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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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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량은 전국 시대 한나라의 재상 집안 출신으로, 진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킨 후 진시황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후 유방을 도와 초한전쟁에서 한나라 건국에 기여했으며, 유방의 책사로 활약했다. 유방은 장량의 책략을 높이 평가하여 삼걸 중 한 명으로 칭찬했다. 한나라 건국 후에는 정치에서 은퇴하여 도교를 수행하며 은둔 생활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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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량 - [인물]에 관한 문서
인물 정보
장량 초상
서한 시대 홍문연 장면을 묘사한 벽화 속 장량의 초상화 (뤄양 고대 무덤 박물관 소장)
이름장량
로마자 표기Jang Ryang
본관불명
자방 (子房)
시호문성후 (文成侯)
작위유후 (留侯)
출생기원전 251년경
사망기원전 189년 (62세)
생애 및 경력
직업군사 전략가, 정치가
주요 활동한왕 성 섬김
유방 섬김
가족 관계
자녀장불의
장벽강
기타
종교도교
상징황소
제부소
국가 조디악 호랑이 (Zhìshao)
인도차이나표범
조디악 표범고양이 (Zirem)

2. 생애

장량의 할아버지 장개지는 전국시대 (韓)의 소후(昭侯), 선혜왕(宣惠王), 양왕(襄王) 등 3대에 걸쳐 재상을 지냈고, 아버지 장평도 희왕(釐王), 환혜왕을 섬기며 재상을 맡은 한나라 명문가 출신이었다.[86] 《사기색은》(史記索隱)에는 장량의 조상은 한의 왕족이라 주 왕실과 같은 희성(姬姓)이었지만 진의 통일 이후 성명을 바꿨다고 하면서, 옛날 한나라에 있던 장거질(張去疾)·장견(張譴)이 장량의 선조가 아닐까 추측했다.

아버지가 죽고 20년 뒤인 기원전 230년에 한이 에 멸망하여 집안은 몰락했고, 그때 아직 관직을 얻지는 못한 채였다.[86]

조국을 멸망시킨 복수를 위해 자신의 전재산을 모두 팔아 자금을 마련하고, 동생이 죽었을 때조차 장례 비용을 대주지 않았다고 한다. 동지를 찾아 동쪽으로 떠난 장량은 창해공(滄海君)이라는 자를 얻어 대화를 나눠보고, 창해공으로 하여금 기원전 218년경, 박랑사(현재의 허난 성 양장)를 지나는 시황제의 행차를 노리고 무게가 120근(약 30kg)이나 되는 철퇴를 던져 시황제가 탄 수레를 부수어 시황제를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철퇴는 시황제의 수레가 아닌 다른 빈수레에 맞아 암살은 실패하고 장량 등은 도망쳤다. 이름까지 바꾸고 하비에 숨은 그는 황석공이라는 인물로부터 병법을 배웠다고 한다.

《사기》에 실린 관련 일화에 따르면, 어느 날 장량이 다리를 건너는데 남루한 차림의 노인이 자신의 신발을 다리 밑으로 던지고는 장량더러 가서 주워오라고 했다. 장량은 화를 참고 가서 주워다 공손하게 바쳤지만, 노인은 다시 자신의 발을 내밀며 신겨달라고 했다. 장량은 이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눈치채고 공손히 무릎을 꿇고 노인에게 신발을 신겼는데, 노인은 웃으며 그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노인은 다시 돌아와 장량에게 가르쳐줄 것이 있으니 닷새 뒤 아침에 이곳에서 만나자고 했다. 닷새 뒤 아침에 장량은 약속 장소로 갔지만, 이미 노인은 그곳에 와있었고 어른과 약속해놓고 그것을 어겼다며 장량에게 핀잔을 주고는 닷새 뒤에 다시 오라고 하고 가버렸다. 닷새가 지나서 장량은 다시 해가 뜨기 전에 약속 장소에서 기다리려 했지만, 이번에도 노인은 장량보다 먼저 와서 기다리면서 다시 닷새 뒤에 오라고 말하고는 가버렸다. 장량은 다시, 이번에는 아예 밤부터 약속 장소에 나가 노인을 기다렸고, 잠시 후에 나타난 노인은 장량을 칭찬하며 그에게 태공망(太公望)의 병법서를 전해주며 "13년 뒤에 산기슭에서 네가 마주치게 될 노란 돌이 바로 나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 훗날 장량은 이 예언대로 자신이 산에서 발견한 노란 돌을 가지고 돌아와 이를 가보로 전했으며, 사후 장량의 무덤에도 함께 부장되었다고 한다.

