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 정양산성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영월 정양산성은 남한강에 돌출된 정양산의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축조된 산성이다.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되어 조선 전기까지 사용되었으며, 고려 시대에는 교통로의 요충지였다. 내성과 외성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성벽의 총 연장은 1,630m에 달한다. 성벽의 규모, 곡성, 현문식 문터 구조 등에서 보은 삼년산성과 유사한 점을 보인다. 외성은 고려 시대 이후 내성의 수용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축조되었으며, 현재 역사적·학술적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강원특별자치도의 성 - 춘천 봉의산성
춘천 봉의산성은 고려 시대 몽골 침입에 맞서 춘천 주민들이 항전했던 곳으로 추정되며, 임진왜란과 한국전쟁 때도 요충지였고, 둘레 약 1,280m의 성벽과 봉의산 순의비가 있다. - 강원특별자치도의 성 - 정선 고성리 산성
정선 고성리 산성은 강원도 정선군 해발 425m 산 능선에 위치한, 삼국 시대 고구려가 축조했다는 설과 청동기 시대 이전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는 산성으로, 조선 시대 기록에도 남아있으며 현재 강원도 기념물로 지정되어 보존되고 있다. - 강원특별자치도의 사적 - 낙산사
낙산사는 의상대사가 관음보살의 계시로 창건한 사찰로, 화재와 재건을 거쳐 현재 재건축 중이며, 의상대, 홍련암 등의 암자와 해수관음상, 칠층석탑 등의 문화재를 보유한 역사적, 예술적 가치를 지닌 곳이다. - 강원특별자치도의 사적 - 장릉 (조선 단종)
장릉은 조선 6대 왕 단종과 정순왕후의 능으로, 단종의 비극적인 역사와 관련되어 수도권 외부에 위치한 유일한 왕릉이며 충신단이 조성되어 있고, 조선왕릉으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 영월 정양산성 - [유적/문화재]에 관한 문서 | |
|---|---|
| 위치 정보 | |
| 주소 | 강원특별자치도 영월군 영월읍 정양리 산1-1번지 외 8필 |
| 기본 정보 | |
| 이름 | 영월 정양산성 |
| 한자 표기 | 寧越 正陽山城 |
| 지정 종류 | 사적 |
| 지정 번호 | 446 |
| 지정일 | 2003년 6월 2일 |
| 시대 | 삼국시대 |
| 면적 (문화재구역) | 126,076m2 |
| 면적 (보호구역) | 47,738m2 |
| 이전 문화재 정보 | |
| 이전 이름 | 영월왕검성 |
| 이전 지정 종류 | 문화재자료 |
| 이전 지정 번호 | 52 |
| 이전 지정일 | 1984년 6월 2일 |
| 이전 해제일 | 2003년 6월 2일 |
2. 역사
영월 정양산성은 문헌기록상 축조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시대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전기까지 계속 사용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둘레 798보, 성안에 샘 하나, 창고 5칸이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석축, 둘레 2,314척, 높이 19척으로, 관동지에는 정양산성(부 동쪽 10리, 석축, 둘레 2,314척, 높이 19척), 대동지지에는 정양산고성, 둘레 2,314척으로 기록되어 있다.[2]
2. 1. 삼국시대 축성
영월 정양산성은 삼국이 한강 유역을 놓고 각축전을 벌이던 시기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성은 남한강에 돌출된 정양산(해발 430-565m)의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돌로 쌓은 산성이다.[2]성의 전체적인 평면 모습은 서북쪽을 향하여 넓은 사다리꼴 또는 키 모양을 이루고 있다. 내성과 외성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내성의 둘레는 1,060m, 외성의 둘레는 570m이며, 성벽의 총 연장은 1,630m이다. 성벽은 자연석을 적당히 다듬어 매우 정교하게 쌓았으며,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최대 높이는 11.5m에 달한다. 이는 보은의 삼년산성(사적 제235호)과 비교될 만큼 큰 규모이다.[2]
남쪽의 낮은 지대에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여러 건물터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성벽이 꺾어지는 3군데에서는 성벽 바깥으로 돌출하여 만든 시설물인 치성(雉城) 혹은 곡성(曲城)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3군데에 다락문 같은 현문(懸門) 형식의 문터가 있다.[2]
2. 2.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활용
고려 공양왕 2년(1390)까지 정양역이 존재하여 교통로의 요충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2] 조선시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둘레 798보, 성안에 샘이 하나 있고, 창고 5칸이 있다’는 기록이 있고,[2]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석축, 둘레 2,314척, 높이 19척으로 기록되어 있으며,[2] 『관동지』에는 정양산성(부 동쪽 10리, 석축, 둘레 2,314척, 높이 19척),[2] 『대동지지』에는 정양산고성, 둘레 2,314척으로 기록되어 있다.[2]외성은 고려 시대 이후 내성의 수용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서 많은 부분을 천연의 절벽을 성벽으로 삼고, 필요한 부분에 인공 성벽을 축조하는 등 응급적인 상황에서 축조되는 중세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2]
3. 구조
영월 정양산성은 남한강에 돌출된 정양산(해발 430-565m)의 자연지형을 잘 이용하여 돌로 쌓은 산성이다. 성의 전체적인 평면 모습은 서북쪽을 향하여 넓은 사다리꼴 또는 키 모양을 이루고 있다.
