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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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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광종은 고려의 제4대 왕으로, 태조 왕건과 신명순성왕후 유씨의 아들로 949년부터 975년까지 재위했다. 그는 왕위 계승 과정에서 정종의 후계자로 지명되어 즉위했으며, 강력한 왕권 강화를 목표로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 주요 정책으로는 노비안검법 실시, 과거제도 도입, 독자적인 연호 사용 등이 있으며, 이를 통해 호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려 했다. 또한 불교를 장려하고 민심 안정에도 힘썼지만, 개혁 과정에서 숙청을 단행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그는 대외적으로는 후주, 송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어 거란과 여진의 침략에 대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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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 (고려)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름광종 (光宗)
왕소 (王昭)
시호홍도선열평세숙헌의효강혜대성대왕 (弘道宣烈平世肅憲懿孝康惠大成大王) / 홍도선열평세대성대왕 (弘道宣烈平世大成大王)
묘호광종 (光宗)
생몰년925년 ~ 975년 7월 4일
재위기간949년 ~ 975년
능묘헌릉 (憲陵)
연호광덕(光德), 준풍(峻豊)
가계
부친태조
모친신명순성왕후 유씨
왕후대목왕후 황보씨
후궁경화궁부인 이씨
궁인 김씨
자녀아들: 경종, 효화태자
딸: 천추전부인, 보화궁부인, 문덕왕후
정치
업적노비안검법 실시
과거제 도입
백관의 공복 제정
칭제건원
기타
종교불교

2. 생애

925년 태조와 신명순성왕후 유씨(劉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복형제로는 형 태자 태(泰)와 정종, 동생 문원대왕 정(貞), 증통국사, 누이 낙랑공주, 여동생 흥방공주 등이 있었다. 혜종이 병약하고, 동복 형인 태자 태가 일찍 요절하면서 형 요와 함께 유력 왕위계승권자가 되었다.

왕소는 친형인 정종과는 다른 성격으로, 호탕하고 과감하면서도 신중하였다. 최승로는 '정종이 고집이 세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성품인데 반해 광종은 치밀하고 조심스럽지만, 기회를 잡았을 땐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대범한 성격이었다.[27]'고 평했다. 그는 뛰어난 용모와 우수한 자질을 갖고 있어 태조로부터도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27]

태자 시절 그는 정종과 더불어 왕실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고, 박수경·박수문 형제와 왕식렴 등의 서경 세력과도 친분이 두터웠다.[28] 왕규박술희가 이끄는 개경 세력을 제거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하였으며, 정종의 즉위에도 공헌하였다.

945년 동복 형인 정종이 즉위하였다. 정종은 병약하여 죽음을 예감하고, 아들 경춘원군 대신 동생 왕소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정했다. 949년 정종이 사망하자, 광종은 25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27]

광종은 즉위 후, 왕권 강화와 중앙 집권화를 위한 여러 정책을 추진하였다. 956년 노비안검법을 실시하여 귀족들이 불법으로 소유한 노비를 양민으로 해방시켰다.[2][3][5][6][7] 958년 후주에서 귀화한 쌍기의 건의를 받아들여 과거 제도를 시행하여, 능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고 신진 세력을 키웠다.[9]

960년 관복의 색깔을 달리하여 관료들의 위계질서를 확립하고,[11] 개경을 황도(皇都)로, 평양을 서경(西京)으로 칭하며, 광덕(光德, 949년 ~ 951년), 준풍(峻豊, 960년 ~ 963년) 등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여 고려가 황제국임을 선포하였다.[3][11]

이러한 개혁 정책에 반발하는 호족 세력을 숙청하여 왕권을 강화하였다. 960년 평농서사 권신이 대상 준홍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하자, 대대적인 숙청을 단행했다.[15] 이 과정에서 혜종의 아들 흥화궁군,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 태조의 서자 효은태자 왕원 등이 처형되었다.[3][15]

광종은 불교를 장려하여 민심을 수습하고 사상적 통합을 이루고자 하였다. 963년 개경에 귀법사(歸法寺)를 창건하고, 968년에는 충청남도 논산관촉사 창건을 지원하였다. 또한, 국사와 왕사 제도를 도입하여 혜거탄문 등을 등용하였다.[57]

975년 5월 병으로 개경 황궁에서 사망했다. 향년 51세였다. 묘호는 광종(光宗), 시호는 대성(大成), 능은 개풍군에 있는 헌릉(憲陵)이다.