상관주(上官周)가 1743년에 그린 『만효당화전』(萬笑堂畫傳)에 나오는 청나라 시대 장량 그림


베이징 하계궁전의 긴 복도에서 장량이 황석공의 신발을 다시 신겨주는 그림


이 황석공 이야기는 물론 전설이지만, 장량이 누군가 스승을 두고 병법을 배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때 황석공이 장량에게 주었다는, 소위 태공망의 병법서라는 것이 현존하는 《육도》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육도》는 위, 진 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여겨지므로 적어도 장량이 읽은 것은 현존하는 《육도》는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 하비에서 도피생활을 하면서 항우(項羽)의 숙부 항백(項伯)이 사람을 죽이고 도망쳐온 것을 숨겨주기도 했다.

그 후 유방이 군사를 일으키자 1백여 명의 종을 데리고 따랐다가, 항량(項梁)에게 옛 한나라 공자 횡양군 성을 한왕(韓王)에 옹립하도록 했으며 한의 사도에 임명되었다. 이후 한성이 항우(項羽)에게 죽자 다시 유방에게 귀순하고 이때부터 유방의 중요 참모가 되어 홍문연에서 유방을 구하고 한신을 천거하는 등, 그는 전략적인 지혜를 잘 써서 유방이 한을 세우고 천하를 통일하도록 도와주었다.

명나라 시대 장량 초상화(장량상축), 고궁박물원 소장


장량 초상화 (국립고궁박물원)


『상산사호도 병풍』가노 나오노부(狩野尚信), 보스턴 미술관(ボストン美術館) 소장


고조 6년(기원전 201년), 공신들에게 포상할 때 고조에게 책략으로써 세운 공을 인정받아 제나라에서 3만 호를 마음대로 택하라는 말을 받았지만, 스스로 사양하고 고조를 처음 만난 유(留) 땅(당시 초나라 내사지의 땅으로 지금의 장쑤성 페이현 동남에 있다)을 받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유후에 봉해졌다.[87] 고조의 공신 중에서는 62위에 불과했지만, 봉읍은 1만 호로 유택(1만 2천 호), 조참(1만 6백 호) 다음으로 가장 많았다.[88] 한이 세워진 후에는 정치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으며 단지 후계자 문제로 여후에게 자문을 해줬다고 한다.

장가계, 후난성에 있는 장량묘

2. 1. 가문과 출신

장량(張良)은 진(秦)나라가 한(韓)나라를 멸망시키기 전, 한나라 수도였던 신정(新鄭)(현재 정주, 허난성)에서 태어났다. 그의 본관은 성부(城父)(현재 보주, 안후이성 성부진)였다. 그는 한나라 귀족 가문 출신이었으며, 그의 할아버지는 3대에 걸쳐 한나라 재상을 역임했고, 그의 아버지도 2대에 걸쳐 재상을 지냈다. 기원전 230년 진(秦)나라의 통일 전쟁으로 한나라가 멸망하면서 장량은 가문의 유산을 이을 기회를 놓쳤다.

2. 2. 진시황 암살 시도와 은둔 생활

장량의 할아버지 장개지는 전국시대 (韓)의 소후(昭侯), 선혜왕(宣惠王), 양왕(襄王) 등 3대에 걸쳐 재상을 지냈고, 아버지 장평도 희왕(釐王), 환혜왕을 섬기며 재상을 맡은 한나라 명문가 출신이었다.[11][12] 기원전 230년, 진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키자[86], 장량은 조국을 잃은 복수를 위해 전 재산을 털어 진시황 암살을 계획했다. 동생이 죽었을 때조차 장례를 치르지 않고, 모든 재산을 암살 자금으로 사용했다.[11]

장량은 동쪽으로 가 창해공(滄海君)이라는 자를 만나고, 그와 함께 힘센 장사를 고용하여 암살을 준비했다.[15] 기원전 218년, 진시황(秦始皇)의 행렬이 박랑사(현재의 허난 성 양장)를 지날 때, 무게가 120근(약 30kg[16])이나 되는 철퇴를 던져 진시황이 탄 수레를 공격했다.[15] 그러나 철퇴는 부차에 맞아 암살은 실패했고,[15] 장량은 가명을 쓰며 하비(下邳)로 도망쳐 임협의 무리에 가담하며 은둔 생활을 했다.[17] 이때 사람을 죽이고 도망 중이던 항백(항우의 삼촌)을 숨겨주기도 했다.[17]

하비에서 은둔 생활을 하던 중, 장량은 황석공이라는 노인을 만나 병법을 배우게 된다.[3] 어느 날 장량이 다리를 건너는데 남루한 차림의 노인이 자신의 신발을 다리 밑으로 던지고는 장량에게 주워오라고 했다.[18] 장량은 화를 참고 공손하게 신발을 주워 바쳤지만, 노인은 다시 자신의 발을 내밀며 신겨달라고 했다.[18] 장량은 노인이 평범한 사람이 아님을 눈치채고 공손히 무릎을 꿇고 노인에게 신발을 신겼다.[18] 노인은 웃으며 떠났지만, 잠시 후 돌아와 장량에게 닷새 뒤 아침에 다시 만날 것을 제안했다.[18][19]

