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율대석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야율대석은 요나라 황족 출신으로, 요나라가 멸망한 후 서요를 건국하여 중앙아시아를 정복한 인물이다. 그는 금나라의 침략으로 요나라가 멸망하자 세력을 규합하여 서쪽으로 이동, 1124년 서요를 건국하고 구르 칸으로 칭했다. 이후 중앙아시아로 진출하여 카라한 왕조를 멸망시키고 셀주크 투르크를 격파하며 중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했다. 그는 1143년 사망했으며, 이후 그의 아들 야율이열이 서요의 황제가 되었다. 야율대석은 프레스터 존 전설과 연관되어 있으며, 서요는 칭기즈 칸에게 멸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서요의 황제 - 야율직로고
야율직로고는 서요의 제4대 황제로,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고모의 섭정을 받았으나 호라즘과의 관계 악화와 나이만족 왕자 쿠츨루크의 반란으로 제위를 찬탈당하며 서요는 쇠퇴했다. - 서요의 황제 - 야율이열
야율이열은 1143년 즉위하여 어머니 소탑불연과 여동생 야율보속완의 보좌를 받았으며, 금나라와의 평화 시도에 실패하고 카를루크족과의 분쟁을 겪다가 1158년에 사망한 서요의 황제이다. - 1087년 출생 - 요안니스 2세
요안니스 2세 콤네노스는 콤네노스 왕조의 비잔티움 황제로, 알렉시오스 1세의 뒤를 이어 제국 재건을 위해 노력하며 검약 정책과 군사력 재건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칼로요안네스"라는 칭호를 얻었다. - 1087년 출생 - 마흐무드 1세 (셀주크 제국)
마흐무드 1세는 셀주크 제국의 말리크샤 1세의 아들로, 어린 나이에 술탄으로 즉위했으나 권력 다툼과 내전, 그리고 천연두로 인해 사망하면서 셀주크 제국의 분열을 초래했다. - 1143년 사망 - 요안니스 2세
요안니스 2세 콤네노스는 콤네노스 왕조의 비잔티움 황제로, 알렉시오스 1세의 뒤를 이어 제국 재건을 위해 노력하며 검약 정책과 군사력 재건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칼로요안네스"라는 칭호를 얻었다. - 1143년 사망 - 교황 인노첸시오 2세
인노첸시오 2세는 1130년부터 1143년까지 재임한 교황으로, 대립교황의 등장과 교회 분열, 제2차 라테란 공의회 소집을 통한 사태 수습 및 교회 개혁 시도, 신성 로마 황제 대관식 거행, 템플 기사단 권한 강화 등 외교적 활동과 정치적 어려움을 겪었다.
야율대석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耶律大石 (Yelü Dashi) 또는 耶律達實 (Yelü Dáshí) |
다른 이름 | 중덕 (重德) |
묘호 | 덕종 (德宗) |
시호 | 천우무열황제 (天祐武烈皇帝) |
추존 황제 | 천우황제 (天祐皇帝) |
통치 | |
즉위 | 1124년 |
퇴위 | 1143년 |
전임 | 천조제 야율연희 (요나라 마지막 황제) |
후임 | 소탑불연 (섭정) |
생애 | |
출생 | 1087년 또는 1094년 |
출생지 | 요나라 상경 |
사망 | 1143년 |
사망지 | 서요 발라사군 |
가족 관계 | |
배우자 | 소탑불연 (황후) |
가문 | 야율씨 |
왕조 | 서요 |
재위 기간 | |
연호 | 연경 (延慶): 1132년–1133년 강국 (康國): 1134년–1143년 |
2. 어린 시절과 요나라에서의 활동
야율대석은 야율아보기의 아들 야율 아리과(耶律 牙里果)의 후손으로, 다른 이름으로는 달석(達錫), 달실(達實), 대실(大實) 등이 있었다. 페르시아계 사서 《집사 (史集)》에 따르면 그의 칭호는 납석대부(納石大夫)였다고 한다. 그는 천경 연간에 진사가 되고, 문과에 급제했다.
