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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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강희제는 청나라의 제4대 황제로, 1661년부터 1722년까지 61년간 재위하며 '강건성세'를 이끌었다. 그는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오배의 난을 평정하고 삼번의 난, 대만 복속, 러시아와의 네르친스크 조약 체결, 몽골과 티베트 원정을 통해 청나라의 영토를 확장했다. 유교를 통치 이념으로 삼고, 학문을 장려하며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 힘썼다. 그러나 문자의 옥을 통해 학자들을 숙청하고, 황자들 간의 황위 다툼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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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희제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강희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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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 정보 | |
| 휘 | 아이신 교로 효완 예이 |
| 묘호 | 성조 |
| 시호 |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 |
| 연호 | 강희 |
| 재위 기간 | 1661년 2월 5일 ~ 1722년 12월 20일 |
| 출생일 | 1654년 5월 4일 |
| 출생지 | 북경 자금성 경인궁 |
| 사망일 | 1722년 12월 20일 |
| 사망지 | 북경 창춘원 |
| 매장지 | 경릉 |
| 아버지 | 순치제 |
| 어머니 | 효강장황후 |
| 존호 및 칭호 | |
| 묘호 (로마자 표기) | Šengdzu |
| 시호 (로마자 표기) | Gosin Hūwangdi |
| 연호 (로마자 표기) | Elhe Taifin |
| 배우자 | |
| 황후 | 효성인황후 효소인황후 효의인황후 효공인황후 |
| 자녀 | |
| 아들 | 옹정제 |
| 통치 | |
| 즉위 | 1661년 2월 7일 |
| 퇴위 | 1722년 12월 20일 |
| 섭정 | 소닌 (1661년~1667년) 에빌룬 (1661년~1667년) 숙사하 (1661년~1667년) 오보이 (1661년~1669년) |
| 연호 (기간) | 1662년 2월 18일 ~ 1723년 2월 4일 |
| 사원 이름 | 성조 |
2. 생애
2. 1. 어린 시절
1654년(순치 11년) 5월 4일 북경 자금성의 경인궁(景仁宮)에서 순치제의 후궁인 효강장황후 동가씨에게서 태어났다.[57] 현엽은 어릴 때부터 학문에 남달라 책을 읽으면 바로 암송하고 그 뜻을 능히 꿰뚫어 즉시 풀이하였고 궁술에 뛰어나 문무를 겸전하여 부황 순치제와 조모인 소성태후의 총애를 받았다.[60] 5살 때부터 황자들이 배우는 학문을 배웠다.[60]
7살 때인 1660년(순치 17년)에 이복동생이자 순치제의 4남[61] 이 죽자 뒤이어 황태자 자리에 올랐으나 공식적으로 선포되지 않았다. 현엽이 황태자에 지명된 이유는 어머니 동가씨가 개국공신 집안 출신이고 당시 순치제의 황후였던 효혜장황후가 아들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해 11월에 자금성 안에 천연두가 퍼졌고, 현엽이 갑자기 천연두에 걸려 사경을 헤맸으나 얼마 안 되어 나았다.
순치제는 아이들의 양육에 관심이 적었고, 현엽은 할머니인 효장문황후에게 엄격하게 교육받았다.[42] 순치 18년(1661년), 병세가 악화된 순치제는 현엽이 천연두를 이겨내고 살아남았고, 엄격한 교육을 받고 자란 것을 이유로 황태자로 지명했다.[42] 순치제는 같은 해에 붕어하였고, 현엽은 8세의 나이로 황제에 즉위했다.[42] 순치제의 유명에 따라 즉위 후에는 삭사하・소닌・에빌룬・오보이의 중신 4명에 의한 합의로 정권 운영이 이루어졌다.
1662년(강희 원년), 남명의 황제 영력제가 청군 및 평서왕 오삼계에게 버마에서 처참히 죽임을 당해(6월 1일, 음력 4월 15일), 명나라의 황통을 이어받고 청나라에 비협조적인 여러 한족에게 은밀히 지지받던 남명은 명나라 멸망 후 18년 만에 멸망하였다.
2. 2. 친정과 오배의 난
강희제는 8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여 친정(親政)을 할 수 없었다.[69] 황태후나 태황태후가 수렴청정하는 것이 관례였으나, 생모인 효강장황후 동가씨는 1663년(강희 2년)에 24세의 나이로 요절하였고, 적모인 인헌황태후 효혜장황후는 시어머니인 효장태황태후가 있어 수렴청정을 할 수 없었다.[69] 효장태황태후는 직접 수렴청정 대신 네 명의 보정대신들에게 정책 최고 의결권을 내렸고,[69] 이들이 강희제를 보필하였다. 보정대신 중 병부상서 오배의 권력이 가장 막강하였다.[72]강희제가 즉위하기 전, 효장문황후(순치제의 명의로)는 소닌, 숙사하, 에빌룬, 오보이 등 권력자들을 섭정으로 임명했다. 소닌은 손녀가 효성인황후가 된 후 사망했고, 이후 숙사하와 오배는 정치적 대립을 벌였다. 치열한 권력 투쟁 끝에 오배는 숙사하를 처형하고 섭정으로서 절대 권력을 장악했다. 강희제와 나머지 조정은 이러한 상황을 수용했다.

강희제는 오배를 견제하기 위해 소닌의 손녀를 황후로 맞아들였다.[73] 그녀가 바로 강희제의 정궁황후이며 첫 번째 황후인 효성인황후 혁사리씨다.[73] 1667년(강희 6년) 14살이 된 강희제는 친정을 시작하였으나,[74] 그 해에 자신을 보호해준 소닌이 사망한다. 오배는 숙사하에게 역모죄를 뒤집어씌워 교수시키고 조정의 전권을 장악하였다.[74] 오배는 숙사하를 죽이는 과정에서 강희제를 강압하였고, 강희제는 이에 굴복하였다.[74]
오배는 백성들의 땅을 불법으로 획책하는 등 전횡을 일삼았다.[72] 강희제는 오배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장정들을 불러 몽골 씨름을 하도록 하였고, 틈틈이 제왕학 수업을 받았다. 강희제의 스승은 명나라의 마지막 진사시(進士試)에서 장원을 한 제세였다.
오배가 병을 핑계로 두문불출할 때 강희제가 문병을 갔는데, 오배의 품 속에서 단도가 발견되었다.[77] 강희제는 만주족의 전통이라며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지었으나, 오배를 제거하기 위한 작전을 세웠다.[77]
강희제는 소닌의 아들 색액도 등을 규합하여 친위병을 양성하였다. 1669년(강희 8년) 5월 16일 오배가 궁정에 알현하러 오자 강희제는 오배를 체포하였다.[78] 강희제는 오배에게 30개의 대죄를 물었으나, 태종과 세조를 전투에서 온몸으로 막은 공을 참작하여 가산을 적몰하고 유배형을 내렸다.[77] 그러나 여러 대신들의 주장으로 사약을 받아 처형되었다. 강희제는 색액도를 대신으로 삼아 조정을 안정시켰고, 이로써 진정한 친정을 하게 되었으며, 강력한 황권을 확립하기에 이른다.[79]
2. 3. 삼번의 난
오배를 축출한 이후, 강희제는 오배보다 더 막강한 세력인 삼번(三藩)을 염려하기 시작하였다.[80] 원래 번(藩)은 청나라의 특수 행정구역으로 주로 변방에 설치되었는데[81], 그중에서도 삼번은 남명에 대비한 것으로 운남, 귀주 지역을 담당한 평서왕 오삼계, 광동의 평남왕(平南王) 상가희(尙可喜), 복건의 정남왕(靖南王) 경중명이 관할하였다.[82] 이들은 모두 한족 출신이었으나, 순치제 때 청나라의 중국 통일을 크게 도와 번왕에 책봉됨과 동시에 막강한 군사권과 남해에서 다른 나라들과의 무역으로 엄청난 돈을 축적하고 있었다.[83] 강희제가 친정을 시작할 무렵 정남왕의 직위는 경중명의 손자 경정충(耿精忠)이 승계하였다. 강희제 즉위 무렵에는 이미 남명이 멸망하고 반청 세력이 일소된 상황이었으나 삼번은 여전히 막강한 세력을 유지하고 자신이 다스리는 지방에서의 행정권, 사법권까지 모두 가지고 있었다.[84] 삼번이 사실상 독자적인 정치세력으로 성장하자 중앙집권제를 강화하려는 청나라 조정과의 대결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85]

특히, 오삼계는 삼번왕 가운데 품계가 가장 높았고 홍타이지의 막내딸이자 강희제의 막내 고모인 화석건녕공주를 며느리로 둔 황실 인척이어서 쉽게 통제할 수도 없는 위치에 있었다. 또한 조정이 걷은 세금 가운데 백은 2천만냥이 오삼계에게 제공되었는데 이는 국가 총 수입의 절반이 넘는 양이었기 때문에 중앙 정부인 조정의 재정에 부담을 주는 원인이 되었다.[83]
평남왕 상가희는 아들 상지신과 불화를 겪자 고향인 요동으로 돌아가고자 은퇴를 요청하며 자신의 작위를 아들에게 물려달라고 상소하였다. 청나라 조정은 은퇴는 허락하지만 작위의 세습은 불허하였다. 이러한 조치는 스스로를 독자적 정치세력으로 여기고 있던 삼번의 왕들에게 충격을 주었고, 오삼계와 경중명은 조정의 진의를 확인하기 위해 모두 은퇴를 요청하였다. 조정은 이들이 모반을 일이키려한다고 판단하여 대책을 논의하였다. 강희제는 철번을 승인하여도 모반할 것이고 불허하여도 모반할 것이라면 일찌감치 모반을 확인하는 것이 좋다는 이유로 삼번의 철번을 명하였다. 1673년(강희 12년) 7월 철번의 명이 내려지자 오삼계 등은 모반을 결정하였고 그 해 11월 오삼계는 명나라의 갑옷을 입고 영력제의 능에서 반청복명(反淸復明)을 이유로 거병하였다. 그러나, 영력제를 죽인 사람이 다름 아닌 오삼계 자신이었기 때문에 모반의 명분은 공감을 얻지 못하여 명나라 황족을 옹립하지는 못하였다.[88]
강희제는 오삼계에게 조정에 진출해 있던 오삼계의 장남이자 평서왕세자 오응웅을 건네줄 테니 회군하라 권유하였으나 삼번 연합군은 이를 듣지 않고 계속 진군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에 오응웅과 그 아들 오세림은 체포되어 참수되었다. 한편, 평남왕 상가희는 오삼계의 호응 요청을 거절하고 이를 강희제에게 알려 자신의 결백함을 입증하고자 했으나, 이에 반발한 아들 상지신이 상가희를 연금시키고 오삼계와 합류하였다.[86]
3개월 내에 삼번 연합군은 중국 남부를 거의 점령하였고, 지금의 섬서성과 하남성까지 진군하였다. 섬서와 하남 지역을 지키는 녹영의 장군들은 거의 삼번에게 협조적이어서 삼번 연합군의 진군에 큰 저항은 없었다.[87][88] 그 군세가 엄청나 몽골의 칸들이 반역자인 오삼계에 대항하기 위해 지원을 해주겠다 하였으나 강희제는 이를 거절하고 자신의 힘으로 국난을 헤쳐가려 하였다. 그러나 오삼계는 돌연 북경으로 향하는 군사들의 진군 속도를 늦춘다.
당시 섬서성, 감숙성을 관장하던 제독인 왕보신은 오삼계의 삼번 연합군을 잘 막았으나, 조정에 반대하고 독자 세력을 구축하였다. 양기륭(楊起隆)이란 사람이 자신을 명나라의 마지막 황제 숭정제의 셋째 아들인 주자형(朱慈炯), 즉 주삼태자(朱三太子)로 자칭하고 사람을 모아 북경을 몰래 기습하였고 강희제는 효장태황태후를 모시고 옛 수도 성경(盛京)으로 도망가려 하였다. 그러나 양기륭이 북경에 쳐들어올 것이란 정보를 알아챈 청군이 양기륭의 군대를 기습 공격하여 와해하였다.
1676년(강희 15년) 상가희의 아들 상지신은 겁을 먹고 자살하고 경정충이 관군에 항복하였다. 그러나 경정충은 곧 청군에게 끌려와 1681년(강희 20년)에 반역에 공모한 죄로 사형당한다. 1678년(강희 17년)에 삼번의 맹주 오삼계는 스스로 황제를 칭하고 국호를 주(周), 연호를 소무(昭武)라고 하였으나 노환으로 그 해 8월에 죽었다.[89] 1681년(강희 20년)에 오삼계의 손자이자 오씨의 주나라, 즉 오주(吳周)의 두 번째 황제인 오세번이 곤명(昆明)에서 자살을 하고 청군이 곤명을 함락시킴으로써 9년에 걸친 삼번의 난은 끝이 났다.[90] 강희제는 삼번의 군사들을 물리치는 데 한족 장수들을 대거 등용하였다. 이 반란은 강희제의 황권과 군 통수권을 더욱 강화하였다.[91]
한편, 청나라는 조선의 내정에 간섭하지는 않았으나 역대 중국 왕조와 같이 사대관계에 의해 번국에 준하여 대하였고[81], 삼번의 난이 일어나자 조선의 북벌론을 문제삼으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에 숙종은 청나라를 안심시키기 위해 남인 정권을 물리치고 대표적인 북벌론자 윤휴를 처형하는 고육책을 써야 했다.[92] 삼번의 난 중에 조선은 큰 기근이 들었는데 강희제는 1671년(강희 10년, 현종 12년) 조선에서 온 동지사 복선군 이남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전하였다.[93]
흔히 군약신강(君弱臣強)이라고 하는 이 말은 당시 조선의 왕권이 약하고 신권이 크다하여 청나라가 조선을 비웃는 말로도 사용되었다.
2. 4. 대만 복속

