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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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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경복궁은 1395년 조선을 건국한 태조에 의해 한양에 창건된 조선의 정궁이다. 태종과 세종 시기를 거쳐 확장되었으며, 명종 때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임진왜란으로 완전히 불타 3세기 동안 폐허로 남았다. 1865년 흥선대원군에 의해 중건되었으나, 을미사변, 아관파천 이후 왕궁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일제강점기에 건물 훼손과 철거를 겪었다. 1990년부터 복원 사업이 진행되어 왔으며, 현재는 광화문을 정문, 근정전을 정전으로 하여 다양한 건축물과 정원을 갖춘 문화재로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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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위치 정보
기본 정보
이름경복궁
로마자 표기Gyeongbokgung
한글 표기경복궁
한자 표기景福宮
의미빛나는 복을 누리다
위치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세종로, 경복궁)
유형궁궐 (과거 왕궁)
지정 번호사적 117호
지정일1963년 1월 21일
면적432,703m²
웹사이트경복궁 공식 웹사이트
문화재청문화재청 경복궁 정보
이미지
경복궁 전경 (2008년)
근정전
경복궁 전경 (2016년)
역사
건립조선 태조 4년 (1395년)
주요 변화임진왜란으로 소실
고종 때 재건
일제강점기일본에 의해 파괴, 축소
현재복원 사업 진행 중
설명조선 왕조의 정궁
법궁 역할 수행
조선의 역사와 문화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
건축 양식
양식한국 건축
주요 시설
궁궐 내부근정전
경회루
강녕전
교태전
기타 시설국립고궁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참고 자료
참고자료네이버 지식백과
일본의 한국 식민지화
경복궁 소개 (영어, pdf)
경복궁 소개 (영어)
관리
관리 주체대한민국 국가유산청 경복궁관리소
소유대한민국 정부
현재 사용
주요 입주 기관국립고궁박물관
국립민속박물관

2. 역사

경복궁은 1394년 조선 태조가 조선 왕조를 건국하면서 짓기 시작하여 1395년에 완성된 조선 왕조의 법궁(정궁)이다.[5] 정도전이 《시경》의 구절을 따서 "경복궁"이라고 이름 지었다. 북악산을 등지고 정문인 광화문 앞으로 육조거리(지금의 세종로)가 펼쳐진 경복궁은 조선의 수도 한양의 중심이었다.

태종과 세종 대에 걸쳐 궁궐이 확장되었으나, 1553년 화재로 큰 피해를 입었다. 명종의 명으로 복구되었지만, 1592년 임진왜란 때 선조가 피난하면서 백성들의 분노로 불타 없어졌다.[7] 이후 창덕궁이 정궁 역할을 했고, 경복궁은 273년간 폐허로 남았다.[8]

1867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경복궁은 대대적으로 재건되었다. 330여 동의 건물들이 들어섰고, 왕과 관리들의 집무 공간인 외전, 왕실 가족의 거주 공간인 내전, 왕비와 세자의 거처 등이 있었다. 경복궁은 다시 한국과 왕실의 상징이 되었지만,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고종이 궁을 떠나면서 황실은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16]

1910년 한일병합조약 이후 경복궁은 왕궁의 역할을 잃고 일제 강점기 동안 크게 훼손되었다. 1911년 경복궁 부지 소유권이 조선총독부로 넘어가고,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며 건물의 90% 이상이 철거되었다. 1926년에는 근정전 앞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세워졌고, 광화문은 이전되었다.[11] 한국 전쟁으로 광화문의 목조 구조물이 파괴되는 등 더 큰 피해를 입었다.

1990년부터 경복궁 복원 사업이 시작되었다.[12] 1996년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되고, 흥례문(2001년)과 광화문(2006~2010년)이 원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내전과 동궁 복원도 완료되었다. 현재 대한민국 정부는 경복궁을 이전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한 사업을 진행하고 있다.[13]

2. 1. 태조의 창건

1392년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는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을 열어 한양에 천도하면서, 먼저 종묘사직 건설에 착수하고, 청성백 심덕부에게 명하여 궁궐을 짓게 했다.[35][36] 처음 새 궁궐을 지으려고 잡은 터는 고려 때의 남경 이궁(南京 離宮) 자리였으나 너무 좁아, 거기서 남쪽으로 조금 옮겨 지금의 경복궁 자리에 건물을 배치하고 전각을 세웠다.[37][38]

태조


새 궁궐 경복궁은 1395년 8월 경기좌도의 인부 4,500명, 경기우도 인부 5,000명, 충청도 인부 5,500명을 징용하면서 시작되어, 같은 해 9월 29일에 1차로 완성되었다.[39] 그러나 이때는 궁궐 내부 중심부만 지어졌고, 궁궐을 감싸는 궁성이나 궁궐 앞에 세워지는 의정부나 육조 등의 관청은 몇 해 뒤에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40]

그 해인 1395년 음력 10월 태조는 입궐하면서 정도전에게 새 궁궐과 주요 전각의 명칭을 지어 올리게 하였는데, 이때 경복궁의 명칭을 비롯하여 강녕전, 연생전, 경성전, 사정전, 근정전, 근정문, 정문(현재 광화문) 등 주요 건물의 명칭이 지어졌다. 정도전은 《시경》(詩經) 〈주아〉(周雅)에 나오는 “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기취이주 기포이덕 군자만년 개이경복)”에서 두 글자를 따서 “景福宮”(경복궁)이라고 지었다.[36][41]

높이 20자 1치, 둘레 1813보(步: 6尺)의 담을 쌓고 남쪽에는 정문인 광화문, 북에는 신무문, 동에는 건춘문, 서에는 영추문을 두었다. 조하를 받는 정전인 근정전의 주위에는 근정문을 비롯한 4문이 있었고, 그 북쪽 사정전은 편전이며, 강녕전·교태전 등의 침전, 그 밖에 여러 전각이 있었다. 이때 건립된 전각은 총 390여 칸에 이르렀는데, 태조실록에 새 궁궐의 규모, 배치 및 각 건물의 기능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39][42]

실록 내용을 통해 창건 당시 경복궁의 기본 배치를 짐작하자면, 경복궁은 남북축 선상에서 남쪽에서 북쪽으로 오문, 정전, 보평청, 연침의 순서로 남북 직선축을 따라 중심 전각이 나란히 놓이고, 중심 전각 주변에는 행각이 좌우 대칭으로 네모반듯하게 감쌌으리라 추정된다.[43] 그리고 왕이 신하들과 정무를 보는 외전은 궁궐 앞쪽에, 내전은 뒤쪽에 배치하는데, 내전의 각 전각과 정전은 천랑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43]

궁궐의 외곽 울타리인 궁성을 건설한 것은 궁궐을 완성한 지 3년 뒤인 1398년의 일이었는데, 이 해 1월에 민정을 징발하여 궁성 공사에 들어갔다.[40] 공사는 겨울 동안에 대체적인 궁성 성벽을 축조한 것으로 보이며, 다시 그 해 7월이 경기 좌도와 충청도 군사 3,700명을 동원하여 궁성을 수축하였다.[40] 궁성에는 정문인 남문 외에 동문과 서문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북쪽은 궁성과 문을 갖추지 못하고 목책으로 둘러쳐 있다가 세종 대에 와서야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40][44] 한편 궁궐이 창건되었을 때 실록 기록 말미에 "(뒤에) 문 남쪽 좌우에는 의정부, 삼군부, 육조, 사헌부 등의 각사 공청이 벌여 있었다"고 나와있어서, 궁성 문 남쪽에 의정부나 육조 등 여러 관청이 좌우로 조성된 것은 궁성과 궁문이 조성된 1398년 때로 추정된다.[45]

2. 2. 전각 확대와 1553년 화재

태종과 세종을 거치면서 경복궁에는 계속해서 전각이 추가되고 보완되었다. 태종 11년(1411년)에는 명당수를 파서 홍례문 앞 금천으로 끌어들여 궁궐의 상징성과 풍수적인 형국을 보완했고, 경회루를 지어 외국 사신과 조정 관원들의 연회 장소로 사용했다.[39] 1426년(세종 8년)에는 집현전에서 광화문, 홍례문(현재 흥례문), 일화문, 월화문, 건춘문, 영추문, 영제교 등 경복궁의 각 문과 다리의 이름을 지어 올렸다.[36] 1429년에는 사정전과 경회루의 중수를 시작으로 주요 전각을 새로 짓거나 중수했다. 그밖에 간의대 등의 관측 시설도 세종 때 완비되었다. 경회루는 1474년에 보수되었고, 근정전과 광화문에는 청와(靑瓦)가 올려졌다.[46]

명종 8년(1553년) 9월에는 강녕전에 큰 불이 나서 사정전, 근정전, 경회루, 함원전, 청연루만 남기고 편전과 침전 구역의 건물이 모두 소실되었다. 이 화재로 역대로 내려오던 진귀한 보배와 서적, 왕과 왕비의 고명, 의복, 거마 등이 불타버렸다.[53] 불이 난 지 1년도 되지 않은 1554년 봄에 중건 공사가 시작되어 그해 9월에 낙성되었다.[53] 이때 동원된 인력은 부역 2,200명, 품팔이꾼 1,500명이었다고 한다.

