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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그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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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쌍용그룹은 1939년 김성곤이 설립한 삼공유지(주)를 모태로 시작하여, 건설, 자동차, 증권 등 다양한 분야로 사업을 확장했으나, 외환 위기를 거치며 해체되었다. 김성곤은 정치권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민주공화당의 주요 인물로 활동하며 정부의 산업 정책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다. 1970년대 이후 석유 파동을 겪으며 정유 사업에 진출했고, 김성곤 사후 장남 김석원이 그룹 회장직을 승계하여 사업 확장을 추진했다. 1980년대 자동차 산업에 진출했으나, 1990년대 후반 외환 위기로 인해 쌍용자동차를 비롯한 주요 계열사를 매각하고, 2006년 쌍용건설 분리와 함께 사실상 해체되었다. 현재는 쌍용C&E와 쌍용건설 등이 주요 계열사로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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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용그룹
기본 정보
회사 이름쌍용그룹
로마자 표기Ssangyong geurup
창립1939년 3월 15일
해체2006년 4월 17일
창립자김성곤
본사 위치서울특별시 중구 수표로 34 (저동2가)
회사 정보
모기업쌍용양회공업
본사 위치 (영어)Seoul
본사 위치 (국가)대한민국

2. 역사

1939년 김성곤대구에서 설립한 비누공장인 '''삼공유지'''(三共油脂)가 쌍용그룹의 모태이다.[14] 김성곤은 삼공유지에서 얻은 수익으로 1947년 고려화재해상보험 설립을 지원하고, 조선방직의 안양 공장을 인수하여 금성방직을 설립했다. 1950년 한국 전쟁으로 공장이 파괴되었지만, 1954년 유엔 한국 재건단의 지원을 받아 재건하여 1950년대 말 국내 2위의 섬유 제조업체가 되었다.[2]

쌍용그룹은 1940~1950년대 면방직, 보험, 무역, 1960년대 시멘트, 제지, 해운, 1970년대 정유, 중공업, 종합상사, 건설, 1980년대 컴퓨터, 증권, 자동차 등 시대와 사회가 요구하는 기초 기간 산업을 중심으로 발전했다.[14] 네슬레1978년1979년 한국에 진출할 당시 합작 상대로 거론되기도 했지만, 정부가 농어촌개발공사를 합작 상대로 결정하자 스스로 포기했다.[15]

2. 1. 설립 초기 (1939년 ~ 1960년대)

1939년 김성곤대구에서 설립한 비누공장 '''삼공유지'''(三共油脂)가 쌍용그룹의 모태이다.[14]

김성곤은 1947년 고려화재해상보험 설립을 지원했고, 조선방직의 안양 공장을 인수하여 금성방직을 설립했다. 1950년 한국 전쟁으로 공장이 파괴되었지만, 1954년 유엔 한국 재건단의 지원을 받아 재건하여 1950년대 말 국내 2위의 섬유 제조업체가 되었다.[2]

1962년 금성방직을 매각하고 강원도에 시멘트 제조업에 투자하여 쌍용시멘트공업을 설립했다. 동해시 공장은 세계 최대 규모의 시멘트 공장으로 확장되었다.[4] 이후 시멘트 사업 지원을 위해 시멘트 포장용 삼화제지(후일 쌍용제지)를 인수하고, 시멘트 운송용 금성해운(후일 쌍용해운)을 설립했다.

2. 1. 1. 정치적 영향력 (이승만, 박정희 정권)

김성곤은 이승만 정권과 긴밀한 정치적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1958년 이승만의 자유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2] 1961년 5월 16일 쿠데타로 박정희가 집권하자 그는 신속하게 태도를 바꾸었다. 중앙일보의 보도에 따르면, 김성곤은 대구에서 좌익 단체와 연루되었던 기록을 숨겨주는 대신 박정희에게 충성을 약속했다.[3] 이후 김성곤은 박정희의 민주공화당(DRP)의 주요 인물이 되었다.