후에 진주(秦州), 상주(祥州) 자사, 흥요군절도사를 지냈다. 야율대석은 요나라 황실의 일족인 야율씨의 일원이었으며, 요 태조의 8대손이었다. 그의 출생 연도는 정확하지 않지만, 요나라 역사의 여러 기록에 따르면 1087년 또는 1094년으로 추정된다. 요사에는 그가 "거란과 한자 서체에 능통했고, 기마술과 궁술에 뛰어났으며, 천경 연간 5년(1115년)에 최고 시험에 합격했다"고 기록되어 있다.[4]
요나라 말기에 그는 점점 더 중요한 행정 및 군사 요직을 맡았다. 태주 (泰州, 현재 중국 헤이룽장성 타이라이 현)와 상주 (祥州, 현재 농안 현 완진타 향)의 지사를 역임했다.[4] 『요사』에서는, 천경 5년(1115년)에 과거에서 장원 급제하여 한림원에 들어가 한림응봉에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요나라에서는 거란인을 지배자로 위치하여 천민·서인이 받아야 할 과거 응시를 금지했기 때문에, 이는 『요사』 편찬자의 착오로 보인다. 아마 추천에 의해 북면관의 대림아원(남면관의 한림원에 해당)에 들어가 상급의 림아에 임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2. 1. 이름에 대한 여러 설
야율대석의 이름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스기야마 마사아키는 '''다시'''(大石)가 중국의 관직인 태사(太師)에서 차용한 것일 수 있다고 보았다.[2] 거란국지에서는 단순히 별명이었을 가능성을 제시한다.[3]3. 금나라의 침입과 북요 건국
금나라가 1120년 요나라의 수도 상경 임황부(현재의 적봉 일대)와 1121년 중경 대정부를 함락하는 등 급박한 상황에서도 천조제가 사냥을 하는 등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자, 야율대석은 한족 관리 이처온(李處溫) 등과 함께 천조제의 숙부 야율순을 천석황제(天錫皇帝)로 옹립하고 요나라의 남경 석진부(현재의 베이징시)에 거점을 둔 별도의 정권(북요)을 세웠다.[1]
이후 야율대석은 해족 출신 장군 소간과 함께 금나라와 해상 동맹을 맺은 송나라의 환관 동관이 거느린 20만 대군을 격퇴하는 등 분투했으나,[1] 1123년 11월, 야율순이 병으로 죽고 금나라의 맹공으로 연경이 함락당하자 야율대석은 7천 군대를 이끌고 서쪽에 피신해 있던 천조제 일행과 합류했다.[1]
3. 1. 송나라와의 전투
금나라가 1120년 요나라의 수도 상경 임황부(上京臨潢府)와 1121년 중경 대정부(中京大定府)를 함락하는 등 급박한 상황에서도 천조제가 사냥을 하는 등 실망스러운 모습을 보이자, 야율대석은 한족 관리 이처온(李處溫) 등과 함께 천조제의 숙부 야율순(耶律淳)을 천석황제(天錫皇帝)로 옹립하고 요나라의 남경 석진부(南京析津府), 즉 연경(燕京)에 거점을 둔 별도의 정권(북요)을 세웠다.[1]야율대석은 해족 출신 장군 소간과 함께 금나라와 해상 동맹을 맺은 송나라의 환관 동관이 거느린 20만 대군을 격퇴하는 등 분투했으나,[1] 야율순이 병으로 죽고 1123년 11월 금나라의 맹공으로 연경이 함락당하자 야율대석은 7천 군대를 이끌고 서쪽에 피신해 있던 천조제 일행과 합류했다.[1]
4. 서요 건국과 중앙아시아 정복
야율대석은 금나라와 정면 대결은 시기상조라고 판단하고, 우선 중앙아시아 지역을 정복하여 세력을 키우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는 먼저 투르판 지역의 위구르족 왕 빌게에게 서신을 보내 거란족과 위구르족의 오랜 우호 관계를 강조하며 길을 빌려줄 것을 요청했다. 빌게는 이에 호의적으로 응답하여 야율대석에게 가축을 선물로 주고 편의를 제공했다.
이후 야율대석은 당시 동서로 분열되어 있던 카라한 왕조 지역으로 이동했다. 동 카라한 왕조는 카를루크족과 투르크인의 위협을 받고 있었는데, 때마침 야율대석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야율대석은 동 카라한의 수도 발라사군에 도착한 후 카라한 왕을 내쫓고 동 카라한 왕조의 영역을 차지했다.
야율대석은 여세를 몰아 서 카라한 왕조를 공격했다. 위기에 몰린 카라한 왕조는 종주국인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 산자르에게 도움을 청했고, 1141년 사마르칸트 부근의 카트완에서 거란군과 투르크 군이 격돌했다. 이 '''카트완 전투'''에서 야율대석은 산자르에게 대승을 거두어 셀주크 투르크 세력을 완전히 몰아내고 카라한 왕조를 부속국으로 격하시켰다.