2. 3. 임진왜란

1592년 임진왜란으로 경복궁은 완전히 불타 잿더미가 되었다. 선조가 서울을 버리고 피난하면서 치안이 무너지자, 분노한 백성들이 왕궁에 불을 질렀다.[7] 이후 왕실은 창덕궁으로 옮겨갔고, 경복궁 터는 3세기 동안 폐허로 남았다.[8] 임진왜란 당시 소서행장 등의 제1부대와 가토 기요마사 등의 제2부대가 한양에 입성하기 전에 이미 조선 백성들에 의해 약탈당하고 불태워졌다.[34]

2. 4. 흥선대원군의 중건

임진왜란으로 잿더미가 된 경복궁은 273년 동안 방치되었다가, 1867년 흥선대원군의 주도로 재건되었다. 복원은 대규모로 진행되어 330여 동의 건물들이 미궁처럼 들어섰다.[5] 궁궐 안에는 왕과 관리들의 집무 공간인 외전(外殿)과 왕실 가족의 거주 공간과 정원인 내전(內殿)이 있었다. 광대한 경복궁 안에는 중궁(왕비의 거처)과 동궁(세자의 거처)을 비롯한 크고 작은 다른 궁궐 건물들도 있었다.

1867년 흥선대원군의 섭정 시절에 궁궐 건물들이 재건되어 건물 330채, 방 5,792개에 달하는 거대한 건축물 단지가 조성되었다. 432703m2 부지에 자리 잡은 경복궁은 다시 한번 한국 민족과 한국 왕실의 상징적인 건축물이 되었다. 1894년 일본이 궁궐을 점령하여 고종으로 하여금 친일 정부를 수립하게 강요했다. 1895년 일본인 요원들에 의한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고종 황제는 궁궐을 떠났고, 황실은 경복궁으로 돌아오지 않았다.[16]

1865년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재건했고, 1868년 국왕의 거처와 정무를 창덕궁에서 경복궁으로 옮겼다.

2. 5. 일제강점기

1910년 한일 강제 병합 이후, 경복궁은 본래의 모습을 잃고 크게 훼손되었다. 일제는 경복궁 내의 많은 건물을 헐어 민간에 팔았으며,[55] 1915년에는 '시정오년기념 조선물산공진회'를 경복궁 안에서 개최하면서 4,000여 칸의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상품 진열관을 설치하였다.[56] 전시회가 끝난 후, 일제는 경복궁 안에 각종 석탑, 부도, 석등 등을 옮겨 배치하고 음악당을 설치했으며, 1916년부터는 조선총독부 청사 건립을 시작하였다.[56]

1917년 창덕궁에 큰 화재가 발생하자, 일제는 이를 복구한다는 명목으로 경복궁의 강녕전, 교태전 등 침전 건물들을 헐어 창덕궁 복구에 사용하였다.[56] 1918년부터는 근정전, 사정전 등 왕권의 상징적인 건물들을 유물 전시실로 이용하였다.[57] 1916년부터 시작된 조선총독부 건물 공사는 1926년에 완료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흥례문과 영제교 등이 헐리고 1927년에는 광화문이 건춘문 북쪽으로 옮겨졌다.[55][57]

1929년 조선박람회 회장도


이 밖에도 일본인들은 1929년 융무당, 융문당 등을 헐어 용광사를 지었고, 1932년에는 선원전을 헐어 이토 히로부미를 위한 사당인 박문사를 지었다.[55] 1940년에는 건청궁터에 미술관을 지으면서 수많은 내전 건물들을 헐어버렸다.[55]

2. 6. 광복 이후

1990년부터 2030년 완료를 목표로 경복궁 복원사업이 시작되었으나,[57] 2045년으로 계획이 연장되었다. 1915년 조선총독부 미술관으로 건립되어 조선공업전람회 장소로 사용된 철근콘크리트 건물은 1995년에, 1926년 건립된 조선총독부 청사는 1997년에, 1935년 건립된 조선총독부 미술관은 1999년에 각각 철거되었다. 수정전 남측의 한식 건물인 무명각(일제강점기 건립 추정)도 1998년에 철거되었다. 다만, 조선총독부 박물관 창고로 1915년에 건립된 부속 건물은 현재 경복궁 관리소로 사용 중이다.

철거되기 전 근정문 앞에 서 있는 일본 총독부 건물 (1995-96)


2010년 기준으로 경복궁 1차 복원정비사업이 완료되어 89동 8987m2(2720평)의 건물이 복원되었다. 일제의 철거를 피해 남아 있던 건물 36동을 포함해 총 125동의 건물이 들어서, 고종 당시 경복궁 건물 500여 동의 약 25% 수준에 도달하였다.[63] 2010년 9월 이후 광화문 권역이 완전히 개방되었다.

오늘날의 경복궁


2011년부터 약 20년에 걸쳐 경복궁 전각을 76%까지 복원하는 2차 복원정비사업이 추진 중이다. 1차 복원이 중심 건물들로 경복궁의 뼈대를 갖추는 것이었다면, 2차 복원은 임금의 수라간과 궐내각사 등 많은 부속건물을 지어 살을 붙이는 과정이다.[64]

경복궁 후원에는 일제 강점기인 20세기 초에 건립된 일본 총독 관저의 주요 부분이 있었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이곳을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민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 경내에 있던 일본 총독 관저는 일본 식민주의의 주요 상징물을 제거하기 위해 철거되었다.

대한민국 독립 후, 경복궁 내 구 조선총독부 청사는 중앙청 및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용되었으나, 경복궁 복원 계획에 따라 찬반 논란 속에 1996년에 해체되었다. 광화문은 1968년에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외관이 복원되었으나, 총독부 청사가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가 아니었다. 그래서 2006년에 철거되고, 2010년에 정확한 위치에 목조 건물로 복원되었다.

2. 7. 복원사업

1989년,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강점기(1910~1945) 동안 일본 제국의 식민 정부에 의해 파괴된 수많은 건물들을 재건하기 위한 40년 계획을 시작했다.

1995년 여러 논쟁 끝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흥례문과 회랑이 재건되었다. 당시 경복궁 내에 있던 국립중앙박물관1996년 12월 임시 시설로 이전되었고, 2005년 용산구의 새로운 건물로 이전했다.

2009년 말까지, 일제강점기 이전에 존재했던 건물의 약 40%가 복원 또는 재건되었다.[12] 경복궁 복원 사업 5단계의 일환으로 경복궁의 정문인 광화문이 원래 설계대로 복원되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경복궁을 이전의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해 향후 20년간의 복원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13]

대한민국 독립 후, 경복궁 내 구 조선총독부 청사는 중앙청 및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이용되었으나, 경복궁 복원 계획에 따라 찬반 논란 속에 1996년에 해체되었다. 1968년 광화문이 철근콘크리트 구조로 복원되었으나, 총독부 청사가 있었기 때문에 정확한 위치가 아니었다. 그래서 2006년에 철거되고, 2010년에 정확한 위치에 복원되었다.

2. 7. 1. 1차 복원정비사업

1990년에 시작된 1차 복원 정비 사업은 당초 2009년에 완료될 예정이었으나, 1년 연장되어 2010년에 마무리되었다. 총 1789억 원의 예산이 투입될 계획이었으나, 실제로는 1572억 원이 투입되어 89동 8987 m2(2720평)의 건물이 복원되었다. 이로써 일제강점기에 철거되지 않고 남아 있던 건물 36동을 포함하여 총 125동의 건물이 들어서게 되었고, 이는 고종 당시 500여 동의 25% 수준이다.[65][66]

1차 복원 정비 사업의 주요 목표는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조선 정궁의 기본 궁제를 완비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옛 조선총독부 청사와 옛 조선총독부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 옛 조선총독부미술관(전통공예전시관) 등을 철거하고 광화문을 이전 복원하였다.