남쪽의 낮은 지대에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여러 건물터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북서쪽에 자리 잡은 정양리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는 곳에는 5개, 외성 내에 2~3개의 차단벽을 갖고 있다.[2]
3. 1. 내성과 외성
영월 정양산성은 내성과 외성으로 크게 구분된다. 내성의 둘레는 1,060m, 외성의 둘레는 570m이며, 성벽의 총 연장은 1,630m이다.[2] 내성은 최대 높이가 11.5m에 달하며, 보은의 삼년산성(사적 제235호), 단양의 적성(사적 제265호), 온달 산성(사적 제264호) 등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보인다. 성벽의 규모, 곡성(曲城)의 존재, 현문식(懸門式) 문터 구조, 성벽 외측 하부 보축의 존재 등에서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2]외성은 고려 시대 이후 내성의 수용력을 늘리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많은 부분을 천연 절벽을 성벽으로 삼고 필요한 부분에만 인공 성벽을 축조하는 등 응급 상황에서 축조되는 중세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2]
3. 2. 성벽
남한강에 돌출된 정양산(해발 430-565m)의 자연지형을 이용하여 돌로 쌓은 영월 정양산성의 성벽은 내성과 외성으로 구분된다. 내성 둘레는 1,060m, 외성 둘레는 570m로, 성벽 총 길이는 1,630m에 달한다. 성벽은 자연석을 적당히 다듬어 매우 정교하게 쌓았으며, 현재 남아 있는 성벽 최고 높이는 11.5m이다. 이는 보은 삼년산성(사적 제235호)과 비교될 만큼 큰 규모이다. 남서쪽에는 여장(女墻)이 남아 있다.[2]내성은 최대 높이 11.5m에 달하며, 보은 삼년산성, 단양 적성(사적 제265호), 온달산성(사적 제264호) 등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보인다. 성벽 규모뿐만 아니라, 곡성(曲城)의 존재, 현문식(懸門式) 문터 구조, 성벽 외측 하부 보축에서도 유사점을 찾을 수 있다.[2]
외성은 고려 시대 이후 내성 수용력을 늘리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많은 부분을 천연 절벽을 성벽으로 삼고 필요한 부분에만 인공 성벽을 쌓는 등 응급 상황에서 축조되는 중세적 특징을 잘 보여준다.[2]
3. 3. 문터와 치성
영월 정양산성에는 다락문 같은 현문(懸門) 형식의 문터가 3곳에 있고, 성벽이 꺾어지는 3곳에서는 성벽 바깥으로 돌출하여 만든 시설물인 치성(雉城) 또는 곡성(曲城)의 흔적이 남아 있다.[2]4. 특징
이 성은 문헌기록상 축조 연대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삼국이 한강 유역을 놓고 다투던 시기에 처음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세종실록지리지에 ‘둘레 798보, 성안에 샘이 하나 있고, 창고 5칸이 있다’는 기록을 통해 조선 전기까지 계속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2]
성의 전체적인 평면 모습은 서북쪽을 향하여 넓은 사다리꼴 또는 키 모양을 이루고 있다. 북서쪽에 자리잡은 정양리에서 계곡을 따라 오르는 곳에 5개, 외성 내에 2∼3개의 차단벽을 갖고 있다.[2]
남서쪽 일대에는 여장(女墻)이 남아 있다.[2]
남쪽의 낮은 지대에는 비교적 넓은 평지가 형성되어 있는데, 여러 건물터가 있었던 곳으로 추정된다. 성벽이 꺾어지는 3군데에는 성벽 바깥으로 돌출하여 만든 시설물인 치성(雉城) 또는 곡성(曲城)의 흔적이 남아있고, 3군데에 다락문 같은 현문(懸門) 형식의 문터가 있다.[2]