광종의 능

2. 1. 즉위 이전

왕소는 왕위를 두고 벌어진 암투극 사이에서 호족들의 도움을 받아 생명을 보전할 수 있었지만, 이들이 각자 가문의 외손이나 연고자를 왕위에 올리려는 것을 보고 제거해야 할 대상 또는 잠재적인 적으로 간주하였다. 혜종과 친분을 가지면서 서경 세력과 혜종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하였는데,[28] 이는 혜종이 서경 세력과의 화합을 도모하기 위해 자신의 딸을 왕소의 두 번째 부인으로 보낸 것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27]

2. 1. 1. 출생과 생애 초반

925년 태조와 신명순성왕후 유씨(劉氏)의 아들로 태어났다. 동복형제로는 형 태자 태(泰)와 정종, 동생 문원대왕 정(貞), 증통국사, 누이 낙랑공주, 여동생 흥방공주 등이 있었다. 그는 왕위계승권에서 멀리 있었으나, 혜종이 병약하고, 동복 형인 태자 태가 일찍 요절하면서 형 요와 함께 유력 왕위계승권자가 되었다.

왕소는 친형인 정종과는 판이하게 다른 성격의 소유자였다. 그는 성격이 호탕하고 과감하면서도 한편으로 신중하였다. 최승로의 평에 의하면 '정종이 고집이 세고 남의 말을 잘 듣지 않는 성품인데 반해 광종은 치밀하고 조심스럽지만, 기회를 잡았을 땐 과감하게 밀어붙이는 대범한 성격이었다.[27]'고 한다. 그는 뛰어난 용모와 우수한 자질을 갖고 있어 태조로부터도 남다른 사랑을 받았다.[27]

태자 시절에 그는 정종과 더불어 왕실 세력의 핵심 인물이었고, 박수경·박수문 형제와 왕식렴 등의 서경 세력과도 친분이 두터웠다.[28] 그 때문에 왕규박술희가 이끄는 개경 세력을 제거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하였으며, 정종의 즉위에도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태조는 호족들을 견제할 목적으로 이복남매들 사이의 족내혼을 시켰는데, 그는 이복 여동생이자 신정왕후 소생인 대목왕후 황보씨와 결혼하였다. 대목왕후에게서 2남 3녀를 두었는데, 둘째 아들 효화태자는 요절하고 첫째 아들 태자 주가 뒷날의 경종이 된다. 딸은 천추전부인, 보화궁부인, 흥덕원군부인이 있는데 셋째딸인 흥덕원군부인은 흥덕원군 왕규와 결혼하여 딸을 두었으나 다시 성종에게 재가한다.

태조가 자식들을 이복 형제끼리 결혼시킨 것은 신라 왕족의 풍습에 따른 것이었다.[29] 이는 왕실 혈통의 순수성을 유지하고 동시에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한 배려였다.[29]

2. 1. 2. 잠재적 왕위 계승자

943년 태조 사후 광종은 유력한 왕위 계승권자로 주목받았고, 왕규로부터 왕위를 노린다는 의심을 받았다. 왕규의 고변을 들은 혜종은 광종을 시험하였으나, 본심을 숨긴 덕에 뚜렷한 혐의가 없어 제거되지 않았다. 오히려 944년 혜종은 자신의 딸 경화궁부인 임씨를 광종에게 후궁으로 주었다.[27]

945년 동복 형인 정종이 즉위하였다. 정종은 병약하여 죽음을 예감하고, 아들 경춘원군 대신 동생 왕소에게 왕위를 물려주기로 결정했다. 949년 정종이 사망하자, 광종은 25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27]

2. 2. 치세

광종은 25세의 나이로 즉위했을 때, 고려는 불안정한 상태였다.[2] 태조는 후삼국 시대 통일을 위해 혼인을 통해 강력한 가문들과 동맹을 맺었는데, 이 가문들은 자체 군대를 가지고 있어 언제든지 반란을 일으킬 수 있었다. 광종은 왕권 강화를 위해 귀족 가문 출신 여성과의 결혼을 거부하고 왕실과 결혼했다. 대목왕후는 그의 이복 여동생이었고, 경화궁부인은 그의 이복 형인 혜종의 딸이었다.[2]