복원 사업은 일제강점기에 훼손된 정전(正殿), 편전(便殿), 침전(寢殿), 동궁(東宮), 빈전(殯殿) 등 경복궁 중심축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다. 구체적인 복원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업 단계기간복원 구역복원 내용
1단계1990년 ~ 1995년침전 권역강녕전, 교태전 등 12동 복원
2단계1994년 ~ 1999년동궁 권역자선당, 비현각 등 18동 복원
3단계1996년 ~ 2001년흥례문 권역흥례문 등 6동 복원
4단계1997년 ~ 2005년태원전 권역태원전 등 25동 복원
5단계2001년 ~ 2010년광화문 및 기타 권역광화문, 건청궁, 함화당, 집경당 등 32동 복원
2006년 ~ 2010년광화문 권역광화문 제 모습 찾기 사업[65][66]



특히, 근정전은 일제강점기 때 축이 틀어진 것을 바로잡기 위해 '근정전 정비공사'(2000년~2003년)를 통해 복원되었다.

2. 7. 2. 2차 복원정비사업

1990년에 시작된 1단계 복원 사업은 2010년까지 진행되어 총 1572억 원의 예산을 투입, 89동의 건물을 복원하였다. 이는 고종 당시 경복궁 건물 500여 동의 25% 수준이다.[65][66] 이 사업을 통해 일제강점기에 훼손되었던 정전(正殿), 편전(便殿), 침전(寢殿), 동궁(東宮), 빈전(殯殿) 등 경복궁의 중심축을 이루는 건물들이 복원되었다.

1단계 복원 사업의 세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기간복원 대상주요 복원 건물비고
1990년 ~ 1995년침전 권역강녕전, 교태전 등 12동
1994년 ~ 1999년동궁 권역자선당, 비현각 등 18동
1996년 ~ 2001년흥례문 권역흥례문 등 6동
1997년 ~ 2005년태원전 권역태원전 등 25동
2001년 ~ 2010년광화문 및 기타 권역광화문, 건청궁, 함화당, 집경당 등 28동2006년~2010년 광화문 복원[65][66]



1단계 복원 사업 기간 동안 옛 조선총독부 건물과 옛 조선총독부박물관(국립민속박물관), 옛 조선총독부미술관(전통공예전시관) 등이 철거되었으며, 광화문이 이전 복원되었다. 이는 일제의 잔재를 청산하고 조선 정궁의 기본 궁제(宮制)를 완비하기 위한 것이었다.[65][66]

2차 복원 사업은 2011년부터 2030년까지 진행될 예정이며, 1865년 재건 당시의 75% 수준인 379동 복원을 목표로 한다. 1차 복원 사업에서 주요 건물이 복원된 데 이어, 2차 복원 사업에서는 부속 건물의 복원도 함께 진행될 예정이다.

3. 건축물

경복궁은 동서남북 4개의 대문 안에 근정전을 중심으로, 동쪽에 동궁과 자전, 서쪽에 궐내각사와 경회루 등 수십 채의 전각이 배치된 구조였다. 조선 건국 3년 후 건설되어 법궁(正宮)으로 기능했으나,[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이후 273년간 방치되었다가 1867년 흥선대원군 주도로 재건되어 330여 동의 건물들이 들어섰다.

1965년 8월 경복궁 항공사진


일제강점기인 1911년, 경복궁 부지 소유권은 조선총독부로 넘어갔고, 1915년 조선공업전람회를 명목으로 건물의 90% 이상이 철거되었다.[9][10] 이후 일본은 남은 건물마저 허물고 총독부 건물(1916~1926년)을 건설했다.[11] 근정전경회루 등 일부 상징적인 건물만 남았다.

1990년부터 복원 작업이 진행되어 1996년 총독부 건물이 철거되고, 흥례문(2001년)과 광화문(2006~2010년)이 원래 위치와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내전과 동궁 복원도 완료되었다. 현재 경복궁 총면적은 415800m2이다.[6] 1989년,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강점기(1910~1945) 동안 일본 제국에 의해 파괴된 수많은 건물들을 재건하기 위한 40년 계획을 시작했다. 2009년 말까지, 일제강점기 이전에 존재했던 건물의 약 40%가 복원 또는 재건되었다.[12] 대한민국 정부는 경복궁을 이전의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해 향후 20년간의 복원 사업을 계획하고 있다.[13]

경복궁의 주요 건축물은 다음과 같다.

3. 1. 궁성

경복궁의 정문(남문)이다. 원래 이름은 남문이었으나, 세종 때 '왕의 큰 덕(德)이 온 나라를 비춘다’는 의미로 광화문이라 개칭하였다. 1395년 건립되었으며, 2층 누각 앞에 해태 조각상 한 쌍이 있다. 광화문 복원 공사 때 잠시 이동했다가 복원 완료 후 2010년 8월 15일 광복절에 공개되었다. 광화문에는 3개의 문이 있는데, 가운데 문은 왕이, 좌우 문은 신하들이 다녔다. 천장에는 주작, 용, 거북 그림이 있다. 2021년부터 월대 복원 발굴 공사가 진행 중이다.건춘문(建春門)
경복궁의 동문으로, ‘동쪽은 에 해당한다’는 의미이다. 주로 왕족, 척신, 상궁이 드나들었다. 문 앞에는 은행나무가 있고, 천장에는 청룡이 있다. 문 안에는 왕세자 거처인 춘궁(春宮)이, 문 밖에는 왕실 종친 교육 기관인 종학(宗學)이 있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흥선대원군이 재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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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추문(迎秋門)
경복궁의 서문으로, ‘서쪽은 가을에 해당하여 가을을 맞이한다’는 의미이다. 문 밖에 명당수가 흐르는 개울이 있었다. 주로 일반 관료들이 드나들었다. 천장에는 백호가 그려져 있다. 문 안에는 궐내 각사가, 문 밖에는 궁궐 물자 조달 관청이 있었다. 1865년 준공된 원래 영추문은 1926년 전차 진동으로 석축이 무너져 철거되었다. 1975년 원래 위치에서 북쪽으로 50m 떨어진 곳에 철근 콘크리트로 재건되었다.
신무문
신무문(神武門)
경복궁의 북문으로, ‘북쪽을 관장하는 현무’에서 따왔다. 천장에는 현무가 그려져 있다. 음기가 강하다 하여 평소에는 굳게 닫아 두었다.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흥선대원군이 재건하였다. 1961년 5·16 군사정변 이후 청와대 보호 명목으로 군부대가 경복궁 내에 주둔하면서 45년간 폐쇄되었다. 현재 청와대 본관 정문과 마주하고 있다.


3. 2. 외조

경복궁의 외전(外殿)은 왕과 관리들이 집무를 보던 공간이다. 주요 건물로는 근정전, 사정전, 경회루, 수정전, 집옥재 등이 있다.
경회루 (왕실 연회장)


'''경회루(慶會樓)'''는 경복궁 연못 안에 있는 정자로, 조선 시대에 중요하고 특별한 국가 연회를 개최하는 장소로 사용되었다. 1985년 1월 8일 대한민국의 국보 제224호로 지정되었다.[6]

최초의 경회루는 1412년 태종 12년에 건축되었으나,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 현재의 건물은 1867년(고종 4년)에 128m 너비, 113m 길이의 인공 직사각형 연못의 섬 위에 건축되었다.

주로 목재와 돌로 건축된 경회루는 목조 구조물이 48개의 거대한 돌기둥 위에 놓여 있으며, 목재 계단이 2층과 1층을 연결한다. 경회루의 외곽은 네모난 기둥으로 지탱하고 내부 기둥은 원형으로 하여 음양의 개념을 나타내었다. 1412년 경회루가 처음 지어졌을 때, 이 돌기둥들은 하늘로 승천하는 용을 묘사한 조각으로 장식되었지만, 19세기에 건물이 재건축될 때는 이러한 세부 사항이 재현되지 않았다. 세 개의 돌다리가 건물을 궁궐 경내와 연결하고 있으며, 섬 주변의 난간 모서리에는 십이지신을 묘사한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경회루는 과거 1983~2002년 발행된 대한민국 10,000원 지폐에 등장하였다.

수정전


'''수정전(修政殿)'''은 경회루 남쪽에 위치한 건물로, 1867년에 건립되어 조선 시대 정부에서 사용되었다.[6] 보물 제1760호이며, 세종대왕 시대 집현전이 있던 자리이다. 근정전 서쪽 외곽 공간에 남아있는 유일한 건물이라는 점에서 역사적, 건축적 가치가 높다.

집옥재(왕실 사서고)


'''집옥재(集玉齋)'''는 경복궁 건청궁 옆에 위치한 고종의 2층 서고이다. 1876년 경복궁에 큰 화재가 발생하자 고종은 잠시 창덕궁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는 1888년 경복궁으로 돌아왔지만, 기존의 집옥재 건물을 창덕궁에서 현재 위치로 옮겨 1891년에 재건축하였다.[21] 집옥재라는 이름은 '옥을 모으는 재'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이 건물은 전통 한국 궁궐 건축 양식이 아닌 중국 건축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독특한 특징을 보인다.[22] 측벽은 전적으로 벽돌로 건축되었는데, 이는 당시 중국에서 흔히 사용하던 방식이며, 지붕 형태, 내부 칸막이, 기둥 등에서도 중국식 영향이 나타난다. 이러한 건축 양식은 이국적인 외관을 의도한 것으로 추측된다.

