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력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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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력제는 명나라의 마지막 황실 후손으로, 1646년부터 1662년까지 남명의 황제였다. 이자성의 난으로 명나라가 멸망하자 남명 정권 수립에 참여하여 황위에 올랐으나, 청나라의 공세에 밀려 버마로 도주했다. 이후 오삼계에게 붙잡혀 1662년 쿤밍에서 처형당하면서 명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그의 사후 정성공은 그를 기리는 시호를 올렸고, 조선 유림은 그의 죽음을 애도하며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고 영력 연호를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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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력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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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주유랑 (朱由榔) |
풀 네임 | 주유랑 (朱由榔) |
칸톤어 | Zyu1 Jau4 Long4 |
묘호 | 소종 (昭宗) (정경이 추존) |
시호 | 응천추도민의공검경문위무예인극효광황제 (應天推道敏毅恭檢經文緯武禮仁克孝匡皇帝) (정경이 추존) |
존호 | 광황제 (匡皇帝) (정경이 추존) |
생애 | |
출생일 | 1623년 11월 1일 (천계 3년 10월 9일) |
사망일 | 1662년 6월 1일 (영력 16년 4월 15일) |
매장지 | 영력릉 |
통치 | |
즉위일 | 1646년 12월 24일 |
퇴위일 | 1662년 6월 1일 |
연호 | 영력 (永曆) |
연호 기간 | 1647년 2월 5일 – 1662년 6월 1일 |
가문 | |
왕가 | 주 |
왕조 | 남명 |
부친 | 주상영 |
모친 | 소성태후 |
배우자 | 효강광황후 |
자녀 | |
자녀 목록 | 주자궐, 회민태자 주자?, 도민태자 주자현, 애민태자 주자?, 원애왕 주자위, 부도왕 주자의, 면상왕 주자탁, 이충왕 |
작위 | |
영명왕 재임 기간 | 1636년 – 1646년 |
귀왕 재임 기간 | 1646년 |
계승자 | 주자영 |
남명 황제 | |
선대 황제 | 소무제 |
후대 황제 | 없음 |
2. 생애
1643년 명나라 말기의 혼란을 피해 아버지 주상영과 함께 광서로 피난했다. 아버지와 형이 사망하면서 계왕(桂王)이 되었다.[2]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숭정제가 자살하고 명이 멸망하자, 남명 정권 수립에 참여하여 당왕, 복왕과 협력했다. 1646년 12월 18일, 청군에게 당왕이 사로잡히자 조경에서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를 영력(永曆)으로 정했다.[3][4]
이후 정성공 등의 협력을 얻어 광둥, 광서, 귀주, 운남 일대를 통치하며 한때 청나라를 압도하는 듯했으나, 내부 권력 투쟁으로 서서히 약화되었다. 1650년 광시구이린이 함락되자 화남 각지를 방랑했고, 1655년 윈난쿤밍을 거쳐 1659년에는 버마로 피신했다. 그러나 이때 영력제를 따르는 신하는 650명 정도에 불과했다.[4]
1662년 청나라에 투항한 오삼계가 버마까지 쳐들어왔고, 버마 왕은 청군의 위세를 두려워하여 영력제를 청군에게 넘겼다. 영력제는 쿤밍에서 교살 또는 화형당했다는 설이 있으며, 이로써 명나라는 완전히 멸망하였다.[6][7][8]
영력제는 기독교에 조예가 깊어 로마 교황에게 사절을 파견하기도 했지만, 명나라 말기의 쇠퇴기였기에 사절 파견의 정치적 의의는 매우 제한적이었다.
