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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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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는 고려 광종 26년(975)에 건립된 탑비로, 원종대사 찬유의 생애를 기리고 있다. 1915년 파손되어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었다가 2016년 여주박물관으로 옮겨진 비신과, 귀부 및 이수로 구성되어 있다. 비신은 2014년에 복원되었으며, 현재 여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 탑비는 보물 제6호로 지정되었으며, 귀부와 이수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우람한 형상을 자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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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개요
이름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驪州 高達寺址 元宗大師塔碑)
영문 이름Stele for Buddhist Monk Wonjong at Godalsa Temple Site, Yeoju
지정 번호보물 제6호
지정일1963년 1월 21일
시대고려 시대
소유국유
수량1기
문화재청 ID12,00060000,31
위치 정보
귀부, 이수 주소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 419-3번지
비신 주소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6-12 여주박물관

2. 건립 배경 및 역사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는 비석 본문에 975년(광종 26)에 세워졌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비석 뒷면에는 977년(경종 2)에 공사가 끝났다고 기록되어 있어 건립 시기가 명확하지 않다. 비석은 975년에 세워졌지만, 부도탑은 977년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원종대사 찬유가 958년에 입적하자 광종은 김정언에게 비문을 짓게 하였고, 966년경 탑비 건립이 시작되었다. 975년경 비문이 완성되자 이정순이 비문을 새겼고, 이후 비각 건립이 시작되어 977년에 완공되었다.[2][5]

2. 1. 건립 배경

비석 본문에는 975년(광종 26)에 비석을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비석 뒷면 맨 뒤에는 '처음 명인년(966, 광종 26)에 시작한 비와 탑의 공사가 마침내 정축년(977, 경종 2)에 이르러 공역을 끝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비석 건립 시기가 975년인지 977년인지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비석은 975년에 세워졌으나, 부도탑이 세워진 것은 977년으로 보인다. 부도탑과 탑비가 하나로 연결된 공사이기 때문에 모든 공사가 마무리된 977년에 비석 뒷면의 기록을 작성하였던 것으로 보인다.[2] 즉, 원종대사 찬유가 958년 입적하자 광종은 곧바로 김정언(金廷彦)에게 비문을 짓도록 하였으며, 966년경에는 탑비 건립 공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비문이 975년경에 완성되자 이정순(李貞順)이 비문을 새겼으며, 새기는 작업이 완료되자 비각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977년에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5]

2. 2. 건립 연도 논란

비석 본문에는 비석을 세운 것이 975년(광종 26)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음기 맨 뒤에는 ‘처음 명인년(966, 광종 26)에 시작한 비와 탑의 공사가 마침내 정축년(977, 경종 2)에 이르러 공역을 끝났다.’라고 기록되어 있다.[2] 따라서 비석 건립 시기가 975년인지 977년인지 분명하지 않다. 아마도 비석은 975년에 세워졌으나, 부도탑이 세워진 것은 977년으로 보인다. 부도탑과 탑비가 하나로 연결된 공사이기 때문에 모든 공사가 마무리된 977년에 음기를 작성했던 것으로 보인다.[2] 즉, 원종대사 찬유가 958년 입적하자 광종은 곧바로 김정언(金廷彦)에게 비문을 찬하도록 하였으며, 966년경에는 탑비 건립 공사가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비문이 975년경에 완성되자 이정순(李貞順)이 비문을 각자하였으며, 각자가 완료되자 비각을 건립하기 시작하여 977년에 완공되었음을 알 수 있다.[5]

2. 3. 비신 이전 및 복원

1915년 봄에 넘어져 8조각으로 깨진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었다가 현재 여주 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 중이다. 비신의 규모는 높이 279cm, 너비 162cm, 폭 31cm에 이른다.[6] 2010년 8월부터 비신 보존 처리 방안에 대한 복원 사업이 준비되었다.[6] 2010년 11월 25일 개최된 문화재위원회에서 원종대사혜진탑비의 비신을 복제하여 복원하고, 원 비신을 여주박물관 실내에 전시하는 방안이 가결됐다.[7]