광종은 당 태종의 저서인 《제범》을 연구하며, 고려 발전에 기여한 모든 사람에게 보상하고, 인접 국가들과 좋은 외교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다.[2] 이를 통해 조정 안팎에서 권력을 집중할 수 있었고, 즉위 7년 후에는 안정적이고 왕 중심적인 정치 시스템을 구축하고 경제와 군대를 확장하기 위한 개혁을 시행할 수 있었다.[5]

956년, 광종은 노비안검법을 시행하여 귀족들이 소유한 노비들을 평민으로 해방시켰다. 이는 귀족 가문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왕에게 세금을 내고 군대에 복무할 수 있는 사람들을 늘리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개혁은 백성들의 지지를 얻었지만, 귀족들의 반발을 샀다.[2][3][5][6][7]

958년, 후주의 외교관이자 학자인 쌍기의 조언으로 과거제도를 실시하여, 가문의 영향력이나 명성이 아닌 재능에 따라 관료를 선발했다.[9] 시험은 모든 남성 자유민에게 개방되었지만, 실제로 시험을 치를 수 있는 사람은 향반의 아들들뿐이었다.[10] 960년에는 관복의 색깔을 달리하여 관료들의 품계를 구별했다.[11]

광종은 가난한 환자들에게 무료 의약품을 제공하는 대비원을 설치하고, 곡물 대출에 이자를 부과하는 제위보를 추가하여 가난한 백성을 구제했다.[10] 이러한 조치들은 인구 증가에 발맞춘 더 나은 경작 방법과 함께 다음 900년 동안 계속되었다.[10]

959년, 후주가 멸망하고 송나라가 건국되자, 광종은 군대를 재조직하고 확장하여 북방 국경을 강화했다.[7] 또한 청천강 너머 압록강까지 국경을 넓혔다.[10]

광종은 종교 기관과 국가의 연합이 지방 영주들을 굴복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보고, 해인사 주지를 선택하여 불교를 장려했다.[10] 유능한 승려들을 자문관으로 삼고 사찰 건설을 장려했으며, 승과라는 불교 승려 시험을 만들어 정부와 교회를 연결했다.[14]

왕실의 권위를 강화하기 위해 고려를 제국으로 칭하고 스스로를 황제로 칭하며, 개경을 황도, 평양을 서경으로 불렀다. 또한 949년부터 951년까지 광덕, 960년부터 963년까지 준풍이라는 연호를 사용했다.[3][11]

광종의 개혁은 귀족들의 반발을 샀고, 960년에는 반대자들을 숙청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그의 형제 효은태자 왕원, 혜종의 아들 흥화군,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 등이 희생되었다.[3][15] 숙청이 끝났을 때, 태조를 도운 3,200명의 공신 중 40명만이 살아남았다.[15]

광종은 노비안검법과거 제도 실시 등 국가 기반을 다진 명군으로 평가받지만, 치세 후반의 숙청은 죄 없는 사람들의 희생을 초래하여 비판받기도 한다.

2. 2. 1. 즉위 초반

949년 8월, 광종대광 박수경 등에게 명하여 공신들에게 쌀을 차등 있게 지급하고, 이를 표준 녹봉으로 정하였다.[27] 또한 원보 식회, 원윤 신강 등에게 명하여 각 주, 군, 현에서 세금으로 바치는 세공의 액수를 정하게 하였다. 평주의 호족 박수문, 박수경 형제는 정종 사후 광종의 즉위를 적극 지지했는데, 이들의 세력이 막강하였으므로 광종은 자기 가문의 외손이나 연고자를 황위로 앉히려는 다른 호족들을 견제하였다.

950년 1월, 사천대의 승려가 광종에게 덕을 쌓으라고 하자 광종은 항상 정관정요를 읽었다고 한다.[27] 광종은 정관정요를 통해 군주가 나아가야 할 행동 방향, 정책 입안, 신하를 다스리는 방법을 익혔다.[30] 또한, 중국의 연호를 사용하지 않고 광덕(光德)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27]

즉위 초반 광종은 후한과 후주에 형식적으로 조공을 바치며 충돌을 자제하였다. 951년 12월부터는 후주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는데,[30] 이는 외교적 경로를 통해 여진거란을 경계하기 위함이었다.[30] 당시 거란은 고려 침략을 노리고 있었는데, 고려는 그들의 침략을 막기 위해 중원의 한족들과 돈독한 외교관계를 형성할 필요가 있었다.[30]

광종은 호족을 견제할 친위세력이 부족했기에, 후주에서 귀화한 인사들과 과거 급제자 출신 인재들로 친위세력을 구성하였다.