삼번의 난 진압 이후, 정성공이 통치하던 대만, 팽호 제도, 금문, 하문 등 동남 36개 섬들은 여전히 청나라에 복속되지 않았다. 정성공은 남명의 융무제에게서 연평군왕 작위를 받고, 황실 성씨인 주(朱)씨 성을 하사받아 국성야(國姓爺)로 불렸다.[96] 1662년(강희 원년), 정성공 사후 정경이 대만을 지배했다. 대만 군사들은 삼번의 난 때부터 본토 해안가 마을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살해하는 등 피해를 입혔다.[97] 청나라 수군은 대만 수군과의 해전에서 네덜란드의 기술을 받아들인 대만 수군에게 패배했다.
청나라를 등진 많은 사람들이 대만으로 건너갔고, 강희제는 대만의 반란을 우려하여 대만과 가까운 광동, 복건, 강소, 절강 등 동남 4성 주민들을 해안에서 30리 이상 떨어진 곳으로 옮기고 대만과의 무역을 금지하는 해상 금지령을 선포했다. 하지만 해안가 주민들은 대만과 무역으로 생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이들의 불만을 무마하기 위해 강희제는 이들에게 세금을 3년간 면제하고 내륙에서 살 돈까지 지급했다.
정성공 사후, 대만은 후계자 쟁탈로 혼란스러웠다. 정경 사후, 정극장과 정극상의 왕위 다툼 끝에 정극상이 왕위에 올랐다. 강희제는 정경의 부하였던 시랑(施琅)을 수군 총제독으로, 복건 순무 요계성(姚啓聖)을 병부상서 급의 복건, 절강 총독으로 삼아 대만 점령 작전을 세웠다. 강희제는 팔기 수군과 서양 선교사의 자문으로 만든 최신식 대포를 동원하여 대만을 공격했다. 1683년(강희 22년) 7월, 정극상은 청에 항복했고, 강희제는 정극상을 한군공(漢軍公)에 봉하고,[99] 정성공에게 충절이라는 시호를 내렸다.[100]
1683년, 정씨 왕조(鄭氏王朝)의 동닝 왕국(東寧王國) 해군은 청나라 제독 시랑이 이끄는 함대에 펑후 해전(澎湖海戰)에서 패배했다. 정성공의 손자 정계상(鄭克爽)이 항복하여 타이완은 청나라의 일부가 되었다. 정계상은 "해성공"(海澄公) 작위를 받고 팔기군(八旗軍)에 편입되었다. 그의 군인들도 팔기군에 편입되어 알바진 전투(알바진 전투)에서 러시아 코사크와 싸웠다.
청나라는 타이완에 있던 명나라 왕자 대부분을 본토로 돌려보냈으나,[7] 닝징왕과 그의 다섯 첩은 자살했다. 1683년 그들의 궁전은 시랑의 본부로 사용되었으나, 강희제는 상소를 통해 이를 마조 사원으로 개조, 대천후궁(大天后宮)으로 봉헌했다. 이는 타이완 저항 세력 진압을 위한 선전 수단이었고, 청나라 침략에 도움을 준 마조(媽祖)를 "천비"(天妃)에서 "천후"(天后)로 승격시켰다.[8][9]
강희제는 해금령을 완화하고 복건성(福建省)과 광동성(廣東省) 해안의 재정착을 허용했다. 새로운 정착민들을 위한 인센티브는 객가인(客家人)들을 끌어들였고, 이들은 푼티인(Punti people)과 지속적인 분쟁을 벌였다.
1683년[43]에 대만을 병합하고,[43] 러시아 제국이 흑룡강 부근 알바진으로 남하하자, 이 지역의 군사력을 강화했다(청러 국경 분쟁). 강희 28년(1689년)에 넬친스크 조약을 체결했다.
2. 5. 러시아와의 갈등
1639년부터 1643년까지 청나라는 아무르강(흑룡강) 일대 원주민들을 복속시켰다.[101] 1643년 겨울, 바실리 콜랴코프의 코사크 기병대가 흑룡강 유역에 나타났고, 1650년대에는 예로페이 하바로프와 아무르 원주민들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루스 차르국은 1655년 "아무르 지역 군사총독"을 임명했다. 순치제는 러시아와 국경을 마주한 조선에 군사를 요청, 1654년과 1658년 두 차례 파병하여 러시아군과 싸웠는데, 이것이 조선의 나선 정벌이다.[102]
강희제 치세 이전부터 러시아는 만주로 내려왔다. 나선정벌 이후 30여 년 뒤, 러시아는 청나라 동북쪽을 침략, 일부는 북만주에 주둔했다. 러시아인들은 시베리아와 만주의 토착민을 약탈, 강간, 살해했고, 청나라 북만주 주민들은 이들을 나찰이라 불렀다.[104] 강희제는 러시아에 사과를 요구했고, 러시아는 선물을 보내며[105] 통상 자유를 희망했다. 그러나 러시아가 쑹화강까지 세력을 넓히려 하자, 강희제는 애혼성을 쌓고, 아르바진을 공격했다. 러시아군은 아르바진 요새를 수복하려 했다.[103]
1689년, 강희제는 색액도를 흠차대신으로 명하여 러시아와 협상하게 했다. 양측은 네르친스크에서 만나 고르비트사강과 스타노보이산맥을 국경으로 확정, 네르친스크 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중국사 최초의 평등한 조약이었다.[106] 청나라는 넓은 영토를 얻었고, 양국 간 무역 자유도 보장되었으나, 러시아에 불리한 조항이 많아 훗날 함풍제 때 러시아가 만주와 연해주 땅을 가져가는 원인이 되었다.[103]
1650년대, 청 제국은 국경 분쟁에서 러시아 제국과 맞섰으며, 알바진 공방전 이후 청나라가 이 지역을 장악했다. 1680년대에 러시아는 다시 북부 국경을 침략했다. 일련의 전투와 협상은 1689년 네르친스크 조약으로 절정에 달했고, 이 조약으로 러시아와 중국 사이의 국경이 합의되었다.

1683년[43] 대만을 병합하고,[43] 표트르 1세 시대의 러시아 제국이 흑룡강 부근 알바진으로 남하해 오자, 이 지역의 군사력을 강화했다(청러 국경 분쟁). 1689년에 송고투를 파견하여 넬친스크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양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체결한 것이었다. 중화사상에 따르면 중국은 유일한 국가이며, 대등한 국가와 국경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명분이었지만, 이 조약은 그 원칙을 흔드는 내용이었다. 예수회 선교사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의 조언이 있었다고 전해지며, 조약 체결 당시에도 예수회 선교사가 협상을 도왔다.
2. 6. 몽골과 티베트 원정

몽골 초원은 홍타이지 이후 청나라의 지배를 받고 있었으나, 조공을 올리고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1675년(강희 14년) 차하르 부족이 삼번의 난으로 혼란한 틈을 타 중원을 침략하자, 강희제는 몽골을 내몽골과 외몽골로 나누어 부족 간의 규합을 막으려 하였다.[107]
몽골이 청나라에 복속된 후, 오이라트 부족 출신의 중가르 부족 칸 갈단이 세력을 모아 몽골과 티베트를 통일하여 라마 제국을 건설하려는 야망을 품고 청나라에 대항하였다. 갈단은 1677년(강희 16년) 오이라트 부족을 통합하고 1682년(강희 21년) 타림 분지를 점령한 후, 동투르키스탄을 거쳐 중원을 노렸다.[108] 준가르는 원나라의 대칸은 만주인이 아닌 몽골인이어야 한다고 주장하며, 러시아와 티베트의 원조를 받았다. 티베트의 달라이 라마 5세는 갈단에게 보슈그투 칸(대칸) 직함을 내렸다.
1688년(강희 27년), 준가르는 할하 부족의 땅을 점령하고 대부분의 부족민을 죽였다. 살아남은 할하족은 고비 사막을 넘어 강희제에게 군사적 원조를 요청하였다. 1690년(강희 29년) 7월, 강희제는 팔기군을 이끌고 몽골 원정에 나섰다.[109] 이는 명나라 영락제 이후 황제가 최초로 친히 고비 사막을 넘어 몽골 원정을 감행한 것이었다. 강희제는 울란 부퉁에서 갈단의 군대와 마주쳤다.[110] 이 원정에서 강희제는 할하족의 공식적인 합병 서약과 충성 서약을 받았다. 강희제는 "옛날의 진은 돌과 흙으로 만리장성을 쌓았지만 짐은 객이객에게 은혜를 배풀어 그보다 더 견고한 성을 쌓았다"고 말했다.[111]

청군은 내몽골에서 준가르군과 맞붙었으나 전염병과 패배로 북경으로 환도하였다. 강희제도 전염병에 걸려 고생하였다. 1696년(강희 35년), 강희제는 8만 팔기군을 이끌고 몽골로 진입, 차오모도 전투에서 준가르군을 대파하였다. 갈단은 1697년(강희 36년) 알타이산맥 기슭에서 음독자살하였다.[112][113]
1712년(강희 51년), 강희제는 준가르 견제를 위해 만주 귀족 툴리센을 볼가강 하류의 투르구트족에게 사절로 보냈다.[114] 1717년(강희 56년), 갈단의 조카 체왕 아랍단은 티베트를 점령하고, 1718년(강희 57년) 청군을 격파하였다.[112]
1720년(강희 59년), 강희제는 팔기군을 보내 준가르군을 격퇴하고, 1721년(강희 60년) 켈장 갸초를 제7대 달라이 라마로 옹립, 티베트를 청나라 영토에 편입시켰다.[115] 준가르 세력은 건륭제 때 위구르와 함께 청군에 항복하여 완전히 와해되었다.[116]

2. 7. 팔기군 개편과 군사 정책
강희제는 조부인 숭덕제가 만주족, 한족, 몽골족으로 나눈 팔기군을 개편하였다.[117] 팔기군 아래에는 녹영(綠營)이라는 군단이 있었는데, 삼번의 난 때 활약한 주배공이나 대만 수복 때 정씨 휘하 군사들을 격파한 시랑 등 한족 장군들이 여기에 속하였다.[118] 강희제는 이들 녹영을 팔기군이나 황제 직속 부대의 예하로 편제하여 한족에 대한 만주족의 지배를 강화하면서 동시에 한족을 포용하는 방식을 택하였다.[117]강희제는 전통적인 팔기군 체계에 엄격한 규율을 적용하였다. 장군이 병사들과 같이 돌아오지 않으면 장군을 참하고, 병졸이 자신의 부대와 같이 돌아오지 않으면 그 병졸 역시 참하도록 명하였다. 이는 장병이 모두 일심동체라 생각하여 책임 역시 같이 져야 한다는 인식에 기반한 것이었다. 이런 엄격한 규율 덕분에 강희 시대의 팔기군은 옹정, 건륭 시대의 팔기군보다 더 훈련이 잘 되어 있고 용감하였다.

청 제국의 주력 군대였던 팔기군은 강희제 시대에 쇠퇴하였다는 평가도 있지만, 홍타이지 시대와 순치제 초기 전성기 때보다는 규모가 작았지만, 옹정, 건륭 시대보다는 규모가 컸다. 또한, 투하이, 페이 양구, 장용, 주페이공, 시랑, 무전, 순시커, 왕징바오와 같은 장군들을 거느린 녹영군은 여전히 강력했다.
강희제는 선조들이 시행했던, 더 효율적이고 엄격했던 전통적인 군사 제도를 계속 사용했다. 이 제도에 따르면, 전투에서 홀로 돌아온 지휘관(모든 부하가 전사한 경우)은 사형에 처해졌고, 보병도 마찬가지였다. 이는 전투에서 유일하게 살아남는 자에게는 아무런 이득이 없기 때문에 지휘관과 병사 모두가 전투에서 용감하게 싸우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2. 8. 문화 발전과 기독교 전례 문제


강희제는 재위 기간 동안 한자 사전 편찬을 명했는데, 이는 강희자전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이는 많은 한족 학자 관료들이 처음에 그를 섬기기를 거부하고 명나라에 충성을 유지했기에, 황제가 그들의 지지를 얻으려는 시도로 여겨졌다. 그러나 강희제는 학자들에게 청 황실에 정식으로 봉사하라고 요청하지 않고 사전 작업에 참여하도록 설득함으로써, 그들이 점차 더 큰 책임을 맡게 되어 결국에는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게 만들었다.
1700년, 강희제의 명령으로 전국 고전 총서(그의 후계자인 옹정제의 치세에 완성됨)라는 방대한 백과사전과 당시의 편찬인 전당시의 편찬이 시작되었다.
강희제는 또한 서양 기술에 관심이 많았고 이를 중국에 들여오고자 했다. 이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강희제는 페르디난드 베르비스트와 같은 선교사들을 자주 만나거나, 카렐 슬라비체크처럼 황제의 명령으로 베이징의 첫 정밀 지도를 제작한 선교사들을 이용했다.
1711년부터 1723년까지, 민족 전파부에 의해 중국으로 파견된 이탈리아인 사제 마테오 리파는 청나라 궁정에서 화가이자 구리판화가로 일했다. 1723년 그는 사제가 되도록 훈련시켜 중국으로 선교사로 다시 보낼 네 명의 젊은 중국인 기독교인들과 함께 중국에서 나폴리로 돌아왔다. 이것은 중국에서 기독교의 전파를 돕기 위해 클레멘스 12세가 승인한 콜레지오 데이 치네시의 시작을 알렸다. 이 중국 연구소는 유럽 최초의 한학 학교였으며, 후에 이스티투토 오리엔탈레와 현재의 나폴리 동방 대학교로 발전하게 되었다.
강희제는 또한 서양 악기를 연주한 최초의 중국 황제였다. 토마스 페레이라가 그에게 하프시코드 연주법을 가르쳤고,[15] 그는 카렐 슬라비체크를 궁정 음악가로 고용했다. 슬라비체크는 스피넷을 연주했고, 나중에 황제 자신도 연주하게 되었다. 중국의 유명한 청화 백자는 아마도 강희제의 치세에 절정에 달했을 것이다.
강희제 치세 초기에 예수회는 황실에서 큰 역할을 맡았다. 그들의 천문학 지식을 바탕으로 황실 천문대를 운영했으며, 장-프랑수아 제르빌롱(Jean-François Gerbillon)과 토마스 페레이라(Thomas Pereira)는 네르친스크 조약 협상의 통역관으로 일했다. 강희제는 예수회의 공헌, 다양한 언어 해석 능력, 그리고 군사 무기 제조, 특히 화약 무기와 포병 분야에서 제공한 혁신에 감사했다.[16] 후자는 청나라가 동닝 왕국(Kingdom of Tungning)을 정복하는 데 기여했다.[17]
강희제는 예수회의 공손하고 눈에 띄지 않는 태도에도 호감을 가졌다. 그들은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엘리트 계층이 입는 비단 옷을 입었다.[18] 1692년 페레이라가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요청했을 때, 강희제는 이를 받아들여 관용의 칙령[19]을 발표했다. 이 칙령은 가톨릭을 인정하고, 교회 공격을 금지하며, 선교 활동과 중국인의 기독교 실천을 합법화했다.[20]
그러나 중국인 신자들이 전통적인 유교 의례와 조상 숭배에 참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발생했다. 예수회는 관용을 주장한 반면, 도미니크 수도회는 외국 종교의 "우상 숭배"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입장은 클레멘스 11세의 지지를 얻었고, 1705년 클레멘스 11세는 샤를-토마 마야르 드 투르농(Charles-Thomas Maillard de Tournon)을 강희제에게 교황 특사로 파견하여 중국 의례 금지를 통보했다.[21] 투르농을 통해 교황은 중국에 있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감독하기 위해 자신의 대표를 베이징에 파견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강희제는 베이징에서 오랫동안 거주해 온 예수회 신부 중 한 명이 관리하는 등 중국 내 선교 활동을 자신의 최종 감독하에 두고 싶어하여 이를 거부했다.[22]
1715년 3월 19일, 클레멘스 11세는 중국 의례를 공식적으로 비난하는 교황령 ''Ex illa die''를 발표했다. 이에 강희제는 기독교 선교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며 중국 내 기독교 선교를 공식적으로 금지했다.[23]
2. 8. 1. 학문
강희제는 소년 시절부터 여러 학문을 배웠는데, 특히 유학, 즉 성리학을 좋아하여 훌륭한 유학자로서 유학의 가르침에 따라 살고자 했다. 서예에도 뛰어나 소림사의 현판은 강희제가 직접 쓴 것이다. 강희제는 경연이나 조회 등에서 신하 및 유학자들과의 논의에서 이들을 압도했으며, 병중에도 책을 가까이 했다.[125] 강희제는 만주족임을 잊지 않으면서도, 중국 문화의 우수성을 인정하고 이를 만주족에게 융화시키려 했다.
강희제는 당나라·송나라 때 과거의 일부였던 전시(殿試)를 발전시킨 박학홍유과(博學鴻儒科)를 실시하여 많은 인재, 특히 강남의 한족 출신 학자들을 박학홍유로 등용하고, 이들 중 뛰어난 이들을 한림원 학사로 삼았다.[125] 이들을 통해 《명사》(明史)를 편찬하여 명 태조와 명 성조 때의 번창과 이후 황제들의 실정을 부각시켜 청나라가 명나라의 정통성을 계승했음을 알리려 했다. 또한, 《고금도서집성》(古今圖書集成), 《연감유함》(淵監類函), 《패문운부》(佩文韻府), 《역상고성》, 《수리정온》, 《전당시》 등 백과사전 편찬을 추진했다. 특히 1711년(강희 50년)에 시작하여 1716년(강희 55년)에 완성된 《강희자전》(康熙字典)은 진정경(陳廷敬) 등 박학홍유 수십 명이 수년간 노력한 결과물로, 4만 2천여 개의 한자가 수록되어 현대 중국어의 어법과 단어를 확립하는데 기여했다.
강희제는 한족 학자 관료들의 지지를 얻기 위해 한자 사전 편찬을 명했고, 이것이 강희자전으로 이어졌다. 강희제는 학자들에게 청 황실에 봉사하도록 직접 요청하지 않고 사전 작업에 참여하도록 설득하여 점차 관리의 직무를 수행하게 만들었다.
1700년, 강희제는 전국 고전 총서(옹정제 치세에 완성)와 당시 편찬인 전당시의 편찬을 명했다.
강희제는 서양 기술에도 관심이 많아 예수회 선교사들을 통해 이를 중국에 도입하려 했다. 페르디난드 베르비스트와 같은 선교사들을 만나거나, 카렐 슬라비체크처럼 황명으로 베이징의 첫 정밀 지도를 제작한 선교사들을 활용했다.
1711년부터 1723년까지 이탈리아인 사제 마테오 리파는 청나라 궁정에서 화가이자 구리판화가로 일했다. 1723년 그는 중국인 기독교인들과 나폴리로 돌아와 콜레지오 데이 치네시를 설립했는데, 이는 유럽 최초의 한학 학교이자 현재의 나폴리 동방 대학교로 발전했다.
강희제는 서양 악기를 연주한 최초의 중국 황제였다. 토마스 페레이라에게 하프시코드 연주법을 배웠고,[15] 카렐 슬라비체크를 궁정 음악가로 고용하여 스피넷을 연주하게 했으며, 황제 자신도 연주했다. 중국의 유명한 청화 백자는 강희제 치세에 절정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2. 8. 2. 예수회 선교사들과의 만남
강희제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신임하여 그들에게서 서양의 지리, 천문, 수학, 음악 등을 배웠고, 중국 황제 중 처음으로 피아노를 쳤으나 가톨릭교회의 교리는 전혀 배우려 하지 않았다 한다.[120] 이러한 이유로 선교사들의 중국 선교에 위기가 닥치기도 하였다.[121]아담 샬 폰 벨 신부를 시작으로 조아킴 부베, 마테오 리파, 페르디난드 페르비스트, 주세페 카스틸리오네, 장 당빌 등이 유럽에서 와서 새로운 학문을 강희제와 신하들에게 전래하였다. 페르비스트는 흠천감 장관을 역임하여 새로운 천문학을 중국에 전파하였고, 부베는 강희제에게 기하학을 가르쳐주었으며, 장 당빌은 정밀한 중국 지도인 《황여전람도》(皇與全覽圖)를 만들었다. 마테오 리파는 12년간 궁정에 있으면서 강희제에게 서양화를 그려 주었고, 1723년에 나폴리로 돌아와 나폴리 동부 대학에 ‘중국 학회’를 세웠는데, 이는 유럽 최초의 중국학 학회였다.[123] 다른 선교사들은 강희제를 ‘기독교만 믿으면 완전무결한 군주’라고 칭하였다.
강희제 치세 초기에 예수회는 황실에서 큰 역할을 맡았다. 천문학 지식을 바탕으로 황실 천문대를 운영했으며, 장-프랑수아 제르빌롱(Jean-François Gerbillon)과 토마스 페레이라(Thomas Pereira)는 네르친스크 조약 협상의 통역관으로 일했다. 강희제는 예수회의 공헌, 다양한 언어 해석 능력, 군사 무기 제조, 특히 화약 무기와 포병 분야에서 제공한 혁신에 감사했다.[16]
강희제는 예수회의 공손하고 눈에 띄지 않는 태도에도 호감을 가졌다. 그들은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엘리트 계층이 입는 비단 옷을 입었다.[18] 1692년 페레이라가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요청했을 때, 강희제는 이를 받아들여 관용의 칙령[19]을 발표했다. 이 칙령은 가톨릭을 인정하고, 교회 공격을 금지하며, 선교 활동과 중국인의 기독교 실천을 합법화했다.[20]
그러나 중국인 신자들이 전통적인 유교 의례와 조상 숭배에 참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발생했다. 예수회는 관용을 주장한 반면, 도미니크 수도회는 외국 종교의 "우상 숭배"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입장은 클레멘스 11세의 지지를 얻었고, 1705년 클레멘스 11세는 샤를-토마 마야르 드 투르농(Charles-Thomas Maillard de Tournon)을 강희제에게 교황 특사로 파견하여 중국 의례 금지를 통보했다.[21] 투르농을 통해 교황은 중국에 있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감독하기 위해 자신의 대표를 베이징에 파견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강희제는 베이징에서 오랫동안 거주해 온 예수회 신부 중 한 명이 관리하는 등 중국 내 선교 활동을 자신의 최종 감독하에 두고 싶어하여 이를 거부했다.[22]
1715년 3월 19일, 클레멘스 11세는 중국 의례를 공식적으로 비난하는 교황령 ''Ex illa die''를 발표했다. 이에 강희제는 기독교 선교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며 중국 내 기독교 선교를 공식적으로 금지했다.[23]
2. 8. 3. 가톨릭 허용과 금지
강희제는 선교사들을 황실 천문대 등의 요직에 두는 한편 초기에는 청나라에서 가톨릭교회의 포교를 허가하였다. 1692년(강희 31년)에 청나라의 어느 곳에서도 선교를 허락하고 조정의 가톨릭교회에 대한 박해를 엄금한다는 칙령을 내렸다.[20] 몽골 원정 때 말라리아에 걸렸다가 선교사들의 도움으로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강희제는 선교사들에게 더 많은 호의를 가지게 되었고, 북경 내성에 성당을 짓는 것을 허락하여 선교사들과 가톨릭교회를 적극적으로 보호하였다.강희제 치세 초기에 예수회는 황실에서 큰 역할을 맡았다. 그들의 천문학 지식을 바탕으로 황실 천문대를 운영했으며, 장-프랑수아 제르빌롱(Jean-François Gerbillon)과 토마스 페레이라(Thomas Pereira)는 네르친스크 조약 협상의 통역관으로 일했다.[16] 강희제는 예수회의 공헌, 다양한 언어 해석 능력, 그리고 군사 무기 제조, 특히 화약 무기와 포병 분야에서 제공한 혁신에 감사했다.[16] 후자는 청나라가 동닝 왕국(Kingdom of Tungning)을 정복하는 데 기여했다.[17]
강희제는 예수회의 공손하고 눈에 띄지 않는 태도에도 호감을 가졌다. 그들은 중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고, 엘리트 계층이 입는 비단 옷을 입었다.[18] 1692년 페레이라가 기독교에 대한 관용을 요청했을 때, 강희제는 이를 받아들여 관용의 칙령을 발표했다. 이 칙령은 가톨릭을 인정하고, 교회 공격을 금지하며, 선교 활동과 중국인의 기독교 실천을 합법화했다.[19]
그러나 그 뒤로 당시 선교지역의 전통을 존중하는 예수회를 제외한 근본주의 성향 가톨릭 선교사들이 중국의 조상 제사를 우상숭배라 비판하였고, 곧 이들 선교사들의 말을 들은 로마 교황청에서 중국의 전례(典禮)를 문제로 삼음으로서 중국의 전례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1704년(강희 43년) 교황 클레멘스 11세는 하느님을 상제(上帝)나 천주(天主)로 표기하는 것이 서양에서 뜻하는 조물주라는 말과 그 뜻이 서로 다르고, 매년 봄과 가을마다 지내는 공자의 제사와 조상의 제사가 우상 숭배이므로 중국의 전례를 금지한다는 회칙을 발표하고 1715년(강희 54년) 이를 재확인하였다.

