옷로비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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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옷로비 사건은 1999년 신동아 그룹 최순영 회장의 아내 이형자가 김태정 법무부 장관의 아내 연정희에게 고가의 옷을 제공하려 한 의혹으로 시작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1999년 5월 언론 보도로 촉발되어, 특별검사 임명, 법무부 장관 사임, 국회 청문회, 관련자들의 위증 혐의 유죄 판결 등으로 이어졌다. 이 사건은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속에서 발생하여 국민적 분노를 일으켰으며, 김대중 대통령과 민주당의 명성에 타격을 입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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옷로비 사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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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개요 | |
사건 이름 | 옷 로비 사건 |
다른 이름 | 옷 뇌물 스캔들 |
발생 시기 | 1990년대 후반 |
발생 장소 | 대한민국 |
유형 | 뇌물 |
관련자 | 대한민국 고위 정부 인사 및 배우자들 |
결과 | 1억 6500만 달러 손실 |
유죄 판결 | 다수 |
공식 웹사이트 | 대한민국 기록관 |
2. 사건 관련자 명단
- 이형자 -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의 아내. 구속 직전의 남편을 위해 연정희에게 거액의 옷 상납을 시도한 혐의를 받았다.
- 연정희 - 김태정 법무부 장관의 아내. 1380만 원짜리 호피무늬 반코트를 공짜로 얻으려는 혐의를 받았다.
- 배정숙 -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의 아내. 이형자에게 옷 값 대납을 요구하는 등 로비의 징검다리 역할을 한 혐의를 받았다.
- 김태정 - 전 검찰총장. 옷로비 의혹 당시 법무부 장관. 배우자가 옷로비 사건에 연루되어 취임 15일 만에 사임했다.
- 최순영 - 신동아그룹의 회장. 옷로비 사건의 계기가 된 외화밀반출 사건의 당사자.
- 정일순 - 라스포사 사장. 상류층의 허영심을 적절히 이용하는 놀라운 상술을 구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 김봉남 (앙드레 김) - 패션 디자이너. 연정희와 배정숙에게 옷을 판 인물.
-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553582 박시언] - 전 신동아그룹 부회장, 신동아그룹의 로비스트 역할 수행하며 김태정 장관으로부터 내사보고서를 입수, 그룹 비서실에 전달함
2. 1. 주요 관련자
이형자는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의 아내로, 구속 직전의 남편을 위해 연정희에게 거액의 옷 상납을 시도한 혐의를 받았다.[2][7][3][4] 연정희는 김태정 당시 법무부 장관의 아내로, 1380만 원짜리 호피무늬 반코트를 공짜로 얻으려 했다는 의혹을 받았다. 강인덕 전 통일부 장관의 아내인 배정숙은 이형자에게 옷 값 대납을 요구하는 등 로비의 연결 고리 역할을 한 혐의를 받았다.[2][7][3][4]김태정은 옷로비 의혹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으며, 배우자가 옷로비 사건에 연루되어 취임 15일 만에 사임했다.[6] 최순영은 신동아그룹의 회장으로, 옷로비 사건의 계기가 된 외화밀반출 사건의 당사자였다. 정일순은 라스포사 사장으로, 상류층의 허영심을 이용한 상술을 구사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봉남 (앙드레 김)은 패션 디자이너로, 연정희와 배정숙에게 옷을 판매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553582 박시언]은 전 신동아그룹 부회장으로, 신동아그룹의 로비스트 역할을 수행하며 김태정 장관으로부터 내사보고서를 입수, 그룹 비서실에 전달했다.