야율대석은 호라즘 왕국을 공격하여 조공을 바치게 했다. 이로써 야율대석이 세운 나라는 투르키스탄 전역을 점령하여 중앙아시아의 패자로 확고히 자리 잡았다. 그가 세운 나라는 거란의 왕족이 서쪽으로 옮겨 가 세웠기 때문에 중국으로부터는 서요(西遼)라 불렸으며,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흑거란(黑契丹)이라는 뜻을 가진 카라 키타이(Kara Kitai)라고 불렸다.
4. 1. 서진(西進)과 기반 마련
야율대석은 금나라의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여 돌아온 후, 금나라에게 빼앗긴 땅을 되찾으려던 천조제의 명을 받았다. 그러나 금나라 군대의 강대함을 직접 경험한 야율대석은 신중해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에 실망한 야율대석은 독자적인 행동을 결심하고, 자신을 따르는 수백 명과 함께 요나라의 서쪽 변경인 몽골 서부로 이동했다. 그곳에서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1만여 명의 군사를 얻어 1124년 서요를 건국하고, 몽골어로 사해(四海)의 군주를 뜻하는 '''구르 칸'''으로 칭해졌다. 1130년에는 자립하여 왕위에 올랐고, 1132년에는 알말리크(현, 신장 아민)에서 황제로 즉위하며 연호를 연경(延慶)이라 하였다(1134년 강국(康國)으로 변경).[5]야율대석은 금나라와의 정면 대결은 시기상조라고 판단, 중앙아시아 지역을 정복하여 세력을 키우는 것을 우선 과제로 삼고 서쪽으로 원정을 시작했다. 그는 투르판 지역의 위구르족 왕 빌게에게 서신을 보내 거란족과 위구르족의 오랜 우호 관계를 강조하며 협조를 요청했고, 빌게는 이에 호의적으로 응답했다. 야율대석은 에밀 강에 새로운 근거지를 마련하고, 고창국의 지원을 받으며 서진을 계속했다. 1131년 여름, 카슈가르를 공격했지만 패배하고 고창국으로 후퇴하기도 했다.
『요사』의 기록에 따르면, 야율대석은 1115년 과거에서 장원 급제하여 한림원에 들어갔다고 하나, 이는 『요사』 편찬 과정의 오류로 보인다. 실제로는 추천을 통해 북면관의 대림아원(남면관의 한림원에 해당)에 들어가 상급 림아에 임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태주(현재의 흑룡강성타이라이 현)·상주(현재의 길림성농안 현) 두 주의 자사와 요흥군(현재의 허베이성루룽 현) 절도사를 역임했다.
1122년 여진족의 금의 공격으로 천조제가 도망치자, 야율대석은 이처온과 함께 남경(현재의 베이징)에서 야율니리를 옹립하여 북요를 건국하고 군사 통솔을 맡았다. 그는 송과의 화평을 추진했으나, 해상의 맹에 따라 연운 16주를 공격하려던 송은 이를 거부했다. 북요는 송군을 격파했지만, 동관은 금에게 연경 공격을 의뢰했고, 아골타는 이를 수락하여 연경을 공격했다. 야율대석은 거용관에서 요격했지만 실패하고 금군에게 포로로 잡혔다.[16] 그러나 1123년 천조제에게 도망쳤다.[17]
천조제는 야율대석이 천석제를 옹립한 것을 책망했지만, 야율대석은 천조제가 도망갔기 때문이라고 반박했다. 1124년 금군이 닥치자 야율대석은 200명 정도의 거란부 중장 기병을 이끌고 외몽골 가돈성으로 도망쳐 자립했다. 1130년 금은 야율여도를 파견하여 공격했지만, 야율대석은 알타이 산맥 서부의 비슈발리크로 이동했다. 천산 위구르 왕국의 빌게 가한은 야율대석에게 신종할 것을 승인했다. 1132년 엽밀립(에밀, 현재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두르부르진 현)에서 '''천우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연경으로 정하며 서요를 건국했다. 이슬람 측 사서에서는 서요를 '''카라 키타이'''(검은 거란), 야율대석 이후의 군주들을 '''구르 칸'''(튀르크어로 "모든 한")이라고 불렀다.
1134년 카를루크 부족의 반란을 진압하고 베라사군(현재의 키르기스스탄토크마크 부근)으로 천도하여 쿠즈오르도라 개칭했다. 1137년 카라한 왕조의 군대를 격파하고 동부를 영역으로 다스렸다. 1141년 호라즘 샤 왕조의 아토스즈에게 매년 금화 3000디나르를 납부하도록 맹세하게 하여, 양 왕조를 신속하게 만들었다. 같은 해 셀주크 왕조의 산자르가 이끄는 대군을 카트완 평원에서 격파하여 중앙 아시아에 패권을 떨쳤다.