이후 두 번의 만남에서 노인은 장량이 약속 시간보다 늦었다며 핀잔을 주었지만,[20] 세 번째 만남에서 장량은 밤부터 약속 장소에서 기다려 노인을 만족시켰다. 노인은 장량에게 태공망(太公望)의 병법서를 전해주며 "13년 뒤에 산기슭에서 네가 마주치게 될 노란 돌이 바로 나다"라고 말하고 사라졌다.[20] 훗날 장량은 이 예언대로 자신이 산에서 발견한 노란 돌을 가지고 돌아와 이를 가보로 삼았으며, 사후 장량의 무덤에도 함께 부장되었다고 한다.[19][20]

2. 3. 유방과의 만남과 초한전쟁

장량의 할아버지인 장개지(張開地)는 전국시대 (韓)의 소후(昭侯), 선혜왕(宣惠王), 양왕(襄王)등 3대에 걸치는 군주 아래서 재상을 지냈고, 아버지 장평(張平)도 희왕(釐王), 환혜왕을 섬기며 재상을 맡았다.[86] 기원전 230년에 한이 에 멸망하여 집안은 몰락했고, 그때 아직 관직을 얻지는 못한 채였다.[86]

조국을 멸망시킨 복수를 위해 자신의 전재산을 모두 팔아 자금을 마련하고, 동생이 죽었을 때조차 장례 비용을 대주지 않았다고 한다. 동지를 찾아 동쪽으로 떠난 장량은 창해공(滄海君)이라는 자를 얻어 대화를 나눠보고, 창해공으로 하여금 기원전 218년경, 박랑사(현재의 허난 성 양장)를 지나는 시황제의 행차를 노리고 무게가 120근(약 30kg)이나 되는 철퇴를 던져 시황제가 탄 수레를 부수어 시황제를 암살하려 했다. 그러나 철퇴는 시황제의 수레가 아닌 다른 빈수레에 맞아 암살은 실패하고 장량 등은 도망쳤다. 이름까지 바꾸고 하비에 숨은 그는 황석공이라는 인물로부터 병법을 배웠다고 한다.

《사기》에 실린 관련 일화에 따르면, 어느 날 장량이 다리를 건너는데 남루한 차림의 노인이 자신의 신발을 다리 밑으로 던지고는 장량더러 가서 주워오라고 했다. 장량은 화를 참고 가서 주워다 공손하게 바쳤지만, 노인은 다시 자신의 발을 내밀며 신겨달라고 했다. 장량은 이 노인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눈치채고 공손히 무릎을 꿇고 노인에게 신발을 신겼는데, 노인은 웃으며 그 자리를 떠났다. 잠시 후 노인은 다시 돌아와 장량에게 가르쳐줄 것이 있으니 닷새 뒤 아침에 이곳에서 만나자고 했다. 훗날 장량은 이 예언대로 자신이 산에서 발견한 노란 돌을 가지고 돌아와 이를 가보로 전했으며, 사후 장량의 무덤에도 함께 부장되었다고 한다.

이 황석공 이야기는 물론 전설이지만, 장량이 누군가 스승을 두고 병법을 배웠음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이때 황석공이 장량에게 주었다는, 소위 태공망의 병법서라는 것이 현존하는 《육도》라는 이야기도 있지만, 《육도》는 위, 진 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여겨지므로 적어도 장량이 읽은 것은 현존하는 《육도》는 아닌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 이 하비에서 도피생활을 하면서 항우(項羽)의 숙부 항백(項伯)이 사람을 죽이고 도망쳐온 것을 숨겨주기도 했다고 한다.

진 이세의 통치 기간 동안 중국 전역에서 진나라를 타도하기 위한 여러 차례의 봉기가 일어났다. 장량(張良) 또한 약 100명의 병사를 모아 반란을 일으켰으나, 세력이 너무 약했기에 경주(荊咎)에게 합류하였다. 그는 여정 중 유방(劉邦)을 만났고[4] 유방의 카리스마에 감명받아 결정을 바꾸어 유방에게 합류했다. 장량은 유방의 일시적인 참모가 되어 유방을 따라 향량(項梁)의 반란군에 합류했다.

그 후 유방이 군사를 일으키자 1백여 명의 종을 데리고 따랐다가, 항량(項梁)에게 옛 한나라 공자 횡양군 성을 한왕(韓王)에 옹립하도록 했으며 한의 사도에 임명되었다. 이후 한성이 항우(項羽)에게 죽자 다시 유방에게 귀순하고 이때부터 유방의 중요 참모가 되었다.