2. 2. 기타 관련자
김태정은 전 검찰총장이자 옷로비 의혹 당시 법무부 장관이었다. 배우자가 옷로비 사건에 연루되어 취임 15일 만에 사임했다.[6] 최순영은 신동아그룹의 회장으로, 옷로비 사건의 계기가 된 외화밀반출 사건의 당사자이다.[2][7][3][4] 정일순은 라스포사 사장으로, 상류층 고객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였다.[7][5] 김봉남 (앙드레 김)은 패션 디자이너로, 연정희와 배정숙에게 옷을 판매했다. [https://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4553582 박시언]은 전 신동아그룹 부회장으로, 신동아그룹의 로비스트 역할을 수행하며 김태정 장관으로부터 내사보고서를 입수하여 그룹 비서실에 전달했다.3. 사건 전개
1999년 5월, 한국에서 신동아 사건 관련 부정부패 수사 과정에서 이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부정부패 혐의를 받고 있는 사업가의 아내들이 고급 선물을 이용하여 한국 고위 정치인과 사법 관계자의 아내들에게 환심을 사고, 그들을 통해 남편들에게 관대한 처분을 받도록 회유하려 했다.[2][7][3][4] 이 사건 수사는 한국 사법 사상 최초로 특별검사 임명으로 이어졌다.[7][5] 두 명의 장관이 이 사건으로 인해 사임했고,[6] 전 법무부 장관과 전 대통령 법률 비서관이 수사 과정에서 체포되었다.[5]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전 통일부 장관과 전 검찰총장의 아내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은 국회(국회)에서 위증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7][5]
3. 1. 사건 개요
옷로비 사건은 1999년 5월 24일 신동아그룹 최순영 회장의 아내 이형자가 김태정 검찰총장의 아내 연정희에게 고급 옷을 선물했다는 언론 보도로 촉발되었다.[2][7][3][4] 이형자는 검찰총장 부인 등이 자신에게 옷값을 대신 지불하도록 압력을 가했으나 거부했다고 폭로했다. 언론 보도 사흘 후인 1999년 5월 28일 연정희는 이형자를 명예훼손 혐의로 서울지검에 고소했고,[7] 1999년 6월 2일 검찰은 수사에 착수했다.사건의 발단은 1994년 10월 연정희와 배정숙(당시 강인덕 통일부 장관의 아내)이 할렐루야 교회에서 처음 만나면서 시작되었다. 1998년 4월 검찰은 최순영 회장의 외화 밀반출 혐의에 대한 내사에 착수했고, 같은 해 9월 연정희와 이형자는 이화여고 바자회에서 만났다. 1998년 12월, 연정희는 라스포사와 앙드레 김 의상실에서 옷을 구입했고, 배정숙은 연정희에게 블라우스를 선물했다. 이 과정에서 이형자는 배정숙으로부터 옷값 대납 요구를 받았다. 1999년 1월, 사직동팀은 옷로비 의혹에 대한 내사를 시작했고, 1999년 5월 24일 옷로비 의혹 사건이 언론에 보도되면서 표면화되었다.
이 사건은 한국 사법 사상 최초로 특별검사 임명으로 이어졌으며,[7][5] 두 명의 장관이 사임하고,[6] 전 법무부 장관과 전 대통령 법률 비서관이 체포되었다.[5] 전 통일부 장관과 전 검찰총장의 아내는 국회에서 위증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7]
3. 2. 사건 관련 주요 일지
