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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케 3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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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엔리케 3세는 카스티야의 왕(1390-1406)으로, 부르고스에서 카스티야 왕 후안 1세와 아라곤의 엘레오노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는 아스투리아스 공 칭호를 처음으로 받았으며, 11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라 14세부터 친정을 시작했다. 엔리케 3세는 잉글랜드에 대항하여 여러 차례 승리하고, 카나리아 제도 식민화를 시작했으며, 티무르 제국에 사절을 파견하는 등 활발한 외교 활동을 펼쳤다. 그는 1388년 랭커스터의 캐서린과 결혼하여 후안 2세를 낳았으며, 1406년 톨레도에서 2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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엔리케 3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알폰소 데 카르타헤나의
알폰소 데 카르타헤나의 "히스파니아 왕국 계보"에 묘사된 엔리케 3세
칭호카스티야와 레온의 왕
재위 기간1390년 10월 9일 - 1406년 12월 25일
이전 국왕후안 1세
다음 국왕후안 2세
배우자랭커스터의 캐서린 (1388년 결혼)
자녀마리아, 아라곤 왕비
인판타 카타리나, 비예나 여공
후안 2세, 카스티야 왕
왕가트라스타마라
아버지후안 1세
어머니레오노르 데 아라곤
출생일1379년 10월 4일
출생지부르고스
사망일1406년 12월 25일
사망지톨레도
매장지톨레도 대성당
별칭엔리케 엘 돌리엔테 (Enrique el Doliente)
엔리케 오 도엔테 (Henrique o Doente)

2. 생애

엔리케 3세는 카스티야 왕국부르고스에서 태어나, 왕세자로서 아스투리아스 공 칭호를 받은 첫 인물이다. 1390년 아버지 후안 1세가 낙마 사고로 사망하자 11세에 왕위를 계승했다. 초기에는 알폰소 엔리케스(Alfonso Enríquez)와 고모 레오노르(Leonor de Trastámara) 등 귀족들의 도움을 받았으나, 14세부터 친정을 시작하며 왕권 강화에 힘썼다.

1388년 잉글랜드의 랭커스터 공작 존 오브 곤트의 딸 카탈리나와 결혼했다. 카탈리나의 어머니 콘스탄스 오브 카스티야는 페드로 1세의 딸이었는데, 이 결혼은 페드로 1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오른 엔리케 2세를 시조로 하는 트라스타마라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의미를 가졌다.

재위 기간 동안 엔리케 3세는 대외적으로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400년 해군 함대를 보내 북아프리카의 테투안을 공격했으며, 1402년에는 프랑스 탐험가 장 드 베텡쿠르를 지원하여 카나리아 제도의 식민화를 시작했다. 또한 동방의 티무르에게 루이 곤잘레스 데 클라비호를 사절로 파견하기도 했다.

1406년 엔리케 3세는 그라나다 왕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던 중 톨레도에서 27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했다.[9]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왕위는 왕비 카탈리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아들 후안 2세에게 계승되었고, 당시 후안 2세가 두 살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인 왕비 카탈리나가 섭정을 맡게 되었다.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부르고스에서 태어난 엔리케는 당시 카스티야 국왕이었던 후안 1세와 그의 아내 아라곤의 엘레오노르 사이에서 태어난 장남이었다. 그는 왕세자로서 아스투리아스 공 칭호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다. 그의 남동생 페르난도는 훗날 아라곤의 국왕이 되었다.

엔리케의 성장과 교육은 후안 니뇨의 아내인 이네스 라소 데 라 베가에게 맡겨졌다. 어린 시절 그는 투이-비고 로마 가톨릭 교구의 주교이자 훗날 세비야 대주교가 된 디에고 데 아나야 말도나도에게 교육을 받았다. 그의 가정교사는 후안 우르타도 데 멘도사 엘 림피오였으며, 고해 신부는 도미니크회 수도사이자 훗날 살라망카와 레온의 주교가 된 알론소 데 쿠산사였다.

2. 2. 아스투리아스 공

1388년 랭커스터 공작 존 오브 곤트의 딸 캐서린과 결혼하면서 아스투리아스 공(Príncipe de Asturiasspa) 칭호를 받았다. 이 칭호는 브리비에스카 궁정의 승인을 받은 것으로, 카스티야 왕국의 공식적인 왕위 계승자를 나타냈다. 엔리케 3세는 이 칭호를 사용한 최초의 인물이며, 이전까지 왕위 계승자는 '인판테 마요레스'(Infantes mayoresspa)로 불렸다.

