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스이 산테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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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야스이 산테쓰는 1590년에 태어나 1652년에 사망한 일본 에도 시대의 바둑 기사이다. 어린 시절부터 바둑을 배웠으며,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발탁되어 바둑 상대 역할을 했다. 1626년 도쿠가와 히데타다 앞에서 나카무라 도세키와의 대국에서 승리하며 어성기의 시작을 알렸다. 나카무라 도세키 사후, 바둑 기사 우두머리 지위를 심의받았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의 기력은 명인과 상수 사이로 평가받았으며, 나카무라 도세키와 100여 국의 대국을 벌였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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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스이 산테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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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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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야스이 산테쓰 |
본명 | 안도 사다요시 (安藤 貞祥) |
별명 | 쇼잔 (少詹), 슌토쿠 (春徳) |
작위 | 종위하 |
봉록 | 150석 |
출생 | 간에이 원년 (1624년) |
사망 | 겐로쿠 6년 5월 11일 (1693년 6월 14일) |
묘소 | 도쿄도 분쿄구 고이시카와 덴쇼지 |
신분 | 고후 번사 |
가문 | 안도가 |
양가 | 야스이가 |
가족 관계 | |
아버지 | 안도 모리요시 |
어머니 | 오카베 나가모리의 딸 |
양아버지 | 안도 요시치카 |
아내 | 야스이 산치카의 딸 |
자녀 | 아들: 야스이 산테쓰 (2세) 딸: 구보타 번사 미우라 모리타카의 아내 |
이력 | |
직업 | 바둑 기사 천문학자 |
바둑 가문 | 야스이 가문 (초대 당주) |
스승 | 혼인보 산사 |
제자 | 야스이 산테쓰 (2세) |
주요 업적 | 조쿄력 제작 |
일본어 | |
일본어 표기 | }} |
로마자 표기 | Yasui Santetsu |
관련 정보 | |
관련 인물 | 시부카와 하루미 |
2. 생애
1590년(덴쇼 18년), 안씨(안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바둑을 배웠으며, 혼인보 산사의 제자라고도 전해진다(『난가당기화』).
1600년(게이초 5년) 11세 때,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를 통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후시미성에서 불려 30석 12인 부양을 받았다. 슨푸에서 바둑 상대 역할을 하거나, 혼인보 산사, 하야시 리겐 등과 함께 바둑 모임 등에 초대되었지만, 기온사의 피관(「순구기」)이자, 큐호지 출신이라고 기록된 것은(「녹원일록」) 오사카 큐호지(야오시) 출신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1608년(게이초 13년), 삭발하고 산테쓰라고 칭했다.
1612년(게이초 17년)에는 도세키 50석 다음가는 30석의 봉록을 받았다. 오사카 전투에서는 숙부 안이 도톤이 도요토미 측에 있었지만, 아버지 소슌과 숙부 사다요시를 이에야스에게 소개하고, 도쿠가와 측 안내자로 추천했다. 그 후 교토에 거처를 마련하고, 매년 3월에 산사 등과 함께 에도로 내려갔다.
1626년(간에이 3년) 니조 성에서 도쿠가와 히데타다 앞에서 나카무라 도세키와 대국하여 선번 3목 승리했다. 그 이전에도 어전 대국이 행해졌지만, 이 바둑이 어성기의 시작이라고 한다.
도세키가 사망한 후 1644년(쇼호 원년), 혼인보 산에쓰, 이노우에 인세키(겐카쿠), 산테쓰 등에게 지샤 봉행으로부터 도세키 후계의 바둑 기사 우두머리 지위의 심의가 있었고, 산테쓰는 자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으며, 산에쓰, 인세키는 사퇴했기 때문에 공석이 되었다('''기소 심의''', 「전신록」).
친 자식이 없었기 때문에, 또는 아직 어렸기 때문에 문하생 안이 산치를 양자로 삼아 가독을 물려주었다. 다만 나중에 장남이 2세 산테쓰로 안이 가문을 이었기 때문에, 가계로서의 안이 가문과 바둑 가문으로서의 안이 가문이 이 시기에 병립하고 있었다는 시각도 있다. 차남 칸자에몬은 나이토 가문 가신이 되었고, 삼남 지테쓰는 산치를 이어 안이 가문 3세가 되었다.
1652년(게이안 5년), 교토에서 사망. 법호는 쇼테쓰인 쇼겐.