다음 해, 향량은 경주를 제거한 후 미신(羋心)을 추나라의 회왕(懷王) 2세로 옹립했다. 장량은 한(韓)나라를 재건하는 것이 목표였기에, 향량을 설득하여 한나라를 재건하도록 했다. 한나라 왕족의 후손인 한 성(韓成)이 한나라의 왕으로 즉위했고, 장량은 한나라의 승상(丞相)으로 임명되었다. 한 성의 군대는 예전 한나라의 영토였던 진나라의 여러 도시를 점령하려 했으나 큰 성공을 거두지 못하고 약 1년 동안 게릴라전을 벌였다. 그해 후반, 향량은 정도(定陶) 전투에서 전사했고, 회왕 2세는 항우(項羽) (향량의 조카)와 유방에게 각각 군대를 지휘하여 진나라를 공격할 것을 명령하며, 관중(關中) (진나라의 중심지)에 먼저 진입하는 자에게 ‘관중왕’의 칭호를 수여할 것을 약속했다.

기원전 207년, 유방과 한 성의 연합군은 한나라의 옛 수도였던 양재(陽翟)(오늘날 河南성 유주시(禹州市))를 정복했다. 한 성은 양재를 방어하기 위해 남았고, 장량은 유방의 일시적인 참모로 활동했다. 장량은 제안한 전략으로 유방이 관중 진입 경쟁에서 승리하는 데 기여했다. 예를 들어, 요(堯)관 전투에서 장량은 진나라 장수에게 뇌물을 주어 항복하도록 유인할 것을 제안했다. 유방은 항복한 진나라 군대를 자신의 군대에 편입하려 했으나, 장량은 장수가 항복했더라도 일부 군인들은 항복할 의지가 없다고 경고했다. 그날 밤, 유방의 군대는 진나라 군대를 기습하여 큰 승리를 거두었다. 또 다른 사건에서 장량은 유방에게 완성(宛城)에서 우회하지 말라고 경고했는데, 그렇게 하면 적에게 포위될 위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함양(장안)의 촉궐에 입성한 유방은 그곳에 가득한 부귀영화에 마음이 흔들려 영원히 머물고 싶어 했다. 그러나 장량은 유방에게 방탕한 쾌락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일깨워주었고, 유방은 부하들에게 보물을 봉인하고 파상으로 이동하여 항우와 다른 반군의 도착을 기다리라고 명령했다. 이 기간 동안 유방은 장량의 조언을 따라 관중을 자애롭게 다스려 평화와 안정을 회복하고, 부하들이 도시를 약탈하거나 백성을 해치는 것을 금했다.

기원전 206년, 항우의 군대가 함곡관(관중의 동쪽 관문)에 도착하자 유방은 부하들에게 항우의 군대가 관중으로 진입하는 것을 막으라고 명령했다. 항우는 유방이 관중에 먼저 입성한 것을 알고 격분하여, 범증과 유방 측의 탈영자인 조오상의 부추김에 따라 유방을 죽이려 했다. 항우의 삼촌인 항박은 장량의 오랜 친구였는데, 그는 비밀리에 장량에게 항우가 유방을 공격할 계획임을 경고했다. 유방은 자신의 군대가 항우를 상대하기에는 너무 약했기 때문에 그 소식을 듣고 충격과 공포에 휩싸였다. 장량은 유방에게 항우가 주최하는 홍문연회에 참석하여 항우의 경계심을 풀고 유방이 항우에게 대항할 의도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라고 조언했다. 항박의 도움으로 유방은 위험한 연회에서 살아남았고, 항우는 유방을 죽일 생각을 접었다. 그러나 범증은 불만을 품고 항우의 사촌인 항장에게 칼춤을 추는 척하며 유방을 죽일 기회를 엿보라고 지시했다. 항박은 다시 한번 개입하여 유방의 목숨을 구했다.

한편, 장량은 밖으로 나가 번쾌를 찾아 유방을 구출할 계획을 세웠다. 장량의 지시를 받은 번쾌는 텐트 안으로 뛰어들어 항우를 공개적으로 비난하며 유방의 업적을 이야기하고 항우에게 대항할 의도가 없음을 강조했다. 유방은 변소에 간다는 구실로 연회를 떠났고, 장량의 지시를 받고 근처에서 기다리고 있던 하후영을 만났다. 장량은 항우의 주의를 끌기 위해 남아 있으면서 유방이 도망칠 수 있도록 했다. 떠나기 전에 장량은 항우와 범증에게 한 쌍의 옥기를 선물했다.

항우는 전 촉나라를 십팔왕국으로 분할하여 관중 땅을 삼진에게 할양했는데, 이는 회왕의 이전 약속에 따르면 마땅히 유방의 땅이었다. 유방은 대신 먼 바슈 지역(현재 사천성)으로 이주하여 한왕에 봉해졌다. 한성은 한왕으로서 통치권을 유지했고, 장량은 유방의 곁을 떠나 한나라로 돌아가 계속 승상으로 섬겼다. 헤어지기 전에 유방은 장량에게 금과 진주를 선물했는데, 장량은 이 모든 것을 항복에게 주었다. 장량은 또한 유방에게 한중으로 가는 길에 바슈로 이어지는 갈랑도로를 파괴하여 항우가 유방이 돌아와 자신에게 도전할 계획이라는 의심을 줄이라고 촉구했다.

