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광 (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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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광은 진승과 함께 진나라 말기에 일어난 농민 반란을 이끈 인물이다. 기원전 209년, 900명의 농민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허난성 일대를 점령하고 진주성을 함락시켰다. 진승이 장초라는 나라를 세우자 부왕으로 임명되어 낙양을 공격하다가 부하 전장에게 살해되었다. 그는 중국 사찰과 도교 사원에서 문신으로 묘사되며, 진승과 함께 짝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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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나라의 반란자 - 진승
진승은 진나라 말기에 오광과 함께 반란을 일으킨 지도자로서,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있겠는가'라는 말로 유명하며 진나라 멸망의 도화선이 된 최초의 농민 반란을 주도한 인물이다. - 진나라의 반란자 - 항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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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광 (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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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이름 | 오광 |
자 | 숙 |
생몰년도 | ? ~ 기원전 209년 |
시대 | 진나라 말기 |
출신지 | 양무현 |
국적 | 진나라 |
사인 | 전사 |
관직 | |
작위 | 가왕 |
가족 관계 | |
동료 | 진승 |
주요 활동 | |
활동 | 대택향 기의 |
기타 정보 | |
관련 인물 | 진승, 주문 |
로마자 표기 | |
한국어 | O Gwang |
중국어 | Wu Guang |
2. 생애
기원전 209년, 진승과 함께 일으킨 봉기는 진승·오광의 난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 오광은 진승과 함께 농민군을 이끌고 허난성 일대를 점령했으며, 진나라의 폭정에 반발한 수많은 농민들이 합류하여 봉기군은 허난성의 중심지인 진주성을 큰 저항 없이 함락시켰다.[2]
진승이 장초를 건국하고 왕위에 오르자, 오광은 부왕(副王)에 임명되어 2만 군사를 이끌고 낙양을 공격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러나 낙양 근처에서 진나라 장수 장한과 대치하던 중, 부하인 전장에게 살해당했다.[2]
오광의 군대는 형양을 포위하는 동안 갇히게 되었고, 전장을 비롯한 오광의 장군들은 장한 휘하의 진나라 증원군이 곧 도착하여 양쪽에서 공격해 올 것을 우려했다. 그들은 오광의 계획을 변경하고 형양 포위를 끝낸 다음 장한의 군대와 직접 맞서 싸우기를 원했다. 오광이 자신의 계획을 변경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한 그들은 오광을 암살하고 군대를 장악했다.[3]
이세 2년(기원전 208년) 11월, 장한에게 여러 번 패배하여, 주문은 자살했고, 초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6] 전장은 형양에 병력을 조금 남겨 두고 요격을 하기를 원하며, "가왕(오광)은 교만하고, 또한 병략이나 권모술수를 모른다. 함께 계략을 짤 수 없다. 죽이지 않으면, 아마도 일은 실패로 끝날 것이다."라고 동료에게 말했다.[6] 결국 오광은 왕(진승)의 명령을 위조한 전장에 의해 살해당했고, 그 머리는 진승에게 바쳐졌다. 진승은 전장을 영윤(초나라 재상)・상장으로 임명했다.[6]
2. 1. 초기 생애와 배경
오광(吳廣)은 양하(陽夏, 현재의 타이캉현, 저우커우시, 허난성)에서 태어났으며, 자는 '''숙(叔)'''이었다.[2] 마을 어귀에 살았던 가난한 백성이었으나, 평소 사람을 아끼는 성품이었다.이세황제 원년(기원전 209년) 7월, 진나라는 마을 어귀에 사는 빈민들을 징발하여 하북의 어양으로 보내 지키게 했다. 오광도 징발되어 진승과 함께 900명의 둔병(屯兵)을 이끄는 둔장(屯長)이 되었다.
이들은 대택향에 주둔하던 중 큰 비를 만나 기한 내 어양에 도착할 수 없게 되었다. 진나라 법에 따르면 기한을 어기면 모두 처형될 운명이었다. 이에 오광은 진승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기로 모의하면서 "지금 도망가도 죽고, 반란을 일으켜도 죽으니, 차라리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낫다[6]"라고 말했다.
두 사람은 점쟁이를 찾아갔는데, "당신들의 일은 모두 이루어질 것이나, 당신들은 귀신이 될(죽을) 것이다"라는 점괘가 나왔다. 진승과 오광은 이를 귀신을 속이면 된다고 해석하고, 우선 군중을 위협하기로 했다. 물고기 뱃속에 진승이 왕이 될 것이라는 글을 적은 천을 넣고, 여우 울음소리를 흉내 내어 병사들을 속였다.
오광은 평소 인망이 두터워 따르는 병사가 많았다. 그는 둔병을 이끄는 장위(長尉)가 술에 취한 틈을 타 일부러 '도망치고 싶다'고 여러 번 말해 장위를 화나게 했다. 장위는 오광을 모욕하고 채찍질했으며, 칼까지 뽑았다. 오광은 장위의 칼을 빼앗아 죽이고, 진승도 가세하여 다른 장위 두 명도 죽였다.