김성곤은 민주공화당 내에서 소위 "TK(대구·경북) 그룹"의 리더가 되었다. TK 그룹은 박정희의 산업 정책을 실행하는 데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정부의 수익성 높은 계약을 독점하고, 자신들과 관련된 인물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채택했다. 김성곤은 민주공화당 재정위원장으로서 걸프 오일(Gulf Oil)에 당에 기부할 것을 압력을 행사했는데, 1975년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걸프 오일 회장은 1966년에 100만달러, 1970년에 300만달러를 지급했다고 밝혔다.[6]

김성곤의 정치 경력은 1971년에 끝났다. 당시 총리였던 김종필과 TK(대구·경북) 지역 출신 의원들이 오치성 내무부 장관(김성곤의 라이벌) 해임 건의안을 제출하며 신민당에 합류했기 때문이다. 박정희 대통령은 해임 건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김성곤을 비롯한 의원들을 청와대로 불러들여 구타했고, 이로 인해 그들은 당과 국회에서 사퇴했다.[8]

2. 2. 확장기 (1970년대 ~ 1990년대)

1973년 석유 파동 이후, 김성곤 회장은 이란 팔레비 국왕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와 합작하여 한국에 정유 공장을 건설하는 협상을 진행했다. 그 결과, 1976년 한국이란석유주식회사가 설립되었고, 울산에 정유 공장 건설이 시작되었다.[5] 1980년 첫 유조선을 인도받았으며, 같은 해 회사 이름을 쌍용정유주식회사로 변경했다.[5]

김성곤 회장의 장남 김석원이 29세의 나이로 쌍용그룹 회장직을 승계받았다.[10] 김석원은 건설, 자동차, 증권 등 새로운 산업 분야로 쌍용그룹을 공격적으로 확장해 나갔다. 1974년 797억 원이었던 매출액은 1994년 그가 정계 진출을 위해 물러날 때 14조 6천억 원으로 18,000% 이상 증가했다.

김석원은 자동차 제조업에 큰 관심을 가졌고, 1986년 쌍용그룹은 동아자동차를 인수했다. 동아자동차는 1954년 설립된 하동환모터를 기원으로 하며, 미국 군대를 위한 지프를 제조하고 트럭과 버스도 생산했다. 1983년에는 지프 제조업체인 계화를 인수했다. 이듬해 쌍용은 진도(Jindo)사로부터 팬서 웨스트윈즈를 인수했고, 1988년에는 회사 이름을 쌍용자동차로 변경했다.

1991년 김석원은 25억달러 규모의 SUV와 4륜구동 차량 생산 확장에 나섰다.[11] 그러나 이 사업은 향후 5년 동안 재정적 부담으로 작용하여 5,050억 원의 손실과 3조 4,000억 원의 부채를 초래했다. 현금 흐름이 매우 악화되어 첫 세단인 쌍용 체어맨의 생산이 20일 지연되었고, 다른 제품의 개발은 중단되었다.[11]

2. 3. 해체 및 구조조정 (1997년 ~ 현재)

1980년대 무리한 기업 확장으로 자동차 산업에 진출하고 외국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면서 1992년부터 쌍용자동차에서 큰 적자를 보았고, 막대한 빚을 떠안게 되었다. 외환위기로 인해 그룹 구조조정의 일환으로 1998년 쌍용제지를 미국 P&G에, 쌍용자동차를 대우그룹에 매각하였다.[10] 1999년 쌍용투자증권을 계열 분리하였고, 쌍용정유의 지분과 경영권을 쌍용정유와 메리웨더에게 매각하였다.[12] 2000년 쌍용중공업(현 STX)의 지분은 한누리투자증권 컨소시엄으로 매각하였고, 쌍용엔지니어링, 텍스텍 등을 매각하여 계열 분리하였다. 2001년에는 쌍용중공업, 쌍용엔지니어링, 텍스텍을 매각했다. 2002년 쌍용화재(현 흥국화재)를 중앙제지에 매각, 2003년 용평리조트를 세계일보에 매각하였으며,[11] 쌍용캐피탈, 남광토건을 계열 분리하였다. 2004년 3월 진방철강을 매각하였으며 2006년 4월 쌍용건설이 분리되는 등 쌍용그룹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김석준 당시 회장은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계열사 매각을 추진했고, 자동차 부문에 대해서는 삼성과, 이후에는 대우와 협상을 벌였다. 1997년에는 현금 확보를 위해 쌍용제지를 P&G에 매각했다. 김석원은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회장직에 복귀했지만, 아시아 금융 위기로 인해 재벌들이 부채를 재융자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한국 경제는 위기에 처해 600억 달러 규모의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되었다. 1997년 말, 쌍용자동차는 경쟁사인 대우에 매각되었다.[10] 대우그룹 자체는 부도 및 관련 비리 사건 이후 해체되었고, 2022년 KG그룹이 인수할 때까지 여러 기업 소유주를 거쳤다.