明月협 고잔도


한성은 한왕이었지만, 항우는 그가 자신의 왕국을 다스리도록 허락하지 않고 그를 자신의 서초 수도인 팽성(현재 장쑤성 숙현)으로 데려가게 했다. 한성은 나중에 '랑후'로 강등되었고 항우의 명령으로 살해되었다. 항우는 한성의 왕국을 빼앗아 자신의 신하인 정창을 새로운 한왕으로 삼았다. 장량은 여전히 새로운 체제 하에서 한나라의 승상이었지만, 자신의 불안정한 위치와 항우가 한나라를 재건하려는 자신의 희망을 꺾은 것을 알고 있었다. 장량은 나중에 한나라를 떠나 기원전 206년 겨울 유방에게 합류했다. 유방은 장량에게 성신후의 작위를 수여했고, 장량은 그때부터 유방의 영구적인 고문이 되었다.

기원전 206년, 유방의 군대가 삼진을 정복한 후, 유방과 항우는 중국 패권을 놓고 4년간의 권력 다툼을 벌였는데, 이는 역사적으로 초한전쟁으로 알려져 있다. 기원전 205년, 유방은 팽성 전투에서 항우에게 패배하고 낙양으로 후퇴했다. 장량은 항우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 소위 "낙양 계책"(下邑之謀중국어)을 유방에게 제안했다. 유방은 장량의 조언에 따라 소하를 보내 영포를 설득하여 자신의 편에 붙게 하고, 팽월과 연합했으며, 한신에게 군대 일부를 이끌고 북방 전선의 다른 영토를 공격하도록 했다.

기원전 204년, 유방은 성양에서 항우에게 포위되었고 양측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리이지는 유방에게 전국 시대의 이전 여러 나라들을 재건하고 그 왕족의 후손들을 각각의 왕위에 앉히자고 제안했다. 이 계획은 항우와의 전쟁에서 유방을 도울 여러 제후국의 통치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장량은 한나라보다 초나라의 군사력이 우세했기 때문에 여러 제후국들이 오히려 서초를 지지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하여 이 계획을 반대했다. 유방은 문제점을 깨닫고 즉시 리이지의 계획을 기각했다.

기원전 203년, 위수 전투에서 승리한 후, 한신은 기나라를 정복하고 사자를 유방에게 보내 자신을 기나라의 임시 왕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유방은 여전히 성양에 포위되어 있었고, 한신이 자신의 지원을 위해 올 것이라고 기대했기에 이 요청을 듣고는 격분했다. 장량은 유방에게 한신의 요청을 거절하면 한신이 불만을 품고 유방에게서 독립을 선언하여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일깨워주었다. 유방은 마지못해 승낙하고 장량을 보내 한신에게 왕의 인장을 전달하게 했다. 장량은 한신을 만나 한나라의 유방에 대한 충성을 재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계명산의 달』(월옥방년 ‘월백자’) 항우의 진영을 향해 초의 곡을 생으로 연주하는 장량(개하의 전투)


기원전 203년 말, 장량은 항우가 삼면으로 포위되면서 유방에게 유리하게 전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알았다. 장량은 진평과 함께 유방에게 홍구협약을 파기하고 기회를 틈타 서초를 제압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구릉 전투에서 유방은 한신과 팽월의 예상된 증원이 도착하지 않아 항우에게 패했다. 장량은 유방에게 한신과 팽월이 제후왕의 작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봉토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유방은 장량의 조언에 따라 한신과 팽월에게 땅을 나눠주었다. 두 달 후, 장량의 예측대로 한신과 팽월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유방의 군대와 함께 서초를 공격하여 기원전 202년 개하 전투에서 항우를 패퇴시켰다.

홍문연에서 유방을 구하고 한신을 천거하는 등, 그는 전략적인 지혜를 잘 써서 유방이 한을 세우고 천하를 통일하도록 도와주었다.

고조 6년(기원전 201년), 공신들에게 포상할 때 고조에게 책략으로써 세운 공을 인정받아 제나라에서 3만 호를 마음대로 택하라는 말을 받았지만, 스스로 사양하고 고조를 처음 만난 유(留) 땅(당시 초나라 내사지의 땅으로 지금의 장쑤성 페이현 동남에 있다)을 받고 싶다고 했다. 그래서 유후에 봉해졌다.[87] 고조의 공신 중에서는 62위에 불과했지만, 봉읍은 1만 호로 유택(1만 2천 호), 조참(1만 6백 호) 다음으로 가장 많았다.[88] 한이 세워진 후에는 정치에 일체 관여하지 않았으며 단지 후계자 문제로 여후에게 자문을 해줬다고 한다.