캐서린의 어머니 콘스탄스 오브 카스티야는 페드로 1세의 딸이었는데, 엔리케 3세의 할아버지인 엔리케 2세는 이복동생이었던 페드로 1세를 죽이고 왕위에 올랐었다. 따라서 이 결혼은 트라스타마라 왕조의 정통성을 강화하는 정치적 의미도 가지고 있었다.

2. 3. 즉위와 섭정 시대

1390년, 아버지 후안 1세가 낙마 사고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자, 엔리케 3세는 11세의 어린 나이에 왕위를 계승했다. 그는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였던 부르고스에서 태어났으며, 왕세자 시절 아스투리아스 공 칭호를 공식적으로 사용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

어린 나이에 즉위했기 때문에 초기에는 알폰소 엔리케스(Alfonso Enríquez)와 고모 레오노르(Leonor de Trastámara) 등 영향력 있는 귀족들의 도움을 받으며 통치했다. 14세부터 친정을 시작했으며,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국왕 자문 회의에 비교적 낮은 신분의 귀족들을 참여시키고, 주요 도시들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국왕의 대리인인 코레히도르(Corregidor)를 파견했다.

1388년, 엔리케 3세는 잉글랜드의 강력한 귀족이었던 랭커스터 공작 존 오브 곤트의 딸 카탈리나와 결혼했다. 카탈리나의 어머니 콘스탄스 오브 카스티야는 과거 카스티야의 왕이었던 페드로 1세의 딸이었다. 이 결혼은 중요한 정치적 의미를 가졌는데, 엔리케 3세의 할아버지인 엔리케 2세는 이복동생이었던 페드로 1세를 몰아내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페드로 1세의 혈통을 이은 카탈리나와의 결혼은 트라스타마라 왕조의 정통성을 더욱 공고히 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대외적으로도 활발한 활동을 펼쳤다. 1400년에는 해군 함대를 파견하여 북아프리카 해안의 테투안을 공격해 파괴했으며, 당시 경쟁 관계에 있던 잉글랜드를 상대로도 몇 차례 군사적 성공을 거두었다. 1402년에는 프랑스 왕국 출신의 탐험가 장 드 베텡쿠르(Jean de Béthencourt)를 지원하여 카나리아 제도에 대한 식민 활동을 시작하게 했다. 또한 동방의 강력한 군주였던 티무르에게 루이 곤잘레스 데 클라비호를 사절로 보내 외교 관계를 맺기도 했다.

하지만 엔리케 3세는 1406년 톨레도에서 27세라는 젊은 나이에 병으로 세상을 떠났다.[9]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왕위는 왕비 카탈리나와의 사이에서 태어난 어린 아들 후안 2세에게 돌아갔다. 그러나 당시 후안 2세는 두 살도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인 왕비 카탈리나가 아들을 대신하여 나라를 다스리는 섭정이 되었다. 이로써 카스티야는 다시 한번 섭정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2. 4. 치세

1390년, 아버지 후안 1세가 낙마 사고로 사망하자 11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 그는 왕세자 시절 아스투리아스 공 칭호를 받은 최초의 인물이었다. 즉위 초기에는 알폰소 엔리케스와 고모인 레오노르 데 트라스타마라 같은 귀족들의 지원을 받았다. 1393년, 14세가 되면서 친정을 시작했다.

엔리케 3세는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데 힘썼다. 그는 알폰소 엔리케스나 나바라 여왕 레오노르와 같이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친척들을 몰아냈다. 또한, 이전 왕들이 귀족들에게 부여했던 알카발라(판매세) 징수권이나 평의회 참석 권한 등의 특권을 폐지했다. 국왕 자문 회의에는 하급 귀족들을 등용했으며, 도시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 코레히도르(국왕이 파견한 지방 행정관)를 파견하고 도시 행정관의 수를 늘렸다.[1] 그는 왕국의 경제를 정비하는 한편, 1391년경 심화되었던 유대인 박해를 줄이기 위한 여러 법안을 통과시켜 사회 안정을 도모했다.[2][3]