집옥재 왼쪽에는 팔각형 2층 정자인 '''팔우정(八隅亭)'''이, 오른쪽에는 '''협길당(協吉堂)'''이 위치하여 집옥재와 함께 자리 잡고 있다. 팔우정은 서적을 보관하는 곳으로 사용되었고, 협길당은 집옥재의 부속 건물 역할을 하였다. 두 건물 모두 집옥재와 내부적으로 연결되어 있다.[21]

집옥재 남쪽에 위치했던 서고 건물인 '''보현당(寶賢堂)'''과 '''가회정(嘉會亭)'''은 20세기 초 일본 정부에 의해 철거되었다.

3. 2. 1. 정전 권역

근정문


근정전


'''근정문(勤政門)'''은 경복궁의 정전인 근정전의 정문으로, 정면 3칸, 좌우로 각각 1칸씩의 옆문을 배치한 중층 구조이다. 보물 제812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고종 4년(1867년)에 근정전과 함께 중건되었다.[73] 평소에는 문을 닫아두었고, 관리들은 좌우에 있는 일화문(日華門)과 월화문(月華門)을 통해 출입하였다. 문반 관료들은 동쪽의 일화문을, 무반 관료들은 서쪽의 월화문을 이용했다.

근정전 (왕좌가 있는 전각)


'''근정전(勤政殿)'''은 문무백관의 조하(朝賀)를 비롯한 국가 의식을 거행하고, 외국 사신을 접견하던 경복궁의 정전이자 법전(法殿)이다.[72] 국보 제223호로 지정된 현존하는 한국 최대의 목조 건축물이다. 정종, 세종, 단종, 세조, 성종, 중종, 명종 등 조선 전기의 여러 임금이 이곳에서 즉위하였다.[72] 임진왜란 이전에는 주변이 단랑(單廊)이었으나, 현재는 복랑(復廊) 형식의 행각으로 둘러싸여 있다. 마당에서 약간 북쪽에 있는 상·하월대 위에 정면 5칸, 측면 5칸 규모의 다포계 팔작지붕 중층 건물로 지어졌다.[72] 정전 앞 넓은 마당에는 거칠게 다듬은 박석(薄石)이 깔려 있고, 어도(御道) 좌우로 문·무관의 신분에 따라 자리하는 아홉 쌍의 품계석이 놓여 있다.

품계석


조선물산공진회 때 용상이 훼손되었으나 2000년부터 2003년까지 근정전 해체 공사 때 복원되었다.[73] 건물 외관은 중층이지만 내부는 층 구분이 없이 트인 통칸이며, 뒷면 내진주 중앙에는 어좌와 일월오봉도 병풍이 있다.[73] 천장 중앙에는 보개(寶蓋)를 설치, 구름무늬와 발톱이 7개인 칠조룡(七爪龍) 한 쌍을 달았으며, 바닥에는 전돌을 깔았다.[73]

흥례문


영제교


'''흥례문(興禮門)'''은 정문 광화문과 근정문 사이의 중간문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 목조 건물이다. 1867년 중건 후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초 철거되어 조선총독부 청사가 들어섰으나, 경복궁 복원 사업으로 총독부 건물을 철거하고 2001년 복원했다.

'''영제교(永濟橋)'''는 근정문 앞 금천에 설치된 다리로, 풍수지리사상에 따라 정전 안을 신성하게 하기 위해 명당수를 흐르게 하고 그 위에 설치했다. 북악산에서 흘러온 물과 서쪽에서 온 물이 합쳐져 금천을 이루며, 덕수궁의 금천교, 창덕궁의 옥천교와 금천교도 같은 원리로 지어졌다. 길이는 13.85m, 너비는 9.8m로, 3칸으로 나뉘며 중앙이 3.4m, 양쪽이 각각 3.2m이다. 가운데는 어도(御道)로 왕의 어가가 지나는 길이다.

'''기별청(奇別廳)'''은 근정문 전 서쪽의 작은 건물로, 승정원에서 발행하는 관보 성격의 기별지를 발행하던 곳이다.[71] 매일 아침 각 관청의 기별서리들은 기별청에서 승정원의 기별지를 베껴 돌아갔고, 지방에는 기별군사라는 전령이 며칠 분량을 한꺼번에 가져갔다.

3. 2. 2. 편전 권역

사정전


'''사정전'''(思政殿|사정전한국어)은 조선 시대 왕이 주요 집무를 보던 건물이다. 근정전 뒤편에 위치하며, 왕은 사정전에서 집무를 보고 고위 관료들과 회의를 열었다.

사정전은 왕이 나랏일을 보던 편전의 중심 건물로 좌우의 만춘전(萬春殿)과 천추전(千秋殿)과 함께 편전을 이루고 있다. 다음은 사정전에 대한 정도전의 설명이다.[74]

서쪽과 동쪽에는 사정전의 측전인 '''천추전'''(千秋殿|천추전한국어)과 '''만춘전'''(萬春殿|만춘전한국어)이 있다. 사정전에는 난방 시설이 없지만, 이 두 건물에는 추운 달에 사용할 수 있도록 온돌이 설치되어 있다.

천추전은 왕의 소편전(小便殿)으로 왕과 신하가 학문을 토론하던 장소이다. 사정전의 보조 역할을 하며 주로 가을과 겨울에 사용하였다. 만춘전과는 좌우 대칭을 이룬다. 문종이 이 곳에서 승하하였다. 예전에는 사정전과 연결되어 있었다고 전해지나, 중건되면서 격리된 형태로 변했다.

만춘전은 사정전을 보좌하는 부속 건물로서 임금이 신하들과 나랏일을 의논하거나 연회를 베풀던 편전(便殿) 가운데 하나이다. 천추전과 좌우대칭을 이루며, 주로 봄에 사용된 건물이였다. 천추전과 마찬가지로 온돌이 설치되어있다. 다만, 천추전과 달리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파괴되어 터만 남아있다가 1988년에 복원하였다.[75] 세종 때 만춘전에 일성정시의를 설치했다는 기록이 있다.[76]

3. 2. 3. 궐내각사 권역

수정전


'''수정전(修政殿)'''은 세종 때 훈민정음 창제의 산실이었던 집현전이 있던 자리에 세워진 건물이다. 1592년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1867년(고종 4년)에 재건되어 왕의 편전으로 사용되었다. 1894년 제1차 갑오개혁 당시 군국기무처와 내각 청사로 사용되기도 하였다.

수정전 주변에는 200칸 가까이 되는 행각들이 있었고, 비변사, 승정원 등 여러 관청이 있었다. 수정전 서쪽에는 궁중의 경서와 문서를 관리하던 옥당과 역대 왕들의 글과 옥새를 보관하던 검서청 등이 있었다. 남쪽으로는 비변사의 당상관 등 신하들이 나랏일을 의논하던 빈청과 왕명 출납을 담당하던 승정원 등의 건물이 영추문까지 이어져 있었다. 수정전 좌측 앞에는 장영실자격루를 세웠던 곳이라는 표식이 있다.

3. 3. 내전

내전은 왕과 왕비가 거처하던 곳으로 왕의 침소인 강녕전과 왕비의 침소인 교태전, 왕의 할머니인 대왕대비의 거처인 자경전이 있다.[5]

교태전


향원정


자경전


동궁


건청궁


'''향원정(香遠亭)'''은 고종이 1873년경 건청궁 북쪽에 지은 2층 육각정자이다.[19] 향원지(香遠池)라는 인공 호수 섬 위에 세워졌으며, 취향교(醉香橋)라는 다리로 궁궐과 연결된다.[19]

'''자경전(慈慶殿)'''은 헌종의 어머니 신정왕후가 주로 거주하던 곳이다.[20] 1865년 건립 후 두 차례 화재를 겪었으나 1888년 재건되었다. 일제강점기에도 살아남은 유일한 왕실 거주 건물이다.