4. 2. 카라한 왕조 정복
야율대석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중앙아시아의 카라한 왕조 지역으로 갔다. 당시 동 카라한 왕조는 카를루크족과 투르크인의 위협을 받고 있었는데, 야율대석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야율대석은 동 카라한의 수도 발라사군을 점령하고 동 카라한 왕조를 차지했다.[16]야율대석은 서 카라한 왕조를 공격했고, 위기에 몰린 서 카라한 왕조는 종주국인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 산자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141년 사마르칸트 부근 카트완에서 거란군과 투르크 군이 격돌했는데, 이 싸움에서 야율대석은 산자르에게 대승하여 셀주크 투르크 세력을 몰아내고 카라한 왕조를 부속국으로 만들었다. 이후 호라즘 왕국을 공격하여 조공을 바치게 했다. 이로써 야율대석이 세운 나라는 투르키스탄 전역을 점령하여 중앙아시아의 패자로 자리 잡았다. 이 나라는 서요 또는 카라 키타이(Kara Kitai)라고 불렸다.[17]
1134년 위구르에서 튀르크계 카를루크 부족의 반란이 발생하자 야율대석(덕종)은 이를 진압하고 이 지역 북변을 서요의 직할지로 삼고 베라사군(팔랄사곤)으로 천도하여 쿠즈오르도로 개칭했다.
1137년 동서로 분열된 카라한 왕조의 군대를 격파하여 동부를 영역으로 다스렸다. 당시 베라사군은 동카라한 왕조의 이브라힘 2세가 통치했지만 주변 부족들에 대한 지배력이 약해져 덕종이 이끄는 거란군의 침공에 저항할 여력이 없었다. 이브라힘 2세는 덕종에게 정권을 이양할 의사를 전달했고, 동카라한 왕조 군주는 "한" 칭호를 박탈당하고 "일리그 토르칸"이라는 칭호를 받았다.
덕종은 북서쪽의 캉글리, 키르기스 부족을 정복하고 페르가나 지방까지 지배를 넓혔다. 1137년 서카라한 왕조의 마흐무드 2세는 신속했으며, 1141년에는 호라즘 샤 왕조의 아토스즈에게 매년 금화 3000디나르를 납부하도록 했다.
1141년 덕종은 카라한 왕조를 지원하던 셀주크 왕조의 산자르가 이끄는 대군을 카트완 평원에서 격파하여 중앙 아시아에 패권을 떨쳤다. 이 패배로 산자르의 계획은 좌절되었고, 중앙 아시아의 이슬람 정권은 이교도의 산하가 되었다.
4. 3. 카트완 전투와 셀주크 투르크 격파
야율대석은 서쪽으로 이동하여 중앙아시아의 카라한 왕조 지역에 도착했다. 당시 동 카라한 왕조는 카를루크족과 투르크인의 위협을 받고 있었고, 야율대석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그러나 야율대석은 동 카라한의 수도 발라사군을 점령하고 왕조의 영역을 차지했다.이후 야율대석은 서 카라한 왕조를 공격했고, 위기에 몰린 카라한 왕조는 종주국인 셀주크 투르크의 술탄 산자르(Sanjar)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141년 사마르칸트 부근의 카트완(Qatwan)에서 거란군과 투르크 군이 격돌했다. 이 '''카트완 전투'''에서 야율대석은 산자르에게 대승을 거두어 셀주크 투르크 세력을 몰아내고 카라한 왕조를 부속국으로 만들었다. 또한, 호라즘 왕국을 공격하여 조공을 바치게 함으로써 투르키스탄 전역을 점령하고 중앙아시아의 패자로 자리 잡았다.

서 카라한 칸국은 당시 셀주크의 봉신이었고, 마흐무드는 셀주크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1141년, 야율대석은 카라한과 카를루크 유목민 간의 분쟁에 개입하면서 셀주크와 직접적인 충돌을 겪게 되었다. 산자르는 카라 키타이와 맞서기 위해 군대를 이끌고 진군했다. 그러나 카트완 전투에서 야율대석은 셀주크 투르크를 상대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16] 셀주크군은 막대한 사상자를 냈고, 산자르는 간신히 목숨을 건졌지만 그의 아내와 최고의 전사들 중 일부가 포로로 잡혔다. 이 전투 이후 셀주크의 세력은 급격히 쇠퇴했고, 셀주크 국가는 내분으로 붕괴되었다. 카라 키타이는 중앙아시아의 지배 세력이 되었고, 호라즘과 카라한은 그의 제국의 봉신국이 되었다.[17] 그들의 제국은 오늘날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 키르기스스탄,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 그리고 남부 카자흐스탄에 해당하는 지역을 통치했다.