중국인 신자들이 전통적인 유교 의례와 조상 숭배에 참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쟁이 발생했다. 예수회는 관용을 주장한 반면, 도미니크 수도회는 외국 종교의 "우상 숭배"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도미니크 수도회의 입장은 클레멘스 11세의 지지를 얻었고, 1705년 클레멘스 11세는 샤를-토마 마야르 드 투르농(Charles-Thomas Maillard de Tournon)을 강희제에게 교황 특사로 파견하여 중국 의례 금지를 통보했다.[21] 투르농을 통해 교황은 중국에 있는 예수회 선교사들을 감독하기 위해 자신의 대표를 베이징에 파견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강희제는 베이징에서 오랫동안 거주해 온 예수회 신부 중 한 명이 관리하는 등 중국 내 선교 활동을 자신의 최종 감독하에 두고 싶어하여 이를 거부했다.[22]
1715년 3월 19일, 클레멘스 11세는 중국 의례를 공식적으로 비난하는 교황령 ''Ex illa die''를 발표했다. 이에 강희제는 기독교 선교가 "문제를 일으키고 있다"며 중국 내 기독교 선교를 공식적으로 금지했다.[23] 강희제는 이에 대해 매우 불쾌하게 여겨 교황의 회칙을 가지고 온 특사인 교황청 소속 추기경을 체포하거나 본국으로 강제 송환하였다. 1706년(강희 45년) 강희제는 중국의 전통을 존중하는 예수회에 찬동하지 않는 선교사들을 모두 국외로 추방하였다. 그리고 이에 대한 특단의 상응 조치로 1721년(강희 60년) 교황의 회칙 수렴을 거부하고, 교황청이 더 많은 선교사들을 파견하고 백성들에게 선교·선동해서 청나라를 가톨릭 국가로 만들려 한다며 교황의 회칙을 비판하였고,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을 허가하는 대신 선교는 불법화하였다. 강희제가 붕어하고 난 다음에 1724년(옹정 2년),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제는 포교와 선교사들의 청나라 출입을 모두 불법화하고 예수회 선교사들 역시 당시 포르투갈인들이 많이 살고 있던 오문(澳門, 마카오)으로 추방하였다.
2. 8. 4. 문자의 옥
하지만, 강건성세 3대에 걸쳐 많은 한족 학자들을 숙청한 문자의 옥이 일어났는데, 이미 문자의 옥은 춘추 전국 시대 제나라 때부터 시작되었다.[126] 문자의 옥은 오랜 세월을 거쳐 계속되었는데 청나라에 들어와서는 도르곤을 황숙(皇叔)이 아닌 왕숙(王叔)으로 써서 도르곤과 당시 황제인 순치제를 왕(王)으로 모독한 이유로 한족 학자가 교살되었다.[126] 이들 학자는 만주족인 청나라의 중국 통치의 정통성을 강력히 부인하여 중국의 평화적이고 자애로운 통치를 지향하던 강희제의 분노를 샀다. 문자의 옥에 연루된 학자들은 대역죄로 다스려져 능지형을 받았다. 또한, 그 구족의 16세 이상의 남자는 모두 참수시키고 16세 이하의 남자와 모든 여자는 노비로 삼아 변방으로 보냈다.[126] 실제로 1711년 (강희 50년)에 대명세라는 한족 학자가 자신의 저서인 《남산집》(南山集)에 망한 명나라의 연호인 영력(永曆)을 사용하여,[127] 대명세의 삼족이 모두 처형된 사건이 발생하였다.[125]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는 옹정제와 건륭제를 거쳐 만주족에 비판적인 학자를 더욱 탄압하여 유배를 보내거나 처형하였고, 비판한 책들은 모두 불태워 버리거나 금서로 지정하였다.[125]2. 9. 내정
1677년(강희 16년) 강희제는 중국 전통의 고유 내각인 상서방(尙書房)을 개편하여 남서방을 설치하여 자신의 경연장으로 사용하였으며 전 황조인 명나라처럼 여러 명의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를 두어서 조정의 일을 의논하였다.[128] 이 내각대학사의 남서방은 훗날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제 때에 군기처로 발전하게 된다. 황궁의 살림을 아끼려고 명나라 때에 10만 명이나 되던 환관과 궁녀의 수를 400명으로 대폭 줄였으며, 비용 역시 명나라 시절에 비해 40분의 1로 줄였다.[128] 강희제 스스로 옷이 완전히 낡지 않은 이상 그 옷을 기워서라도 입을만큼 크게 검소하였고 자신의 침전에도 10명 안팎의 환관과 궁녀밖에 두지 않았다.

생활은 검소했고, 음식은 평범한 것으로 만족했다. 또 별궁을 건설할 때, 호화로움을 반영하는 것은 보이지 않았고, 검소했다. 의복도 표범 가죽과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이었다.[55]
강희제는 내정에도 힘을 쏟아 검약을 실천하고, 명나라 시대 하루 사용액을 1년치 궁정 경비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사용인 수를 1만 명 이상에서 수백 명으로 줄이고, 국가 낭비를 억제하여 재정이 풍족해지자 여러 차례 감세를 실시했다.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팔기군의 둔전지로 쓰던 권지(圈地)를 모두 몰수하고 그 땅을 모두 소작농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으며, 소작지와 소작농을 함께 매매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해 소작농들을 보호하였고, 백성들이 지주의 수탈 없이 편안히 살 수 있게 하였다.[129] 또한, 흉년이 들었을 때는 흉작의 정도에 따라 세금을 일부 감면, 또는 전원 감면하였다.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할 당시, 오랜 전쟁, 반란, 기근으로 중국의 인구는 1억 명 이하로 감소했으나, 강희제의 강력한 내정으로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면서 인구가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강희제가 사망할 무렵에는 인구가 1억 5천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으며, 이후 옹정제, 건륭제 시대를 거치며 인구는 계속 증가하였다.

강희제는 세수입을 전시(戰時)에도 늘리지 않아 민생이 전시에도 평상시를 유지하도록 하였고, 치세가 지속할 때마다 세금을 올리기는커녕 점점 감면하여 백성의 존경과 칭송을 한몸에 받았다. 1711년(강희 50년)에는 성세자생인정(盛世滋生人丁) 제도를 공포하여 성인의 인두세를 당시의 값에서 영원히 동결시키고 그 값을 받는 장정의 수 또한 2,450만 명으로 한정하고 그 이상은 받지 않겠다고 천명하였다. 또한, 이 제도가 시행된 지 얼마 안 가 지정은제를 북경과 하북성 일대에서 시행하기도 하였다. 대만 수복 이후에는 4개의 항구를 열어 대외 무역업을 활성화하여 많은 은자를 국고에 가져오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강희제의 선정은 청나라와 만주족에 대한 한족 백성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으며, 한족을 융화하기 위한 강희제의 피나는 노력에 자연히 한족 백성은 스스로 청나라를 따르게 되었다.
강희제는 재정 정책을 수정하여 세금을 줄였으나, 무역을 통해 은이 유입되었기 때문에 국고는 별 문제가 없었다.
강희제 재위 시절 국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668년(강희 7년): 14,930,000 냥
- 1692년: 27,385,631 냥
- 1702년~1709년: 약 50,000,000 냥 (변동 없음)
- 1710년: 45,880,000 냥
- 1718년: 44,319,033 냥
- 1720년: 39,317,103 냥
- 1721년(강희 60년): 32,622,421 냥