2. 1. 즉위 전
1643년 명나라 말기의 혼란을 피해 아버지 주상영과 함께 광서로 피난했다. 아버지와 형이 사망하면서 계왕(桂王)이 되었다.[2] 1644년, 이자성의 난으로 숭정제가 자살하고 명이 멸망하자, 남명 정권 수립에 참여하여 당왕, 복왕과 협력했다.2. 2. 남명 황제 즉위와 통치
1643년 명나라 말기의 혼란 속에서 아버지 주상영(朱常瀛)과 함께 광서(廣西)로 피신했다. 그 직후, 아버지와 형이 사망하면서 계왕(桂王)이 되었다. 1644년, 이자성(李自成)의 반란으로 숭정제(崇禎帝)가 자살하여 명이 멸망하자, 당왕(唐王)과 복왕(福王)과 협력하여 남명 정권을 수립하였다. 당왕이 청(淸)의 군대에게 잡히자, 1646년 12월 18일에 조경(肇慶)에서 황제로 즉위하였고, 연호를 영력(永曆)으로 정했다.[3][4]이후 정성공(鄭成功) 등의 협력으로 한때 광동(廣東), 광서(廣西), 귀주(貴州), 운남(雲南) 일대를 통치하였다. 1650년 청군이 중국 남부 경동(京東)과 계림(桂林)을 함락시키고, 1656년 주산열도를 점령하자, 화남(華南) 각지를 방랑했다.[4]
주유량은 양어머니이자 아버지의 미망인이었던 왕태후의 승인을 받아 즉위했으며, 즉위 후 5년 동안 왕태후가 그의 조언자 역할을 했다. 왕태후는 글과 시사에 능통하고, 업무에 대한 분석력과 논리가 명확하여 황제가 즉위한 후 그녀의 뜻을 따르지 않는 일이 없었다고 전해진다.[5]
1655년 (영력 9년)에는 윈난 쿤밍으로 근거지를 옮겼다. 영력제는 지역 군벌과 산적 두목들의 군사적 지원에 의존하게 되었는데, 이들 중 가장 뛰어나고 효과적인 인물은 이정국이었다. 이정국은 5년 동안 남명의 영토를 서남부에서 크게 확장하는 데 성공했다.[4] 그러나 이러한 성공으로 인해 청나라는 유능한 전직 명나라 관리인 홍승주에게 이 지역 전체를 맡겼고, 홍승주는 5개 성의 총독으로 임명되었다. 1658년까지 영력제는 중국 서남부 변경의 가장자리에 있는 윈난성으로 밀려났다.
2. 3. 버마 피난과 최후
朱由榔중국어은 1643년 명나라 말기의 혼란을 피해 아버지 주상영과 함께 광서(廣西)로 피난했다. 아버지와 형이 사망하면서 계왕(桂王)이 되었고, 1644년 이자성의 반란으로 숭정제가 자살하여 명나라가 멸망하자 남명 정권에 참여했다.[3][4] 1646년 황제로 즉위하여 연호를 영력(永曆)으로 정했다.1659년 청군의 압박으로 버마로 피난했다. 그러나 1661년 버마에서 자신의 왕국을 건설하려다 버마인들과 전쟁이 발발했고, 버마 왕 핀달레 민이 그의 형제 페 민에게 전복되면서, 페 민은 영력제를 제외한 모든 중국인에게 사형을 명령했다.
1662년 청나라에 투항한 오삼계가 버마까지 쳐들어와 영력제를 압박했다. 버마 왕은 영력제를 청군에 넘겨주었고, 영력제는 쿤밍(昆明)에서 오삼계에 의해 교살(혹은 화형)되었다.[6][7][8] 영력제의 죽음으로 명나라는 완전히 멸망하였다.
영력제 이후, 명 부흥군은 정무제를 추대하고 2년간 청군에 항전하였으나, 그도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명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영력제 이후 청나라에 저항했던 마지막 명나라 왕족은 영정왕 주술계와 정성공을 따라 타이완으로 간 노왕 주홍환이었다. 주술계는 동녕 왕국에서 대리인으로 활동했다.