'''동궁(東宮)'''은 왕세자와 세자빈의 거처로, 향원정 남쪽에 위치했다. 순종이 거주하기도 했으나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었다. 1999년 복원 작업이 시작되었지만 자선당과 비현각만 복원되었다.[23]

'''건청궁(乾淸宮)'''은 고종이 1873년 경복궁 내에 건설한 사적인 왕실 거처이다.[16] 1888년부터 고종이 거주하였고, 1895년 명성황후가 일본인 자객들에게 시해당한 비극적인 장소이기도 하다.[16]

3. 3. 1. 침전 권역

강녕전|康寧殿한국어은 왕의 주된 거처로 사용되었던 건물이다.[15] 1395년(태조 4년)에 처음 건립되었으며, 왕의 침실이 있었다.[15] 1592년 임진왜란 때 파괴된 후, 1867년 경복궁 중건 당시 재건되었으나, 1876년 11월 대화재로 다시 소실되어 고종의 명으로 1888년에 복원되었다. 그러나 1917년 창덕궁 희정당이 화재로 소실되자, 일제는 강녕전을 해체하여 그 건축 자재를 사용하여 1920년 희정당을 복원하였다.[15] 현재의 강녕전은 1994년에 원형에 맞춰 정밀하게 복원된 건물이다.

강녕전은 회랑과 14개의 직사각형 방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건물의 좌우에 각각 7개의 방이 바둑판처럼 배치되어 있다. 왕은 중앙의 방을 사용하였고, 궁궐 시종들은 나머지 측면 방에 거주하며 왕을 보호하고, 보필하며, 명령을 받았다. 건물은 높은 돌기단 위에 있으며, 건물 앞에는 돌 난간이 있는 마루가 있다.

강녕전의 특징적인 부분은 '용마루'(용마루|labels=no한국어)라고 불리는 지붕 위의 흰색 용마루가 없다는 것이다. 그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설이 있지만, 대표적인 설은 조선 시대 왕이 용으로 상징되었기 때문에 용(龍)이라는 글자를 포함하는 용마루가 왕이 잠든 위에 놓일 수 없다는 것이다.

강녕전


강녕전에는 부속 건물로 연생전, 경성전, 연길당, 응지당 등이 있다.

강녕전의 부속 건물
건물이름설명
연생전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정면 7칸, 측면 4칸이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새로이 연길당을 지어 회랑 및 복도각을 통해 강녕전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경복궁 복원 사업을 통해 복원했다.
경성전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정면 7칸, 측면 4칸이다. 흥선대원군이 경복궁을 중건할 때 새로이 연길당을 지어 회랑 및 복도각을 통해 강녕전과 연결되어 있었으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경복궁 복원 사업을 통해 복원했다.
연길당흥선대원군이 새로 영건한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강녕전 오른쪽에 있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전각이다. 과거에는 강녕전과 회랑 및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경복궁 복원 사업을 통해 복원했다.
응지당흥선대원군이 새로 영건한 강녕전의 소침 중 하나로, 강녕전 왼쪽에 있는 정면 4칸, 측면 3칸의 전각이다. 과거에는 강녕전과 회랑 및 복도각으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이나 지금은 분리되어 있다. 1917년 11월 10일 발생한 화재로 소실된 창덕궁 복구를 위한 자재로 활용하기 위해 철거되었다가 1995년 경복궁 복원 사업을 통해 복원했다.



교태전|交泰殿한국어은 조선 시대 왕비의 주요 거처로 사용된 건물이다.[17] 이 건물은 임금의 침전인 강녕전 뒤에 위치하며, 왕비의 침실이 있다. 1440년경, 세종 22년경에 처음 건립되었다.[17]

세종은 재위 후반기 건강이 좋지 않았기 때문에 사정전 대신 침실이 있는 강녕전에서 집무를 보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으로 인해 많은 관료들이 강녕전을 자주 방문하고 출입하게 되자, 세종은 왕비의 사생활을 고려하여 교태전을 건립하였다.[17]

이 건물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지만, 1867년에 재건되었다. 그러나 1917년 창덕궁대조전이 화재로 소실되자, 일제는 교태전을 해체하여 건축 자재를 재활용하여 대조전을 복원하였다.[18] 현재의 건물은 원래 설계 및 규격에 따라 1994년에 재건되었다. 강녕전과 마찬가지로 교태전은 용마루가 없다.

'''아미산|峨嵋山한국어'''은 인공으로 만든 언덕으로 조성된 유명한 정원으로 교태전 뒤에 위치해 있다. 1869년경에 주황색 벽돌과 장식 기와로 건축된 육각형의 굴뚝 네 개가 아미산을 장식하고 있으며, 그 기능을 드러내지 않고 조선 시대 형성 예술의 주목할 만한 사례이다. 이 굴뚝은 1985년 1월 8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811호로 지정되었다.

아미산 굴뚝


교태전 서쪽에는 흠경각과 함원전이 있다. 흠경각은 1438년(세종 20년) 세종이 장영실에게 명해 지은 일종의 천문 관측소였으나, 여러 차례 화재와 복원을 거듭하다 1995년 경복궁 복원 사업을 통해 복원되었다. 함원전은 세종이 내불당(內佛堂)을 설치해 불사를 거행했던 곳으로 알려져 있으며, 1995년 경복궁 복원 사업을 통해 복원되었다.

3. 3. 2. 연침 권역



'''자경전(慈慶殿)''' 및 '''자경전 십장생 굴뚝''' (보물 제809호)은 교태전 동쪽에 있는 건물이다.[77] 왕이 세상을 떠난 후, 대비가 된 왕비는 교태전을 새로운 중전에게 물려주고 자경전으로 거처를 옮겼다.[77]

자경전은 현존하는 침전 중 유일하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현재 건물은 조대비를 위해 고종 2년(1865년)에 지어졌다가 화재로 소실된 후, 고종 25년(1888년)에 재건되었다.[77] 전면 마당은 동행각, 남행각, 서행각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뜰 앞 왼쪽에는 돌짐승 조각상, 오른쪽에는 배롱나무가 있다.[78]

자경전 담장은 벽돌로 장식되어 있는데, 대왕대비 조씨를 위해 지어진 만큼 만(卍), 수(壽), 복(福), 강(康), 녕(寧) 등의 글자와 소나무, 국화, 거북, 연꽃, 대나무, 모란 등 장수와 복을 기원하는 문양들로 이루어져 있다. 예를 들어 만(卍)자는 끝없이 이어져 영원함을 상징하고, 거북은 장수하는 동물로 알려져 있다. 자경전 후정 담 중앙에는 자경전 십장생 굴뚝이 있는데,[78] 담보다 앞으로 돌출된 장대석 기단 위에 전돌로 쌓아 올려져 있다. 벽면 상부에는 소로, 창방, 서까래 모양을 전돌로 만들어 쌓고 기와를 얹어 건물 모양을 하고 있으며, 십장생 무늬로 장식되어 있다.[78]

'''흥복전(興福殿)'''은 경복궁의 대비전 중 하나로, 창의궁의 함일재를 옮겨온 것으로 알려져 있다. 중건 후 왕의 공식 업무 및 행사 장소로 사용되었으며, 1890년(고종 27년) 신정왕후가 이곳에서 승하하였다. 이후 고종의 명으로 북행각은 경운궁 확장 자재로 사용되었고, 일제강점기인 1917년 창덕궁 화재로 인한 내전 재건을 위해 본채가 헐려 사라졌다가 2010년대에 복원되었다. 다만, 흥복전의 북행각과 서행각은 복원되지 않았다. 흥복전은 궁궐 복원 중 처음으로 내부가 현대식으로 배치되었다.

'''집경당(緝敬堂)'''과 '''함화당(咸和堂)'''은 1860년대 경복궁 중건 당시에는 없었으나, 1890년대에 춘희당과 보광당을 헐고 새로 지어졌다.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박물관 사무실로 사용되면서 헐리지 않고 남았지만, 주변 행각과 문은 헐렸다. 이후 2000년대 후반에 행각이 복원되었다. 함화당과 집경당은 복도로 연결되어 있으며, 고종이 건청궁에 머물 당시 외국 사신을 접견했던 기록이 있다.

