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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크 다라고 왕자 (140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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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엔리케 다라고 왕자(1400년)는 트라스타마라 왕가의 일원으로,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1세의 아들이자, 알폰소 5세, 후안 2세의 형제였다. 그는 어린 나이에 산티아고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가 되었으며, 카스티야 왕실 내 권력 투쟁에 연루되었다. 1420년 쿠데타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망명했고, 이후 권력을 되찾으려 했지만, 올메도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사망했다. 그는 카스티야 공작부인 캐서린과 결혼했고, 재혼하여 아들 엔리케를 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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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크 다라고 왕자 (1400년)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칭호비예나 공작
이름엔리크 다라고
출생1400년
사망1445년 6월 15일 (45세)
사망 장소칼라타유드
배우자카탈리나 데 카스티야
베아트리스 데 피멘텔
자녀엔리크 다라고
왕가트라스타마라 가
아버지아라곤 왕 페르난도 1세
어머니레오노르 데 알부르케르케
작위
알부르케르케 백작시작: 1435년
종료: 1445년
이전: 레오노르 데 알부르케르케
암푸리아스 백작시작: 1436년
종료: 1445년
이후: 엔리크 다라고

2. 어린 시절

트라스타마라 왕가의 일원인 엔리케는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1세와 알부르케르케 백작 부인 레오노르 데 알부르케르케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의 형으로는 아라곤 국왕 알폰소 5세와 나바라 국왕 후안 2세가 있었지만, 엔리케의 주요 영지는 부모가 물려준 카스티야에 있었다. 어린 시절의 엔리케는 카스티야 왕실에 들어갔는데, 그의 아버지의 삼촌인 카스티야 국왕 엔리케 3세가 엔리케보다 다섯 살 어린 사촌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의 왕립 위원회에 그를 위한 자리를 마련해 주었기 때문이다.

1409년, 로렌소 수아레스 데 피게로아, 산티아고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가 사망했다. 엔리케는 겨우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그랜드 마스터로 선포되었다. 그의 고모인 랭커스터의 캐서린이 사망한 후, 엔리케는 허약한 사촌 후안의 통치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권력을 잡으려 했다.

2. 1. 출생과 부모

엔리케는 트라스타마라 왕가의 일원으로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1세와 알부르케르케 백작 부인 레오노르 데 알부르케르케의 셋째 아들이었다.[3] 아버지는 본래 카스티야의 국왕 후안 1세(재위 1379~1390)의 차남이었다. 형인 국왕 엔리케 3세가 1406년 사망하여 어린 조카 후안 2세가 즉위하자 숙부로서 섭정이 되어 형수인 캐서린과 분점하여 카스티야 왕국의 국정을 책임졌다.[3]

아라곤의 마르틴 1세가 후계 없이 사망한 후 1412년에 아라곤의 국왕으로 선출되어 카스티야를 떠나 아라곤에서 즉위하였다. 엔리케는 부모님이 물려준 주요 영지가 카스티야에 있었고[3] 카스티야에 넓은 인맥도[3] 가지고 있었으므로 카스티야 궁궐에 남게 되었다. 그의 형으로는 아라곤 국왕 알폰소 5세와 나바라 국왕 후안 2세가 있었다.

1409년, 산티아고 기사단의 그랜드 마스터 로렌소 수아레스 데 피게로아가 사망하자, 엔리케는 아홉 살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그랜드 마스터로 선포되었다.

2. 2. 형제 관계

엔리케의 형 알폰소 5세는 1416년 아버지 페르난도 1세의 뒤를 이어 아라곤의 국왕이 되었고, 1443년 나폴리 왕국을 점령했다.[4][5] 또 다른 형 후안 2세는 1420년 나바라 왕국의 블랑쉬 1세와 혼인하여 나바라의 명예왕('''Jure uxoris''')이 되었다.[6] 1458년 알폰소 5세가 후계 없이 사망하자 후안 2세는 아라곤과 시칠리아 왕국을 물려받았다.[7] 여동생 마리아는 1420년 카스티야 왕국후안 2세와 결혼하여 카스티야 왕비가 되었다.

2. 3. 성장기 이력

엔리케는 트라스타마라 왕가의 일원으로, 아라곤 국왕 페르난도 1세와 알부르케르케 백작 부인 레오노르 데 알부르케르케의 셋째 아들이었다. 그의 형으로는 아라곤 국왕 알폰소 5세와 나바라 국왕 후안 2세가 있었다.[3] 1405년, 5세의 나이에 백부 엔리케 3세 (카스티야)가 아들 후안 왕세자를 위한 왕실 평의회 위원 자격을 부여하면서 카스티야 왕실에 들어갔다.[3]

1409년, 산티아고 기사단장 로렌소 수아레스 데 피게로아가 사망하자, 엔리케는 9세의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기사단장(Grand Master)이 되었다.[3]

3. 권력 투쟁

1420년, 엔리케는 몇몇 귀족들의 도움을 받아 후안 2세가 머물고 있던 성을 포위하고, 국왕이 데 루나에 의해 납치되었다고 주장하며 국왕의 항복을 요구했다.[1] 그러나 며칠 후, 그는 귀족들의 지지를 잃고 포기를 해야 했다. 엔리케는 체포되어 반역죄로 기소되어 모라 성에 갇혔다. 그는 형제의 노력으로 풀려났고, 이후 망명했다.