3. 사후
정성공은 영력제가 죽자 국상을 선포하고 애도 기간을 가졌다.[1] 조선 유림들은 영력제의 죽음 이후 사적으로 별실에 상청(喪廳)을 마련하고 상복을 입으며 애도했고, 이는 청나라와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었다.[1] 이후에도 조선 유림들은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고 19세기까지 양반가나 공문에서 영력 연호를 사용했다.[1]
3. 1. 정성공의 추서
정성공은 영력제가 죽자 국상을 선포하고 애도 기간을 가진 뒤 응천추도민의공검경문위무예인극효광황제(應天推道敏毅恭檢經文緯武禮仁克孝匡皇帝)라는 시호를 추서했다.[1]3. 2. 조선과의 관계
정성공이 영력제에게 응천추도민의공검경문위무예인극효광황제(應天推道敏毅恭檢經文緯武禮仁克孝匡皇帝)라는 시호를 추서하자,[1] 조선의 유림들은 사적으로 별실에 상청(喪廳)을 마련하고 상복을 입고 곡을 하는 등 애도를 표했다.[1] 이는 조선과 청나라 간의 외교 문제로 비화되기도 했다.[1] 조선 유림들은 청나라를 인정하지 않고 영력제의 연호인 '영력'을 19세기까지 사용했으며, 양반가나 공문에는 영력 200년 등으로 표기하기도 했다.[1]4. 가계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회민태자 주자작(懷愍太子 朱慈爝) | 1645년 | ? | 장남 |
도민태자 주자벌(悼愍太子 朱慈䇅) | 1646년 | 1712년 | 차남 |
애민태자 주자현(哀愍太子 朱慈炫) | 1648년 | 1662년 | 3남 |
원애왕 주자립(沅哀王 朱慈𤇥) | 1650년 | ? | 4남 |
부도왕 주자위(涪悼王 朱慈煒) | 1654년 | 1655년 | 5남 |
면상왕 주자습(沔殤王 朱慈熠) | 1654년 | 1655년 | 6남 |
예충왕 주자작(澧冲王 朱慈焯) | 1654년 | 1656년 | 7남 |
'''후궁:'''
- 효강광황후 왕씨 (孝剛匡皇后 王氏; ? ~ 1662)
- 비(妃) 두씨 (竇氏)
- 비(妃) 모씨 (某氏)
- 귀인(貴人) 대씨 (戴氏)
- 궁빈(宮嬪) 모씨 (某氏)
- 귀인(貴人) 양씨 (楊氏; ? ~ 1661)
- 귀인(貴人) 유씨 (劉氏)
- 귀인(貴人) 양씨 (楊氏)
- 상재(常在) 곽씨 (郭氏), 이름은 양박(良璞)
5. 기년과 연호
6. 기타
영력제는 기독교에 조예가 깊어 로마 교황에게 사절을 파견하기도 했으나, 명나라 말 쇠퇴기였던 당시 사절 파견은 큰 정치적 의의가 없었다.
참조
[1]
문서
《南明史》本紀第四
[2]
서적
China: A History
https://archive.org/[...]
Harper
[3]
서적
The Cambridge history of China: The Ming dynasty, 1368–1644, Part 1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8-02-26
[4]
서적
Imperial China 900-1800
https://books.google[...]
Harvard University Press
[5]
서적
Biographical Dictionary of Chinese Women: v. 1: The Qing Period, 1644–1911
https://books.google[...]
[6]
서적
The Asiatic Journal and Monthly Register
https://books.google[...]
[7]
서적
The Great Enterprise: The Manchu Reconstruction of Imperial Order in Seventeenth-Century Chin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8]
논문
Last Court of the Ming China: The Reign of the Yung-li Emperor in the South (1647–1662)
Princeton University
[9]
문서
조선의 각종 공문에서도 영력 기원, 혹은 전임자인 숭정제의 연호를 따서 숭정 기원으로 하는 등 혼란이 있었다. 이 때문에 조선과 청나라간 외교적 마찰을 빚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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