1999년 6월 11일, 한나라당과 자유민주연합은 "파업유도", "옷 로비", "3.30 재보선 50억 원 사용설", "고관집 절도사건" 등 4대 의혹사건에 대한 국정조사와 특별검사제 도입을 요구했다. 1999년 6월 13일 여야 협상이 결렬되면서 국회가 파행되었고, 새정치국민회의는 특검 도입에 반대했다. 1999년 6월 16일, 국민회의가 "파업유도" 의혹에 대해 한시적 특검제를 수용하겠다고 밝혔지만, 한나라당은 4대 의혹 모두에 대한 특검 도입을 주장하며 맞섰다. 1999년 6월 22일, 이회창 한나라당 총재는 2~3년 한시적 특검제를 제안하며, "파업유도" 및 "옷 로비" 의혹에 대한 국정조사를 강조했다.1999년 7월 4일, 특검제 대상 등 핵심 사안에 대한 절충에 실패했지만, 국민회의는 "옷 로비" 의혹에도 특검제를 수용하는 방안을 제시했다. 1999년 7월 15일, 국민회의는 "파업유도" 및 "옷 로비" 의혹에 대한 한정적 특검제와 "파업유도" 의혹 국정조사를 제시했으나, 야당은 대선자금 조사, 한시적 특검제 도입, 2개 사건 국정조사 등을 요구하며 기존 입장을 고수했다. 1999년 7월 29일, 특검법 관련 여야 협상이 난항을 겪었다.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최순영 신동아 회장 아내 이형자의 의류 제공 의혹에 한정된 특검 도입을 주장한 반면, 한나라당은 이형자의 다른 고위층 뇌물 제공 혐의도 수사 대상에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99년 8월 26일, 국회 법사위 청문회가 성과를 내지 못하자 여야는 특검제 조기 도입을 통한 재수사 방향으로 의견을 모았다. 1999년 9월 7일, 3당 총무들은 특별검사법안을 9월 20일까지 본회의에서 통과시키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특별검사의 수사 범위, 수사 기간, 특별수사관 수 등에서 여전히 이견이 존재했다. 한나라당은 "옷 로비" 및 "파업유도" 관련 범죄 수사, 60일 수사 기간, 15명 특별수사관을 주장했고, 국민회의와 자민련은 "옷 로비" 및 "파업유도" 의혹에 국한된 수사, 50일 수사 기간, 7~8명 특별수사관을 주장했다. 1999년 9월 15일, 여야는 특별검사 수사 기간을 준비 기간 10일, 본조사 30일, 추가 조사 30일 등 총 70일로 하는 등 특별검사제 법안 주요 내용에 합의했다.
1999년 5월, 신동아 사건 관련 부정부패 수사 과정에서 옷로비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2][7][3][4] 이 사건으로 인해 한국 사법 사상 최초로 특별검사가 임명되었다.[7][5]
3. 3. 옷로비 사건 청문회
1999년 8월 23일 옷로비 사건에 대해 청문회가 열렸지만 청문회는 처음부터 사건 증인들의 연이은 거짓말과 질의 의원들의 준비부족으로 의혹만 커졌다.[2][7][3][4]== 첫째날 ==
배정숙은 옷값 대납을 요구한 적이 없는데 검찰이 자기만 죄인으로 몰아붙였다고 억울함을 주장했다. 옷값을 놓고 이형자와 다투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삼자 대면을 요구했다. 라스포사 종업원이 호피코트를 연정희의 트렁크에 넣는 장면을 봤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전혀 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배정숙은 검찰이 자신을 속죄양으로 만들었다며 강한 불만을 터트렸다. 그러나 라스포사 사장 정일순의 호피무늬 코트가 로비와 연관된 것에 대해서는 일부 시인하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여야 의원들이 새롭게 얻어낸 것은 별로 없었다.