2. 2. 2. 권력 분산과 집중화

949년 8월, 광종대광 박수경 등에게 명하여 공신들에게 쌀을 차등 있게 나누어 주고, 이때 지급된 급료를 표준 녹봉으로 정하였다. 또한 원보 식회, 원윤 신강 등에게 명하여 각 주, 군, 현에서 세금으로 바치는 세공의 액수를 정하게 하였다. 이는 국가 재정 기반을 안정시키고, 자신의 지지 세력을 확고히 다지기 위한 조치였다.[27]

광종은 호족 세력을 견제하고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평주의 호족 박수문, 박수경 형제는 광종의 즉위를 적극 지지했지만, 이들의 세력이 막강하여 광종은 다른 호족들을 견제해야 했다. 이를 위해 951년 후주에서 귀화한 인사들과 과거 급제자 출신 인재들로 친위 세력을 구성하여 호족을 견제했다. 특히, 후주 출신 쌍기는 후주 태조를 도와 개혁 작업을 한 인물로, 광종은 그를 적극 등용하여 개혁 정책을 추진했다.[31]

950년 1월, 광종은 사천대 승려의 조언을 듣고 정관정요를 읽으며 정치적 역량을 강화했다. 정관정요당나라 황제들의 치세 교과서로, 광종은 이를 통해 군주로서 나아가야 할 방향을 세우고 정책 입안 및 신하를 다스리는 방법을 익혔다.[30]

광종은 즉위 초반 7년간 정국을 주시하며 왕권 강화 방법을 모색했다.[27] 국내 정국 주도권은 호족들에게 내주고 조용히 정치적 기반을 닦았다.[27] 951년 12월부터는 후주의 연호를 사용하여 외교적 경로를 통해 여진거란을 경계했다. 당시 거란은 고려 침략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에, 고려는 중원의 한족들과 돈독한 외교 관계를 형성할 필요가 있었다.[30]

광종은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실현하고자 하는 야심이 강했으며,[32] 중앙군을 능가하는 군사력을 가진 호족의 제거를 계획했다.[32] 즉위 초기에는 호족들의 지지가 필요하여 권한을 부여했지만, 태자 시절 호족들의 암투를 지켜본 그는 호족들의 숙청을 결심한다. 광종은 고려 왕조 성립 초기의 공신들과 호족의 세력을 약화시켜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 확립을 위한 개혁 정책을 추진하였다.

2. 2. 3. 민심안정책

광종은 정치적 역량과 대외적 위상을 높이는 것 외에도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30] 민심을 얻는 것이 곧 힘을 얻는 것이라고 생각한 그는 불교를 통해 민심 안정책을 추진하였다.[30] 951년 개성 남쪽에 대봉은사를 세워 태조의 명복을 비는 원당으로 하고, 동쪽에 불일사를 세워 신명순성왕후[30]의 명복을 비는 원당으로 삼았다.

954년에는 신명순성왕후의 명복을 빌기 위해 숭선사를 창건하였으며, 화엄종 승려 균여와 교분을 갖고 그의 '성상융회(性相融會)' 사상을 받아들였다.[33] 성상융화사상은 일종의 불교 종파 융합책이었다. 당시 불교교종이 융성했는데, 교종 내에서도 성종과 상종이 있었다. 성종의 대표적인 종단은 화엄종이었고, 상종의 대표적인 종단은 법상종이었다. 이 두 종단의 특징은 이질 집단을 통합할 수 있는 융화적이고 보편적인 원리를 추구하고 있다는 점이다.[33] 균여는 이 원리를 통하여 민심을 하나로 묶어낼 수 있다고 보았고, 광종은 이에 적극 동조했다.[33] 광종은 화엄종과 법상종계 승려들과도 자주 면담하며 민심을 불심으로 단결시킬 방안을 강구했다.

