도달한 곳은 빙붕 위이므로 당연한 결과였다.

야마토 설원에 대해서는 "야마토 세츠겐"이라고 읽는 경우도 있지만, 시라세 부대의 공식 기록인 『남극기』에서는 "야마토 유키하라"라고 표기되어 있다. 2012년 국립극지연구소 남극 지명 위원회 및 남극 지역 관측 통합 추진 본부에 의해 정식 지명으로 채택될 때에도 "야마토 유키하라"라는 읽기가 채택되었다.

5. 명칭 읽기

야마토 유키하라는 '야마토 세츠겐'으로 읽는 경우도 있지만, 시라세 부대의 공식 기록인 『남극기』에서는 '야마토 유키하라'라고 표기되어 있으며 2012년에 국립극지연구소 남극 지명 위원회 및 남극 지역 관측 통합 추진 본부에 의해 정식 지명으로 채택될 때에도 '야마토 유키하라'라는 읽기가 채택되었다.

참조

[1] 서적 南極探検 博文館 1913-01-22
[2] 간행물 帝国議会衆議院議事摘要 第74回下巻 https://dl.ndl.go.jp[...]
[3] 간행물 第七十九議會ニ於ケル外交關係質疑應答要旨 (調 ; 第241號) https://dl.ndl.go.jp[...]
[4] 웹사이트 本の万華鏡 第19回 白瀬矗、南極へ―日本人初の極地探検 第2章 白瀬矗の探検人生と、関係者との人間ドラマ https://www.ndl.go.j[...] 国立国会図書館 2020-04-12
[5] 웹사이트 Yamato Yukihara Camp Site (historical) https://geonames.usg[...] 2018-0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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