그러나 이런 배씨의 주장에 대해 검찰은 위증이라고 하였다. 정일순의 호프무늬 코트가 로비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옷이 배달된 시점은 작년 12월 26일이었는데 그보다 닷새 전에 이미 이형자가 옷값을 못 내겠다고 라스포사 사장에게 통보했다는 게 그 근거였다. 그러나 배정숙은 검찰의 발표를 근본적으로 뒤집었다. 연정희와 라스포 사에서 옷을 입어본 시점은 검찰 발표와는 달리 작년 12월 19일이 틀림없다고 증언했다. 옷을 돌려준 날짜도 검찰은 지난 1월 5일이라고 밝혔지만 배정숙은 1월 7일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배정숙의 증언을 종합하면, 연정희가 코트를 보관했던 기간은 당초 알려진 열흘이 아니라 19일까지 늘어난다. 이에 대해 검찰은 배정숙이 옷 로비 사건의 주역이기 때문에 자신의 혐의를 벗기 위해 청문회에서도 계속 거짓 주장을 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검찰은 또 작년 12월 18일 배정숙이 신동아 그룹 최순영 회장의 아내 이형자와 옷값 대납 문제로 심하게 말다툼을 벌인 사실이 확인됐는데도 배정숙이 이같은 기초 사실조차 부인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배 씨의 증언 내용에 신빙성이 더욱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 둘째날 ==
김태정 전 법무장관의 아내 연정희는 옷 로비를 유도한 적도 없고, 로비를 받은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호피무늬 밍크코트를 입어 본 날짜는 지난해 12월 19일이었다고, 당초의 주장을 번복했지만 코트가 트렁크에 실려온 날은 1주일 뒤인 26일이었다면서 검찰에서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코트가 실려온 것을 뒤늦게 알고 올해 1월 5일 돌려줬다는 해명도 되풀이했다. 조사 때마다 진술이 달라진 점에 대해서 날짜를 착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연정희는 결백을 주장할 때마다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연정희는 또 검소하고 조심하는 생활을 해왔다고 항변하다가 물의를 일으킨 것 자체가 문제 아니냐는 추궁에 깊이 반성한다면서 흐느꼈다.
그러나 이 증언들은 배정숙의 주장과는 정반대였다. 여야 의원들은 누구 말이 맞는지, 이걸 확인할 만한 어떠한 증거나 정황도 내놓지 못했다. 배정숙은 라스포사에서 연정희와 옷을 입어본 시점이 검찰 발표와는 달리 작년 12월 19일이었다고 어제 증언했다. 그러나 연정희는 19일에는 옷을 한 벌도 사지 않았고, 26일에 옷이 배달됐다고 거듭 밝혔다. 옷을 돌려준 날짜도 배정숙은 지난 1월 7일이라고 했지만 연정희는 1월 5일이 맞다며 증거도 있다고 반박했다. 최순영 신동아 회장 수사에 대한 언급도 배 씨와 정반대였다. 배정숙은 구속 가능성을 직접 이야기 했다고 했지만, 연정희는 그런 말을 한 적도 없다고 했다.
기도원에 갔을 때도 호피무늬 코트를 입지 않고 걸쳤을 뿐이라며 배씨의 증언과 차이를 보였다. 이에 대해 연정희는, 배정숙에 대해 괘씸스런 생각도 들었지만 진실을 알고 싶어서 마지못해 병원에 갔었다고 증언했다. 두 사람의 증언에 공통점은 성경에 손을 얹고 맹세할 수 있다고 진실을 주장한 점이 유일했다.
== 셋째날 ==
옷 로비 의혹 사건에 대한 국회 청문회에서 핵심 증인 4명을 상대로 대질신문을 진행했지만, 증언은 엇갈렸다. 옷값 대납 요구에 대해 이형자는 있었다고 증언한 반면, 배정숙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최순영 회장의 구속 사실을 연정희가 흘렸다는 부분에서도 공방이 이어졌다. 배정숙이 라스포사에 장관 부인들을 데려오겠다고 한 부분에 대해서도 정일순은 있었다고, 배정숙은 없었다고 반박했다. 이형자가 정일순에게 옷값을 요구했다고 주장하자 정일순은 거짓말이라고 반박하며, 이형자 자매가 최 회장 수사에 대한 보복으로 검찰총장 아내를 모함한 것 같다고 주장했다. 호피코트 배달 시점에 대해서는 연정희와 정일순의 증언이 일치했다.