균여의 성상융회 사상은 화엄종과 법상종을 하나의 사상으로 이끌어내자는 논리였다. 당시 화엄종과 법상종을 신봉하던 사람들은 대개 중소 호족이나 평민들이었는데, 대호족을 경계하던 광종은 중소호족들과 평민들의 힘을 키울 요량으로 두 종파의 융회를 시도하였던 것이다. 953년 화엄종 승려 겸신이 국사로 봉해지기도 했다. 이같은 화엄종, 법상종 장려와 융화정책은 곧 중소 호족들의 지지를 얻게 되고, 반대로 대부호들의 불교적 기반을 무너트리는 역할을 했다.[33]

또한 그는 백성들을 위한 구호 및 의료기관인 제위보를 설치하여 가난한 사람과 병자들을 구제하기 위해 노력했다. 광종에 비판적인 최승로조차 광종이 천한 사람이라고 버리지 않고 불쌍한 이들에게 혜택을 베푼 덕분에 그의 초기 치세를 두말할 나위 없는 태평성대였다고 칭송하였다.

2. 3. 개혁 정책

광종은 고려 건국 초기 공신과 호족 세력을 약화시켜 왕권을 강화하고 중앙집권 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또한 국가 재정 기반 안정을 위한 개혁 정책도 추진했다. 즉위 후, 왕실 공로자에게 차등을 두어 쌀을 지급하며 지지 세력을 다졌다.[2]

949년 8월, 박수경 등에게 명하여 공신들에게 쌀을 차등 지급하고, 이를 표준 녹봉으로 정했다. 또, 원보 식회, 원윤 신강 등에게 명하여 각 지역 세공 액수를 정하게 했다.

광종은 즉위 초 7년간 정국을 주시하며 왕권 강화 방법을 모색했다.[27] 당태종과 신하들의 정치 토론을 기록한 정관정요를 숙독하며,[27] 군주로서 나아갈 방향, 정책 입안, 신하 통솔법 등을 익혔다.[30] 950년 1월, 사천대 승려의 권고로 정관정요를 읽기 시작했다.

950년, '광덕'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선포하고, 장청진과 위화진에 성을 쌓는 등 국방력 강화에도 힘썼다.

951년부터 후주 연호를 사용, 외교를 통해 여진거란을 견제했다. 당시 거란은 고려 침략을 노렸고, 고려는 중원 한족과 우호 관계가 필요했다.[30] 후주는 광종을 고려 국왕, 검교태사로 책봉하며 고려 백관 복식을 중국식으로 바꾸도록 했다.[31] 이때 쌍기 등 후주 개혁 인물들을 고려로 데려오려 했다.

956년, 노비안검법을 실시, 귀족 소유 노비를 평민으로 해방시켜 귀족 세력을 약화시키고, 국가 재정을 확충하며 백성 지지를 얻었다.[2][3][5][6][7]

958년, 쌍기 건의로 과거 제도를 도입, 능력 위주 관리 선발로 호족을 견제하고 신진 세력을 등용했다.[9] 유교 경전 시험은 자유민 남성에게 개방되었으나, 실제로는 향반 자제만 가능했다. 왕족은 제외되었다.[10]

960년, 관복 색깔로 관료 위계를 구분했다.[11]

개경, 평양에 대비원을 설치, 무료 의료를 제공하고 지방에 혜민국으로 확대했다. 의창 외 곡물 대출 이자를 받는 제위보를 추가, 빈민 구제에 힘썼다.[10]

2. 3. 1. 대중국 외교 정책

광종은 951년 후주에 사신을 파견하고 그해 12월부터 후주의 연호를 시행했으며, 이후 꾸준히 후주에 사신과 공물을 보냈다.[30] 952년 봄에는 광평시랑 서봉을 후주에 보내 방물을 바쳤다. 953년 후주 세종은 사신 위위경 왕연과 장작소감 여계빈을 보내 광종을 특진 검교태보사 지절 현도주 도독 충 대의군사 겸 어사대부 고려국왕으로 책봉하는 교서를 전달했다.[31]

955년 대상 왕융을 후주에 보내 방물을 바쳤고, 광평시랑 순질을 보내 공제의 즉위를 축하했다. 956년 후주는 장작감 설문우를 보내 광종을 개부의동삼사검교태사로 봉했으며, 이때부터 후주의 복식과 제도를 도입해 백관의 의관을 중국 제도에 따르게 했다.[31] 959년 봄 좌승 왕긍과 좌윤 황보위광을 후주에 보내 방물을 바쳤고, 그해 가을 다시 사신을 보냈다. 같은 해 후주에서도 좌효위대장군 대교를 보냈으며, 그해 겨울 고려는 다시 후주에 사신을 보냈다. 960년 후주의 시어 청주수 쌍철이 고려에 왔고, 쌍기가 좌승으로 임명되었다.