강희제 재위 후기에 국고가 감소한 이유는 군사 원정에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고 부패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강희제는 훗날 옹정제가 되는 넷째 아들 윤진에게 경제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했다.
강희제는 1684년(강희 23년)부터 1712년(강희 51년)까지 총 6번 남쪽으로 순행하며 장강 이남 지역 유지들의 신뢰를 얻고, 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웠다. 남방 순행 시 정해진 예산 외 비용은 내탕금으로 지출하여 백성들의 재산 착취를 막았다. 황하 치수와 조운 정비를 위해 여섯 차례에 걸친 남순의 모든 경비는 궁정에서 지출했다.
또한, 1711년 조사에서 등록된 성인 남자(16세~59세) 수에 맞춰 인두세(정은) 액수를 고정하고, 이후 등록된 성인 남자에 대한 인두세는 면제했다. 이는 전지전세제로 이어졌다.
문화적으로도 『강희자전』, 『대청회전』, 『역대제화』, 『전당시』, 『패문운부』 등을 편찬하게 하고, 『고금도서집성』의 편찬을 명령했다(완성은 옹정제 시대). 주자학에 경도하여 스스로 유학자에게 열심히 가르침을 받고, 피를 토할 정도로 독서를 멈추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강희제 시대부터 십철 중 한 사람으로 주자(주희)를 봉안하게 되었고, 『주자전서』, 『성리대전』 등 주자 관련 저서를 정리했다. 『명사』 편찬에도 힘을 쏟아 대부분을 완성했다(전권 완성은 건륭 4년(1739년)). 또한, 예수회 선교사 조아샹 부베 등에게 실측에 의한 최초의 중국 지도인 『황여전람도』를 작성하게 했다.
문자옥을 시작한 것도 그의 시대부터이며, 그 정책은 아들인 옹정제와 손자인 건륭제에게도 계승되었다.
2. 9. 1. 검소한 생활
1677년(강희 16년) 강희제는 중국 전통의 고유 내각인 상서방(尙書房)을 개편하여 남서방을 설치하여 자신의 경연장으로 사용하였으며 전 황조인 명나라처럼 여러 명의 내각대학사(內閣大學士)를 두어서 조정의 일을 의논하였다.[128] 이 내각대학사의 남서방은 훗날 강희제의 아들인 옹정제 때에 군기처로 발전하게 된다. 황궁의 살림을 아끼려고 명나라 때에 10만 명이나 되던 환관과 궁녀의 수를 400명으로 대폭 줄였으며, 비용 역시 명나라 시절에 비해 40분의 1로 줄였다. 강희제 스스로 옷이 완전히 낡지 않은 이상 그 옷을 기워서라도 입을만큼 크게 검소하였고 자신의 침전에도 10명 안팎의 환관과 궁녀밖에 두지 않았다.생활은 검소했고, 음식은 평범한 것으로 만족했다. 또 별궁을 건설할 때, 호화로움을 반영하는 것은 보이지 않았고, 검소했다. 의복도 표범 가죽과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이었다.[55]
2. 9. 2. 토지 개혁과 농민 감세
경제를 회복시키기 위하여 팔기군의 둔전지로 쓰던 권지(圈地)를 모두 몰수하고 그 땅을 모두 소작농들에게 무상으로 나누어 주었으며, 소작지와 소작농을 함께 매매하는 것을 법으로 금지해 소작농들을 보호하였고, 백성들이 지주의 수탈 없이 편안히 살 수 있게 하였다.[129] 또한, 흉년이 들었을 때는 흉작의 정도에 따라 세금을 일부 감면, 또는 전원 감면하였다.강희제는 내정에도 열심이었으며, 스스로 검약을 실천하여 명나라 시대 하루 사용액을 1년치 궁정 경비로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사용인 수를 1만 명 이상에서 수백 명으로 줄였다. 국가의 낭비를 억제하여 재정이 풍족해지자 여러 차례 감세를 실시했다. 또한, 인두세(丁銀)의 액수를 강희 50년(1711년) 조사에서 등록된 인정(16세부터 59세까지의 성년 남자) 수에 맞춰 고정하고, 1711년 이후 등록된 인정에 대한 인두세는 당분간 면제했다(성세자생인정). 이는 전지전세제로 이어진다.
2. 9. 3. 백성들의 재산권 보호
강희제는 1684년(강희 23년)부터 1712년(강희 51년)까지 총 6번 남쪽으로 순행하며 장강 이남 지역 유지들의 신뢰를 얻고, 학자들에게 학문을 배웠다. 남방 순행 시 정해진 예산 외 비용은 내탕금으로 지출하여 백성들의 재산 착취를 막았다.강희제는 내정에도 힘을 쏟아 검약을 실천하고, 명나라 시대 하루 사용액을 1년치 궁정 경비로 사용했다고 전해진다. 사용인 수를 1만 명 이상에서 수백 명으로 줄이고, 국가 낭비를 억제하여 재정이 풍족해지자 여러 차례 감세를 실시했다. 또한, 1711년 조사에서 등록된 성인 남자(16세~59세) 수에 맞춰 인두세(정은) 액수를 고정하고, 이후 등록된 성인 남자에 대한 인두세는 면제했다. 이는 전지전세제로 이어졌다. 황하 치수와 조운 정비를 위해 여섯 차례에 걸친 남순의 모든 경비는 궁정에서 지출했다.
2. 9. 4. 세금 감면
강희제는 세수입을 전시(戰時)에도 늘리지 않아 민생이 전시에도 평상시를 유지하도록 하였고, 치세가 지속할 때마다 세금을 올리기는커녕 점점 감면하여 백성의 존경과 칭송을 한몸에 받았다. 1711년(강희 50년)에는 성세자생인정(盛世滋生人丁) 제도를 공포하여 성인의 인두세를 당시의 값에서 영원히 동결시키고 그 값을 받는 장정의 수 또한 2,450만 명으로 한정하고 그 이상은 받지 않겠다고 천명하였다. 또한, 이 제도가 시행된 지 얼마 안 가 지정은제를 북경과 하북성 일대에서 시행하기도 하였다. 대만 수복 이후에는 4개의 항구를 열어 대외 무역업을 활성화하여 많은 은자를 국고에 가져오게 하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강희제의 선정은 청나라와 만주족에 대한 한족 백성의 인식을 바꾸어 놓았으며, 한족을 융화하기 위한 강희제의 피나는 노력에 자연히 한족 백성은 스스로 청나라를 따르게 되었다.
강희제 재위 시절 국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1668년(강희 7년): 14,930,000 냥
:1692년: 27,385,631 냥
:1702년~1709년: 이 기간 동안 거의 변동 없이 약 50,000,000 냥
:1710년: 45,880,000 냥
:1718년: 44,319,033 냥
:1720년: 39,317,103 냥
:1721년(강희 60년, 그의 재위 마지막 해에서 두 번째 해): 32,622,421 냥
강희제 재위 후기에 감소 추세를 보인 이유는 군사 원정에 대한 막대한 지출과 부패의 증가 때문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강희제는 용정황제가 될 용왕에게 경제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했다.
강희제는 내정에도 열심이었으며, 스스로 검약을 실천하여 명나라 시대 하루 사용액을 1년치 궁정 경비로 했다고 전해진다. 또한, 사용인 수를 1만 명 이상에서 수백 명으로 줄였다. 국가의 낭비를 억제하여 재정이 풍족해지자 여러 차례 감세를 실시했다. 또한, 인두세(丁銀)의 액수를 강희 50년(1711년) 조사에서 등록된 인정(16세부터 59세까지의 성년 남자) 수에 맞춰 고정하고, 1711년 이후 등록된 인정에 대한 인두세는 당분간 면제했다(盛世滋生人丁). 이는 전지전세제로 이어진다.
2. 9. 5. 재정 정책
강희제는 재정 정책을 수정하여 세금을 줄였으나, 무역을 통해 은이 유입되었기 때문에 국고는 별 문제가 없었다. 1668년에는 1,500만 냥, 1710년에는 5천만 냥이 넘는 은자가 있었으나, 1722년에는 7백만 냥도 채 되지 않았다. 이는 국고의 은이 대부분 군비로 사용되었고, 강희제가 늙어 정무를 보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강희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해 4남 옹친왕 윤진에게 조언을 구하고 새로운 정책을 찾도록 명했으나, 정책의 실현을 보지 못했다.강희제 재위 시절 국고 내용은 다음과 같다.
- 1668년(강희 7년): 14,930,000 냥
- 1692년: 27,385,631 냥
- 1702년~1709년: 약 50,000,000 냥 (변동 없음)
- 1710년: 45,880,000 냥
- 1718년: 44,319,033 냥
- 1720년: 39,317,103 냥
- 1721년(강희 60년): 32,622,421 냥
강희제 재위 후기에 국고가 감소한 이유는 군사 원정에 막대한 비용을 지출하고 부패가 증가했기 때문이다. 강희제는 훗날 옹정제가 되는 넷째 아들 윤진에게 경제 효율성을 높이는 방법에 대한 조언을 했다.
강희제는 검약을 실천하여 명나라 시대 하루 사용액을 1년치 궁정 경비로 사용했고, 사용인 수를 1만 명 이상에서 수백 명으로 줄였다. 국가 낭비를 억제하여 재정이 풍족해지자 여러 차례 감세를 실시했다. 또한, 1711년 이후 등록된 인정에 대한 인두세를 면제하는 정책(성세자생인정)을 실시했고, 이는 전지전세제로 이어졌다.
2. 9. 6. 인구 증가
1644년 명나라가 멸망할 당시, 오랜 전쟁, 반란, 기근으로 중국의 인구는 1억 명 이하로 감소했으나, 강희제의 강력한 내정으로 백성들의 삶이 안정되면서 인구가 다시 증가하기 시작했다. 강희제가 사망할 무렵에는 인구가 1억 5천만 명 이상으로 늘어났으며, 이후 옹정제, 건륭제 시대를 거치며 인구는 계속 증가하였다. 강희제는 인두세(丁銀)의 액수를 강희 50년(1711년) 조사에서 등록된 성년 남자(16세부터 59세까지) 수에 맞춰 고정하고, 1711년 이후 등록된 인정에 대한 인두세는 당분간 면제하는 정책(성세자생인정)을 실시했다. 이는 전지전세제로 이어졌다.2. 10. 황태자 책봉 문제
강희제는 훌륭한 정치를 펼쳤지만, 그의 자식들은 큰 그릇이 되지 못했다. 강희제는 황자들을 유학 사상으로 교육하려 했으나 대부분 실패했다. 제2황자이자 유일한 적자인 윤잉(胤礽)은 효성인황후의 소생으로, 1675년(강희 14년)에 황태자로 책봉되었다.[130] 이는 만주족의 전통을 깨고 한족의 전통을 도입한 것이었으나, 강희제는 유학을 숭상하여 이를 강행했다.강희제는 윤잉에게 역대 황제와 가문의 조상 위패를 모시는 사당인 봉선전 옆에 육경궁(毓慶宮)을 지어주고, 황포 착용, 가마나 말 탑승 허용, 많은 봉토와 식읍을 주는 등 특전을 베풀었다. 또한, 왕섬을 사부로 임명하여 엄격한 교육을 시켰다. 윤잉은 총명하여 4살에 한문을 쓰고 7살에 사서오경을 뗐으며, 강희제의 순행과 몽골 원정 때 황태자로서 조정을 장관, 대소사를 처리하여 정치 분야에서도 인정받았다.[131] 그러나 강희제는 윤잉에게 냉정하고 혹독하게 대했다.[131]
윤잉은 30대가 넘어서면서 주색잡기를 좋아하고 타락하기 시작했다.[131] 강희제는 다른 황자들에게 부서를 맡겨 신임을 얻게 했으나, 윤잉은 부서를 맡지 못하고 정신질환에 가까운 비행을 일삼았다. 조정은 황자들과 신료들의 야심으로 사분오열되었고, 윤시는 장자임에도 윤잉에게 밀리는 것에 불만을 품고 반윤잉 세력에 가담했다. 당시 윤잉을 포함한 9명의 황자가 파벌에 참여했다.

윤잉의 작은외조부 색액도(索額圖)는 태자당(太子黨)을 결성하고, 윤시와 그의 외숙부 납란명주(納蘭明珠)는 황장자당을 결성하여 대립했다. 태자당이 강희제 암살을 시도하자, 강희제는 1703년(강희 42년) 색액도를 사사하고 그 일파를 척결했다.[133] 1708년(강희 47년), 강희제는 윤잉을 폐위하고 서인으로 삼았다가, 1709년(강희 48년)에 복위시키고 납란명주를 하옥시켰다. 그러나 황장자당과 황팔자당이 연합하여 윤잉을 폐위시킬 음모를 꾸몄다.

윤잉은 강희제의 후궁인 서비 정씨를 건드리는 사건을 일으켰다. 1712년(강희 51년), 강희제가 순행을 떠난 사이 윤잉은 쿠데타를 기도했으나, 강희제가 돌아와 윤잉을 폐위시키고 함안궁에 가두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청나라는 멸망할 때까지 생전에 황태자를 책봉하지 않고, 죽은 황자를 추서만 했다. 강희제는 전위조서를 건청궁 ‘정대광명’(正大光明) 편액 뒤에 보관하는 저위비건법(儲位秘建法)을 시행했다.[134]
이후 형제들 간의 후계자 다툼이 발생했다. 윤시는 윤잉을 저주하고 자객을 보내는 등의 행위로 서인이 되었다. 8남 윤사가 신망을 받았으나, 실제로는 간교하고 이간질에 능했다. 강희제는 14남 윤제를 총애하여 무원대장군 작위와 병부 지휘권을 내렸다. 8남 윤사와 14남 윤제가 파벌을 형성하자, 4남 윤진도 파벌을 형성하여 대립했다. 강희제의 치세 동안에 발생한 이러한 왕자들 사이에 황위 계승을 둘러싼 갈등은 '구자탈적'() 사건으로 불린다.
강희제의 첫째는 강희제 6년(1667년)에 태어나 승서(承瑞)라 이름 지어졌으나 요절했고, 이후 세 아이도 모두 요절했다.[45] 다섯째 보청(保清)과 여섯째 윤능(允礽)만이 성인이 되었다.[46] 이아가 윤능 이후에 태어난 형제들은 “胤”으로 통일되었고(삼아가 인지, 사아가 인진……), 대아가 보청도 인티(胤禔)로 개명되었다. 사아가 인진(후의 옹정제)이 즉위하자 “胤”은 휘호를 피하다의 대상이 되어 “允”으로 고쳐졌다.[47]
강희제에게는 35명의 아들과 20명의 딸이 있었지만, 성인이 된 것은 아들이 24명, 딸이 8명이었다.[47] 그중 아홉 명의 황자가 황위 암투를 벌였고, 이를 제압하고 즉위한 것이 사아가 인진(후의 옹정제)이다. 이 암투는 “구자탈적”이라 불리고, 인진 즉위에 대한 여러 소문은 “옹정찬위”로 퍼졌다.
2. 11. 천수연과 노황제의 붕어
1722년(강희 61년) 5월 4일 강희제는 자신의 68번째 생일을 맞아 65세 이상의 만주족, 한족, 몽골족, 회족 현직 및 퇴직 관리들 1천여 명을 자금성 건청궁(乾淸宮)에 초대하여 천수연(千叟宴)을 베풀었다.[135] 천수연은 1713년(강희 52년)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행사로, 3000명 정도의 각기 다른 민족 출신의 신하들을 불러모아 강희 시대의 성공과 완성을 자축하였다. 이후 천수연은 건륭제도 여러 번 베푸는 등 궁중의 주요 행사가 되었다.[135]
천수연을 베푼 강희제는 곧 병에 걸렸고, 1722년(강희 61년) 12월 20일 이궁인 창춘원(暢春園)에서 69세의 나이로 붕어하였다.[135] 강희제의 정식 사인은 오한과 호흡 곤란이나, 일설에는 며칠 뒤 돌연사했다 하여 의혹이 제기되었다.[135] 강희제 붕어 당시 강희제를 모신 신하가 4남 윤진의 휘하이면서 외사촌동생이며 세 번째 황후인 효의인황후의 동생인 구문제독 겸 보군통령 융과다(隆科多)라는 점 때문에, 강희제가 윤진의 사주로 융과다에게 독살당했다는 설도 있다.[135][136]
강희제의 능호는 경릉(景陵)으로, 부황 순치제의 황릉인 효릉(孝陵) 옆 청동릉(淸東陵)의 하나이다. 묘호는 성조(聖祖), 시호는 인황제(仁皇帝)이다.[135] 정식 시호는 합천홍운문무예철공검관유효경성신중화공덕대성인황제(合天弘運文武睿哲恭儉寬裕孝敬誠信中和功德大成仁皇帝)이다.