결국 청문회에서 증인들이 서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앙드레 김의 본명'만 밝혀졌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2][7][3][4]
3. 3. 1. 첫째날
배정숙은 옷값 대납을 요구한 적이 없는데 검찰이 자기만 죄인으로 몰아붙였다고 억울함을 주장했다. 옷값을 놓고 이형자와 다투었다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삼자 대면을 요구했다. 라스포사 종업원이 호피코트를 연정희의 트렁크에 넣는 장면을 봤냐는 질문에 대해서는 전혀 보지 못했다고 주장했다. 배정숙은 검찰이 자신을 속죄양으로 만들었다며 강한 불만을 터트렸다. 그러나 라스포사 사장 정일순의 호피무늬 코트가 로비와 연관된 것에 대해서는 일부 시인하는 답변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여야 의원들이 새롭게 얻어낸 것은 별로 없었다.그러나 이런 배씨의 주장에 대해 검찰은 위증이라고 하였다. 정일순의 호프무늬 코트가 로비와 관계가 없다는 것이다. 옷이 배달된 시점은 작년 12월 26일이었는데 그보다 닷새 전에 이미 이형자가 옷값을 못 내겠다고 라스포사 사장에게 통보했다는 게 그 근거였다. 그러나 배정숙은 검찰의 발표를 근본적으로 뒤집었다. 연정희와 라스포 사에서 옷을 입어본 시점은 검찰 발표와는 달리 작년 12월 19일이 틀림없다고 증언했다. 옷을 돌려준 날짜도 검찰은 지난 1월 5일이라고 밝혔지만 배정숙은 1월 7일인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배정숙의 증언을 종합하면, 연정희가 코트를 보관했던 기간은 당초 알려진 열흘이 아니라 19일까지 늘어난다. 이에 대해 검찰은 배정숙이 옷 로비 사건의 주역이기 때문에 자신의 혐의를 벗기 위해 청문회에서도 계속 거짓 주장을 하고 있다고 반박했다.
검찰은 또 작년 12월 18일 배정숙이 신동아 그룹 최순영 회장의 아내 이형자와 옷값 대납 문제로 심하게 말다툼을 벌인 사실이 확인됐는데도 배정숙이 이같은 기초 사실조차 부인하고 있는 점으로 볼 때 배 씨의 증언 내용에 신빙성이 더욱 떨어진다고 주장했다.
1999년 5월, 한국에서 신동아 사건 관련 부정부패 수사 과정에서 이 사건이 수면 위로 떠올랐다. 부정부패 혐의를 받고 있는 사업가의 아내들이 고급 선물을 이용하여 한국 고위 정치인과 사법 관계자의 아내들에게 환심을 사고, 그들을 통해 남편들에게 관대한 처분을 받도록 회유하려 했다.[2][7][3][4] 이 사건 수사는 한국 사법 사상 최초로 특별검사 임명으로 이어졌다.[7][5] 두 명의 장관이 이 사건으로 인해 사임했고;[6] 전 법무부 장관과 전 대통령 법률 비서관이 수사 과정에서 체포되었다.[5]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 전 통일부 장관과 전 검찰총장의 아내가 포함되어 있으며, 이들은 국회(국회)에서 위증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7][5]
3. 3. 2. 둘째날
김태정 전 법무장관의 아내 연정희는 옷 로비를 유도한 적도 없고, 로비를 받은 적도 없다고 주장했다. 호피무늬 밍크코트를 입어 본 날짜는 지난해 12월 19일이었다고, 당초의 주장을 번복했지만 코트가 트렁크에 실려온 날은 1주일 뒤인 26일이었다면서 검찰에서의 주장을 되풀이했다. 코트가 실려온 것을 뒤늦게 알고 올해 1월 5일 돌려줬다는 해명도 되풀이했다. 조사 때마다 진술이 달라진 점에 대해서 날짜를 착각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연정희는 결백을 주장할 때마다 자신이 기독교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연정희는 또 검소하고 조심하는 생활을 해왔다고 항변하다가 물의를 일으킨 것 자체가 문제 아니냐는 추궁에 깊이 반성한다면서 흐느꼈다.그러나 이 증언들은 배정숙의 주장과는 정반대였다. 여야 의원들은 누구 말이 맞는지, 이걸 확인할 만한 어떠한 증거나 정황도 내놓지 못했다. 배정숙은 라스포사에서 연정희와 옷을 입어본 시점이 검찰 발표와는 달리 작년 12월 19일이었다고 어제 증언했다. 그러나 연정희는 19일에는 옷을 한 벌도 사지 않았고, 26일에 옷이 배달됐다고 거듭 밝혔다. 옷을 돌려준 날짜도 배정숙은 지난 1월 7일이라고 했지만 연정희는 1월 5일이 맞다며 증거도 있다고 반박했다. 최순영 신동아 회장 수사에 대한 언급도 배 씨와 정반대였다. 배정숙은 구속 가능성을 직접 이야기 했다고 했지만, 연정희는 그런 말을 한 적도 없다고 했다.