후주가 멸망하고 송나라가 건국되자, 광종은 960년부터 '준풍'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다가[40] 963년 12월부터 송나라의 연호를 사용했다. 962년 겨울 광평시랑 이흥우를 송나라에 보냈고, 963년 12월 송나라는 책명사 시찬을 보냈으나 폭풍우로 시찬만이 홀로 살아남아 도착했다. 광종은 시찬을 환영하고 위로하여 돌려보냈다. 965년 2월 황족인 대승 내봉령 왕로를 송에 보냈고, 송나라는 왕로에게 상서 좌복야의 식실봉 3백호를 내렸다. 972년 2월 8일 내의시랑 서희를 송에 보냈다.

또한 광종은 송나라와 공식 무역 관계를 체결했다. 개경에서 30리 길인 예성강 포구의 벽란도는 광종 때 송나라와의 공식 무역이 시작된 이후 국제적인 무역항으로 크게 성장했다.[54]

광종은 후주, 송나라와의 돈독한 외교 관계를 바탕으로 거란, 여진족 세력을 견제하고자 했다.[30]

2. 3. 2. 칭제 건원

960년(광종 11년)부터 '준풍'이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다.[40] 또한 개경을 황도(皇都)로 개칭하여 황제(皇帝)의 면모를 갖췄다.[40] 광종은 자신을 황제의 지위에 올려놓음으로써 스스로가 절대 권력자임을 신하들에게 주입시키려 했다.[42]

2. 3. 3. 황제권 강화와 정적 숙청

960년(광종 11년), 평농서사 권신이 대상 준홍 등이 역모를 꾀한다고 고변하자, 광종은 호족들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기 시작했다.[15] 혜종의 아들 흥화궁군,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 태조의 서자 효은태자 왕원 등이 처형되었다.[3][15] 광종은 심지어 다섯 살 난 자신의 장남 왕주마저 불신하였다.[3] 이러한 숙청으로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운 태조의 공신 3,200명 가운데 겨우 40명만이 살아남았다.[15]

광종의 개혁은 귀족들, 그 중에서도 특히 고려 건국에 공이 큰 고위 군사 및 문관들의 반발을 샀다.[2][11] 귀족들의 반란 시도는 실패로 끝났다.

2. 3. 4. 불교 장려

광종은 사상적 통합을 위해 불교를 적극 장려하였고, 각지의 사찰 중수와 공양, 시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953년 화엄종 승려 겸신을 국사로 봉하였다. 겸신이 입적한 이후에는 혜거를 초빙하여 국사로 삼았다.[55]

963년 개성에 귀법사(歸法寺)를 창건하고, 제위보(濟危寶)를 설치하여 각종 법회와 재회를 열었다.[56] 귀법사의 승려 균여(均如)·탄문(坦文) 등을 통해 호족에 반발하는 일반 민중을 포섭하고, 개혁 지지 세력으로 삼고자 하였다.[56] 968년 충청남도 논산관촉사 창건을 지원하였다.

967년 최행귀에게 명하여 균여의 보현십원가(普賢十願歌)를 한문으로 번역하게 하였다. 968년 고승을 나라의 스승으로 초빙하는 국사·왕사의 이사제도(二師制度)를 시작하였다. 혜거(惠居)를 국사로 삼아 홍화사(弘化寺)·삼귀사(三歸寺)·유암사(遊巖寺) 등의 창건을 지원하고, 탄문(坦文)을 왕사로 삼았다.[57] 974년 혜거 사후 탄문을 국사로 삼았다. 왕족과 호족 처형으로 흉흉해진 민심을 불교 법회로 달래려 했다. 그러나 불교 승려들 사이에서도 내분이 발생하여, 968년 균여가 고발당하고 탄문이 귀법사를 장악한다.[57]

970년부터 충청남도 논산에 대규모 석불을 중수하였다. 1006년(목종 9년)에 완공된 이 불사는 37년이 걸렸다.[58] 석불 조각이 수월치 않자 혜명 스님이 아이들의 흙장난을 보고 깨달아 불상을 세웠다고 한다.[58] 광종은 황제권 확립을 위해 거대한 미륵불을 조성했고, 옛 후백제 유민에게 새 왕조를 알리고자 후백제 고토 논산을 선택했다.