진승과 오광은 민중의 기대에 부응하여 부소와 항연을 사칭하고, 옷의 오른쪽 어깨를 드러내고 대초(大楚)라 칭하며, 단을 쌓아 맹세하고 장위의 머리를 제물로 바쳤다.
장군이라 칭한 진승을 따라 오광은 도위가 되었다. 진승은 국호를 장초로 하고 왕위에 올랐다(진승·오광의 난).
2. 2. 진승·오광의 난
기원전 209년, 진승과 함께 일으킨 봉기는 진승·오광의 난으로 역사에 기록되어 있다.오광은 진승과 함께 900명의 농민군을 이끌고 허난성 일대를 점령했으며, 진나라의 폭정에 반발한 수많은 농민들이 합류하여 봉기군은 허난성의 중심지인 진주성을 큰 저항 없이 함락시켰다.[2]
진승이 장초를 건국하고 왕위에 오르자, 오광은 부왕(副王)에 임명되어 2만 군사를 이끌고 낙양을 공격하라는 명을 받았다. 그러나 낙양 근처에서 진나라 장수 장한과 대치하던 중, 부하인 전장에게 살해당했다.[2]
2. 2. 1. 봉기 초기: 세력 확장
오광은 진승과 함께 900명의 농민들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허난성 일대를 점령했다. 이들은 곧 수많은 농민들의 지지를 받아 허난성의 중심지인 진주성을 무혈로 함락시켰다.[2]오광과 진승은 기한 내에 병사들을 어양군(漁陽, 현재 베이징시 미윈구 남서부)으로 이동시켜 흉노에 대항해 북쪽 국경을 방어하는 임무를 수행해야 했다. 그러나 폭풍으로 인해 기한을 맞추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진나라 법에 따르면 이는 처형에 해당하는 중죄였다. 이에 오광과 진승은 반란을 결심하고, 병사들에게 부소와 초나라 장군 항연(項燕중국어)이 살아있으며 자신들의 대의에 합류했다고 선언했다. 또한 초나라의 재건을 선언하며 민심을 얻고자 했다.[3]
900명의 병력으로 진나라에 저항하는 것은 무모해 보였지만, 진나라의 억압에 시달리던 백성들은 빠르게 진승과 오광의 봉기에 합류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사람들은 진승에게 스스로를 "초나라 왕"으로 칭할 것을 요청했고, 진승은 장이와 진여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장초왕"()이라 칭하며 새로운 나라를 세웠다.
진승은 진현(陳縣, 현재 화이양현, 허난성)을 수도로 정하고 오광을 '초왕' 대행으로 임명하여 진나라 본토 공격을 명령했다.
2. 2. 2. 장초 건국과 역할
진승과 함께 농민 900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허난성 일대를 점령했고, 곧 수많은 농민들이 가담하여 허난성의 중심지 진주성을 무혈로 함락시켰다.[2]그 뒤 진승이 장초(張楚)라는 나라를 세우고 제왕(帝王)이 되자 진승에 의해 부왕(副王)으로 임명되어 2만 군사를 이끌고 낙양을 공략하라는 명을 받고 낙양으로 진군했다.[2]
이세 원년(기원전 209년) 7월, 진나라는 여문의 왼쪽에 사는 빈민들을 징발하여, 하북에 있는 어양으로 보내 지키게 하는 명령을 내렸고, 오광도 징발 대상이었다. 오광과 진승을 포함하여 모두 900명이었고, 진승과 함께 둔의 장이 되었다.[6]
대택향에 숙영했을 때, 큰 비가 내려 길이 통하지 않아, 도착 기한을 맞출 수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한을 맞추지 못하면, 진나라의 법에 따라 전원이 처형될 상황이었다. 오광은 진승과 상의하여 "지금 도망가도 죽고, 대계(반란)를 일으켜도 또한 죽는다. 어차피 죽을 바에는 나라를 위해 죽는 것이 낫다."라고 말했다.[6] 진승은 백성들에게 인기가 있는 부소・항연이라고 사칭할 것을 제안했고, 오광도 동의했다.
두 사람은 점쟁이에게 가서 점을 쳤는데, 점쟁이는 "당신들의 사업은 모두 성취되어 성공할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들의 점은 귀신이 될(죽을)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진승과 오광은 귀신을 속이면 된다고 해석하고, 우선 군중을 위협하기로 결심한다. 두 사람은, 진승이 왕이 될 것이라는 계시를 물고기 뱃속에 넣은 천과 여우의 울음소리를 흉내내는 것으로 병사들에게 전하여 믿게 했다.
오광은 인망이 있었고, 병사들은 오광을 위해 돕고자 하는 자가 많았다. 둔의 병사를 이끄는 장위(장위)가 술에 취해 있는 틈을 타, 오광은 '도망치고 싶다'고 일부러 여러 번 말해 장위를 화나게 하고, 오광을 모욕하게 하여, 병사들이 장위에게 분노를 느끼게 했다. 장위는 오광을 채찍으로 때린 데다, 칼까지 뽑았다. 오광은 일어서서, 장위의 칼을 빼앗아 장위를 죽였다. 진승도 가세하여, 2명의 장위를 더 죽였다.