2. 4. 한나라 건국과 은퇴

장량은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모두 전국시대 (韓)나라의 재상을 지낸 명문가 출신이었다.[86] 그러나 기원전 230년 한나라가 에 멸망하면서 가문이 몰락했고, 장량은 조국을 위해 복수하고자 전 재산을 털어 자객을 모았다.[86] 기원전 218년 창해공(滄海君)과 함께 시황제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이후 이름을 바꿔 황석공에게 병법을 배우며 은둔 생활을 했다.[86]

유방이 군사를 일으키자 장량은 그를 따랐고, 항량(項梁)에게 옛 한나라 공자 횡양군 성을 한왕(韓王)으로 옹립하도록 건의하여 한나라의 사도가 되었다. 한성이 항우(項羽)에게 죽은 후 유방에게 귀순하여 한신을 천거하고 홍문연에서 유방을 구하는 등 유방의 책사로서 활약했다.[87]

기원전 202년 유방이 한나라를 건국한 후, 장량은 정식 관직을 맡지 않았지만 고조의 중요한 책사 역할을 수행했다. 루경과 함께 수도를 장안(長安)으로 정할 것을 건의했는데, 장안은 낙양보다 전략적 위치가 유리하고, 비옥한 땅과 천혜의 방어 시설로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이다.[52][53] 한번은 고조가 신하들의 모반을 의심하자, 장량은 고조가 가장 미워하는 옹치에게 작위를 수여하여 다른 신하들을 안심시키는 계책을 내놓기도 했다.[50][51]

기원전 201년, 고조는 장량에게 제나라 3만 호를 식읍으로 내리려 했으나, 장량은 이를 사양하고 고조와 처음 만난 유(留) 땅을 받기를 청하여 유후(留侯)에 봉해졌다.[48][87] 이후 장량은 정치에서 은퇴하여 도교를 수행하며 은둔 생활을 했다.[55]

고조가 태자 유영을 폐위하려 하자, 여후의 요청으로 상산사호를 추천하여 태자의 지위를 유지하도록 도왔다.[56] 장량은 기원전 186년에 사망하여 문성후(文成侯)라는 시호를 받았다.[59][60][61]

2. 5. 그의 죽음

장량의 말년 생애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거의 없으며, 그의 최종 매장지는 역사를 통틀어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62][63] 장량은 타고난 허약 체질이었기에 도교의 도인술을 행하고, 곡식을 끊고 문을 닫아 1년 이상 외출하지 않았다.[55]

이 무렵 유방은 이미 황태자로 책봉되었던 정실 여치(呂雉)의 아들 유영을 폐위하고, 측실 척부인(戚夫人)의 아들 유여를 황태자로 삼고자 하였으며, 중신들의 간언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56] 위기감을 느낀 여치는 장량에게 도움을 청했고, 장량은 유방이 여러 차례 등용하려 했으나 실패했던 저명한 학자들인 동원공/東園公중국어, 녹리선생/甪里先生중국어, 기리기/綺里季중국어, 하황공/夏黃公중국어을 유영의 스승으로 삼도록 건의하였다.[56] 이들은 모두 수염과 눈썹이 하얗게 센 노인이었기에 상산사호라 불린다. 유방은 상산사호가 유영 곁에 있는 것을 보고 놀라 그 이유를 묻자, 그들은 유영의 인품을 칭찬하며 유영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천하 백성들의 평판 때문에 왔다고 대답했다. 유방은 "깃털과 날개가 이미 만들어졌으니 바꿀 수 없다"라고 척부인에게 말하고, 폐위를 포기했다.[56][57]

여치는 장량에게 은혜를 느끼고 있었고, 장량이 특수한 호흡법으로 몸을 가볍게 하려는 것을 듣고 "인생은 한 번뿐이고 짧고 허무한 것입니다. 어찌 유후(장량)는 스스로를 괴롭히십니까?"라고 타이르며, 장량에게 억지로라도 식사를 하도록 했기에, 장량은 어쩔 수 없이 여치의 말대로 식사를 했다.[58]

유방의 죽음으로부터 9년 후인 기원전 186년에 사망[59][60]하였고, 문성후로 시호를 받았다. 아들 장불의가 뒤를 이었다.[61] 당나라의 지리서 『괄지지(括地志)』에 따르면 장량의 무덤은 서주 패현의 동쪽 65리에 있었다고 하나[62], 무덤의 전승지에는 또한 허난성 란고현 등 여러 곳이 있어 어느 것이 진짜인지는 불명확하다.[63] 현재 낙관현, 허난성 남서쪽 6km 지점에 장량묘가 있으며, 산둥성, 웨이산현 남쪽에도 장량묘가 있다.