1427년 알바로 데 루나가 실각한 후, 엔리케는 이전의 권력을 일부 되찾았다. 그는 아내와 함께 카스티야로 돌아와 그녀의 상속을 요구했고 성공했다. 이미 형제로부터 빌레나 공작위를 받았던 그들은 그녀의 나머지 지참금을 받았다.

1429년, 그의 형제인 아라곤 국왕과 나바라 국왕은 카스티야에 선전포고를 했고 빌레나 공작의 지지를 받았다. 전쟁은 누이 마리아의 노력으로 피할 수 있었다. 엔리케는 후안 2세에 의해 불충으로 처벌받아 모든 작위와 재산을 잃었다.[2]

그 후 엔리케는 다시 도망쳐 이번에는 나폴리 왕국에서 피난처를 찾았다. 그의 형제 알폰소 5세가 나폴리 왕위를 위해 싸우고 있었다. 빌레나는 알폰소를 돕고 있었는데, 1435년 8월 폰차 해전 이후 그와 그의 형제 후안과 함께 투옥되었다. 그들은 다시 한 번 누이인 카스티야 여왕의 노력으로 풀려났다.

그의 어머니는 1435년에 사망했으며 그녀의 백작 작위를 엔리케에게 유증했다. 새로운 알부르케르케 백작은 귀족들의 봉기 이후 1438년 마지막으로 카스티야로 돌아왔다. 그는 봉기에 참여하여 매형과 무력 충돌을 벌였다.

3. 1. 쿠데타 (1420년)

1418년 6월, 엔리케의 백모이자 후안 2세의 모후인 랭커스터의 캐서린(1373~1418)이 사망한 후, 엔리케는 친형 후안 왕자와 함께 공동 섭정이 되었다.[8] 이때부터 두 형제간에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으며 카스티야 귀족들 간에도 파벌이 형성되었다. 1419년 3월 7일, 후안 2세가 만 14세가 되어 친정을 선포하자, 두 파벌 간의 긴장은 더욱 증가했다. 권력욕이 강했던 엔리케는 그의 형 후안이 나바라의 블랑쉬와 결혼하기 위해 나바라로 떠나면서 카스티야를 비우자 쿠데타를 일으켰다.[9] 1420년 7월 14일 새벽, 토르데시야스에 있는 왕궁으로 쳐들어가 후안 2세(1405~1454)를 구금하고, 그의 형 후안(1398~1479) 왕자를 따르던 귀족들을 모두 제거한 후 정권을 장악하였다.

1420년 8월, 엔리케는 국왕 후안 2세(1405~1454)를 아빌라로 데려간 후 자신의 여동생 마리아와 강제로 결혼시켰다.[10] 소식을 접한 엔리케의 형 후안이 군대를 일으켜 올메도에 도착하자 엔리케는 왕을 데리고 탈라베라로 이동하였다. 11월 29일, 국왕 후안 2세가 알바로 데 루나와 함께 탈출에 성공하여 몬탈반 성으로 피신하였다. 엔리케가 성을 포위했으나 폭풍으로 인해 성을 함락시키지 못하고 철수하였고, 날이 갈수록 귀족들이 지지를 철회하자 힘을 잃어버리게 되었다.[11]

1423년, 엔리케는 반역죄로 체포되어 산티아고 기사단장직을 제외한 모든 직위와 재산을 몰수당한 채 모라 성에 감금되었다.[2]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는 자신의 탈출을 도와 쿠데타가 무산되는 데 큰 공을 세운 알바로 데 루나를 카스티야의 총사령관(Constable of Castile)으로 임명하였다.[12]

3. 2. 권력 회복 (1427년)

귀족연합의 압박으로 1427년 9월 알바로 데 루나가 실각했고[13] 엔리케는 이전의 권력을 되찾았다. 그러나 귀족연합이 분열양상을 보이며 1428년 2월에 루나가 정계에 복귀하였고 엔리케와의 권력투쟁은 재현되었다. 엔리케와 귀족연합이 카스티야레온에 대한 후안 2세의 지배력 강화를 지속적으로 방해하자 1428년 6월 후안 2세는 엔리케에게 궁정에서 떠날 것을 명령했다. 1429년 그의 형이자 아라곤 왕 알폰소 5세(재위 1416~1458)는 엔리케와 도모하여 카스티야에 선전포고를 하였다.[14]

아라곤나바라 연합군이 자드라케(Jadraque)까지 침공했으나 마리아(후안 2세의 왕비)가 노력한 덕분에 실제 전쟁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듬해 양국간 마자노 조약을 체결하며 사건은 마무리가 되었으나 엔리케는 이 일로 인하여 나폴리로 망명을 떠났다. 친형 알폰소 5세가 나폴리 정복을 위해 싸우고 있었으므로 그곳에서 형을 도왔다.[15]