여주시는 2012년 비신 복제를 위한 3D 스캔 작업을 완료하고 복원 설계를 완료하였으며, 2012년 12월 비신 복제 및 탑비 복원 공사를 착수했다. 여주시 여주박물관은 2010년부터 문화재청, 국립중앙박물관, 국립문화재연구소 등 관계기관과의 긴밀한 업무협의로 원종대사탑비 복원사업을 추진했다.[6] 국가 중요무형문화재 석장 120호인 이재순 석장이 2014년 8월 복원공사를 완료하였다.[8]

2016년 12월 15일, 국가지정문화재(보물)로 지정되어 있던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는 비신을 제외한 귀부와 이수만 지정되어 있었으나,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던 비신을 추가 지정하고 여주박물관으로 이전하였다.[1]

3. 형태 및 특징

975년에 혜목산 고달선원 국사 원종대사비를 받쳤던 귀부와 그 위에 얹혔던 이수이다. 1915년 봄에 비신이 넘어져 8조각으로 깨졌는데, 현재 여주박물관에 보존되어 있고, 비신 없이 귀부와 이수만 맞물려 있다. 원종대사부도비 귀부와 이수는 현존하는 한국 귀부와 이수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며 태산 같은 힘을 분출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각이 깊고 뚜렷하며, 험상궂은 꼬리, 콧등의 주름, 부릅뜬 눈 등이 특징적이다. 여의주를 물지 않은 점도 특이하다.

비석 제작에는 국공(국가 소속 공인)들이 파견되었고, 규모가 거대하며, 양식이 독특하고, 일급 석공이 제작에 참여한 점을 통해 비석 건립이 큰 사업이었고 원종대사의 영향력이 컸음을 알 수 있다.[2] 비문에 따르면 원종대사는 신라 경문왕 9년(869) 13세에 출가하여, 고려 광종 9년(958) 8월에 90세로 입적하였다. 왕은 원종대사 혜진이라 추시하고 진영(초상화)을 그리게 하였으며, 대사 입적 17년 후에 이 비가 세워졌다.[9] 귀부는 거대한 단일석으로 조성되고 6각 귀갑문이 장식되어 있으며, 이수는 구름과 용무늬로 장식되어 있고 정상에는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어 보주가 꽂혔던 흔적으로 보인다.[9]

3. 1. 귀부

975년에 혜목산 고달선원 국사 원종대사비를 받쳤던 귀부이다. 1915년 봄에 넘어져 8조각으로 깨진 비신은 현재 여주박물관에 보존되어 있고, 비신 없이 귀부만 남아있다. 원종대사부도비 귀부는 현존하는 한국 귀부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며 태산 같은 힘을 분출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각이 깊고 뚜렷하여 귀부의 튀어 올라온 거북등만 보아도 그 힘을 당할 장사가 천하에 없을 듯이 보인다. 치켜 올라간 꼬리가 험상궂기 이를 데 없고, 콧등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코를 벌름거리며 눈을 부릅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여의주를 물지 않은 게 특이하다. 비석 제작에 국공(국가 소속 공인)들이 파견되어 작업한 점, 규모가 거대한 점, 양식이 독특한 점, 비문을 짓고 일급 석공이 제작에 참여한 점 등을 종합해 보면, 비석 건립은 꽤 큰 사업이었으며, 원종대사의 영향력이 지대했음을 나타내고 있다.[2]

귀부는 거대한 단일석으로 조성되고 6각 귀갑문이 장식되어 있으며 장방형의 비좌는 운문이 새겨져 있는 연화좌 위에 조출되고 상면 둘레에는 복련문이 조출되어 있다. 네 다리와 손톱 끝의 조형은 사실적이며 예리하나 귀두의 면모는 흔히 볼 수 있는 용형이다.[9]