2. 1. 초기 생애
야스이 산테쓰는 1590년(덴쇼 18년), 안씨(안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부터 바둑을 배웠으며, 혼인보 산사의 제자라고도 전해진다(『난가당기화』).1600년(게이초 5년) 11세 때, 사카키바라 야스마사를 통해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후시미성에서 불려 30석 12인 부양을 받았다. 슨푸에서 바둑 상대 역할을 하거나, 혼인보 산사, 하야시 리겐 등과 함께 바둑 모임 등에 초대되었다. 기온사의 피관(「순구기」)이자, 큐호지 출신이라고 기록된 것은(「녹원일록」) 오사카 큐호지(야오시) 출신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1608년(게이초 13년), 삭발하고 산테쓰라고 칭했다.
2. 2. 에도 시대 활동
1612년(게이초 17년)에는 도세키 50석 다음가는 30석의 봉록을 받았다. 오사카 전투에서는 숙부 안이 도톤이 도요토미 측에 있었지만, 아버지 소슌과 숙부 사다요시를 이에야스에게 소개하고, 도쿠가와 측 안내자로 추천했다. 이후 교토에 거처를 마련하고, 매년 3월에 산사 등과 함께 에도로 내려갔다.1626년(간에이 3년) 니조 성에서 도쿠가와 히데타다 앞에서 나카무라 도세키와 대국하여 선번 3목 승리했다. 이 바둑이 어성기의 시작으로 여겨진다.
도세키 사후, 1644년(쇼호 원년) 혼인보 산에쓰, 이노우에 인세키(겐카쿠), 산테쓰 등에게 지샤 봉행으로부터 도세키 후계의 바둑 기사 우두머리 지위 심의가 있었으나, 산테쓰는 자천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산에쓰, 인세키는 사퇴하여 공석이 되었다. (기소 심의, 「전신록」)
2. 3. 가문
야스이 산테쓰는 1590년(덴쇼 18년) 안씨(안정)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바둑을 배웠으며, 산사의 제자라고도 전해진다. 친자식이 없거나, 아직 어렸기 때문에 문하생 안이 산치를 양자로 삼아 가독을 물려주었다. 나중에 장남이 2세 산테쓰로 안이 가문을 이었기 때문에, 가계로서의 안이 가문과 바둑 가문으로서의 안이 가문이 병립했다는 시각도 있다. 차남 칸자에몬은 나이토 가문 가신이 되었고, 삼남 지테쓰는 산치를 이어 안이 가문 3세가 되었다.2. 4. 사망
1652년(게이안 5년), 교토에서 사망하였다. 법호는 쇼테쓰인 쇼겐이다.3. 평가 및 일화
나카무라 도세키와 100여 국의 대국을 벌여 도세키가 40국을 이겼다고 전해지며, 그 대결 모습에 도세키는 "바둑에서 이겨도 목숨은 빼앗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626년(간에이 3년) 니조 성에서의 대국은 야스이 산테쓰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 대국에서 첫 수를 변(오른쪽 변의 소목)에 둔 국도 알려져 있다. 1628년(간에이 5년)과 1629년(간에이 6년)에는 에도성에서 도세키와 대국하여 산테쓰가 선을 잡고 1승 1패를 기록했다. 산테쓰의 기력은 명인과 상수(上手) 사이로 평가되었다.
시마바라의 난 때, 처음에는 에도에서 이타쿠라 시게마사가 파견되었지만, 그 후에 마쓰다이라 노부쓰나 등도 보내졌다. 산테쓰는 시게마사가 죽을 것이라고 주변에 말했고, 그와 같은 보고가 도착했기 때문에 에도에서는 화제가 되었다.
3. 1. 나카무라 도세키와의 대결
나카무라 도세키와 100여 국의 대국을 벌여 도세키가 40국을 이겼다고 전해지며, 그 대결 모습에 도세키는 "바둑에서 이겨도 목숨은 빼앗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1626년(간에이 3년) 니조 성에서의 대국은 야스이 산테쓰의 걸작으로 꼽힌다. 이 대국에서 첫 수를 변(오른쪽 변의 소목)에 둔 국도 알려져 있다. 1628년(간에이 5년)과 1629년(간에이 6년)에는 에도성에서 도세키와 대국하여 산테쓰가 선을 잡고 1승 1패를 기록했다. 산테쓰의 기력은 명인과 상수(上手) 사이로 평가되었다.3. 2. 시마바라의 난 예측
시마바라의 난 때, 처음에는 에도에서 이타쿠라 시게마사가 파견되었지만, 그 후에 마쓰다이라 노부쓰나 등도 보내졌다. 산테쓰는 시게마사가 죽을 것이라고 주변에 말했고, 그와 같은 보고가 도착했기 때문에 에도에서는 화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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