3. 3. 올메도 전투 (1445년)

1435년 어머니 레오노르가 사망하며 엔리케는 알부르케르케 백작위를 상속받았다.[16] 1437년 카스티야 귀족들이 국왕 후안 2세와 루나 재상에 대해 무력 봉기를 일으켜 카스티야는 내전에 돌입했고, 1438년 엔리케는 알부르케르케 백작 자격으로 귀국하여 귀족 측에 가담했다.[16]

1445년 5월 19일, 올메도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아라곤-귀족 연합군은 루나 재상이 이끈 국왕군에 대패했다.[16] 이 전투에는 아라곤이 반 국왕파 카스티야 귀족들과 연합하여 참전했으며, 엔리케도 참전하였다.전투 도중 엔리케는 부상을 입었고, 이는 악화되어 6월 15일에 사망했다.[16] 일설에 따르면, 누바라 왕은 카스티야 왕국의 남부를 정복하고 헨리를 그 왕으로 선포하려 했다고 한다.

4. 결혼

1418년 11월, 엔리케는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의 누이이자 사촌인 캐서린(1403~1439)과 결혼했다. 왕의 누이와의 결혼을 통해 엔리케의 카스티야 왕궁 내 영향력은 증가했으며 카스티야의 총신 알바로 데 루나(1388~1453)에게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 결혼은 엔리케의 형 알폰소 5세가 카타리나의 언니 마리아와 결혼하고, 엔리케의 누이 마리아가 카타리나의 남동생 후안 2세와 결혼하는 협정의 일부였다.

1439년 10월 아내 캐서린이 아이를 유산한 후 세상을 떠났다. 그들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고 캐서린의 남동생(카스티야 왕 후안 2세)은 비예나 공작위를 몰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올메드 전투(1445년)를 앞두고 반 국왕파 카스티야 귀족들과의 연합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베나벤테 백작의 딸인 비트리즈 데 피멘텔/Beatriz de Pimenteles과 재혼하였는데 이들 사이에서 아들 엔리케(1445–1522)가 태어났다. 그의 아들은 초대 세고르베 공작이 되었으나 엔리케의 증손녀 대에서 가문이 단절되었다.

4. 1. 첫 번째 결혼

1418년 11월, 엔리케는 카스티야 국왕 후안 2세의 누이이자 사촌인 캐서린(1403~1439)과 결혼했다. 왕의 누이와의 결혼을 통해 엔리케의 카스티야 왕궁 내 영향력은 증가했으며 카스티야의 총신 알바로 데 루나(1388~1453)에게는 위협적인 존재가 되었다.

이 결혼은 엔리케의 형 알폰소 5세가 카타리나의 언니 마리아와 결혼하고, 엔리케의 누이 마리아가 카타리나의 남동생 후안 2세와 결혼하는 협정의 일부였다.

1439년 10월 아내 캐서린이 아이를 유산한 후 세상을 떠났다. 그들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고 캐서린의 남동생(카스티야 왕 후안 2세)은 비예나 공작위를 몰수했다.

4. 2. 두 번째 결혼

1439년 10월 아내 캐서린이 아이를 유산한 후 세상을 떠났다. 그들 사이에는 자식이 없었고 카스티야 왕 후안 2세는 비예나 공작위를 몰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올메도 전투(1445년)를 앞두고 반 국왕파 카스티야 귀족들과의 연합을 공고히 하기 위해서 베나벤테 백작의 딸인 비트리즈 데 피멘텔/Beatriz de Pimenteles과 재혼하였다. 이들 사이에서 아들 엔리케(1445–1522)가 태어났다. 그의 아들은 초대 세고르베 공작이 되었으나 엔리케의 증손녀 대에서 가문이 단절되었다.

참조

[1] 서적 The Politics of Emotion: Love, Grief, and Madness in Medieval and Early Modern Iberia https://books.google[...] Cornell University Press 2024-02-15
[2] 웹사이트 Real Academia de la Historia https://dbe.rah.es/b[...]
[3] 서적 대항해 시대의 탄생 시공사
[4] 서적 The Papacy and Naples in the Fifteenth Century Cambridge at the University Press 1964
[5] 서적 The Medieval Crown of Aragon Oxford University Press 1991
[6] 사전 Law Dictionary 1968
[7] 서적 The Spain of the Catholic Monarchs 1474–1520 Blackwell Publishers Inc 2000
[8] 웹사이트 Medieval Lands
[9] 서적 Juan II de Aragón (1398-1479): monarquía y revolución en la España del siglo XV Pamplona: Urgoiti editores 2003
[10] 서적 Juan II de Aragón (1398-1479): monarquía y revolución en la España del siglo XV Pamplona: Urgoiti editores 2003
[11] 서적 2003
[12] 서적 Juan II de Aragón (1398-1479): monarquía y revolución en la España del siglo XV Pamplona: Urgoiti editores 2003
[13] 서적 2003
[14] 서적 2003
[15] 서적 Juan II de Aragón (1398-1479): monarquía y revolución en la España del siglo XV Pamplona: Urgoiti editores 2003
[16] 서적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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