쌍용그룹은 이후 몇 년 동안 구조조정을 계속하여 1998년에는 쌍용양회(Riverside Cement unit)를 텍사스 인더스트리즈(Texas Industries)에, 1999년에는 쌍용정유 지분 일부를 사우디 아람코에 매각했다.[12] 쌍용그룹이 1983년 인수한 두 개의 호텔과 용평리조트도 매각 대상이었다.[11] 2000년에는 쌍용양회 지분 일부가 도쿄에 본사를 둔 태평양시멘트(Taiheiyo Cement)에 매각되었다.

적극적인 구조조정 이후, 김씨 일가는 2002년 한국자산관리공사(KAMCO)에 인수된 후 2015년 두바이투자청(Investment Corporation of Dubai)에 매각된 후에도 쌍용건설을 계속 경영했다. 그러나 김석원은 2004년 쌍용양회 경영권을 내놓았다.[4]

3. 주요 계열사

2005년 당시 그룹 산하에는 소재 관련 사업분야의 쌍용양회, 쌍용자원개발, 건설 분야의 쌍용건설, 해운 분야의 쌍용해운, 정보통신 분야의 쌍용정보통신 등이 있었다.[12]

과거 쌍용그룹의 주요 계열사는 다음과 같다.

계열사명비고
리버사이드 시멘트현재 텍사스 인더스트리즈 소유
쌍용양회공업현재 쌍용C&E
쌍용시멘트 (퍼시픽)
쌍용시멘트 (싱가포르)
쌍용건설
쌍용투자증권이후 굿모닝증권
쌍용중공업STX
쌍용자동차현재 KG 모빌리티
쌍용정유현재 S-OIL
쌍용제지현재 한국P&G의 일부
쌍용정밀공업
용평리조트


3. 1. 현존 계열사

쌍용C&E (구 쌍용양회공업)쌍용건설이 현존하고 있다.[11]

3. 2. 매각/해체된 계열사


  • 리버사이드 시멘트 (현 텍사스 인더스트리즈 소유)[12]
  • 쌍용시멘트 (퍼시픽)[12]
  • 쌍용시멘트 (싱가포르)[12]
  • 굿모닝증권 (구 쌍용투자증권)[10]
  • STX (구 쌍용중공업)[10]
  • KG 모빌리티 (구 쌍용자동차)[10]
  • S-OIL (구 쌍용정유)[12]
  • 한국P&G (구 쌍용제지)[10]
  • 쌍용정밀공업
  • 용평리조트[11]
  • 흥국화재 (구 쌍용화재)

4. 김성곤 일가

김성곤의 장남 김석원은 29세의 나이로 쌍용그룹 회장직을 승계했다.[10] 김석원은 건설, 자동차, 증권 등 새로운 산업으로 쌍용그룹을 확장하는 공격적인 경영을 이어갔다. 1974년(그가 경영권을 승계하기 전 해) 797억이었던 매출액은 1994년 그가 정계 진출을 위해 물러날 때 14.6조으로 18,000% 이상 증가했다.

그의 남동생들인 김석준과 밀턴 김(김석동) 또한 회사 운영에 참여했다. 김석준은 1983년 쌍용건설 사장, 1994년 쌍용자동차 회장 겸 CEO, 1995년 그룹 회장이 되었다. 막내 동생인 밀턴 김은 1990년 쌍용증권 과장으로 시작하여 1995년 CEO에 올랐다.[10] 형제들은 경영 및 전략 문제에 대해 때때로 충돌했는데, 김석원은 아버지와 다른 재벌들의 전통적인 사업 방식을 따랐고, 밀턴 김은 성과급과 같은 서구식 경영 방식을 도입하려 했다.[10]

5. 비판 및 논란

쌍용그룹은 대한민국 재벌 중 하나였지만, 여러 비판과 논란에 휩싸였다.