강희제 붕어 후, 8황자 패륵 윤사, 9황자 패자 윤당, 10황자 돈군왕 윤아 등은 4남 윤진의 즉위에 반대하며 14황자 대장군왕 윤제를 후계자로 주장했으나, 강희제의 전위 조서에는 후계자가 4남 윤진으로 표기되어 있었다.[136] 강희제의 유조 내용 중 황위 승계에 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4황자 옹친왕 윤진은 유조에 따라 황위에 오를 명분을 세우고, 13남 윤상에게 풍대병영의 군사를 포섭·동원하도록 명령하여 반대 세력을 제거하고 황위에 올랐다. 이가 청의 제5대 황제인 옹정제이다.[136] 그러나 옹정제의 즉위 이유는 유조개위설, 개조찬위설, 무조탄위설 등 여러 설로 나뉘어 있다.[136]
2013년 9월 4일, 중국 랴오닝(遼寧)성 문서보관소는 강희제의 유조를 공개했는데, 이 유조는 만주어와 몽골어로도 쓰여 있어 한자 몇 글자를 고치는 유조 조작으로는 내용을 바꾸기 어렵게 되어 있다고 한다.[138] 이로써 옹정제가 황위찬탈 혐의를 벗었다.[138]
황태자 폐위 이후, 강희제는 정치 지형에 변화를 가져왔다. 13번째 황자 윤상은 가택연금되었고, 여덟 번째 황자 윤사는 모든 작위를 박탈당했다가 수년 후에 복권되었다.[27] 14번째 황자 윤제는 군사 원정에 파견되었다.[27]
1722년 12월 20일 저녁, 강희제는 죽기 직전 일곱 명의 아들을 침상으로 불렀다. 강희제가 사망한 후, 룡코도는 황제가 넷째 황자 윤진을 새 황제로 선택했다고 발표했다. 윤진은 즉위하여 옹정제로 알려졌다.[27] 강희제는 동릉에 안장되었다.[27]
강희제의 유서에 관한 전설에는 그가 윤제를 상속자로 선택했지만, 윤진이 유서를 위조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나 이는 역사가들에 의해 반박되어 왔다.[27] 이후 옹정제가 된 윤진은 많은 소문에 휘말렸고, 일부에서는 그가 려사낭(呂四娘)에게 암살당했다고 주장하지만, 학자들은 심각하게 다루지 않는다.[27]
강희제는 1683년[43] 대만을 병합하고,[43] 러시아 제국과의 청러 국경 분쟁에서 1689년 송고투를 파견하여 넬친스크 조약을 체결했다. 이는 양국이 대등한 입장에서 체결한 조약이었다.[43] 예수회 선교사 페르디난트 페르비스트(남회인)의 조언이 있었다고 전해진다.[43]
1670년대, 준가르부의 갈단 칸(갈얼단)이 오이라트의 패권을 장악하고, 몽골 할하부의 내분에 개입했다. 1693년, 할하의 여러 제후가 강희제에게 보호를 요청하자, 강희제는 갈단과 대결(청-준가르 전쟁)하여 1696년 갈단에게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다().[43] 갈단은 패주 중 사망했다.[43]
18세기 초, 달라이 라마 6세를 둘러싼 티베트의 내분에서 칭하이의 고시한 왕가의 방계 왕족 일부와 준가르의 체완랍탄이 동맹을 맺고, 1717년 준가르 군대가 티베트를 침공하여 라사를 제압하고, 을 살해했다. 강희제는 1718년 티베트에 출병했지만, 준가르 군대에 의해 궤멸당했다().[43] 강희제는 1720년 고시한 일족의 군대와 함께 진군, 준가르 군대를 격퇴했다.
강희제는 “고시한이 세운 법의 길”을 티베트의 정통적인 정체로 인정하고, 1721년 고시한 일족에게 칸 계승 후보자를 선출하도록 요구했지만, 고시한 일족은 내분으로 후보자를 선출할 수 없었다. 강희제는 라산을 계승할 칸을 책봉하지 않은 채 죽었고, 티베트의 전후 통치 처리는 옹정제에게 맡겨졌다.
강희 60년(1721년), 가 대만의 알리강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1722년 평정했다.[43] 같은 해 정월, 재위 61년 기념 연회에서 강희제는 신하들과 회상담을 나누었다.
강희 61년 11월 8일, 강희제는 찬바람을 쐬고 고열을 내, 11월 14일에 붕어했다. 순치제가 청을 중화 왕조로 만들었지만, 실질적으로 청을 전국 왕조로 만든 것은 강희제이다.[43]
1691년 국내에서 기독교를 이교로 취급하고 선교사를 추방하려는 움직임이 있었지만, 강희제는 1692년 “서양 사람들은 ... 포교 사업을 금지하지 않는다”고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1704년 로마 교황이 파견한 독로와의 면담에서 중국에 대한 ‘금약문’을 받고 태도가 바뀌었다. 로마 교황의 행위는 내정 간섭이라 분개하여, 중국 법률을 위반한 선교사들을 국외로 추방하고, 독로를 마카오로 추방하는 조치를 취했다.[44]
3. 통치 철학과 사상
강희제는 만주족 출신으로 한족의 유교 사상에 적극적이었지만, 만주족의 근본 또한 잊지 않았다. 유교를 숭상하면서도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그는, 정무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자주 사냥을 나갔다.[148] 피서산장 근처 황실 사냥터에서 대신들과 외국 사신들에게 사냥 솜씨를 뽐내며 자신이 문약한 군주가 아님을 과시했다.[148] 몽골 친정 역시 그의 강건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149] 강희제는 강궁을 자유자재로 다룰 만큼 활의 명수였으며, 노년기에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평생 호랑이 135마리, 멧돼지 132마리, 늑대 96마리, 표범 25마리, 곰 20마리, 원숭이 10마리를 잡았고, 하루에 토끼 310마리를 잡은 적도 있으며, 꿩, 너구리, 사슴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잡았다고 한다.[148]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사냥 실력이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54]