3. 3. 3. 경회루 일대



'''경회루(慶會樓)'''는 경복궁에 있는 누각으로, 국보 제224호이다. 조선 시대에 나라에 경사가 있을 때 대연회를 베풀던 곳으로, 지금의 청와대 영빈관에 해당된다.[79] 1867년에 경복궁을 중건하면서 새로 지은 건물로, 남북으로 113m, 동서로 128m의 크고 사각진 인공 연못 안에서 동쪽으로 치우친 네모난 섬 위에 지은 정면 7칸, 측면 5칸 규모의 2층 누각 건물이다.[79]

원래 경회루는 경복궁 창건 당시 서쪽 습지에 연못을 파고 세운 작은 누각이었는데, 태종 12년(1412년)에 연못을 넓히고 건물도 다시 크게 완성하였다.[79] 태종창덕궁에서 정무를 보며 경복궁에 들어가기를 꺼렸으나, 중국 사신이 왔을 때 연회 장소를 마련하고자 이 누각을 지었다.[79]

경회루는 단일 평면으로는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누각이다.[80] 거대한 규모의 건물을 물속에 인공으로 조성한 섬에 세웠으면서도 그 기초를 견고히 하여 잘 견딜 수 있도록 한 점, 거대한 건물을 간결한 구조법으로 처리하면서도 왕실의 연회 장소를 합당하게 잘 치장한 점, 2층 누에서 인왕산, 북악산, 남산 등 주변 경관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도록 한 점, 1층 건물 주변을 돌로 만든 방지(方池)의 물과 당주를 바라보며 감상토록 한 점 등이 높이 평가할 만하다.[80]

주로 목재와 돌로 건축된 경회루는 목조 구조물이 48개의 거대한 돌기둥 위에 놓여 있으며, 목재 계단이 2층과 1층을 연결하는 형태이다. 경회루의 외곽은 네모난 기둥으로 지탱하고 내부 기둥은 원형으로 하여 음양의 개념을 나타내었다. 1412년 경회루가 처음 지어졌을 때, 이 돌기둥들은 하늘로 승천하는 용을 묘사한 조각으로 장식되었지만, 19세기에 건물이 재건축될 때는 이러한 세부 사항이 재현되지 않았다. 세 개의 돌다리가 건물을 궁궐 경내와 연결하고 있으며, 섬 주변의 난간 모서리에는 십이지신을 묘사한 조각상으로 장식되어 있다.

경회루는 과거 1983~2002년 발행된 대한민국 10,000원 지폐에 등장하였다.

3. 3. 4. 미복원 전각

경복궁에는 여러 전각들이 있었으나, 현재 미복원된 상태로 남아있는 전각들이 있다. 그중 대표적인 전각들은 다음과 같다.

이 외에도 많은 전각들이 복원되지 못하고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광화문(Gwanghwamun)


경회루(Gyeonghoeru Pavilion) 야경

3. 4. 건청궁 권역

1873년 조선 왕조 역대 임금의 초상화인 어진(御眞) 등을 보관할 목적으로 건립되었으며, 1895년 을미사변이 있기까지 고종과 명성황후의 거처로 사용되었다.[81] 1896년 고종이 러시아 공관으로 거처를 옮긴 후 일제는 1909년 건청궁을 철거하고 그 자리에 조선총독부 미술관을 지었는데,[82] 이 미술관은 해방 후 한동안 국립현대미술관으로 사용되다가 1998년에 철거되었다. 2007년 10월 18일 일제가 철거한 건청궁이 복원되어 일반인에게 공개되었다. 건청궁 복원 공사는 경복궁 복원·정비사업의 5단계 사업인 광화문 및 기타 권역 복원·정비 계획의 일환으로 2004년 6월에 시작되어 3년 4개월 만에 완공되었다.

고종은 건청궁을 왕의 사비인 내탕금으로 건립했다. 고종이 흥선대원군을 벗어나 친정을 선언한 1873년에 지어졌다는 점 등으로 인해, 건청궁 창건은 정치적 자립 선언으로 풀이되기도 한다.[83] 건청궁은 창덕궁 연경당낙선재와 더불어 일반 사대부의 저택과 유사하게 안채와 사랑채로 구분된 건축 형식을 지니고 있으며, 왕의 거처인 장안당과 왕비의 거처인 곤녕합, 그리고 부속 건물인 복수당 등이 배치되어 있다. 뜰에는 고종이 즐겨 먹었다고 해서 이름이 붙은 '고종시' 감나무가 경상남도 산청군의 기증으로 식재되어 있다.[84] 2007년 복원 이후 목재가 썩는 등의 현상이 보였고, 조사 결과 지붕이 잘못 지어져 누수되는 것으로 알려져 부실 복원 논란이 일었다.[85]

건청궁 권역의 건물
사진설명
장안당
장안당(長安堂)
장안당은 고종의 침전이다. 사랑채의 개념으로 지어졌다. 오랫동안 평안하다는 뜻의 장안당은 27칸, 측면 3칸, 7량의 건물이다. 장안당에는 북행각과 동행각이 딸려 있는데, 북행각은 1887년 미국의 에디슨전기회사가 발전기를 설치해 한국 최초로 전깃불을 밝힌 곳으로 유명하다.[86][87] 을미사변 당시, 고종은 이곳에 감금된 상태였다고 전해진다.[88]
곤녕합(坤寧閤)
곤녕합은 명성황후의 침전으로 민가의 안채에 해당된다. 곤녕합 내부에는 문화재청이 의뢰해 무형문화재 장인들이 궁중 유물 기준에 따라 복원한 자개 침대 등 궁중 생활용품 300여 점이 전시되어 있다.[89] 장안당과는 복도각을 통해 연결되어 있다. 곤녕(坤寧)은 땅이 편안하다는 뜻으로 왕비의 덕성을 표현하는 것으로[90] 자금성의 곤녕궁에서 이름을 따온 것으로 추정된다.[91] 곤녕합의 남쪽 누각인 옥호루(玉壺樓)는 명성황후가 시해되었던 장소로 알려져 있다.
복수당(福綏堂)
복수당은 별채에 해당되는 건물이다. 궁인들의 거소로 추정된다.
관문각(觀文閣)
관문각은 고종의 서재로, 원래 전통적인 목조 건물 관문당이었다. 그러다 1891년에 러시아 건축가 아파나시 세레딘사바틴의 설계로 개축되었다. 경복궁 안의 유일한 서양식 건물로, 2층 규모인 것으로 알려졌다. 관문각은 양관이라 불리며 주로 외국인을 접견하기 위한 장소로 쓰였다.[83][92] 다만 공사 과정에서 관리들의 비리와 부실 공사가 도마 위에 오르기도 했다.[93] 결국 부실공사로 1901년 헐리게 되면서[94] 그 존재 자체에 대해 알려지지 않아 경복궁 복원 계획에서 제외되었고, 이후 건청궁 복원 사업이 진행될 때도 복원되지 못하고 현재 터만 복원되었다.[95] 1992년 1월 관문각의 존재가 사진첩 등을 통해 확인되었다.[96]
향원정
향원정(香遠亭)
향원정은 경복궁 후원에 있는 누각이다. 2층 규모의 익공식(翼工式) 기와지붕으로, 누각의 평면은 정육각형이며, 장대석(長臺石)으로 단을 모으고, 짧은 육모의 돌기둥을 세웠다. 1층과 2층을 한 나무의 기둥으로 세웠으며,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4분합(四分閤)을 놓았다. 특히 연못을 가로질러 놓인 다리는 향원정의 아름다움을 더해 준다.
1867∼1873년에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고종이 건청궁을 지을 때 옛 후원인 서현정 일대를 새롭게 조성하였는데 연못 한가운데 인공의 섬을 만들고 그 위에 육각형 정자를 지어서 ‘향기가 멀리 퍼져나간다’는 향원정(香遠亭)이라 불렀다.
향원지를 건너는 다리는 “향기에 취한다”는 뜻의 취향교(醉香橋)이다. 취향교는 조선 시대 연못에 놓인 목교로는 가장 긴 다리이다. 원래는 취향교가 북쪽에 있어 건청궁 쪽에서 건널 수 있었으나 일제강점기 당시 이를 허물고 일본풍으로 나무 적심 위에 간이 다리를 새로 놓았다. 이 다리는 이후 6.25 전쟁 때 파괴되었다가 1953년에 관람 편의를 위하여 본래의 자리가 아닌 향원정 남쪽에 다시 세워졌었다. 그 뒤 2017년부터 약 4년에 걸친 향원정 보수 공사 때 원래의 위치인 북쪽에 아치형 목교로 다시 지었다.
향원지의 근원은 지하수와 열상진원샘이며, 이 물은 경회루의 연지로 흘러가도록 되어 있다.
집옥재(集玉齋)
집옥재는 고종이 개인 서재 겸 전용 도서실로 사용하던 건물이다. 신무문의 동쪽에 있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 규모로 처마 서까래 위에 덧서까래를 달아 꾸민 겹처마에 건물의 측면 좌우 끝에 박공을 달아 벽면 상부가 삼각형으로 된 맞배집으로 도리가 7개로 된 지붕틀을 쓴 칠량 구조다. 경복궁의 다른 전각들과 달리 중국식 양식으로 지어졌다.


3. 5. 빈전•혼전 권역



'''태원전(泰元殿)'''은 1868년에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의 초상화를 모시고 역대 왕실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건립된 사당이다. 경복궁 서북쪽 일대는 빈전, 혼전(魂殿, 종묘에 모실 때까지 만 2년 동안 위패를 모시는 곳), 영전(靈殿, 돌아가신 분의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 등 제사와 관련된 전각들이 있었다. 태원전은 20세기 초 일본 정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2005년에 원래 설계대로 복원되었다.

