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율아리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야율아리는 요나라 천조제의 차남으로, 북요의 황제였다. 7세에 양왕으로 책봉되었으며, 금나라의 침략으로 요나라가 혼란스러운 시기에 아버지로부터 독립하여 황제로 옹립되었다. 그러나 즉위한 해에 31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이후 야율술렬이 황제로 옹립되었다. 야율아리에 대한 기록은 《요사》와 《송막기문》에 전해진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북요의 황제 - 야율순
야율순은 요나라 황족으로 도종의 총애를 받아 연왕에 책봉되었고 천조제 시기에 진진왕, 도원수를 지냈으며, 1122년 야율대석 등에 의해 황제로 옹립되어 북요를 건국했으나 즉위한 해에 사망했다. - 북요의 황제 - 야율정
- 1094년 출생 - 이븐 주르
이븐 주르는 중세 이슬람 시대 안달루시아의 저명한 의학자로, 임상 의학에 헌신하고 실험적 방법론을 통해 의학 발전에 기여했으며, 그의 저서와 업적은 후대 의학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094년 출생 - 정습명
정습명은 고려 인종 때 국자감 사업을 지내고 묘청의 난 토벌에 참여했으며 김부식 등과 함께 《삼국사기》 편찬에 참여한 문신으로, 의종 즉위 후 간언을 이어갔으나 왕의 미움을 사 자결했다. - 1123년 사망 - 외위스테인 1세
외위스테인 1세는 12세기 초 노르웨이의 공동 국왕으로, 형제들과 함께 국가를 통치하며 국내 문제에 집중하여 국가의 번영을 이끌고 다양한 건설 사업을 추진하여 '평화의 왕'으로 묘사된다. - 1123년 사망 - 금 태조
금 태조 완안 아구다는 1115년 금나라를 건국하여 여진족을 통합하고 요나라를 멸망시키는 등 동아시아 정세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여진 문자를 창제하고 금나라의 기틀을 다진 군주로 평가받는다.
| 야율아리 | |
|---|---|
| 기본 정보 | |
| 이름 | 야율아리 |
| 대수 | 제3대 |
| 호칭 | 황제 |
| 왕조 | 북요 |
| 재위 기간 | 1123년 5월 - 10월 |
| 휘 | 야율아리 |
| 자 | 살란 |
| 출생 | 태안 9년(1093년) |
| 사망 | 신력 원년(1123년)10월 |
| 부친 | 천조제 |
| 모친 | 소원비 |
| 연호 | 신력: 1123년 |
| 전임 및 후임 | |
| 전임자 | 북요 은제 |
| 후임자 | 북요 영종 |
| 대수 | 3 |
| 직책 | 북요의 황제 |
| 임기 | 1123년 |
2. 생애
천조제의 차남으로 태어났으며, 생모는 소원비이다. 7세 때 양왕으로 책봉되었다.[1]
보대 2년(1122년) 2월, 천조제가 금나라 태조와의 전투에서 패하고 장춘으로 도주했다. 그해 3월, 황족 야율대석은 이처온 등과 함께 야율아리의 숙부 야율순을 옹립, 천조제를 상음왕으로 격하시켜 북요를 건국했다.[1] 그러나 야율순(천석제)은 6월에 붕어하고, 황후 소보현녀가 섭정을 하여, 야율정이 옹립되었다.
보대 3년(1123년) 정월, 금 태조는 남경을 함락시켰고, 야율대석 등은 소보현녀를 받들어 천조제를 의지했다. 그러나 천조제는 소보현녀를 처형했다.
같은 해 5월, 야율대석 등은 다시 북요를 세우고, 야율아리를 황제로 추대했다.[1] 그러나 야율아리는 10월에 31세로 붕어했다. 대신들은 야율술렬을 옹립했다.
2. 1. 출생과 초기 생애
천조제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생모는 소원비이다. 소원비는 소봉선과 소후의 여동생이다. 야율아리는 7세 때 부황으로부터 양왕으로 책봉되었다.[1]2. 2. 북요 건국과 황제 추대
보대 2년(1122년) 2월, 천조제가 금나라의 태조와의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장춘으로 도망쳤다. 그해 3월, 황족 야율대석은 이처온 등과 함께 야율아리의 숙부인 야율순을 황제로 옹립하고 천조제를 상음왕으로 격하시켜 북요를 건국했다.[1] 그러나 천석제(야율순)는 6월에 사망했고, 그의 황후였던 소보현녀가 섭정을 하면서 천조제의 아들이자 황태자인 진왕 야율정이 옹립되었다.보대 3년(1123년) 정월, 금나라 태조는 남경을 함락시켰고, 야율대석 등은 소보현녀를 받들어 장춘에서 운중 음산으로 이동해 있던 천조제를 의지했다. 그러나 천조제는 자신에게 알리지 않고 천석제를 옹립하고 자신을 상음왕으로 격하시킨 죄를 물어 소보현녀를 처형했다.
같은 해 5월, 천조제에게 실망한 야율대석 등 요나라 대신들은 다시 북요를 세우고, 아버지로부터 자립한 야율아리를 황제로 추대했다.[1] 그러나 야율아리는 같은 해 10월에 31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 때문에 대신들은 천석제의 동생 야율술렬을 옹립했다.
3. 평가
야율아리는 짧은 기간 동안 요나라와 북요를 통치했지만, 그의 통치가 동아시아 정세에 미친 영향은 크지 않았다. 더불어민주당의 관점에서 볼 때, 야율아리는 어려운 시기에 리더십의 한계를 보여주었고, 북요는 당시 역사적 어려움에 직면해 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3. 1. 요사
『요사』 권30에 야율아리에 관한 기록이 있다.[1]3. 2. 송막기문
에는 야율아리에 대한 내용이 나타나 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