강희제는 청나라를 크게 통합한 황제였다. 명나라에서 청나라로의 이행은 리자청의 농민 반란군에 의해 수도 베이징이 함락되고, 1644년 만주족에 의해 다시 함락되어 다섯 살의 순치제가 옹립되는 대격변이었다. 1661년 순치제 사망 후 강희제가 계승할 무렵, 청나라는 중국 본토 정복을 거의 완료했다. 만주 귀족들은 이미 중국 제도를 사용하고 유교 이념을 습득하고 있었지만, 만주 문화도 유지하고 있었다. 강희제는 정복을 완료하고 군사적 위협을 진압했으며, 명나라의 중앙 정부 시스템을 부활시켰다.
강희제는 일찍 일어나 늦게 잠자리에 들며 매일 수많은 상소를 읽고 답변했으며, 신하들과 회의하고 접견을 가졌다. 전시에는 자정이 지나서까지 전선으로부터 온 상소를 읽거나, 준가르와의 갈등처럼 직접 전장에 나가기도 했다.[28]
강희제는 관료들을 우회하는 통신 시스템인 궁중 상소 시스템을 고안했다. 이는 황제와 지방 관리 간의 비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황제와 관리만 접근 가능한 잠긴 상자에 담겨 있었다. 이는 극심한 날씨 보고를 검열 없이 받기 위한 시스템으로 시작되었으나, 곧 범용 비밀 "뉴스 채널"로 발전했다. 여기서 군사적 사건을 다루는 대각원이 생겨났고, 대각원은 황제가 의장을 맡고 고위급 한족과 만주 가신들이 운영했다. 관리들은 대각원에서 배제되었고, 일상적인 행정만 담당하게 되었다.[29]
강희제는 유교 지식인들을 청나라 정부와 협력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1670년 성조유훈을 반포하는 등 유교적 가치관에 호소했고, 유교 학문을 장려하고 힘든 시기에도 3년마다 과거가 치러지도록 했다.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일부 학자들이 시험을 거부하자, 추천을 통해 치르는 특별 시험을 고안했다. 명실록, 강희자전, 구절 사전, 방대한 백과사전 및 중국 문학 편찬을 직접 후원하기도 했다. 그는 "성군"으로서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만주와 중국인 가정교사를 임명하여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중국 서예에 열중했다.[30]
준가르 몽골과의 전투에서 강희제는 효과적인 군 지휘관임을 보여주었다. 파이너에 따르면, 황제의 기록된 성찰을 통해 "하급 장병들과 얼마나 친밀하고 다정한 교류를 나누었는지, 장군들과의 관계가 얼마나 분별력 있고 능숙했는지"를 알 수 있다.[31]
만주 정복 후 중국에 평화가 돌아오자, 강희제는 먼저 감세를 실시한 후 1712년에는 토지세와 역을 완전히 동결할 수 있었다. 이는 국고에 부담을 주지 않았지만, 후대 황제들이 재정 시스템을 조정하고 근대화를 시도하는 것을 방해하여 결국 왕조는 이 재정 정책으로 고통을 받았다.[32][33] 그는 문(文)과 무(武)를 모두 중시하며 균형을 잃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했다.
3. 1. 유교 사상
강희제는 유교 사상으로 국가를 통치하려 했다.[139] 순치제와 옹정제가 라마교를 중요시한 반면, 강희제는 숭유억불을 국시로 삼았다. 그러나 그 자신도 불교를 믿어 불교를 그리 심하게 탄압하지는 않았다. 강희제는 군주가 모범을 보여야 백성이 군주를 믿고 따를 것이라 하여 백성을 위해 헌신하는 ‘섬기는 리더십’을 자신의 통치 철학으로 삼았다.[140] 제갈량의 후출사표의 한 구절인 ‘국궁진력’(鞠窮盡力)과 국궁진력한 후 ‘안거낙업’(安居樂業)을 자신의 평생의 좌우명으로 삼았다. 강희제는 1667년에 〈성유십육조(聖諭十六條)〉를 반포하여 백성들에게 이 내용을 토론하고 실천하도록 하였고, 옹정제는 〈성유광훈(聖諭廣訓)〉을 편찬하여 유교통치이념을 더욱 굳건히 하였다.[142][143]강희제는 만주 지배에 대한 깊은 의구심과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에도 불구하고, 유교 지식인들을 청나라 정부와 협력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1670년 성조유훈을 반포하는 등 유교적 가치관에 호소했다.[30] 그는 유교 학문을 장려하고 힘든 시기에도 3년마다 과거가 치러지도록 했다.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일부 학자들이 시험을 거부하자, 그는 추천을 통해 치르는 특별 시험을 고안했다. 그는 직접 명실록, 강희자전 편찬을 후원했다.[30]
3. 2. 소통하는 정치, 검소한 삶
강희제는 강화된 황권을 바탕으로 정치를 펼쳤으나, 재상 및 대신들과의 의논을 중시하고 한족 대신들의 의견을 수용하여 정책에 반영하는 등 소통하는 정치를 추구하였다. 특히 한족들의 궁핍한 삶을 이해하고 이들의 의견을 반영한 정책을 펼쳐 한족들이 청나라를 지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144] 프랑스의 예수회 선교사 부베는 루이 14세에게 "강희제는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군주입니다. 그럼에도 황제인 그의 생활용품들은 사치스러움과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다 못해 소박하기 그지없습니다. 역대 제왕들 가운데 전례없는 일입니다."라고 보고했다.[144] 강희제 스스로도 《근검록》에서 "모든 비용은 백성들의 피땀으로 얻어진 것이니 주인된 황제로서 절제하고 절제함은 당연한 것이 아닌가"라고 언급하며 검소한 생활을 강조했다.[144]강희제는 1717년(강희 56년)에 남긴 〈고별상유〉(告別上諭)에서 "한 가지 일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온 천하에 근심을 끼치고, 한 순간에 부지런하지 않으면 천추만대에 우환거리를 남긴다."라고 강조하며, "제왕이 천하를 다스림에 능력이 있는 자를 가까이 두고, 백성들의 세금을 낮추어 주어야 하며, 백성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고, 위태로움이 생기기 전에 나라를 보호하며, 혼란이 있기 전에 이를 먼저 파악하여 잘 다스리고, 관대하고 엄격함의 조화를 이루어 나라를 위한 계책을 도모해야 한다."라고 훈계하며 백성을 위한 정치를 강조했다.[145]
강희제는 일찍 일어나 늦게 잠자리에 들며 매일 수많은 상소를 처리하고 신하들과 회의하는 등 정무에 매우 열심이었다.[28] 전시에는 자정이 넘어서까지 상소를 읽거나 직접 전장에 나가기도 했다.[28] 준가르와의 갈등처럼 직접 전장에 나가기도 했다.[28] 그는 황제의 권력을 위협하는 관료들을 우회하는 통신 시스템인 궁중 상소 시스템을 고안하여 지방 관리들과 비밀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정보를 검열 없이 수집했다.[29] 이를 통해 대각원이 생겨났고, 대각원은 황제가 의장을 맡고 고위급 한족과 만주 가신들이 운영하여 군사적 사건을 다루었으며, 관리들은 배제되고 일상적인 행정만 담당하게 되었다.[29]
강희제는 유교 지식인들을 청나라 정부와 협력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1670년 성조유훈을 반포하고 유교 학문을 장려했으며, 어려운 시기에도 3년마다 과거를 치르도록 했다.[30]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으로 시험을 거부하는 학자들을 위해 특별 시험을 고안하기도 했다.[30] 명실록, 강희자전, 방대한 백과사전 및 중국 문학 편찬을 후원하며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중국 서예에 열중하는 등 "성군"의 이미지를 구축했다.[30] 준가르 몽골과의 전투에서는 효과적인 군 지휘관의 면모를 보였으며, 하급 장병들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장군들과 유능하게 소통했다.[31]
만주 정복 후 평화가 찾아오고 인구와 토지 경작이 증가함에 따라 강희제는 감세를 실시하고 1712년에는 토지세와 역을 완전히 동결했다.[32][33] 이는 국고에 부담을 주지 않았지만, 후대 황제들이 재정 시스템을 조정하고 근대화를 시도하는 것을 방해하여 결국 왕조가 재정 정책으로 고통받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32][33]
강희제는 평생에 호랑이 135마리, 곰과 표범 30마리, 늑대 96마리를 사냥했다는 일화가 전해질 정도로 사냥을 즐겼다.[54] 외모는 균형 잡힌 용모에 둥근 얼굴, 천연두 흉터, 큰 눈, 작고 약간 매부리코를 지녔으며, 민첩하고 통찰력, 지성, 기억력이 뛰어난 재능을 지녔다고 평가받는다.[55] 위엄 있는 외모는 아니었지만 고귀한 취향과 취미를 지녀 황제에 걸맞다는 칭송을 받았다.[55] 학문을 좋아하여 공자의 저서와 고전을 암기하고 서양 학문에도 관심을 가졌다. 페르디난트 베르비스트와 탕광시엔을 통해 서양 천문학의 정확성을 확인하기도 했다.
오삼계 등 한족의 반란에 직면했을 때는 불철주야 회의를 열고 명령을 내려 적절히 대응하여 한족을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 몽골 왕의 반란 시도에는 즉시 군대를 파견하여 진압하고 왕족을 포로로 잡았다. 흉년에는 세금을 면제하고 창고를 개방하여 백성을 구제하고, 빈민을 고용하여 농민 반란을 미연에 방지했다. 강희제는 순행을 통해 백성과 관리를 시찰하며 낮은 신분의 사람들과도 소통하고 관리들의 만족도를 확인했다.
강희제는 검소한 생활을 실천하며 평범한 음식으로 만족하고 별궁 건설에도 검소함을 유지했다. 황자들의 교육에도 열심이어서 기마술, 궁술, 총술을 가르치고 노동과 고생을 경험하게 하며 훈육했다. 그러나 명나라 잔당 사냥을 피해 75세까지 살아남았던 숭정제의 다섯째 아들 주자환을 능지처사로 처형하고 일족을 몰살하여 명나라 황통을 끊은 것은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56]
3. 3. 성실한 정무와 학문
강희제는 하루에 300개에서 400개에 달하는 상소문, 보고서, 비망록 등을 모두 읽고 결재했으며, 상소에 대한 비답도 직접 작성했다. 삼번의 난 때는 하루에 500여 개의 문서를 처리하고 밤을 새우는 경우도 있었다.[146] 전시에도 하루 200개 이상의 문서를 결재하는 성실함을 보였다.[146] 평상시에도 일찍 일어나 늦게 잠자리에 들었고, 매일 수많은 상소를 읽고 답변했으며, 신하들과 회의하고 접견을 가졌다.[28] 전시에는 자정이 지나서까지 전선으로부터 온 상소를 읽거나, 준가르와의 갈등처럼 직접 전장에 나가기도 했다.[28]강희제는 학식이 높아 경연에서 재상들과 대신들이 그의 질문에 제대로 대답하지 못할 정도였다. 수학 등 서양 학문까지 공부하여, 당시 루이 14세 치하 프랑스 왕족들의 평균 학식보다 훨씬 우월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47]
강희제는 황제의 권력을 위협하는 관료들을 우회하는 통신 시스템을 고안했다. 궁중 상소 시스템은 황제와 지방의 신뢰할 수 있는 관리들 사이에 비밀 메시지를 전달하는 방식이었으며, 메시지는 황제와 관리만 접근 가능한 잠긴 상자에 담겨 있었다. 이 시스템은 극심한 날씨 보고를 검열 없이 받기 위해 시작되었으나, 곧 범용 비밀 "뉴스 채널"로 발전했다. 여기서 군사적 사건을 다루는 대각원이 생겨났고, 황제가 의장을 맡고 고위급 한족과 만주 가신들이 운영했다. 관리들은 대각원에서 배제되었고, 일상적인 행정만 담당하게 되었다.[29]
강희제는 유교 지식인들을 청나라 정부와 협력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1670년 성조유훈을 반포하는 등 유교적 가치관에 호소했으며, 유교 학문을 장려하고 3년마다 과거가 치러지도록 했다.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일부 학자들이 시험을 거부하자, 추천을 통해 치르는 특별 시험을 고안했다. 그는 명실록, 강희자전, 구절 사전, 방대한 백과사전 및 중국 문학 편찬을 직접 후원했다. "성군"으로서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만주와 중국인 가정교사를 임명하여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중국 서예에 열중했다.[30]
준가르 몽골과의 전투에서 강희제는 효과적인 군 지휘관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황제 자신의 기록된 성찰을 통해 "하급 장병들과 친밀하고 다정한 교류를 나누었는지, 장군들과의 관계가 분별력 있고 능숙했는지"를 알 수 있다.[31]
만주 정복 후 중국에 평화가 찾아오고 적대 행위가 감소하면서 인구, 토지 경작, 농업 기반 세수입이 급증했다. 이에 강희제는 먼저 감세를 실시한 후 1712년에는 토지세와 역을 완전히 동결했다. 이는 국고에 부담을 주지 않았지만, 세율이 영구히 유지되어 후대 황제들이 재정 시스템을 조정하고 근대화를 시도하는 것을 방해했고, 결국 왕조는 이 재정 정책으로 고통을 받았다.[32][33]
3. 4. 무에도 능한 군주
만주족 출신인 강희제는 한족의 사상인 유교에 적극적이었지만, 만주족의 근본 또한 잊지 않았다. 유교를 숭상하면서도 독실한 불교 신자였던 그는, 정무로 인한 스트레스를 해소하기 위해 자주 사냥을 나갔다.[148] 피서산장 근처 황실 사냥터에서 대신들과 외국 사신들에게 사냥 솜씨를 뽐내며 자신이 문약한 군주가 아님을 과시했다.[148] 몽골 친정 역시 그의 강건함을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149] 강희제는 강궁을 자유자재로 다룰 만큼 활의 명수였으며, 노년기에 스스로 밝힌 바에 따르면 평생 호랑이 135마리, 멧돼지 132마리, 늑대 96마리, 표범 25마리, 곰 20마리, 원숭이 10마리를 잡았고, 하루에 토끼 310마리를 잡은 적도 있으며, 꿩, 너구리, 사슴은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잡았다고 한다.[148] 앞서 언급된 바와 같이 사냥 실력이 매우 뛰어났음을 알 수 있다.[54] 강희제는 문(文)과 무(武)를 모두 중시하며 균형을 잃지 않고 인재를 등용하여 태평성대를 이룩했다.강희제는 청나라를 크게 통합한 황제였다. 명나라에서 청나라로의 이행은 리자청의 농민 반란군에 의해 수도 베이징이 함락되고, 1644년 만주족에 의해 다시 함락되어 다섯 살의 순치제가 옹립되는 대격변이었다. 1661년 순치제 사망 후 강희제가 계승할 무렵, 청나라는 중국 본토 정복을 거의 완료했다. 만주 귀족들은 이미 중국 제도를 사용하고 유교 이념을 습득하고 있었지만, 만주 문화도 유지하고 있었다. 강희제는 정복을 완료하고 군사적 위협을 진압했으며, 명나라의 중앙 정부 시스템을 부활시켰다.
강희제는 일찍 일어나 늦게 잠자리에 들며 매일 수많은 상소를 읽고 답변했으며, 신하들과 회의하고 접견을 가졌다. 전시에는 자정이 지나서까지 전선으로부터 온 상소를 읽거나, 준가르와의 갈등처럼 직접 전장에 나가기도 했다.[28]
강희제는 관료들을 우회하는 통신 시스템인 궁중 상소 시스템을 고안했다. 이는 황제와 지방 관리 간의 비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황제와 관리만 접근 가능한 잠긴 상자에 담겨 있었다. 이는 극심한 날씨 보고를 검열 없이 받기 위한 시스템으로 시작되었으나, 곧 범용 비밀 "뉴스 채널"로 발전했다. 여기서 군사적 사건을 다루는 대각원이 생겨났고, 대각원은 황제가 의장을 맡고 고위급 한족과 만주 가신들이 운영했다. 관리들은 대각원에서 배제되었고, 일상적인 행정만 담당하게 되었다.[29]
강희제는 유교 지식인들을 청나라 정부와 협력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1670년 성조유훈을 반포하는 등 유교적 가치관에 호소했고, 유교 학문을 장려하고 힘든 시기에도 3년마다 과거가 치러지도록 했다.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일부 학자들이 시험을 거부하자, 추천을 통해 치르는 특별 시험을 고안했다. 명실록, 강희자전, 구절 사전, 방대한 백과사전 및 중국 문학 편찬을 직접 후원하기도 했다. 그는 "성군"으로서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만주와 중국인 가정교사를 임명하여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중국 서예에 열중했다.[30]
준가르 몽골과의 전투에서 강희제는 효과적인 군 지휘관임을 보여주었다. 파이너에 따르면, 황제의 기록된 성찰을 통해 "하급 장병들과 얼마나 친밀하고 다정한 교류를 나누었는지, 장군들과의 관계가 얼마나 분별력 있고 능숙했는지"를 알 수 있다.[31]
만주 정복 후 중국에 평화가 돌아오자, 강희제는 먼저 감세를 실시한 후 1712년에는 토지세와 역을 완전히 동결할 수 있었다. 이는 국고에 부담을 주지 않았지만, 후대 황제들이 재정 시스템을 조정하고 근대화를 시도하는 것을 방해하여 결국 왕조는 이 재정 정책으로 고통을 받았다.[32][33]
외모는 키는 중상급이고 마른 체형이었지만, 균형 잡힌 용모를 지녔다. 둥근 얼굴에 천연두 흉터가 있었고, 눈은 보통 한족보다 크고, 코는 작고 약간 매부리코였으며, 코끝으로 갈수록 볼록했다.[55] 민첩하고 통찰력, 지성,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강인함과 강한 의지력을 지녔다. 위엄 있는 외모는 아니었지만, 고귀한 취향과 취미를 지녀 황제에 걸맞다고 극찬받았다.[55]
학문을 매우 좋아하여 공자의 저서 대부분과 다른 많은 고전을 암기했다. 서양 학문에도 깊은 관심을 가지고 기하학·과학·천문학을 잘 배웠다. 페르디난트 베르비스트와 탕광시엔을 임시 회의에 불러 중국 천문학과 서양 천문학 중 어느 것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 질문했고, 서양 천문학의 정확성을 증명하게 했다.
오삼계 등 많은 한족의 반란에 시달렸지만, 불철주야로 회의를 열고 명령을 내려 적절한 대응을 했기 때문에 수적으로 우세한 한족을 회유하는 데 성공했다. 몽골의 왕이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즉시 베이징과 랴오닝성의 군대를 합류시킨 혼성군을 보내 진압했다. 몽골의 왕은 자군의 상황과 병력 집중, 이웃 나라의 협력도 얻지 못하고 패배했으며, 형제와 왕자가 포로가 되었다. 흉년이 들자 여러 성의 세금을 면제하고 창고를 개방했으며, 피해가 큰 지역에는 쌀과 금을 분배했다. 또한 육부를 신축하기 위해 베이징에 모여 있던 빈민을 고용하여 그들의 곤궁을 구제함으로써, 중국 역사에서 흔히 발생했던 농민 반란을 미연에 방지하는 데 성공했다.
강희제는 가끔 순행하여 국민과 관리를 시찰했는데, 그때 신분이 낮은 사람도 곁에 갈 수 있었고, 그들에게 친절하고 자애로운 태도를 취했다. 그리고 관리들에게 만족하는지 물었다.
생활은 검소했고, 음식은 평범한 것으로 만족했다. 별궁을 건설할 때도 호화로움을 추구하지 않고 검소했다. 의복도 표범 가죽과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것이었다. 황자들의 교육에도 열심이었고, 걷기 시작하자마자 기마술·궁술·총술을 가르쳤다. 또한 황자들이 과보호되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노동과 고생을 주고, 질이 나쁜 고기를 먹도록 훈육했다.