3. 5. 1. 태원전

'''태원전(泰元殿)'''은 태조 이성계의 어진(임금의 화상)이 봉안되었고, 명성황후의 빈전(殯殿, 왕이 죽으면 능으로 옮기기 전까지 시신을 모시고 의례를 치르던 곳)으로도 활용된 곳이다.[97] 원래 왕의 비빈들이 살던 곳이었으나, 빈소의 높임말인 빈전으로도 사용되었다. 그러나 태원전은 20세기 초에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일본군, 미군, 그리고 청와대 바로 뒤인 관계로 1997년까지 한국군도 주둔했었다.[98] 현재는 원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고종이 태원전을 건축한 이유는 왕의 적통이 아닌 입양된 자신의 정통성을 내세우기 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경복궁 서북쪽 일대는 빈전, 혼전(魂殿, 종묘에 모실 때까지 만 2년 동안 위패를 모시는 곳), 영전(靈殿, 돌아가신 분의 초상화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곳) 등 제사와 관련된 전각들이 있었다. 태원전은 조선 건국자인 태조 이성계의 초상화를 모시던 건물이었으나, 나중에는 빈전이나 혼전으로도 쓰였다.

궁 안 외진 곳에 있어 한적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태원전은, 제사 건물답게 단정하고 엄숙한 외관을 갖추고 있다. 고종은 태원전 재실인 공묵재에 머물면서 신하들을 만나보기도 했다. 태원전 건물은 20세기 초 철거되었다가 현재 옛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3. 5. 2. 미복원 전각



1915년 조선공업전람회를 개최하기 위해 경복궁 내에 새로운 전시 건물을 세웠다.[9][10]

1911년부터 일본 제국일제 강점기 동안 10개의 건물을 제외한 모든 건물을 체계적으로 철거하고 경복궁에서 수많은 전시회를 개최하였으며, 야나기 겐조는 이러한 지속적인 파괴에 반대하였다. 1926년 일본 제국은 궁궐의 상징이자 조선 왕조의 유산을 없애기 위해 즉위식을 거행하는 근정전 앞에 거대한 일본 총독부 건물을 건설하였다. 경복궁의 정문이자 남문인 광화문은 일본에 의해 궁궐 동쪽으로 이전되었다. 1929년에는 조선박람회가 개최되었다.[11]

한국 전쟁으로 이전된 광화문의 목조 구조물이 완전히 파괴되면서 궁궐은 더 큰 피해를 입었다.

현대의 고고학 조사를 통해 330개의 건물 기초가 발견되었다.

'''태원전'''은 원래 1868년에 조선 왕조의 창업주인 태조의 초상화를 모시고 역대 왕실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건립된 사당이다. 20세기 초 일본 정부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으나, 2005년에 원래 설계대로 정확하게 복원되었다.

3. 6. 동궁 권역

'''동궁'''(동궁|東宮한국어)은 왕세자와 왕세자빈의 생활 공간이자 왕세자의 교육이 이루어지던 곳이다. 동궁은 세자궁이라고도 불렸으며, 자선당(資善堂)과 비현각(丕顯閣)이 주 전각이고, 세자의 교육을 담당하는 세자시강원(춘방)과 경호 임무를 수행하던 세자익위사(계방)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23] 경복궁 창건 시에는 궁내에 동궁이 마련되지 않았으며, 세종 대(1427년)에 와서 창건되었다. 자선당에서는 문종의 장자 단종과 연산군의 장자 이황이 태어났으며, 덕종, 세자 시절의 연산군, 연산군의 세자 이황, 인종, 순회세자, 효장세자 등이 거처하였다. 또한 고종 대 경복궁 중건 후에는 순종이 거처를 하였다. 현재의 동궁은 1999년 자선당과 비현각 영역이 복원되었고, 2023년에 계조당 영역이 복원되었다.[24]

사진설명
자선당(資善堂)
자선당은 세자와 세자빈의 거처다. 입구를 바라봤을 때 오른쪽 방에 세자가 살았으며, 맞은 편인 왼쪽 방에 세자빈이 살았다. 일제시대 당시, 건물 전체가 일본에 건너가 이왕가박물관으로 쓰이다가 1923년 관동대지진으로 터만 남아 버려져 있던 것을 1995년에 반환받아 현재 건청궁 옆으로 옮겨두었다. 현존 건물은 1999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계조당(繼照堂)
계조당은 여러 행사 때 왕세자가 축하를 받는 곳으로 사용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사라졌고 한 때 빈 터로 남아있었으나 "경복궁 2차 복원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2023년에 복원되었다.
비현각(丕顯閣)
비현각은 크고 밝은 전각이란 뜻으로 세자가 스승을 모시고 학문을 연마하던 곳이다. 1915년 자선당과 함께 철거되었다. 현존 건물은 1999년에 새로 지은 것이다.


3. 7. 선원전 권역 / 미복원

일제강점기 일본 제국은 1915년 조선공업전람회 개최[9][10], 1926년 근정전 앞 일본 총독부 건물 건설, 광화문 이전 등 경복궁 내 건물을 체계적으로 철거하고 궁궐의 상징성을 훼손했다.[11] 야나기 겐조는 이러한 파괴에 반대했다.

한국 전쟁으로 광화문 목조 구조물이 파괴되는 등 궁궐은 더 큰 피해를 보았다.

3. 7. 1. 선원전

선원전(璿源殿)은 역대 왕들의 어진을 모시고 제사를 지내던 진전(眞殿)이었다.

선원전은 고종 때 경복궁 중건 당시 세워졌으며 지금의 국립민속박물관 자리에 있었다. 일제강점기 직후 경복궁의 소유가 조선총독부로 넘어가면서, 일제는 선원전 주변의 부속 건물과 행각들을 대부분 철거했다. 1931년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기리는 절인 박문사를 장충단에 지으면서 선원전 본채를 옮겨다 사용했다. 건물은 광복 직후에 화재로 불타 없어졌다. 1960년대 대한민국 정부는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을 선원전 영역에 지으면서 이 일대에 그나마 남아있던 경안당 등의 전각들을 철거하고 박물관을 지었다. 이 공사로 인해 당시까지 남아있던 선원전 유구가 심하게 훼손되었다. 문화재청은 2031년부터 2042년에 걸쳐 진행할 "궁중의례권역 복원 정비 사업"의 일환으로 국립민속박물관 건물을 철거하고 선원전 및 혼전 영역의 건물 23동을 짓기로 하였다.

3. 8. 경복궁관리소

경복궁은 조선 건국 3년 후 건설되어 조선 왕조의 법궁(正宮)으로 기능하였다.[5] 임진왜란으로 잿더미가 된 후 273년간 방치되었다가 1867년 흥선대원군 주도로 재건되었다.

1911년 경복궁 부지 소유권은 조선총독부로 이전되었고, 1915년 조선공업전람회 개최를 명목으로 건물의 90% 이상이 철거되었다.[9][10] 이후 일본은 남은 건물들을 허물고 조선총독부 건물(1916~1926년)을 건설하였다.[11] 근정전경회루 등 몇몇 상징적인 건축물만이 남았다.

1990년부터 복원 작업이 진행되어, 1996년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되었고, 흥례문(2001년)과 광화문(2006~2010년)이 복원되었다. 내전과 동궁의 복원도 완료되었다. 현재 경복궁의 총면적은 415800m2이다.[6]

입장료
구분개인단체
만 19세 ~ 64세3000KRW2400KRW (10인 이상)
만 7세 ~ 18세1500KRW1200KRW (10인 이상)
무료6세 미만 어린이, 65세 이상 어르신, 매월 마지막 수요일, 한복 착용 시


3. 9. 북원

2022년 8월 말 문화재청은 ‘경복궁 후원 기초조사 연구’를 시작해 (사)한국건축역사학회 등에 용역하여 2022년 8월 25일부터 12월 23일까지 조사하였다.[99]

3. 9. 1. 경무대 권역

1989년 대한민국 정부는 일제강점기(1910~1945) 동안 일제에 의해 파괴된 수많은 건물들을 재건하기 위한 40년 계획을 시작했다. 1995년 여러 논쟁 끝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철거되었고, 그 자리에 흥례문과 회랑이 재건되었다.

경복궁 후원에는 일제 강점기인 20세기 초에 건립된 일본 총독 관저의 주요 부분이 있었다. 1948년 대한민국 수립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이곳을 집무실과 관저로 사용했다. 1993년 김영삼 대통령의 민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 경내에 있던 일본 총독 관저는 일본 식민주의의 주요 상징물을 제거하기 위해 철거되었다.