진승과 오광은 민중의 기대에 부응하여, 부소와 항연을 사칭하고, 옷의 오른쪽 어깨를 벗고, 대초라고 칭하며, 단을 만들어 맹세하고, 장위의 머리를 제물로 바쳤다.
장군이라고 칭한 진승을 따라, 오광은 도위를 칭한다. 진을 제압한 진승은 국호를 장초로 하고, 왕을 칭했다(진승·오광의 난).
오광은 가왕이 되어, 여러 장수들을 감독하여 서쪽으로 가서 형양을 치게 되었다. 같은 해 8월, 오광은 형양까지 진격하여, 삼천 군수인 이유 (진나라 이사의 장남)가 지키는 형양을 포위했지만, 함락시킬 수 없었다.
이 무렵, 별동군을 이끈 진승의 장군인 주문 (주장)이 형양의 서쪽에 있는 함곡관까지 이르러, 함곡관을 돌파했다. 같은 해 9월, 주문의 군대가 희에서 진을 쳤다. 진나라는 죄수와 노예를 징발하여 병사로 삼아, 장한에게 이끌어 주문을 토벌하게 했다. 주문의 군대는 패주했다.
이세 2년(기원전 208년) 11월, 장한에게 여러 번 패배하여, 주문은 자살했다. 초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 (오광의 부하가 된) 장군인 전장은 형양에 병력을 조금 남겨 두고, 요격을 하기를 원하며, "가왕(오광)은 교만하고, 또한, 병략이나 권모술수를 모른다. 함께 계략을 짤 수 없다. 죽이지 않으면, 아마도 일은 실패로 끝날 것이다."라고 동료에게 말했다.
오광은 왕(진승)의 명령을 위조한 전장에 의해 살해당했고, 그 머리는 진승에게 바쳐졌다. 진승은 전장을 영윤(초나라 재상)・상장으로 임명했다. 전장은 형양성에서 벗어나, 진군을 요격했지만, 패배하여 전사했다.
2. 3. 형양 전투와 죽음
오광은 진승과 함께 농민 900명을 이끌고 반란을 일으켜 허난성 일대를 점령했고, 곧 수많은 농민들이 가담하여 허난성의 중심지 진주성을 무혈로 함락시켰다.[2]그 뒤 진승이 장초라는 나라를 세우고 제왕(帝王)이 되자 진승에 의해 부왕(副王)으로 임명되어 2만 군사를 이끌고 낙양을 공략하라는 명을 받고 낙양으로 진군했다.[2] 그러나 형양을 포위하던 중, 오광의 군대는 갇히게 되었다. 오광의 장군들은 장한 휘하의 진나라 증원군이 곧 도착하여 양쪽에서 공격해 올 것을 우려했다. 그들은 오광의 계획을 변경하고 형양 포위를 끝낸 다음 장한의 군대와 직접 맞서 싸우기를 원했다. 오광이 자신의 계획을 변경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지 못한 그들은 오광을 암살하고 군대를 장악했다.[3]
이세 2년(기원전 208년) 11월, 장한에게 여러 번 패배하여, 주문은 자살했다. 초군은 큰 타격을 입었다.[6]
(오광의 부하가 된) 장군인 전장은 형양에 병력을 조금 남겨 두고, 요격을 하기를 원하며, "가왕(오광)은 교만하고, 또한, 병략이나 권모술수를 모른다. 함께 계략을 짤 수 없다. 죽이지 않으면, 아마도 일은 실패로 끝날 것이다."라고 동료에게 말했다.[6]
오광은 왕(진승)의 명령을 위조한 전장에 의해 살해당했고, 그 머리는 진승에게 바쳐졌다. 진승은 전장을 영윤(초나라 재상)・상장으로 임명했다.[6]
3. 평가 및 영향
오광은 중국과 도교 사원에서 문신으로 나타나며, 진승과 함께 짝을 이루는 경우가 많다.
3. 1. 역사적 평가
사타케 야스히코는 "(전략) 민중을 끌어들여 가장 과격한 반진 체질을 보인 것은 초(楚) 지역의 반란이다. (중략) 진섭·오광 집단의 실패는, 단적으로 말해, 이 초 지역의 철저한 민중적 반진 체질을 지속적으로 조직화하지 못한 점에 기인할 것이다"라고 평하고 있다.[7]4. 문화적 묘사
오광은 때때로 중국과 도교 사원에서 문신으로 나타나며, 보통 진승과 함께 짝을 이룬다.
5. 사료
참조
[1]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vol.48
[2]
서적
Shiji, vol.48
[3]
서적
Records of the Grand Historian, vol.48
[4]
서적
史記』秦楚之際月表第四・陳渉世家
[5]
서적
史記』秦楚之際月表第四
[6]
서적
劉邦
[7]
서적
劉邦
[8]
문서
중화인민공화국 허난성 저우커우 시 타이캉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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