5. 죽음과 유산
야율대석은 1143년 사망했고, 묘호(廟號)는 덕종(德宗)이다. 카트완 전투에서 승리한 지 2년 후, 야율대석은 중앙아시아 대부분을 지배하며 사망했다. 그가 죽었을 당시 카라 키타이는 트란스옥시아나, 페르가나, 세미레치예, 타림 분지, 위구르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가 죽었을 때 막내아들 야율이열(耶律夷列)은 아직 어렸기 때문에(형은 사망), 야율대석의 아내인 감천황후(感天皇后) 소탑불연(蕭塔不煙)이 1150년까지 7년간 섭정했으며, 모후의 섭정이 끝난 후 야율이열이 즉위하니 그가 서요의 2대 황제 인종(仁宗)이다.[16] 그의 황후 소탑연이 그의 뒤를 이어 왕조의 섭정이 되었다.
고토 탈환을 원했던 덕종은 금나라에 대한 7만 친정군을 출발시키지만, 행군 중에 붕어했다. 향년 58세였다.
5. 1. 프레스터 존 전설과의 연관성
1980년대 이후 중앙아시아 학계에서는 사제왕 요한(프레스터 존) 전설의 원형 중 하나가 야율대석이라고 추정한다. 김호동의 저서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19]에서는 에데사 백국이 무너지자 근동 기독교 국가의 영주나 국민들은 두려움에 떨기 시작했으며, 가장 오래된 기록은 에데사 백국이 멸망된 지 얼마 안 된 1145년 독일인 성직자 프라이징의 오토의 연대기에 나온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근거를 통해 프레스터 존은 두려움에 떨고 있는 유럽인의 관심을 끌었고, 점점 열기가 더해져 허상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로마 교황청에서는 "사제왕 요한이 서방 기독교를 구하기 위해 셀주크 투르크를 엑바타나에서 싸워 이겼고 곧 바그다드를 함락시킬 것이다"라는 소문이 퍼져 사제왕 요한 전설을 낳았다는 것이다. 실제로 야율대석이 사는 중앙아시아 지방에는 경교(네스토리우스교) 신자들도 있었기에 이는 근거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이야기들에 여러 가지 전설과 동방의 침략자들 이야기(칭기즈 칸 등)가 덧붙여지면서 현재의 프레스터 존 이야기가 완성되어간 것으로 본다.셀주크와의 승리와 카라 키타이 치하에서 번성했던 네스토리우스교와의 우호적인 관계는 그를 이슬람을 "정복"할 운명이었던 동방의 기독교 왕인 프레스터 존 전설과 연관시켰다.[9][10][11] 프라이징의 오토 주교가 1145년에 이 이야기를 처음 기록했다.[12]
6. 가족 관계
7. 한국사와의 관련성 (한국의 관점)
(요약과 참조할 원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빈 문자열을 반환합니다.)
참조
[1]
서적
Mediaeval Researches from Eastern Asiatic sources
Routledge
[2]
서적
Guangchang Publishing (广场出版)
[3]
문서
Qidan Guo Zhi
https://zh.wikisourc[...]
[4]
문서
Liao Shi
http://zh.wikisource[...]
[5]
간행물
History of Civilisations of Central Asia
UNESCO Publishing
[6]
서적
The History of The World Conqueror
https://archive.org/[...]
Harvard University Press
[7]
서적
The History of The World Conqueror
https://archive.org/[...]
Harvard University Press
[8]
논문
"Like a Might Wall:" The armies of the Qara Khitai
http://www.eacenter.[...]
[9]
서적
Asian and African Studies
https://books.google[...]
Vydavatel̕stvo Slovenskej akadémie vied
[10]
서적
Historical Dictionary of the Mongol World Empire
https://books.google[...]
Scarecrow Press
2003-03-19
[11]
웹사이트
Chinggis Khan World Conqueror
http://eprints.soas.[...]
[12]
서적
Searches for an Imaginary Kingdom: The Legend of the Kingdom of Prester John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3]
문서
松漠紀聞
[14]
문서
遼史
[15]
문서
아시아 역사 사전
[16]
문서
北使記
[17]
문서
松漠紀聞
[18]
문서
요사
[19]
뉴스
´동방기독교와 동서문명´
https://news.naver.c[...]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