3. 9. 2. 경농재 권역

문화재청의 후원 기초조사를 통해 경농재 권역의 위치는 청와대 경호실 A동 북쪽 건물 상부와 영빈관 건물 가장자리 쪽에 지희실, 관풍루, 경농재, 대유헌 등 건축물이 위치하였던 것으로 확인되었다.[100]

4. 기타

경복궁은 조선 건국 3년 후 건설되어 조선 왕조의 법궁(正宮)으로 기능하였다.[5] 임진왜란으로 잿더미가 된 후 273년간 방치되었다가, 1867년 흥선대원군 주도로 재건되었다.[16]

일제강점기에 경복궁 부지 소유권이 조선총독부로 넘어가고, 1915년 조선공업전람회 개최를 명목으로 건물 90% 이상이 철거되었다.[9][10] 이후 일본은 남은 건물들을 허물고 총독부 건물(1916~1926년)을 건설하였다.[11] 광화문은 궁궐 동쪽으로 이전되었다가 한국 전쟁으로 파괴되었다.[11]

1990년부터 복원 작업이 진행되어, 흥례문(2001년), 광화문(2006~2010년) 등이 원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현재 경복궁 총면적은 415800m2이다.[6]

일제강점기와 한국 전쟁을 거치며 살아남은 19세기 경복궁의 주요 건물은 다음과 같다.

건물명설명지정번호
근정전왕의 즉위식을 거행하는 건물국보 제223호
경회루국보 제224호
향원정, 자경전, 집옥재, 사정전, 수정전



경복궁은 화요일에 정기 휴관하며, 여러 대중문화 작품의 배경으로 등장했다.

4. 1. 영결식

1974년 육영수 여사의 영결식, 1979년 박정희 전 대통령의 영결식, 2006년 최규하 전 대통령의 영결식, 2009년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흥례문과 광화문 사이의 공간에서 열렸다.[101]

4. 2. 전면개방

2018년 12월 이전까지 경복궁으로 들어갈 수 있는 문은 남쪽의 광화문, 북쪽의 신무문, 동쪽의 국립민속박물관 출입문 세 곳이었다. 2018년 12월, 경복궁과 서촌 지역 방문객의 편의를 높이고 경제 활성화를 위해 서문인 영추문을 43년 만에 개방하면서 경복궁의 동·서·남·북 모든 곳에서 출입이 가능해졌다.[102]

4. 3. 야간개장

2010년 서울 G20 정상회의의 성공적인 개최를 기원하며 2010년 11월 9일에 처음으로 야간 개장이 실시되었다.[103][104] 이후 정례화되어 연 2회 실시되었으나, 입장객 제한 없이 개방했을 때 하룻밤에 4만여 명이 방문하기도 했다. 특히, 일부 관람객들이 술판을 벌이거나 쓰레기를 버리는 행위 때문에 논란이 크게 일었고, 문화재청이 성급하게 추진했다는 비판도 있었다.[105][106]

2014년부터는 하루 최대 관람 인원을 1,500명으로 제한하고, 월 2회 총 48일간 실시되었다.[107] 2021년 상반기 야간 관람은 하루 최대 관람 인원을 2,000명(사전 예매 1,700명, 현장 발권 300명)으로 제한하였다.[108]

4월부터 10월까지 특정일에 경복궁 야간 관람이 저녁 7시부터 10시까지 진행된다. 회차당 4,500장의 티켓이 온라인 또는 현장에서 판매되며(신분증 필요), 현장 판매는 외국인과 65세 이상 고령자에게만 각각 500장과 50장이 할당된다. 2019년 경복궁 야간 개장은 71회 진행되었다.[29]

2022년 9월 1일부터 11월 6일까지는 야간 관람이 저녁 7시부터 9시 30분까지 진행되었다. 입장료는 3000KRW이며 온라인 예약과 현장 예약이 가능하고, 1인당 최대 2매까지 예약할 수 있었다.[30]

4. 4. 정기휴관

경복궁은 다른 궁들과 달리 화요일에 정기 휴관을 한다.

4. 5. 대중문화

경복궁은 여러 대중문화 작품에서 배경으로 등장했다.

5. 사진

경복궁


경복궁


경복궁


경복궁 수문장 교대식


경복궁 근정전


경복궁


경복궁


경복궁


경복궁

6. 교통

경복궁은 대중교통으로 편리하게 접근할 수 있다.



경복궁 정문은 종로구 사직로 22에 위치해 있으며,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은 경복궁역(3호선 327번역)이다.

2012년 3월 홍사덕의 경복궁 인근 신분당선 연장 공약 등을 계기로 경복궁 인근 신분당선 연장에 대한 논의가 꾸준히 있었다.[32][33]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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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3] 서적 undefined 2004
[74] 뉴스 경복궁...뿌리깊은 이야기 https://news.naver.c[...] 프레시안 2013-12-25
[75] 뉴스 景福宮(경복궁) 萬春殿(만춘전) 복원된다 http://newslibrary.n[...] 동아일보 1988-03-17
[76] 뉴스 과학유물 복원 더 늦출수 없다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05-01-09
[77] 서적 undefined 2004
[78] 서적 undefined 2004
[79] 서적 undefined 2004
[80] 서적 undefined 2004
[81] 뉴스 〈명성황후 시해당한 건청궁 복원돼〉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07-10-18
[82] 뉴스 건청궁, 비극의 역사도 복원되야 한다. http://www.hani.co.k[...] 한겨레신문 2007-10-19
[83] 뉴스 건청궁은 조선 근대화의 산실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7-10-19
[84] 뉴스 복원 건청궁에 입궐한 감나무 '고종시' https://news.naver.c[...] 노컷뉴스 2007-10-18
[85] 뉴스 경복궁 건청궁, 100억 들인 부실 복원 http://mn.kbs.co.kr/[...] KBS 2011-11-16
[86] 간행물 문화재청 50년사 문화재청
[87] 뉴스 명성황후 시해된 비극의 현장 건청궁 98년만에 복원 https://news.naver.c[...] 국민일보 2007-10-18
[88] 뉴스 119년 전, 건청궁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났다 https://news.naver.c[...] 중앙일보 2014-04-29
[89] 뉴스 건청궁의 슬픈 과거 아시나요? https://news.naver.c[...] 정책브리핑 2010-08-20
[90] 뉴스 명성황후 비극 현장 건청궁 복원(종합)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7-10-18
[91] 뉴스 몰락한 왕조 슬픔 안고 한세기만에 돌아오다 https://news.naver.c[...] 한겨레 2007-10-18
[92] 뉴스 100여년 전 구한 말 건축의 중심, 세레진 사바찐① https://news.naver.c[...] 조선비즈 2013-12-14
[93] 뉴스 을미사변 목격한 이국(異國) 땅의 건축가 사바찐② https://news.naver.c[...] 조선비즈 2013-12-21
[94] 뉴스 을미사변 비극 100여년 만에 열려 https://news.naver.c[...] 한국일보 2007-10-18
[95] 뉴스 명성황후 시해 장소 건청궁, 역사공간으로 재탄생 https://news.naver.c[...] 세계일보 2007-10-18
[96] 뉴스 국내최초의 宮苑內 洋館 觀文閣모습 첫공개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1992-01-11
[97] 서적 조선의 궁궐과 종묘 문화재청 2010
[98] 웹인용 체험 테마가 있는 여행 : 고궁엔 이야기가 있다 https://www.joongang[...] 중앙일보 2003-12-04
[99] 보고서 청와대 권역(경복궁 후원지역)은 건축, 경관적 가치와 함께 역사의 보고 https://www.cha.go.k[...] 문화재청 2023-01-03
[100] 웹인용 청와대 경내 경복궁 북원 추정배치도(융문당, 융무당 포함) https://m.blog.naver[...] 2022-08-12
[101] 뉴스 정치권, 경복궁 영결식 `비통의 눈물' http://www.yonhapnew[...] 연합뉴스 2009-05-29
[102] 웹인용 경복궁 https://korean.visit[...] 2022-05-23
[103] 뉴스 가을밤, 경복궁 나들이 어때요? https://news.naver.c[...] YTN 2010-11-10
[104] 뉴스 경복궁 야간개장 "밤에도 아름다운 궁 감상하세요" https://news.naver.c[...] 머니투데이 2012-05-17
[105] 뉴스 난장판 된 경복궁의 밤… “야간개장 상설화·관람객 제한” 목소리 https://news.naver.c[...] 서울신문 2013-06-07
[106] 뉴스 경복궁 야간 개장 가봤더니 … 네티즌 관람객 태도 비판 봇물 https://news.naver.c[...] 한국경제 2013-05-27
[107] 뉴스 창경궁·경복궁 야간개장, 하루 관람인원 제한된다 https://news.naver.c[...] 머니투데이 2013-09-26
[108] 웹인용 경복궁 야간 관람 4월 1일 개장‥밤하늘 별빛 아래 궁궐 거닐기 http://kor.theasian.[...] 2021-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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