3. 2. 이수

1915년 봄에 넘어져 8조각으로 깨진 비신은 현재 여주박물관에 보존되어 있고, 비신 없이 귀부와 이수만 맞물려 있다.[2] 원종대사부도비 귀부와 이수는 현존하는 한국 귀부와 이수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며 태산 같은 힘을 분출하고 있다.[2] 전체적으로 각이 깊고 뚜렷하여 귀부의 튀어 올라온 거북등만 보아도 그 힘을 당할 장사가 천하에 없을 듯이 보인다.[2] 치켜 올라간 꼬리가 험상궂기 이를 데 없고, 콧등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코를 벌름거리며 눈을 부릅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2] 여의주를 물지 않은 게 특이하다.[2] 이수는 구름과 용무늬로 장식되어 있으며 정상에는 작은 구멍이 뚫어져 있어 보주가 꽂혔던 흔적으로 보인다.[9]

3. 3. 비신 (현재 여주박물관 소장)

975년(광종 26) 고려 초 국사 원종대사 찬유를 기리기 위해 세워진 탑비(보물] 제6호)의 비신이다.

4. 문화재적 가치

975년에 혜목산 고달선원에 세워진 국사 원종대사비를 받쳤던 귀부와 비신 위에 얹혔던 이수이다. 1915년 봄에 넘어져 8조각으로 깨진 비신은 현재 여주박물관에 보존되어 있으며, 비신 없이 귀부와 이수만 맞물려 있다.[2]

원종대사부도비 귀부와 이수는 현존하는 한국 귀부와 이수 가운데 규모가 가장 크며 태산 같은 힘을 분출하고 있다. 전체적으로 각이 깊고 뚜렷하여 귀부의 튀어 올라온 거북등만 보아도 그 힘을 당할 장사가 천하에 없을 듯이 보인다. 치켜 올라간 꼬리가 험상궂기 이를 데 없고, 콧등에 주름이 잡힐 정도로 코를 벌름거리며 눈을 부릅떠 정면을 응시하고 있다. 여의주를 물지 않은 것이 특이하다.[2]

비석 제작에는 국공(국가 소속의 공인)들이 파견되어 작업을 했고, 규모가 거대하며, 양식이 독특하다. 또한 비문을 짓고 일급 석공이 제작에 참여한 점 등을 종합해 보면, 비석 건립은 꽤나 큰 사업이었으며 원종대사의 영향력이 지대했음을 나타내고 있다.[2]

5. 현지 안내문 및 사진

1915년 봄에 넘어져 8조각으로 깨진 원종대사탑비의 비신은 현재 여주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비신 없이 귀부와 이수만 맞물려 있다.[2] 원래 비신은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져 경복궁 근정전 서쪽 회랑에 진열되어 있었으나, 현재는 여주박물관으로 옮겨졌다.[9]

참조

[1] 간행물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보물 지정내용 변경" http://gwanbo.mois.g[...] 문화재청장 2016-12-15
[2] 웹인용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 경기문화재연구원 https://gjicp.ggcf.k[...] 2021-08-06
[3] 웹인용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高達寺元宗大師慧眞塔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encykorea.aks[...] 2021-08-06
[4] 웹인용 05.여주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문(驪州高達院元宗大師慧3)眞塔碑文) https://blog.daum.ne[...] 2021-08-06
[5] 웹인용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 여주시사 https://www.yeoju.go[...] 2021-07-18
[6] 웹인용 100년 만의 귀향…여주로 돌아온 유물 https://gnews.gg.go.[...] 2021-07-18
[7] 뉴스 고달사지‘원종대사혜진탑비 비신’여주로 돌아온다 http://gnews.gg.go.k[...] 경기 뉴스 2010-11-29
[8] 웹인용 보물6호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몸돌…101년만의 귀향 https://www.yna.co.k[...] 2021-07-18
[9] 문서 현지 안내문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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