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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브도키야 로푸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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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예브도키야 로푸히나는 1669년 러시아 귀족 표도르 아브라모비치 로푸힌의 딸로 태어나, 표트르 1세의 어머니 나탈리야 나리시키나의 선택으로 표트르 1세의 첫 번째 황후가 되었다. 1689년 황후가 된 후 알렉세이 페트로비치를 포함한 세 아들을 낳았으나, 표트르 1세가 안나 몬스에게 마음을 빼앗기면서 수도원에 유폐되었다. 이후 표트르 1세의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파의 중심 인물이 되었고, 1718년 숙청되어 아들 알렉세이는 고문을 받고 죽임을 당했으며, 예브도키야는 수도원으로 추방되었다. 표트르 1세 사후 손자 표트르 2세가 즉위하면서 모스크바로 소환되어 궁정을 소유하다가 1731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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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브도키야 로푸히나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에브도키야 로푸히나
이름에브도키야 표도로브나 로푸히나
로마자 표기Yevdokiya Fyodorovna Lopukhina
신분
배우자표트르 1세
결혼1689년
이혼1698년 (혼인 취소)
자녀알렉세이 페트로비치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대공
표트르 페트로비치 대공
가문로푸힌
아버지표도르 아브라모비치 로푸힌
어머니우스티니야 보그다노브나 르티시체바
생애
출생일1669년 8월 9일
출생지모스크바, 러시아
사망일1731년 9월 7일 (62세)
사망지모스크바, 러시아
매장지노보데비치 수도원
러시아의 차르비차
재위 기간1689년 – 1698년
대관식1689년

2. 생애

예브도키야 로푸히나는 표트르 1세의 첫 번째 황후였으나, 표트르 1세의 개혁 정치와 서구화 정책에 반대하여 비극적인 삶을 살았다.

표트르 1세와의 사이에서 세 아들을 낳았지만, 알렉세이를 제외한 두 아들은 일찍 사망했다. 표트르 1세는 네덜란드 출신의 애첩 안나 몬스에게 마음을 빼앗겼고, 예브도키야는 남편에게 짝사랑에 대한 원망을 담은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표트르 1세는 예브도키야를 수도원에 유폐시켰고, 예브도키야는 그곳에서 스테판 그레보프라는 관리와 연인 관계를 맺기도 했지만, 그레보프는 나중에 신체관통형에 처해졌다. 예브도키야와 아들 알렉세이는 표트르 1세의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의 중심이 되었고, 결국 표트르 1세에 의해 숙청되었다. 알렉세이는 고문 끝에 사망했고, 예브도키야는 스타라야라도가의 수도원으로 추방되었다.

표트르 1세 사후, 예카테리나 1세에 의해 비밀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손자 표트르 2세 즉위 후 석방되어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1731년 노보데비치 수녀원에서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궁정을 유지하며 여생을 보냈다.

2. 1. 초기 생애

예브도키야 로푸히나는 1669년에 러시아 귀족 표도르 아브라모비치 로푸힌과 우스티니야 보그다노브나 르티셰바의 딸로 태어났다. 17세기 러시아 황후들과 마찬가지로, 유력 귀족 가문 출신은 아니었다. 표트르 1세의 어머니 나탈리야 나리시키나가 예브도키야를 표트르 1세의 아내로 선택했는데, 예브도키야의 어머니가 유력 정치가 표도르 루티시체프의 친척이었기 때문이다. 예브도키야는 1689년에 차리차(황후)로 즉위하여 표트르 1세와 사이에 세 명의 아들을 낳았다.

예브도키야 로푸히나의 자녀
이름출생 - 사망비고
알렉세이1690년 ~ 1718년유일하게 성년까지 성장
알렉산드르1691년 ~ 1692년
파벨1693년


2. 2. 황후 시절

나탈리야 나리시키나는 표도르 르티셰프의 친척이라는 이유로 예브도키야 로푸히나를 표트르 1세의 아내로 선택했다.[1] 예브도키야는 1689년에 황후가 되었고,[1] 슬하에 알렉세이(1690년 ~ 1718년), 알렉산드르(1691년 ~ 1692년), 파벨(1693년)을 낳았으나 알렉세이를 제외한 두 아들은 일찍 사망했다.