기도원에 갔을 때도 호피무늬 코트를 입지 않고 걸쳤을 뿐이라며 배씨의 증언과 차이를 보였다. 이에 대해 연정희는, 배정숙에 대해 괘씸스런 생각도 들었지만 진실을 알고 싶어서 마지못해 병원에 갔었다고 증언했다. 두 사람의 증언에 공통점은 성경에 손을 얹고 맹세할 수 있다고 진실을 주장한 점이 유일했다.
3. 3. 3. 셋째날
옷 로비 의혹 사건에 대한 국회 청문회에서 핵심 증인 4명을 상대로 대질신문을 진행했지만, 증언은 엇갈렸다. 옷값 대납 요구에 대해 이형자는 있었다고 증언한 반면, 배정숙은 없었다고 주장했다. 최순영 회장의 구속 사실을 연정희가 흘렸다는 부분에서도 공방이 이어졌다. 배정숙이 라스포사에 장관 부인들을 데려오겠다고 한 부분에 대해서도 정일순은 있었다고, 배정숙은 없었다고 반박했다. 이형자가 정일순에게 옷값을 요구했다고 주장하자 정일순은 거짓말이라고 반박하며, 이형자 자매가 최 회장 수사에 대한 보복으로 검찰총장 아내를 모함한 것 같다고 주장했다. 호피코트 배달 시점에 대해서는 연정희와 정일순의 증언이 일치했다.결국 청문회에서 증인들이 서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앙드레 김의 본명'만 밝혀졌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오기도 했다.[2][7][3][4] 이 사건은 1999년 5월, 신동아 사건 관련 부정부패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사업가 아내들이 고급 선물을 이용해 고위 정치인과 사법 관계자의 아내들에게 환심을 사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7][5] 이 사건은 한국 사법 사상 최초로 특별검사 임명으로 이어졌고,[6] 두 명의 장관이 사임했으며, 전 법무부 장관과 전 대통령 법률 비서관이 체포되었다.[5] 전 통일부 장관과 전 검찰총장의 아내는 국회에서 위증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7]
3. 4. 수사 및 재판 결과
1999년 8월 서울지검은 이 사건을 실패한 로비로 규정했다.[2][7][3][4] 이 사건은 한국 사법 사상 최초로 특별검사 임명으로 이어졌다.[7][5]1999년 11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특별검사가 임명되어 옷로비 사건을 수사했다.[7][5] 이 사건은 신동아 사건 관련 부정부패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는데, 사업가의 아내들이 고급 선물을 이용해 고위 정치인과 사법 관계자의 아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2][7][3][4] 특검 수사 결과, 전 법무부 장관과 전 대통령 법률 비서관이 체포되었고,[5] 두 명의 장관이 이 사건으로 인해 사임했다.[6] 전 통일부 장관과 전 검찰총장의 아내는 국회에서 위증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7][5]
1999년 12월, 대검찰청은 이형자가 벌인 자작극이라고 발표했다.[2][7][3][4]
2000년 11월 법원(위증사건)은 로비가 있었다고 판결했다.[7] 2001년 11월 법원(문건유출)은 로비가 없었다고 판결했다.[5] 전 통일부 장관과 전 검찰총장의 아내는 국회에서 위증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7][5]
3. 4. 1. 검찰 수사 (1999년 8월)
1999년 8월 서울지검은 이 사건을 실패한 로비로 규정했다.[2][7][3][4] 이 사건은 한국 사법 사상 최초로 특별검사 임명으로 이어졌다.[7][5]3. 4. 2. 특별검사 수사 (1999년 11월)
1999년 11월, 대한민국 역사상 최초로 특별검사가 임명되어 옷로비 사건을 수사했다.[7][5] 이 사건은 신동아 사건 관련 부정부패 수사 과정에서 드러났는데, 사업가의 아내들이 고급 선물을 이용해 고위 정치인과 사법 관계자의 아내들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려 했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2][7][3][4] 특검 수사 결과, 전 법무부 장관과 전 대통령 법률 비서관이 체포되었고,[5] 두 명의 장관이 이 사건으로 인해 사임했다.[6] 전 통일부 장관과 전 검찰총장의 아내는 국회에서 위증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7][5]3. 4. 3. 대검찰청 재수사 (1999년 12월)
1999년 12월, 대검찰청은 이형자가 벌인 자작극이라고 발표했다.[2][7][3][4]3. 4. 4. 법원 판결 (2000년 11월, 2001년 11월)