대외적으로도 적극적인 정책을 펼쳤다. 엔리케 3세 재위 기간 동안 카스티야 해군은 잉글랜드를 상대로 여러 차례 승리를 거두었다. 1399년(또는 1400년)에는 해군 함대를 파견하여 북아프리카의 해적 기지였던 테투안을 파괴했다(테투안 약탈).[9] 1402년에는 프랑스 탐험가 장 드 베탕쿠르를 지원하여 카나리아 제도의 식민화를 시작했다.[9] 1396년, 포르투갈의 침략을 저지하기 위해 바다호스를 공격했으며, 1402년 8월 15일에는 매형인 포르투갈의 주앙 1세와 평화 조약을 체결하여 양국 관계를 안정시켰다.

더 나아가 오스만 제국의 팽창에 대응하기 위해 동방의 티무르 제국과의 외교 관계 수립을 시도했다. 그는 파요 고메스 데 소토마요르와 에르난 산체스 데 팔라주엘로스를 사절로 보냈고, 1403년 5월 21일에는 루이 곤잘레스 데 클라비호를 티무르에게 사절로 파견하여 동맹 가능성을 논의했다.[4] 클라비호는 이 여정을 《타메를란에게 보낸 사절단(Embajada a Tamorlán)》이라는 책으로 기록하여 남겼다.

종교적으로는 아비뇽 유수 시기 대립 교황 베네딕토 13세를 지지했다. 또한 이베리아 반도 내에서는 그라나다 토후국과의 전쟁을 재개하여 1406년 우베다 근처의 콜레하레스 전투에서 승리하고 해당 지역을 확보했다. 그러나 그해 말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그라나다 정복 계획은 완수되지 못했다.

엔리케 3세는 건강이 좋지 않아 재위 후반기에는 동생인 아라곤의 페르난도 1세에게 일부 권력을 위임했다. 그는 사냥을 즐겨 엘 파르도 산에 사냥용 별장을 지었는데, 이는 훗날 스페인 국왕으로 통치하는 카를 5세에 의해 엘 파르도 왕궁으로 개조되었다. 1406년 12월 25일, 그라나다 토후국에 대한 원정을 준비하던 중 톨레도에서 27세의 젊은 나이로 사망했다.[5][9]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 이후, 왕위는 랭커스터의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두 살배기 아들 후안 2세가 계승했다. 후안 2세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왕비 캐서린과 동생 페르난도 1세가 섭정을 맡게 되었다.

2. 5. 죽음과 유산

1406년, 엔리케 3세는 그라나다 왕국과의 전쟁을 준비하던 중 톨레도에서 27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했다.[9] 그의 시신은 톨레도 대성당의 새로운 군주 예배당(Capilla de los Reyes Nuevos)에 안치되었으며, 오늘날까지 그곳에 보존되어 있다.[6]

엔리케 3세의 묘. 톨레도 대성당의 새로운 군주 예배당


캐서린의 묘


엔리케 3세의 묘는 복음서 쪽 성가대석 위에 있으며, 플라테레스크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묘의 상자 부분은 카스티야와 레온의 문장으로 장식되어 있고, 하단 내부에는 트로피로 장식된 세 개의 패널이 있다. 이 패널들 위에는 두 명의 천사가 명판을 들고 있는데, 여기에는 중세 스페인어로 된 왕의 묘비명이 새겨져 있다.[7]

: '''원문 (중세 스페인어):'''

: AQUI IACE EL MUI TEMIDO Y JUSTICIERO REI DON ENRIQUE DE DULCE MEMORIA QUE DIOS DE SANTO PARAISO HIJO DEL CATHOLICO REI DON JUAN NIETO DEL NOBLE CAVALLERO DON ENRIQUE EN 16 AÑOS QUE REINO FUE CASTILLA TEMIDA Y HONRRADA NACIO EN BURGOS DIA DE SAN FRANCISCO Y MURIO DIA DE NABIDAD EN TOLEDO IENDO A LA GUERRA DE LOS MOROS CON LOS NOBLES DEL REINO FINO AÑO DEL SEÑOR DE 1407.[7]

: '''번역:'''

: 여기에 모두가 경외하고 정의로웠던 엔리케 왕이 잠들다. 신께서 그에게 성스러운 낙원을 주시기를. 그는 가톨릭 왕 후안 1세의 아들이자 고귀한 기사 엔리케 2세의 손자였다. 그가 통치한 16년 동안 카스티야는 경외와 존경을 받았다. 그는 부르고스에서 성 프란치스코 축일에 태어나 크리스마스톨레도에서 사망했다. 왕국의 귀족들과 함께 무어인과의 전쟁에 나서던 중이었으며, 주님의 해 1407년에 생을 마감했다.[7] ''(주: 묘비명에는 1407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사망 연도는 1406년이다.)''