2. 4. 생애 후반

961년 4월, 큰 홍수가 발생하자 광종은 궁궐 수호와 복원을 위해 수영도감을 설치하고, 당숙인 왕육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다.[59]

965년 2월, 아들 주를 태자로 책봉하고 잔치를 열었다. 광종은 아들 태자 주를 의심하기도 했지만, 둘째 아들이 요절하여 다른 후계자가 없었다. 태자 주는 목숨을 잃을까 두려워하며 조용히 지냈다.

광종 말년에는 잦은 숙청으로 인해 오랜 공신들조차 죽음을 면치 못했고, 경종 대에 살아남은 구신은 겨우 40여 명에 불과했다고 한다.[53] 965년 7월에는 측근이었던 서필이 사망했고, 이후 광종은 불교에 더욱 의존했다. 968년에는 악몽을 꾼 후 재회를 열고 도살 금지령을 내렸다.

971년 12월972년 2월, 고려에 지진이 발생하자 백성들은 왕을 탓했다. 광종은 민심을 수습하기 위해 972년 8월 죄수들을 대대적으로 사면했다. 972년 말, 서희송나라에 사신으로 보내 광종은 송나라 황제로부터 칭호를 받았고, 서희 등 사신들도 송나라의 관직을 받았다. 이후 송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973년, 함경남도 지역에 성을 쌓았다.

974년 양주자재암 중수를 명했고,[60] 서경에서 반역을 꾀하던 자를 처형했다. 국사 혜거가 사망하자 탄문을 국사로 삼았으나, 탄문975년 3월 사망했다.

975년 5월, 광종은 병으로 개경 황궁에서 사망했다. 향년 51세였다. 묘호는 광종(光宗), 시호는 대성(大成), 능은 개풍군에 있는 헌릉(憲陵)이다.

3. 평가와 비판

광종은 과감한 개혁 정책으로 고려 초기의 왕권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기틀을 다졌다는 평가를 받지만, 지나친 숙청과 공포 정치, 귀화인 우대, 불교에 대한 과도한 의존, 그리고 사치스러운 생활 등으로 비판받기도 한다.

광종의 통치 방식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화를 보였다. 초기에는 과거 제도를 도입하고 노비안검법을 시행하는 등 개혁적인 정책을 펼쳤지만, 후기에는 지나친 숙청과 공포 정치로 많은 이들의 원성을 샀다. 960년 평농서사 권신[48]이 대상 준홍(俊弘) 등의 역모를 고변한 이후 호족들을 대량 숙청하고, 이복형 혜종의 아들 흥화궁군, 동복형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 이복동생 효은태자 등을 처형했다.[40] 심지어 자신의 장남인 태자 주마저 의심하여 갈등을 빚었다. 광종 말년에 이르러서는 세상이 어지럽고 형장이 잇달아서 역세(歷世) 훈신, 숙장이 죽음을 면치 못했던 바 경종대에 살아남은 구신은 겨우 40여 명밖에 되지 않았다고 한다.[53]

노비안검법 시행은 노비와 양인 계층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신분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부작용을 초래했다.[37]

말년에는 불교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사치를 일삼아 국가 재정을 낭비했다는 비판도 있다.[40] 965년 7월에는 그의 측근이었던 내의령 서필이 병사한 이후 불교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968년 악몽을 꾼 후 재회를 열었으며 방생소를 두고 도살 금지령을 내렸다.

3. 1. 평가

광종은 과감한 개혁 정책을 통해 고려 초기의 왕권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기틀을 다진 왕으로 평가받는다.