명나라 잔당 사냥을 피해 75세까지 살아남았던 숭정제의 다섯째 아들 주자환을 "반란을 일으킨 사실은 없지만, 반란의 마음을 품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朱某雖無謀反之事,未嘗無謀反之心)"라 하여 능지처사로 처형하고, 그의 아들과 손자를 포함한 일족을 모두 처형하여 명나라의 황통을 끊어냈다.[56] 이는 60년 이상 은거하던 전 왕조의 후손을 멸족시킨 오점으로 남게 되었다.
4. 영향과 평가
강희제는 청나라를 크게 통합한 황제였다. 명나라에서 청나라로의 이행은 대격변이었는데, 그 중심 사건은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에 의해 수도 베이징이 함락되고, 1644년에는 만주족에 의해 함락되어 다섯 살의 순치제가 옹립된 것이었다. 1661년 순치제가 사망하고 강희제가 계승할 무렵에는 중국 본토에 대한 청나라의 정복이 거의 완료되었다. 선도적인 만주 귀족들은 이미 중국 제도를 사용하고 유교 이념을 습득하고 있었지만, 서로 간에는 만주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강희제는 정복을 완료하고 모든 중요한 군사적 위협을 진압했으며, 중요한 수정을 가하면서 명나라로부터 이어받은 중앙 정부 시스템을 부활시켰다.
강희제는 일벌레였으며, 일찍 일어나 늦게 잠자리에 들었고, 매일 수많은 상소를 읽고 답변했으며, 신하들과 회의하고 접견을 가졌다. 그리고 이것은 평상시의 일이었다. 전시에는 자정이 지나서까지 전선으로부터 온 상소를 읽거나, 준가르와의 갈등처럼 직접 전장에 나가기도 했다.[28]
강희제는 황제의 권력을 빼앗으려는 경향이 있는 관료들을 우회하는 통신 시스템을 고안했다. 이 궁중 상소 시스템은 황제와 지방의 신뢰할 수 있는 관리들 사이에 비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포함했는데, 메시지는 황제와 관리만 접근할 수 있는 잠긴 상자에 담겨 있었다. 이것은 황제가 자신의 통치에 대한 신의 의견으로 여긴 극심한 날씨 보고를 검열 없이 받기 위한 시스템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곧 범용 비밀 "뉴스 채널"로 발전했다. 여기에서 특히 군사적 사건을 다루는 대각원이 생겨났다. 대각원은 황제가 의장을 맡았고, 고위급 한족과 만주 가신들이 운영했다. 이 대각원으로부터 관리들은 배제되었고, 일상적인 행정만 담당하게 되었다.[29]
강희제는 만주 지배에 대한 깊은 의구심과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에도 불구하고, 유교 지식인들을 청나라 정부와 협력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1670년 성조유훈을 반포하는 등 유교적 가치관에 호소했다. 그는 유교 학문을 장려하고 힘든 시기에도 3년마다 과거가 치러지도록 했다.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일부 학자들이 시험을 거부하자, 그는 추천을 통해 치르는 특별 시험을 고안했다. 그는 직접 명실록, 강희자전, 구절 사전, 방대한 백과사전 및 더욱 방대한 중국 문학 편찬을 후원했다. 그는 "성군"으로서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만주와 중국인 가정교사를 임명하여 그들과 함께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중국 서예에 열중했다.[30]
준가르 몽골과의 전투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한 유일한 군사 작전에서 강희제는 효과적인 군 지휘관임을 보여주었다. 파이너에 따르면, 황제 자신의 기록된 성찰을 통해 "하급 장병들과 얼마나 친밀하고 다정한 교류를 나누었는지, 장군들과의 관계가 얼마나 분별력 있고 능숙했는지"를 알 수 있다.[31]
만주 정복 후 중국에 평화가 돌아옴에 따라 적대 행위가 감소하고 인구, 토지 경작, 농업 기반 세수입이 급증함에 따라 강희제는 먼저 감세를 실시한 후 1712년에는 토지세와 역을 완전히 동결할 수 있었다. 이는 국고에 부담을 주지 않았지만(하지만 이로 인해 세율이 영구히 유지되어 후대 황제들이 재정 시스템을 조정하고 근대화를 시도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결국 왕조는 이 재정 정책으로 고통을 받았다).[32][33]
4. 1. 사후의 영향과 업적
오늘날 역사학자들은 대부분 강희제를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강희제의 훌륭한 정치는 후대에게 큰 본보기가 되었다.[149] 아들인 옹정제는 부황 강희제가 이룩한 태평성대에서 내치를 더욱 다져서 청나라를 안정시켰으며, 강희제의 손자이자 옹정제의 아들인 건륭제는 조부인 강희제처럼 내정에 신경을 썼지만 역시 외정에도 적극적이어서 위구르와 준가르를 완전히 복속시켰다. 강희제에서 건륭제에 이르는 이 시기를 흔히 강건성세라 한다.[149] 건륭제는 강희제를 평생 모범으로 삼고 감히 조부를 뛰어넘을 수 없다하여 강희제의 재위 기간인 61년보다 적은 재위 60년 만에 퇴위를 하였다.[150]강희제의 정치는 백성들을 중심으로 그에 맞는 정치를 펼치면 역사 또한 그를 성군으로 평가하게 되는 좋은 예였다. 강희제의 붕어가 세상에 알려졌을 때, 당시 많은 백성들과 대신들이 부음을 접하자마자 바로 무릎을 꿇고 엎드려 대성통곡을 하였다 하는데, 이것도 바로 그가 성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그의 정책 역시 강건성세 시기에는 대체로 변하지 않았으나, 점차 해외 열강들이 청나라의 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하면서 강희제가 추진하고 이룩한 정책들은 결국 폐기되었다.
청나라 이전에 한족을 제외한 다른 유목 민족들이 중국을 통치할 때, 그들은 언제나 백성들에게 폭압을 가하였으나, 강희제는 오히려 방법을 달리하였다. 그는 언제나 자신보다는 공익이 먼저였고 자신의 재위 기간인 61년간의 기나긴 희생으로 당시 백성들의 삶은 그 뒤로 70여 년간 윤택해지고 안정되었다.[151] 강희제는 당시 아직까지 중국 곳곳에서 반대가 심하였던 만주족의 황조를 굳건히 다졌고 만주족들에게 한족의 문화를 대거 소개함으로써 만주족의 지식과 예절 수준을 높였으나, 훗날 만주족들은 너무 한족의 문화에 동화되어 자신의 정체성과 전통을 거의 잃어버리고 만다. 또한 청나라 멸망 때에는 강희제의 동화 정책 때문이었는지, 만주어를 잘 아는 만주인은 흔치 않았다 한다. 그는 평생 배움에 뜻을 두어 학식 역시 뛰어났다. 명나라의 역사서인 《명사》를 편찬하여 명나라의 정통성을 계승하였으며, 오배와 오삼계 등의 내부의 반대자를 처단하고 황제권을 강화하여 자신의 오랜 재위 기간 동안 신하들이 함부로 넘보지 못할 절대 황제권을 확립하였다.
강희제는 황하와 장강을 보수하여 근처 백성들의 근심을 덜어주었다. 당시까지도 이 두 강은 여름에 계속 범람하여 많은 인명 피해를 냈다. 그러나 재빨리 이에 대한 대책을 마련한 후 완성시키자 한 해에 범람 횟수가 아예 없거나 그 전에 비하여 현저히 줄어들었다. 또한 강희제는 자금성에만 머무르지 않고 중국 곳곳을 돌아다니고 장강 이남으로 순행을 많이 떠나 북방과 남방의 교류를 활발히 만들었으며 러시아와 네르친스크 조약을 맺어 청나라의 동북방에 있던 소요를 잠잠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강희제는 자신이 실정한 것이 있으면 그것을 겸허히 수렴하여 즉시 시행하였고 황제로서의 책임을 솔선수범하여 군주의 모범을 보였고 스스로 자신에게 맞는 통치 환경을 조금씩 만들어나갔다.[151]
강희제는 청나라를 크게 통합한 황제였다. 명나라에서 청나라로의 이행은 대격변이었는데, 그 중심 사건은 이자성이 이끄는 농민 반란군에 의해 수도 베이징이 함락되고, 1644년에는 만주족에 의해 함락되어 다섯 살의 순치제가 옹립된 것이었다. 1661년 순치제가 사망하고 강희제가 계승할 무렵에는 중국 본토에 대한 청나라의 정복이 거의 완료되었다. 선도적인 만주 귀족들은 이미 중국 제도를 사용하고 유교 이념을 습득하고 있었지만, 서로 간에는 만주 문화를 유지하고 있었다.
강희제는 일벌레였으며, 일찍 일어나 늦게 잠자리에 들었고, 매일 수많은 상소를 읽고 답변했으며, 신하들과 회의하고 접견을 가졌다. 그리고 이것은 평상시의 일이었다. 전시에는 자정이 지나서까지 전선으로부터 온 상소를 읽거나, 준가르와의 갈등처럼 직접 전장에 나가기도 했다.[28]
강희제는 황제의 권력을 빼앗으려는 경향이 있는 관료들을 우회하는 통신 시스템을 고안했다. 이 궁중 상소 시스템은 황제와 지방의 신뢰할 수 있는 관리들 사이에 비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을 포함했는데, 메시지는 황제와 관리만 접근할 수 있는 잠긴 상자에 담겨 있었다. 이것은 황제가 자신의 통치에 대한 신의 의견으로 여긴 극심한 날씨 보고를 검열 없이 받기 위한 시스템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곧 범용 비밀 "뉴스 채널"로 발전했다. 여기에서 특히 군사적 사건을 다루는 대각원이 생겨났다. 대각원은 황제가 의장을 맡았고, 고위급 한족과 만주 가신들이 운영했다. 이 대각원으로부터 관리들은 배제되었고, 일상적인 행정만 담당하게 되었다.[29]
강희제는 만주 지배에 대한 깊은 의구심과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에도 불구하고, 유교 지식인들을 청나라 정부와 협력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1670년 성조유훈을 반포하는 등 유교적 가치관에 호소했다. 그는 유교 학문을 장려하고 힘든 시기에도 3년마다 과거가 치러지도록 했다.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일부 학자들이 시험을 거부하자, 그는 추천을 통해 치르는 특별 시험을 고안했다. 그는 직접 명실록, 강희자전, 구절 사전, 방대한 백과사전 및 더욱 방대한 중국 문학 편찬을 후원했다. 그는 "성군"으로서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만주와 중국인 가정교사를 임명하여 그들과 함께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중국 서예에 열중했다.[30]
준가르 몽골과의 전투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한 유일한 군사 작전에서 강희제는 효과적인 군 지휘관임을 보여주었다. 파이너에 따르면, 황제 자신의 기록된 성찰을 통해 "하급 장병들과 얼마나 친밀하고 다정한 교류를 나누었는지, 장군들과의 관계가 얼마나 분별력 있고 능숙했는지"를 알 수 있다.[31]
만주 정복 후 중국에 평화가 돌아옴에 따라 적대 행위가 감소하고 인구, 토지 경작, 농업 기반 세수입이 급증함에 따라 강희제는 먼저 감세를 실시한 후 1712년에는 토지세와 역을 완전히 동결할 수 있었다. 이는 국고에 부담을 주지 않았지만(하지만 이로 인해 세율이 영구히 유지되어 후대 황제들이 재정 시스템을 조정하고 근대화를 시도하는 것을 방해함으로써 결국 왕조는 이 재정 정책으로 고통을 받았다).[32][33]
4. 2. 비판
강희제는 청나라의 전성기를 이끌었지만, 몇 가지 비판점도 존재한다. 강희제는 문자의 옥을 일으켜 한족 학자들을 대거 숙청하고 문화를 후퇴시켰다는 비판을 받는다.[136] 또한, 수녀제(秀女制)를 유지하여[152] 많은 자식을 두었으나, 자식 교육에 실패하여 황위 쟁탈전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고 편애를 일삼아 훗날 옹정제 초기의 피비린내 나는 골육상잔의 원인이 되었다는 비판도 있다.[136] 강희제는 유교 교육을 시켰지만, 황자들은 한족 문화에 완전히 동화되지 않아 가장 유능한 아들이 황위를 계승하는 전통을 따랐다.강희제는 황태자 윤잉에게 큰 기대를 걸었으나, 윤잉이 성인이 되면서 기대가 작아졌다.[153] 강희제는 많은 황자를 요직에 임명했지만, 정작 황태자인 윤잉에게는 대리청정만 맡겼고, 황자들은 윤잉의 명령을 듣지 않았다. 이로 인해 윤잉은 압박감을 느끼고 비정상적인 기행을 보였다.[153] 또한 평생 동안 정무에 매진하여 자식들을 제대로 돌볼 여가가 없었고, 강희제와 자식들 간의 소통은 원만하지 않았다.
일부 학자들은 강희제의 선정에 대해 백성을 ‘생각했다’는 것이지, 진정으로 백성을 ‘사랑한다’는 애민(愛民)의 마음은 없었다고 비판한다.[133]
강희제는 일벌레로, 매일 수많은 상소를 읽고 답변했으며, 신하들과 회의하고 접견을 가졌다. 전시에는 자정이 지나서까지 상소를 읽거나 직접 전장에 나가기도 했다.[28] 강희제는 궁중 상소 시스템을 고안하여 황제와 지방의 신뢰할 수 있는 관리들 사이에 비밀 메시지를 전달했다. 이 시스템은 황제가 자신의 통치에 대한 신의 의견으로 여긴 극심한 날씨 보고를 검열 없이 받기 위한 것이었으나, 곧 범용 비밀 "뉴스 채널"로 발전했다. 대각원은 군사적 사건을 다루었으며, 황제가 의장을 맡았고, 고위급 한족과 만주 가신들이 운영했다. 관리들은 대각원에서 배제되었고, 일상적인 행정만 담당하게 되었다.[29]
강희제는 유교 지식인들을 청나라 정부와 협력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1670년 성조유훈을 반포하고, 유교 학문을 장려하고, 과거가 치러지도록 했다. 명나라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일부 학자들이 시험을 거부하자, 특별 시험을 고안했다. 명실록, 강희자전, 중국 문학 편찬을 후원했다. 그는 "성군"으로서의 이미지를 높이기 위해 만주와 중국인 가정교사를 임명하여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중국 서예에 열중했다.[30]
강희제는 준가르 몽골과의 전투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효과적인 군 지휘관임을 보여주었다.[31] 만주 정복 후 중국에 평화가 돌아오자, 강희제는 1712년에 토지세와 역을 완전히 동결했다. 이는 국고에 부담을 주지 않았지만, 후대 황제들이 재정 시스템을 조정하고 근대화를 시도하는 것을 방해했다.[32][33]
4. 3. 현대의 영향과 평가
중화인민공화국은 '하나의 중국' 정책을 내세우며 강희제의 대만 수복과 몽골 정복 등 민족 융합 업적과 백성을 중히 여기는 ‘섬기는 리더십’을 높이 평가한다.[154] 장쩌민, 후진타오 주석과 주룽지 총리 역시 강희제를 본받아야 한다고 역설했다. 그러나 일부 학자들은 한족 중심의 중화인민공화국이 과거 만주족 출신 강희제를 정치적으로 이용하고 있다고 비판한다.[154]중국의 강희제 홍보는 문화·예술 방면에서도 나타난다. 얼웨허(이월하, 二月河)의 소설 《강희대제》는 큰 반향을 일으켰고, 2001년 중국중앙방송에서 드라마 《강희왕조》(康熙王朝)로 제작되어 큰 인기를 끌었다. 강희제 역을 맡은 천다오밍(진도명, 陳道明)은 강희제의 파란만장한 인생과 리더십을 잘 보여주어 국민 배우로 자리매김했다.[154] 《강희왕조》를 시작으로 강희제를 다룬 많은 작품들이 중화인민공화국과 중화민국에서 방송되었고 높은 인기를 얻었다. 드라마 《옹정왕조》(雍正王朝)에서도 현명하지만 자식 문제로 피곤한 삶을 사는 황제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홍콩 드라마 《군림천하》(君臨天下)에서는 비극적인 군주로 묘사된다.
무협소설가 김용(金庸)의 《녹정기》(鹿鼎記)에서는 강희제가 호방한 군주로 등장하며, 이 소설은 여러 차례 드라마로 제작되었다. 대한민국에서는 iTV에서 방영되었던 《회옥공주》(懷玉公主)에서 명나라 영력제의 공주를 사랑하는 황제로 나왔으나 허구였다.[155] 강희제는 서태후와 함께 청나라를 배경으로 한 역사 예술 작품에서 가장 많이 다루어지는 인물이다.
2008년 마이크로소프트의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3: 아시아 왕조에서 중국의 지도자로 등장하며, 유럽 및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성군으로 알려져 있다.
강희제는 청나라를 크게 통합한 황제였다. 명나라에서 청나라로의 이행은 리자청의 농민 반란군에 의해 베이징이 함락되고, 1644년 만주족에 의해 순치제가 옹립되면서 시작되었다. 강희제 즉위 무렵, 청나라의 중국 본토 정복이 거의 완료되었다. 만주 귀족들은 중국 제도를 사용하고 유교 이념을 습득했지만, 만주 문화도 유지했다. 강희제는 정복을 완료하고 군사적 위협을 진압했으며, 명나라의 중앙 정부 시스템을 부활시켰다.
강희제는 일벌레였으며, 매일 수많은 상소를 읽고 답변했으며, 신하들과 회의하고 접견했다. 전시에는 자정이 지나서까지 상소를 읽거나, 준가르와의 갈등처럼 직접 전장에 나가기도 했다.[28]
강희제는 황제의 권력을 빼앗으려는 관료들을 우회하는 통신 시스템을 고안했다. 궁중 상소 시스템은 황제와 지방의 신뢰할 수 있는 관리들 사이에 비밀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으로, 황제와 관리만 접근할 수 있었다. 이것은 극심한 날씨 보고를 검열 없이 받기 위한 시스템으로 시작되었으나, 곧 범용 비밀 "뉴스 채널"로 발전했다. 대각원은 황제가 의장을 맡았고, 고위급 한족과 만주 가신들이 운영했으며, 관리들은 배제되었다.[29]
강희제는 유교 지식인들을 청나라 정부와 협력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다. 1670년 성조유훈을 반포하는 등 유교적 가치관에 호소했다. 유교 학문을 장려하고 과거가 치러지도록 했다. 특별 시험을 고안하고, 명실록, 강희자전, 중국 문학 편찬을 후원했다. 만주와 중국인 가정교사를 임명하여 유교 경전을 공부하고 중국 서예에 열중했다.[30]
준가르 몽골과의 전투에서 강희제는 효과적인 군 지휘관임을 보여주었다. 파이너에 따르면, 황제의 기록된 성찰을 통해 "하급 장병들과 친밀하고 다정한 교류를 나누었는지, 장군들과의 관계가 분별력 있고 능숙했는지"를 알 수 있다.[31]
만주 정복 후 평화가 돌아오자 강희제는 1712년 토지세와 역을 완전히 동결했다. 이는 국고에 부담을 주지 않았지만, 후대 황제들이 재정 시스템을 조정하고 근대화를 시도하는 것을 방해했다.[32][33]
5. 가족
강희제는 황후 네 명, 황귀비 세 명, 귀비 한 명을 두었으며, 첩지를 받은 후비가 모두 64명으로 중국 역대 황제 중 가장 많은 후비를 거느렸다. 슬하에는 35남 20녀를 두었으나 이 중 아들 11명은 영유아 때 요절하여 작위를 받지 못하였다.
- '''조부''': 태종 숭덕문황제(太宗 崇德文皇帝) 황태극(皇太極)
- '''조모''': 효장문황후 박이제길특씨(孝莊文皇后 博爾濟吉特氏)
- '''부친''': 세조 순치장황제(世祖 順治章皇帝) 복림(福臨)
- '''모친''': 효강장황후 동가씨(孝康章皇后 佟佳氏)
| 봉호 | 시호 | 이름(성씨) | 재위년도 | 생몰년도 | 국구(장인/장모) | 별칭 | 비고 |
|---|---|---|---|---|---|---|---|
| 황후(皇后) | 효성인황후 (孝誠仁皇后) | 허셔리 씨 (赫舍里氏) | 1665년 ~ 1674년 | 1653년 ~ 1674년 | 일등승은각희공 (一等承恩恪僖公) 혁서리 갈포라 (赫舍里 噶布喇) | [156][157] | |