묘 위에는 다색 석고로 만든 엔리케 3세의 누워 있는 조각상이 있다. 왕은 프란치스코회 수도복을 입고 있으며, 허리띠에는 칼을 차고 있다. 왕관을 쓴 머리는 세 개의 쿠션 위에 놓여 있고 발은 맨발이며, 조각상 모서리에는 무릎을 꿇은 네 명의 천사가 있다.

엔리케 3세가 요절하면서 왕위는 왕비 캐서린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후안 2세가 계승했다. 하지만 후안 2세는 당시 두 살이 채 되지 않았기 때문에, 어머니인 캐서린이 섭정이 되었다.

3. 가족

후안 1세와 아라곤의 레오노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랭커스터의 캐서린과 결혼하여 마리아, 카탈리나, 후안 2세 등 1남 2녀를 두었다.

3. 1. 결혼과 자녀

후안 1세와 레오노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엔리케 3세는 태어난 직후 포르투갈 여왕 베아트리스와 약혼했다. 이는 페르난도 전쟁 이후 카스티야와 포르투갈이 맺은 평화 조약의 일부였으나, 이 결혼은 성사되지 않았다. 대신 베아트리스는 엔리케 3세의 아버지인 후안 1세와 결혼했고, 이는 포르투갈 계승 위기로 이어져 아비스의 주앙 1세가 왕위에 오르는 계기가 되었다.

1388년 9월 17일, 바욘 조약에 따라 엔리케 3세는 랭커스터의 캐서린 (1372–1418)과 결혼했다. 캐서린은 랭커스터 공작 존 1세와 카스티야의 콘스탄스의 딸이자, 카스티야의 페드로 왕의 장녀였다. 이 결혼은 카스티야 왕국의 왕위 계승을 둘러싼 오랜 왕조 간의 갈등을 끝내고 트라스타마라 왕가의 지배를 공고히 하는 의미를 가졌다. 결혼식은 팔렌시아 대성당에서 거행되었다.

엔리케 3세와 캐서린 사이에는 다음과 같은 1남 2녀를 두었다.

이름생몰년배우자 및 설명
마리아1401년 ~ 1458년1415년 아라곤의 알폰소 5세와 결혼하여 아라곤의 왕비가 됨.
카탈리나1403년 ~ 1439년1420년 빌레나 공작 헨리 인판테 (아라곤 왕 페르난도 1세의 아들)와 결혼.
후안 2세1405년 ~ 1454년아버지의 뒤를 이어 카스티야의 왕이 됨.


3. 2. 가계

후안 1세와 레오노르 사이에서 태어났다. 캐서린과 결혼해 마리아(María), 카탈리나(Catalina), 후안 2세(Juan II)를 낳았다.

참조

[1] 서적 Extensión del régimen de corregidores en el reinado de Enrique III de Castilla Valladolid University
[2] 서적 Los judíos de Castilla en tiempo de Enrique III : el pogrom de 1391 Valladolid University
[3] 서적 Shevat Yehudah https://www.hebrewbo[...] Lvov
[4] 서적 La diplomacia castellana bajo Enrique III : estudio especial de la embajada de Ruy González de Clavijo a la corte de Tamerlán Ministry of Foreign Affairs. Centro de Publicaciones
[5] 서적 Una muerte para un rey : Enrique III de Castilla (Navidad de 1406) Secretariado de Publicaciones e Intercambio Editorial, Universidad de Valladolid
[6] 서적 Sepulcros de la Casa Real de Castilla Madrid
[7] 서적 El Panteón Real de las Huelgas de Burgos. Los enterramientos de los reyes de León y de Castilla Junta de Castilla y León
[8] 웹사이트 Historia genealogica da casa real portugueza https://archive.org/[...] Lisboa Occidental
[9] 백과사전 엔리케 3세 네이버 지식백과, 두산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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