3. 장량의 책략과 공헌

기원전 206년, 유방의 군대가 삼진을 정복한 후, 유방과 항우는 중국 패권을 놓고 4년간 초한전쟁을 벌였다. 기원전 205년, 유방은 팽성 전투에서 항우에게 패배하고 낙양으로 후퇴했다. 장량은 항우에 대항하기 위한 전략, 소위 "낙양 계책"(下邑之謀중국어)을 유방에게 제안했다. 유방은 장량의 조언에 따라 소하를 보내 영포를 설득하여 자신의 편에 붙게 하고, 팽월과 연합했으며, 한신에게 군대 일부를 이끌고 북방 전선의 다른 영토를 공격하도록 했다.

기원전 204년, 유방은 성양에서 항우에게 포위되었고 양측은 교착 상태에 빠졌다. 리이지는 유방에게 전국 시대의 이전 여러 나라들을 재건하고 그 왕족의 후손들을 각각의 왕위에 앉히자고 제안했다. 이 계획은 항우와의 전쟁에서 유방을 도울 여러 제후국의 통치자들의 지지를 얻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장량은 한나라보다 초나라의 군사력이 우세했기 때문에 여러 제후국들이 오히려 서초를 지지할 가능성이 더 높다고 판단하여 이 계획을 반대했다. 유방은 문제점을 깨닫고 즉시 리이지의 계획을 기각했다.

기원전 203년, 위수 전투에서 승리한 후, 한신은 기나라를 정복하고 사자를 유방에게 보내 자신을 기나라의 임시 왕으로 임명해 줄 것을 요청했다. 당시 유방은 여전히 성양에 포위되어 있었고, 한신이 자신의 지원을 위해 올 것이라고 기대했기에 이 요청을 듣고는 격분했다. 장량은 유방에게 한신의 요청을 거절하면 한신이 불만을 품고 유방에게서 독립을 선언하여 위험한 상황에 처할 수 있다고 일깨워주었다. 유방은 마지못해 승낙하고 장량을 보내 한신에게 왕의 인장을 전달하게 했다. 장량은 한신을 만나 한나라의 유방에 대한 충성을 재확인하는 데 성공했다.

기원전 203년 말, 장량은 항우가 삼면으로 포위되면서 유방에게 유리하게 전세가 기울었다는 것을 알았다. 장량은 진평과 함께 유방에게 홍구협약을 파기하고 기회를 틈타 서초를 제압할 것을 건의했다. 그러나 구릉 전투에서 유방은 한신과 팽월의 예상된 증원이 도착하지 않아 항우에게 패했다. 장량은 유방에게 한신과 팽월이 제후왕의 작위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봉토를 받지 못했기 때문에 군대를 동원하지 않았다고 설명했다. 유방은 장량의 조언에 따라 한신과 팽월에게 땅을 나눠주었다. 두 달 후, 장량의 예측대로 한신과 팽월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유방의 군대와 함께 서초를 공격하여 기원전 202년 개하 전투에서 항우를 패퇴시켰다.

4. 장량에 대한 평가



유방은 장량의 책략이 막사 안에서 짜여지고 승리는 천리 밖에서 결정된다고 평가하며, 한신, 소하와 함께 "인걸"이라고 칭찬했다.[74] 사마천은 『사기』에서 장량의 풍모를 위풍당당하고 기이할 것이라 상상했으나, 초상화를 본 후 아름다운 여인과 같다고 하며 용모로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고 서술했다.[75][76] 또한 『태사공자서』에서는 "어려운 일을 쉬운 상태에서 처리하고, 큰 문제는 작은 상태에서 해결했다"라고 평가했다.[77]

남송 말기의 유학자 황진은 장량의 계책 하나하나가 한나라의 존망과 안위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하며, 그를 삼걸 중 으뜸이라 칭송했다.[78] 삼국시대의 조조는 순욱을 "나의 자방"이라고 부르며 기뻐했다.[79] 북송의 시인 소식은 『유후론』에서 황석공이 장량에게 가르친 것은 작은 일을 참고 견디어 큰일을 이루는 것이라 평했다.[80]

장량이 황석공으로부터 책을 받았다는 전설은 한나라의 수명 신화로 발전했고, 장량은 단순한 참모가 아니라 주나라의 태공망과 같은 천명의 중개자로 여겨진다.[81]

장량은 일본에서도 뛰어난 군사로 알려져 있으며, 흑전효고는 덕천수충에게 "현세의 장량"이라고 평가받았다.[82] 황석공이 떨어뜨린 신을 줍고 병법서를 받는 장량의 이야기(자방취리담)는 오가 이야기, 능이나 행약무의 소재가 되었다.[83] 에도 시대에는 『통속한초군담』 등을 통해 장량의 이름이 서민에게도 알려졌고,[84] 원산응거나 우키요에 화가 하반경재, 월강방년 등에 의해 초상화도 많이 그려졌다.