2000년 11월 법원(위증사건)은 로비가 있었다고 판결했다.[7] 2001년 11월 법원(문건유출)은 로비가 없었다고 판결했다.[5] 전 통일부 장관과 전 검찰총장의 아내는 국회에서 위증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7][5]4. 사건의 영향 및 평가
이 사건은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와 관련된 한국 경제 위기 한가운데서 밝혀졌으며, 국민적 분노를 야기했다.[2] 이 사건은 김대중 대통령과 그의 당(당시 민주당)의 명성을 심각하게 손상시켰는데, 특히 검찰이 이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추가 정보가 드러나면서 더욱 그러했다.[2][3][4]
4. 1. 정치적 영향
옷로비 사건은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와 관련된 한국 경제 위기 한가운데서 밝혀져 국민적 분노를 야기했다.[2] 이 사건은 김대중 대통령과 당시 여당인 민주당의 명성을 심각하게 손상시켰는데, 특히 검찰이 이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추가 정보가 드러나면서 더욱 그러했다.[2][3][4]4. 2. 사회적 영향
옷로비 사건은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와 관련된 한국 경제 위기 상황에서 발생하여 국민적 분노를 야기했다.[2] 이 사건은 김대중 대통령과 민주당의 명성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으며, 특히 검찰의 사건 은폐 의혹이 제기되면서 더욱 그러했다.[2][3][4] 고위층의 도덕성 문제와 특권 의식에 대한 비판 여론이 확산되었다.4. 3. 언론의 역할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와 관련된 한국 경제 위기 한가운데서 옷로비 사건이 언론 보도를 통해 밝혀지면서 국민적 분노를 야기했다.[2] 이 사건은 김대중 대통령과 민주당의 명성을 심각하게 손상시켰는데, 특히 검찰이 이 사건을 은폐하려 했다는 추가 정보가 드러나면서 더욱 그러했다.[2][3][4]5. 기타
5. 1. 유사 사건
5. 2. 대중문화에서의 묘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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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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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ooks.goog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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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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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unpan1.un.org[...]
2018-09-11
[3]
서적
South Korea since 1980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10-00-00
[4]
학술지
South Korea in 1999: Overcoming Cold War Legacies
2000-00-00
[5]
서적
Avoiding the Apocalypse: The Future of the Two Koreas
https://books.google[...]
Peterson Institute
2000-00-00
[6]
서적
Korea Briefing: 2000-2001: First Steps Toward Reconciliation and Reunification
https://books.google[...]
Routledge
2016-09-16
[7]
웹사이트
3 Guilty in 'Furgate' Scandal
http://koreajoongang[...]
2018-09-11
[8]
간행물
옷로비사건
http://contents.arch[...]
국가기록원 나라기록
2006-12-01
관련 사건 타임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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