표트르 1세는 예브도키야의 보수적인 친척들을 탐탁지 않게 여겼고, 곧 그녀를 버리고 네덜란드 출신의 애첩 안나 몬스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예브도키야는 남편에게 짝사랑에 대한 원망이 담긴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1696년, 표트르 1세는 서유럽을 여행하던 도중에 나리시킨 가문의 친족들에게 예브도키야를 수도원에 들어가도록 설득해달라고 부탁했다. 예브도키야는 처음에는 이를 거부했지만, 1698년에 수즈달에 있는 포크로프스키 수도원에 들어가야 했다.[2] 수도원장은 예브도키야가 평신도 여성처럼 살 수 있도록 허락했고, 예브도키야는 스테판 그레보프라는 관리와 연인 관계를 맺었지만, 그레보프는 나중에 신체관통형에 처해졌다.

2. 3. 수도원 유폐와 반개혁 세력

표트르 1세는 1696년에 서유럽을 여행하던 도중에 나리시킨 가문의 친족들에게 예브도키야를 수도원에 들어가도록 설득해달라고 부탁했다.[3] 예브도키야는 처음에 이 설득을 물리쳤지만 1698년에 수즈달에 위치한 포크로프스키 수도원에 들어가야만 했다. 수도원장은 예브도키야가 평신도 여성처럼 살 수 있도록 인정했다. 예브도키야는 스테판 그레보프라는 관리와 연인 관계가 되었지만 그레보프는 나중에 신체관통형에 처해지게 된다.[3]

예브도키야와 알렉세이는 점차 고위 성직자를 비롯한 표트르 1세의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파의 중심 존재가 되어 갔다. 반대파 지도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드미트리 로스톱스키 주교는 예브도키야를 "우리의 위대한 통치자"라고 부르면서 예브도키야가 곧 황후로 복귀할 것이라고 예언했다. 1718년 표트르 1세는 예브도키야와 알렉세이를 비롯한 보수파를 숙청했다. 알렉세이는 고문을 받다 사망했고 예브도키야를 지지하던 주교 전원이 처형되었다. 예브도키야는 스타라야라도가에 위치한 수도원으로 추방되었다.

2. 4. 알렉세이 황태자 사건과 박해

예브도키야와 그의 아들 알렉세이는 점차 표트르 1세의 개혁에 반대하는 세력, 특히 고위 성직자들의 중심 인물이 되었다.[3] 로스토프의 디미트리 주교는 예브도키야를 "우리의 위대한 통치자"라고 칭하며 그녀가 곧 황후로 복귀할 것이라고 예언했다.[3] 1718년 표트르 1세는 예브도키야와 알렉세이를 중심으로 모인 보수파들을 숙청했다. 알렉세이는 고문 끝에 사망했고, 예브도키야를 지지한 주교들은 모두 처형되었으며, 예브도키야는 스타라야라도가의 수도원으로 추방되었다.[3]

2. 5. 말년

표트르 1세가 사망하고 그의 두 번째 황후였던 예카테리나 1세가 즉위하면서 예브도키야는 비밀리에 상트페테르부르크 인근에 위치한 슐리셀부르크 요새에 수감되었다. 1727년에 예브도키야의 손자인 표트르 2세가 즉위하면서 예브도키야는 석방되어 모스크바로 돌아왔다. 예브도키야는 1731년에 노보데비치 수녀원에서 사망할 때까지 자신의 궁정을 소유할 수 있도록 허락받았다.[3]

3. 가계도

Евдоки́я Фёдоровна Лопухина́|예브도키야 로푸히나ru는 표트르 1세와의 사이에서 세 아들을 낳았다.


  • 알렉세이 페트로비치 황태자 (1690년 ~ 1718년): 어머니가 몰락한 후 불안정한 삶을 살았고, 아버지에 대한 음모 혐의로 투옥되었다. 사형 선고를 받은 지 이틀 만에 가혹한 태형으로 사망했다. 샬럿 크리스티네 공주와 결혼하여 표트르 2세를 낳았다.
  • 알렉산더 대공 (1691년 ~ 1692년): 추도프 수도원에서 세례를 받았고, 나탈리아 알렉세예브나 대공녀가 대모였다. 한 살 반의 나이에 사망하여 대천사 미카엘 대성당에 안장되었다.
  • 파벨 대공 (1693년 ~ 1693년)

참조

[1] 백과사전 Eudoxia Lopukhina Encyclopædia Britannica
[2] 뉴스 Putin's divorce breaks long taboo in Russian politics: Leaders keep personal lives private https://www.foxnews.[...] Fox News 2013-06-07
[3] 웹사이트 4 sex scandals in the Romanov family https://www.rbth.com[...] Russia Beyond the Headlines 2018-08-08
[4] 서적 名画で読み解く ロマノフ家12の物語 光文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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