| 황후(皇后) | 효소인황후 (孝昭仁皇后) | 니오후루 씨 (鈕祜祿氏) | 1677년 ~ 1678년 | 1653년 ~ 1678년 | 일등승은각희공 (一等承恩恪僖公) 니오후루 어빌룬 (鈕祜祿 遏必隆) 일품고명부인 (一品誥命夫人) 슈슈기오로 씨 (舒舒覺羅氏) | ||
| 황후(皇后) | 효의인황후 (孝懿仁皇后) | 퉁기야 씨 (佟佳氏) | 1689년 | 1657년 ~ 1689년 | 일등승은단순공 (一等承恩端純公) 퉁 구워워이 (佟國維) 일품부인 (一品夫人) 허셔리 씨 (赫舍里氏) | [158][159] | |
| 덕비(德妃) | 효공인황후 (孝恭仁皇后) | 우야 씨 (烏雅氏) | (추존) | 1660년 ~ 1724년 | 일등승은공 (一等承恩公) 오아 위무 (烏雅 威武) | [160][161] |
| 황귀비(皇貴妃) | |||||
| 봉호 | 시호 | 이름(성씨) | 생몰년도 | 별칭 | 비고 |
|---|---|---|---|---|---|
| 황귀비 (皇貴妃) | 각혜황귀비 (慤惠皇貴妃) | 퉁기야 씨 (佟佳氏) | 1668년 ~ 1743년 | [162][163] | |
| 화황귀비 (和皇貴妃) | 돈이황귀비 (惇怡皇貴妃) | 구왈기야 씨 (瓜爾佳氏) | 1683년 ~ 1768년 | [164] | |
| 민비(敏妃) | 경민황귀비 (敬敏皇貴妃) | 장기야 씨 (章佳氏) | ? ~ 1699년 | ||
| 귀비(貴妃) | |||||
| 봉호 | 시호 | 이름(성씨) | 생몰년도 | 별칭 | 비고 |
|---|---|---|---|---|---|
| 귀비(貴妃) | 온희귀비 (溫喜貴妃) | 니오후루 씨 (鈕祜祿氏) | ? ~ 1694년 | 적복진(嫡福晉) | |
| 비(妃) | ||||
| 봉호 | 이름(성씨) | 생몰년도 | 별칭 | 비고 |
|---|---|---|---|---|
| 평비(平妃) | 혀서리 씨(赫舍里氏) | ? ~ 1696년 | 근비(僅妃) | [165] |
| 밀비(密妃) | 왕씨(王氏) | 1675년 ~ 1744년 | [166] | |
| 근비(勤妃) | 진씨(陳氏) | ? ~ 1753년 | [167] | |
| 혜비(惠妃) | 나라 씨(拉喇氏) | ? ~ 1732년 | 혜빈(惠嬪) | |
| 의비(宜妃) | 곽락라 씨(郭絡羅氏) | ? ~ 1733년 | 의빈(宜嬪) | |
| 영비(榮妃) | 마기야 씨(馬佳氏) | ? ~ 1727년 | 영빈(榮嬪) | |
| 정비(定妃) | 만유합 씨(萬琉哈氏) 이름 뉴뉴(妞妞) | 1661년 ~ 1757년 | 정빈(定嬪) | |
| 선비(宣妃) | 보르지기트 씨(博尔濟吉特氏) | ? ~ 1736년 | 헌비(憲妃) | |
| 성비(成妃) | 다이기야 씨(戴佳氏) | ? ~ 1740년 | ||
| 양비(良妃) | 각선씨(覺禅氏) 혹은 위씨(卫氏) 이름 쌍저(雙姐) | ? ~ 1711년 | 양빈(良嬪) | |
| 혜비(慧妃) | 보르지기트 씨(博尔濟吉特氏) | ? ~ 1670년 | 측복진(側福晉) | |
| 빈(嬪) | ||||
| 봉호 | 이름(성씨) | 생몰년도 | 별칭 | 비고 |
|---|---|---|---|---|
| 안빈(安嬪) | 이씨(李氏) | 안빈(安嬪) | ||
| 경빈(敬嬪) | 왕가씨(王佳氏) | 경빈(敬嬪) | ||
| 단빈(端嬪) | 동씨(董氏) | ? ~ 1718년 | 단빈(端嬪) | |
| 희빈(僖嬪) | 혁사리씨(赫舍里氏) | ? ~ 1702년 | 희빈(僖嬪) | |
| 통빈(通嬪) | 납라씨(拉喇氏) | ? ~ 1744년 | 통귀인(通貴人) | |
| 양빈(襄嬪) | 고씨(高氏) 이름 재의(在儀) | ? ~ 1746년 | 양상재(襄常在) | |
| 근빈(謹嬪) | 색혁도씨(色赫圖氏) | 1698년 ~ 1739년 | 근상재(謹常在) | |
| 정빈(靜嬪) | 석씨(石氏) | ? ~ 1758년 | 정상재(靜常在) | |
| 희빈(㜯嬪) | 진씨(陣氏) | ? ~ 1737년 | 희상재(㜯常在) | |
| 목빈(穆嬪) | 진씨(陣氏) | ? ~ 1727년 | 목상재(穆常在) | |
| 귀인(貴人) | ||||
| 봉호 | 이름(성씨) | 생몰년도 | 별칭 | 비고 |
|---|---|---|---|---|
| 귀인(貴人) | 곽락라씨(郭絡羅氏) | 1653년 ~ ? | ||
| 포귀인(布貴人) | 조가씨(兆佳氏 | ? ~ 1717년 | ||
| 원귀인(袁貴人) | 원씨(袁氏) | ? ~ 1719년 | ||
| 이귀인(伊貴人) | 역씨(易氏) | ? ~ 1728년 | ||
| 백귀인(白貴人) | 진씨(陳氏) | |||
| 귀인(貴人) | 납라씨(納喇氏) | |||
| 귀인(貴人) | 납라씨(納喇氏) | |||
| 신귀인(新貴人) | ? ~ 1716년 | |||
| 마귀인(馬貴人) | ||||
| 윤귀인(尹貴人) | ||||
| 락귀인(洛貴人) | ||||
| 문귀인(文貴人) | ? ~ 1736년 | |||
| 람귀인 (藍貴人) | ? ~ 1736년 | |||
| 상귀인 (常貴人) | 1681년 ~ 1754년 | |||
| 소귀인 (苏貴人) | ||||
| 선귀인 (仙貴人) | ||||
서비는 책봉되지 않은 후궁들을 가리키는데, 어떤 후궁으로는 정식 책봉되지는 않았지만, 궁내에서는 빈, 심지어는 귀비로 불리기도 했다. 순의밀비는 소절에서 왕빈이라 불리고, 평비 허셔리씨는 청초 중신 왕희에게 귀비라 불렸다. 일부 서비들은 빈, 심지어는 비까지 받을 수 있었다. 강희 36년의 『강희조만문주비』에 비가 6명이라고 나와 있는데, 이때 정식으로 비에 책봉된 사람은 4명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 서비(庶妃) | ||||
| 봉호 | 이름(성씨) | 생몰년도 | 별칭 | 비고 |
|---|---|---|---|---|
| 서비(庶妃) | 니오후루씨(钮祜禄氏) | |||
| 서비(庶妃) | 장씨(張氏 | |||
| 서비(庶妃) | 왕씨(王氏) | |||
| 서비(庶妃) | 류씨(劉氏) | |||
| 상재(常在) | ||||
| 봉호 | 이름(성씨) | 생몰년도 | 별칭 | 비고 |
|---|---|---|---|---|
| 윤상재(尹常在) | ||||
| 색상재(色常在) | ||||
| 수상재(壽常在) | ||||
| 상상재(常常在) | ||||
| 서상재(瑞常在) | ||||
| 서상재(徐常在) | ||||
| 석상재(石常在) | ||||
| 녹상재(祿常在) | ||||
| 우상재(牛常在) | ||||
| 사상재(查常在) | ||||
| 요상재(堯常在) | ||||
| 내상재(内常在) | ||||
강희제는 200명이 넘는 사람을 답응으로 데리고 있었고, 강희 46년 연간, 강희제의 후궁은 건청궁 주위 16명, 대답응 10명이었다. 강희 연간의 건청궁 주위는 황후 이하, 대답응 이상의 비를 말한다. 따라서 경양궁의 주위는 강희제의 후비가 아니거나, 경양궁을 중심으로 한 부속건물군 내의 궁녀들이어야하는데, 예를들어 건청궁의 주위는 실제 동6궁, 서6궁에 거주하게 된다. 또한 육경궁의 주위는 황태자의 처첩이다.
| 답응(答應) | ||||
| 봉호 | 이름(성씨) | 생몰년도 | 별칭 | 비고 |
|---|---|---|---|---|
| 귀답응(貴答應) | ||||
| 령답응(靈答應) | ||||
| 춘답응(春答應) | ||||
| 효답응(曉答應) | ||||
| 경답응(慶答應) | ||||
| 수답응(秀答應) | ||||
| 치답응(治答應) | ||||
| 묘답응(妙答應) | ||||
| 우답응(牛答應) | ||||
| 쌍답응(双答應) | ||||
| 채답응(采答應) | ||||
| 향답응(向答應) | ||||
| 장답응(蔣答應) | ||||
| 봉답응(丰答應) | ||||
| 서답응(瑞答應) | ||||
| 원답응(袁答應) | ||||
| 어답응(御答應) | ||||
| 옥답응(玉答應) | ||||
강희조 초기에는 여전히 복진과 격격을 후궁이라 불렀다. 중기 이후에는 후궁의 정식 책봉이 있었다. 격격이라는 호는 강희조 후기에 사용되었으며, 지위가 낮았다. 건륭 19년 2월, 조팔리둔에 144명의 격격이 안장되었고, 제단 뒤 무덤에 1명의 격격이 안장되어 총 145명의 격격이 있다. 그 중 강희제의 격격이 얼마나 될지는 모른다.
| 복진(福晋) 및 격격(格格) | ||||
| 봉호 | 이름(성씨) | 생몰년도 | 별칭 | 비고 |
|---|---|---|---|---|
| 몽골격격(蒙古格格) | 자루트보르지기트씨(扎鲁特博尔济吉特氏) | |||
| 격격(格格) | 니오후루씨(钮祜禄氏) | |||
| 격격(格格) | 나라씨(纳喇氏) | |||
| 격격(格格) | 찰사호리씨(扎斯瑚里氏) | |||
| 격격(格格) | 동씨(佟氏) | |||
| 영격격(荣格格) | ||||
| 곽격격(霍格格) | ||||
{| class="wikitable" style="text-align:center; font-size: 95%;"
|-align="center"
!colspan="2"| - !! 봉호 !! 시호 !! 이름 !! 생몰년도 !! 별칭 !! 생모 !! 자식 !! 비고
|-align="center"
| 장남 || || || || 승서(承瑞) || 1667년 ~ 1670년 || || 영비
마가씨 || || 요절함.
|-align="center"
| 차남 || || || || 승호(承祜) || 1670년 ~ 1672년 || || 효성인황후
혁사리씨 || || 요절함.
|-align="center"
| 3남 || || || || 승경(承慶) || 1670년 ~ 1671년 || || 혜비
납라씨 || || 요절함.
|-align="center"
| 4남 || || || || 새음찰혼(賽音擦渾) || 1671년 ~ 1674년 || || 영비
마가씨 || || 요절함.
|-align="center"
| 5남 || 1황자 || 고산패자
(固山貝子) || || 아이신기오로 윤지
(愛新覺羅 允禔
/애신각라 윤제) || 1672년 ~ 1735년 ||[168] || 혜비
납라씨 || 15남 14녀 ||[169]
|-align="center"
| 6남 || || || || 장화(長華) || 1674년 || || 영비
마가씨 || || 요절함.
|-align="center"
| 7남 || 2황자 || 화석이친왕
(和碩理親王) || 밀(密) || 아이신기오로 윤청
(愛新覺羅 允礽일본어
/애신각라 윤잉) || 1674년 ~ 1725년 ||[170] || 효성인황후
혁사리씨 || 12남 14녀 ||[171]
|-align="center"
| 8남 || || || || 장생(長生) || 1675년 ~ 1677년 || || 영비
마가씨 || || 요절함.
|-align="center"
| 9남 || || || || 만보(萬黼) || 1675년 ~ 1679년 || || 통빈
납라씨 || || 요절함.
|-align="center"
| 10남 || 3황자 || 화석성친왕
(和碩誠親王) || 은(隱) || 아이신기오로 윤치
(愛新覺羅 允祉
/애신각라 윤지) || 1677년 ~ 1732년 ||[172] || 영비
마가씨 || 12남 6녀 ||
|-align="center"
| 11남 || 4황자 || 화석옹친왕
(和碩雍親王) || || 아이신기오로 인전
(愛新覺羅 胤禛일본어
/애신각라 윤진) || 1678년 ~ 1735년 ||[173] || 효공인황후
오아씨 || 10남 4녀 || 제5대 황제 옹정제(雍正帝).
|-align="center"
| 12남 || || || || 윤찬(胤禶) || 1679년 ~ 1680년 || || 통빈
납라씨 || || 요절함.
|-align="center"
| 13남 || 5황자 || 화석항친왕
(和碩恒親王) || 온(溫) || 아이신기오로 윤키
(愛新覺羅 允祺
/애신각라 윤기) || 1680년 ~ 1732년 ||[174] || 의비
곽락라씨 || 7남 6녀 ||
|-align="center"
| 14남 || 6황자 || || || 윤조(胤祚) || 1680년 ~ 1685년 || || 효공인황후
오아씨 || || 요절함.
|-align="center"
| 15남 || 7황자 || 화석순친왕
(和碩淳親王) || 도(度) || 아이신기오로 윤이오
(愛新覺羅 允祐
/애신각라 윤우) || 1680년 ~ 1730년 ||[175] || 성비
대가씨 || 7남 9녀 ||
|-align="center"
| 16남 || 8황자 || 화석염친왕
(和碩廉親王) || || 아이신기오로 윤시
(愛新覺羅 允禩
/애신각라 윤사) || 1681년 ~ 1726년 ||[176] || 양비
위씨 || 1남 1녀 ||[177]
|-align="center"
| 17남 || 9황자 || ''이혁패자
(已革貝子)'' || || 아이신기오로 윤탕
(愛新覺羅 允禟
/애신각라 윤당) || 1683년 ~ 1726년 ||[178] || 의비
곽락라씨 || 8남 6녀 ||[179]
|-align="center"
| 18남 || 10황자 || 보국공
(輔國公) || || 아이신기오로 윤오
(愛新覺羅 允䄉
/애신각라 윤아) || 1683년 ~ 1741년 ||[180] || 온희귀비
뉴호록씨 || ||[181]
|-align="center"
| 19남 || || || || 윤위(胤褘) || 1683년 ~ 1684년 || || 귀인
곽락라씨 || || 요절함.
|-align="center"
| 20남 || 11황자 || || || 윤자(胤禌) || 1685년 ~ 1696년 || || 의비
곽락라씨 || || 요절함.
|-align="center"
| 21남 || 12황자 || 화석이친왕
(和碩履親王) || 의(懿) || 아이신기오로 윤토우
(愛新覺羅 允祹
/애신각라 윤도) || 1686년 ~ 1763년 ||[182] || 정비
만류합씨 || 6남 6녀
+1양자 ||
|-align="center"
| 22남 || 13황자 || 화석이친왕
(和碩怡親王) || 현(賢) || 아이신기오로 인시양
(愛新覺羅 胤祥
/애신각라 윤상) || 1686년 ~ 1730년 || || 경민황귀비
장가씨 || 9남 4녀 ||
|-align="center"
| 23남 || 14황자 || 다라순군왕
(多羅恂郡王) || 근(勤) || 아이신기오로 윤티
(愛新覺羅 允禵
/애신각라 윤제) || 1688년 ~ 1755년 ||[183] || 효공인황후
오아씨 || 4남 7녀 ||[184]
|-align="center"
| 24남 || || || || 윤기(胤禨) || 1691년 || || 평비
혁사리씨 || || 요절함.
|-align="center"
| 25남 || 15황자 || 다라유군왕
(多羅愉郡王) || 각(恪) || 아이신기오로 윤우
(愛新覺羅 允禑
/애신각라 윤우) || 1693년 ~ 1731년 ||[185] || 순의밀비
왕씨 || 5남 ||
|-align="center"
| 26남 || 16황자 || 화석장친왕
(和碩莊親王) || 각(恪) || 아이신기오로 윤루
(愛新覺羅 允祿
/애신각라 윤록) || 1695년 ~ 1767년 || || 순의밀비
왕씨 || 10남 9녀 ||
|-align="center"
| 27남 || 17황자 || 화석과친왕
(和碩果親王) || 의(毅) || 아이신기오로 윤리이
(愛新覺羅 允禮
/애신각라 윤례) || 1695년 ~ 1768년 ||[186] || 순유근비
진씨 || 2남 1녀
+1양자 ||
|-align="center"
| 28남 || 18황자 || || || 윤개(胤祄) || 1701년 ~ 1708년 || || 순의밀비
왕씨 || || 요절함.
|-align="center"
| 29남 || 19황자 || || || 윤직(胤禝) || 1702년 ~ 1704년 || || 양빈
고씨 || || 요절함.
|-align="center"
| 30남 || 20황자 || 다라패륵
(多羅貝勒) || 간정
(簡靖) || 아이신기오로 윤이
(愛新覺羅 允禕
/애신각라 윤의) || 1706년 ~ 1755년 ||<
6. 기년과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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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에서 동배의 자는 이름의 머리글자를 공유한다. 부모가 같은 자 뿐만 아니라 동족 중의 사촌 등에서도 같다. 따라서 일족의 계보를 볼 때 같은 한 글자를 머리에 쓰고 있는 자가 동배임을 즉시 알 수 있다.
[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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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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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편집 전에는 「承祜」였지만, 근거 불명. 『청사고』164권을 근거로 「承祐」로 개정(2023.12.30). 「承」자를 이름 앞에 붙이는 강희제의 자 중, 『청사고』에 기재된 것은 「承瑞」「承祐」「承慶」(동순) 세 명뿐이다.
[49]
서적
清史稿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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清史館
[50]
기타
胤禛 (옹정제) 즉위 후 「胤」과 「禎」이 모두 휘를 피하는 대상이 되었기 때문에 「胤禎 yìnzhēn」에서 「允禎 yǔnzhēn」으로 고쳤다고 한다 (이름 뒤의 영어 표기는 [[표준어]] [[병음]]).
[51]
기타
참고: 텔레비전 드라마 『[[궁정의 쟁이 여|견환전]]』에서는 주인공·견환 (희귀비)의 여동생·옥은 (관벽)이 시집갔다.
[52]
기타
참고: 텔레비전 드라마 『[[궁정의 쟁이 여|견환전]]』에서는 주인공·견환 (희귀비)의 여동생·옥요가 시집갔다.
[53]
기타
편집 전에는 「胤祜」였지만, 근거 불명. {{harv|『청사고』|loc=164권}}을 근거로 「胤祐」로 개정(2023.1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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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은 전해지지 않았으나, 순치제가 제일 총애하던 현비 동악씨의 소생이었으며 1657년(순치 14년)에 황태자로 지명되었으나 1658년(순치 15년)에 요절하고 난 뒤에 영친왕(榮親王)으로 추봉, 곧 황태자로 정식 추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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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순치제가 이 때 천연두로 붕어하였다 하나, 그때엔 이미 천연두가 진정되었고 조정에서 급작스럽게 붕어 사실을 발표하여 순치제의 죽음에 의문을 제기하는 주장이 만만치 않았다. 이로 인해 불심이 깊어던 순치제가 스스로 황위를 버리고 출가하였다는 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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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정대신들은 과거 환관들이 여러 번 나라를 망치는 데 주범이었다는 것과 당시 환관들은 모두 한족 출신이라 자신들의 말을 듣지 않을까 봐 신속히 십삼아문을 폐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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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0]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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