  • 과거 제도 도입: 과거 제도를 본격적으로 도입하여 시험을 통해 관리를 등용하는 제도를 확립했다. 이는 신분적 제약이 있던 신라 시대에도 최치원과 같은 육두품 출신 관료들이 학문을 바탕으로 정계에 진출했던 전통을 계승한 것이지만, 광종에 의해 더욱 체계화되었다.[39] 이를 통해 실력 있는 인재를 등용하고, 호족 세력의 정치적 기반을 약화시키는 효과를 거두었다.[37]
  • 노비안검법 시행: 노비안검법을 통해 후삼국 시대의 혼란기에 불법적으로 노비가 된 양인들을 해방시켰다. 이는 호족들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키고 국가 재정을 확충하는 데 기여했다.[37] 그러나 노비와 양인 계층 간의 갈등을 야기하고 신분 질서를 문란하게 만드는 부작용도 있었다.[37]
  • 칭제건원과 중앙집권 강화: 칭제건원을 통해 황제의 권위를 확립하고,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강화했다. 이는 혜종과 정종이 각각 박술희왕식렴 등 강력한 세력 기반에 의존했던 것과 달리, 광종이 독자적인 세력 기반을 구축하는 데 기여했다.[61][62]
  • 불교 장려와 민심 안정: 불교를 장려하여 민심을 안정시키고 사회 통합을 도모했다. 그러나 지나치게 불교를 신봉하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다는 비판도 받았다. 최승로고려사에서 광종이 불교에 집착하여 왕국을 빚더미에 빠뜨렸다고 비난했다.[21]
  • 개혁 정치의 한계: 광종의 개혁 정치는 주로 중앙의 정계 개편에 치중하여 지방 제도 개편이나 광범위한 경제·사회적 제도의 개편은 상대적으로 미약했다는 한계를 지닌다.
  • 공포 정치: 재위 중기 이후, 광종은 지나치게 정적을 견제하고 숙청을 단행하여 공포 정치를 펼쳤다. 특히 960년 평농서사 권신[48]이 대상 준홍(俊弘) 등의 역모를 고변한 이후 호족들을 대량 숙청하고, 이복형 혜종의 아들 흥화궁군, 동복형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 이복동생 효은태자 등을 처형했다.[40] 심지어 자신의 장남인 태자 주마저 의심하여 갈등을 빚었다.


최승로는 광종의 통치에 대해 처음에는 긍정적이었으나, 후반으로 갈수록 지나친 불교 신봉, 사치, 무고한 사람들의 처형 등을 비판했다.[21] 이제현고려사절요에서 광종의 과거 제도 도입이 문화를 발전시키려는 의지를 보여주었다고 평가했다.

3. 2. 비판

광종은 귀화인을 지나치게 우대하여 내국 관료들의 원망을 샀으며, 호족은 물론 혈육과 친인척에 대한 숙청을 지나치게 단행하여 정치적, 사회적으로 불안과 혼란을 야기했다.[40] 960년 평농서사(評農書史) 권신[48]이 대상(大相) 준홍(俊弘) 등의 역모를 고변하자 이를 빌미로 호족들을 대량 숙청하였다. 이복형 혜종의 아들 흥화궁군, 동복형 정종의 아들 경춘원군, 태조의 서자인 이복동생 효은태자 등을 처형하였고, 심지어 자신의 장남인 태자 주 역시 의심하여 갈등을 빚었다.

노비안검법 시행은 노비와 양인 계층 간의 갈등을 심화시키고 신분 질서를 문란하게 하는 부작용을 초래했다.[37] 노비로 있던 자들이 옛 주인을 헐뜯고 욕하는 사건이 잇따라 발생했고, 당시 기준으로 노비와 양인 계층 간의 반목으로 신분 질서가 문란해져 사회적 기반이 흔들리는 양상도 나타났다.[37]

또한, 말년에 불교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사치를 일삼아 국가 재정을 낭비했다는 비판도 제기된다.[40] 최승로는 광종이 불교와 공공 사업에 집착하여 왕국을 빚더미에 빠뜨렸고, 그의 잔혹함 때문에 그를 폭군이라고 비난했다.[21]

4. 가족 관계

광종의 가족 관계
관계이름본관생몰년부모비고
태조개성877년 - 943년세조, 위숙왕후 한씨고려 초대 국왕
신명순성왕후 유씨충주미상유긍달, 미상
관계이름본관생몰년부모비고
황후대목왕후 황보씨황주미상태조, 신정왕후 황보씨이복 여동생
부인경화궁부인 임씨진천미상혜종, 의화왕후 임씨이복 조카
현비 김씨[63]미상미상미상
순서이름생몰년생모배우자비고
1경종955년 - 981년대목왕후 황보씨헌숙왕후 김씨, 헌의왕후 유씨, 헌애왕후 황보씨, 헌정왕후 황보씨고려 제5대 국왕
2효화태자미상대목왕후 황보씨미상요절
순서이름생몰년생모배우자비고
1천추전부인미상대목왕후 황보씨천추전군
2보화궁부인미상대목왕후 황보씨미상
3문덕왕후미상대목왕후 황보씨홍덕원군, 성종성종의 제1왕후


5. 대중 문화 속의 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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