4. 1. 한강 상류 최대 규모
정양산성은 남한강에 돌출된 정양산(해발 430―565m)의 자연지형을 잘 이용하여 돌로 쌓은 산성이다. 내성과 외성으로 크게 구분되는데, 내성의 둘레는 1,060m, 외성의 둘레는 570m이며 성벽의 총 연장은 1,630m에 달한다.[2]성벽은 자연석을 적당히 다듬어 매우 정교하게 쌓았으며, 현재 남아 있는 성벽의 높이는 최고 11.5m이다.[2] 이는 삼년산성(사적 제235호)과 비교될 정도로, 한국의 고대 산성 중에서 성벽 규모가 최대 수준이다.[2]
영월 정양산성은 한강 상류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산성이며, 성벽과 문터, 곡성과 치성, 후대의 외성과 차단벽을 갖춘 유일한 산성으로 보존 상태도 양호하여 역사, 학술적 가치가 높다.
4. 2. 삼년산성과의 유사성
영월 정양산성은 성벽 최대 높이가 11.5m에 달하며, 보은의 삼년산성(사적 제235호), 단양의 적성(사적 제265호), 온달 산성(사적 제264호) 등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보인다. 특히 성벽 규모뿐만 아니라 곡성(曲城), 현문식(懸門式) 문터, 성벽 외측 하부 보축(補築)의 존재 등에서도 서로 유사한 점을 지니고 있다.[2]4. 3. 외성의 중세적 특징
외성은 고려 시대 이후 내성의 수용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 많은 부분을 천연 절벽을 성벽으로 삼고 필요한 부분에 인공 성벽을 축조하는 등 응급 상황에서의 축조되는 중세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2]5. 사적 지정
정양산은 남한강에 돌출된 해발 430-565m의 산으로, 이 산의 자연 지형을 이용하여 정양산성을 축조하였다. 정양산성은 삼국이 한강 유역을 놓고 각축전을 벌이던 5세기 말에서 6세기 초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며, 조선 전기까지 계속 사용되었던 중요한 산성이다.[2]
고려 공양왕 2년(1390)까지 정양역이 존재했던 것으로 보아 교통로의 요충지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둘레가 798보이며, 성 안에 샘이 하나 있고, 창고 5칸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 『관동지』, 『대동지지』에는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2,314척, 높이가 19척이라고 기록되어 있다.[2]
성벽의 둘레는 1,630m(내성 1,060m, 외성 570m)이다. 내성은 최대 높이 11.5m에 달하며, 보은 삼년산성(사적 제235호), 단양 적성(사적 제265호), 온달산성(사적 제264호) 등과 매우 유사한 구조를 보인다. 성벽의 규모뿐만 아니라, 곡성(曲城)의 존재, 현문식(懸門式) 문터 구조, 성벽 외측 하부의 보축의 존재에서도 서로 유사한 점을 지니고 있다.[2]
외성은 고려시대 이후 내성의 수용력을 증대시키기 위해 축조된 것으로서, 많은 부분을 천연의 절벽을 성벽으로 삼고, 필요한 부분에 인공의 성벽을 축조하는 등 응급적인 상황에서 축조되는 중세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2]
참조
[1]
간행물
문화재청고시제2018-45호(영월 정양산성 문화재 구역 조정 및 보호구역 추가 지정)
http://gwanbo.mois.g[...]
관보(정호)
2018-04-27
[2]
간행물
문화재(사적) 지정
문화재청
2003-06-02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