5. 장량의 후손

장량의 사후, 아들 장불의(張不疑)가 유후(留侯)의 지위를 계승하였다.[61] 차남 장벽강(張辟彊)은 혜제가 붕어했을 때 15세였으나 진평에게 여고후 관련 현안을 건의하여 진평을 놀라게 했다는 일화가 《사기》 〈여태후본기〉에 남아 있다.[64] 장불의는 문제 5년(기원전 175년)에 불경죄로 제후를 면직당하고 영지를 몰수당했다.[65] 그 후, 한서 〈고혜고후문공신표〉에 따르면, 장불의의 현손인 장천추선제 시대에 부역 면제의 특권을 받았다.[66] 후한서 〈문원전〉에 따르면 장량의 후예에 후한 말의 문인 장초가 있었다.[67]

익주 출신으로 후한사도 장호가 장량의 자손을 칭했으며, 장호의 후손에는 아들인 광릉 태수 장강, 그의 증손인 촉한거기장군 장익 등이 있다.(《후한서》 〈장호전〉(張浩傳), 《삼국지》 〈장익전〉(張翼傳)).[68][69]

일본에서는 장량의 후예를 자칭하는 명나라 북경 사관 장유(張由)의 아들 장충(張忠)이 명나라에서의 정쟁을 피해 조선으로 망명하려다 평호(平戶)에 표착하여 대내씨(大內氏)를 위해 의사로 일하였다.[70][71] 장충의 아들 장원지(張元至)는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를 섬겨 측근이 되어 가로(家老)까지 출세하였다. 그러나 모리 가문(毛利家) 내부의 권력 투쟁 결과, 원지는 테루모토로부터 적자 모리 히데나리(毛利秀就)의 유모와의 간통 혐의를 받고 할복하게 되었다. 후에 장씨 가문은 부흥되어 장원정(張元貞)·장원령(張元令) 등이 모리 가문을 섬겼다.[72]

6. 장량과 도교

『선전십유』(仙传拾遗)에 따르면, 장량(張良)은 유방(劉邦)이 한나라(漢)를 세우는 것을 도운 후 황석공(黃石公)에게 받은 책을 이용하여 수행을 했다고 한다. 그는 기(氣)를 다듬고, 음식을 끊었으며, 몸이 가벼워져 결국 하늘로 승천하여 태현동자(太玄童子)가 되었다. 그는 종종 태상노군(太上老君)을 태청경(太清境)에서 따랐다고 한다. 그의 8대손인 장도릉(張道陵) 역시 도교의 신선이 되었다.[5]

『조현지』(巢縣志)에 따르면, 조현(巢縣) 백운산(白雲山)에는 자방동(紫房洞)이 있는데, 이곳은 장량이 은거하여 단전(丹田)과 명상을 수행했던 곳이라고 한다. 후대 사람들은 그곳에 사당을 짓고 매년 향을 피워 제사를 지냈다.[5]

개봉시(開封市) 허난성(河南省) 남동쪽에 있는 천수사(天壽寺)는 장량을 모시는 또 다른 곳이다. 송나라(宋) 정화(政和) 연간(1111~1118)에 그는 "영허진인(靈虛真人)"이라는 칭호를 받았다.[5]

7. 대중문화 속의 장량

16세기 중국 소설 《서유기》에는 장량(張良)이 황석공(黃石公)을 만난 이야기가 나온다. 손오공이 당삼장과 언쟁을 벌이고 동해의 동해 용왕을 만났을 때, 용왕은 "삼교구(三橋口)"라는 그림에 얽힌 장량과 황석공의 일화를 들려준다. 황석공은 장량의 인내심을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세 번이나 신발을 다리 아래로 떨어뜨렸고, 장량은 노인에 대한 존중심으로 이를 참아냈다. 황석공은 장량에게 하늘의 책을 전수했고, 장량은 이를 바탕으로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는 것을 도왔다. 평화를 이룬 후 장량은 지위를 버리고 산으로 들어가 도교의 길을 걸어 불멸을 얻었다.[6][7][8] 용왕은 이 이야기를 통해 손오공에게 스승에게 돌아갈 것을 조언했고, 손오공은 감동하여 당삼장에게 돌아갔다.[9] 이 일화는 겸손을 배우는 대표적인 중국 민간 설화 중 하나가 되었다.

장량은 코에이(Koei)사의 비디오 게임 삼국지 11에 등장하는 32명의 역사적 인물 중 한 명으로, 제갈량 다음으로 높은 지능 수치를 가지고 있다. 또한 액션 RPG 게임 진시황에서 "마법사" 클래스의 플레이 가능한 캐릭터로 등장한다.

초한전쟁을 배경으로 한 다양한 미디어에서 장량이 묘사되었다. 예를 들어, 영화 황제의 첩, 최후의 만찬, 미이라 3: 황제의 무덤 등에 등장한다. 그는 2012년 텔레비전 드라마 왕의 전쟁과 애니메이션 시리즈 진시황에도 등장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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