1980년대 쌍용그룹은 자동차 산업 등에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했다. 그러나 1992년부터 쌍용자동차에서 큰 적자를 보았고, 결국 외환 위기를 맞아 그룹 구조조정을 실시했다. 1998년 쌍용제지(주)를 미국의 P&G에, 쌍용자동차(주)를 대우그룹에 매각했다.[10] 1999년에는 쌍용투자증권(주)을 계열 분리하고, 쌍용정유의 지분과 경영권을 넘겼다. 2000년에는 쌍용중공업(현 STX)의 지분을 매각하고, 2001년에는 쌍용중공업(주), 쌍용엔지니어링(주), (주)텍스텍 등을 매각하여 계열 분리하였다.

김석준 당시 회장은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계열사 매각을 추진했는데, 자동차 부문은 삼성대우와 협상을 벌였다.[10] 1997년에는 쌍용제지를 P&G에 매각했다.[10] 김석원 전 회장은 이에 분노하여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회장직에 복귀했지만, 아시아 금융 위기로 인해 재벌들이 부채를 재융자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한국 경제는 위기에 처해 600억 달러 규모의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되었다.[10] 1997년 말, 김석원은 증권회사까지 매각하면서 쌍용자동차를 경쟁사인 대우에 넘겼다.[10] 그러나 대우그룹은 부도 및 관련 비리 사건으로 해체되었고, 쌍용자동차는 2022년 KG그룹에 인수될 때까지 여러 기업의 소유를 거쳤다.

이후에도 쌍용그룹은 구조조정을 계속하여, 1998년 쌍용양회(Riverside Cement unit)를 텍사스 인더스트리즈(Texas Industries)에, 1999년 쌍용정유(SsangYong Oil Refining) 지분 일부를 사우디 아람코에 매각했다.[12] 1983년 인수한 두 개의 호텔과 용평리조트도 매각 대상이었다.[11] 2000년에는 쌍용양회 지분 일부가 도쿄에 본사를 둔 태평양시멘트(Taiheiyo Cement)에 팔렸다. 2002년 쌍용화재(현 흥국화재)를 중앙제지에 매각하고, 2003년 용평리조트를 세계일보에, 쌍용캐피탈과 남광토건을 계열 분리하였다. 2004년 3월 진방철강을 매각하고, 2006년 4월 쌍용건설이 분리되면서 쌍용그룹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김석원 전 회장은 2004년 쌍용양회 경영권을 내놓았다.[4]

5. 1. 정경유착

김성곤은 이승만 정권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1958년 자유당 소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었다.[2] 1961년 5·16 군사정변으로 박정희가 집권하자, 김성곤은 대구에서 좌익 단체 연루 기록을 숨기는 대가로 박정희에게 충성을 약속했다는 김종필의 회고록이 중앙일보에 보도되었다.[3]

김성곤은 민주공화당 내에서 자신(당 재정위원장), 백남욱(정책위원장), 길재호(사무총장), 김진만(국회 원내대표)으로 구성된 "TK(대구·경북) 그룹"의 리더였다. TK 그룹은 박정희의 산업 정책 실행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며 정부 계약을 독점하고 관련 인물들에게 유리한 정책을 채택했다.

대한민국 제3공화국 시절, 김성곤은 민주공화당 재정위원장으로서 걸프 오일(Gulf Oil)에 당에 기부할 것을 압력을 행사했다. 1975년 미국 상원 청문회에서 걸프 오일 회장 밥 도르시(Bob Dorsey)는 1966년에 100만달러, 1970년에 300만달러를 지급했다고 밝혔는데, 김성곤은 1970년에 원래 1000만달러를 요구했었다.[6]

1971년, 김종필과 TK 출신 의원들이 오치성 내무부 장관 해임 건의안을 제출하며 신민당에 합류했을 때 김성곤의 정치 경력은 끝났다. 박정희 대통령은 해임 건의안에 찬성표를 던진 김성곤 등을 청와대로 불러들여 구타했고, 이로 인해 그들은 당과 국회에서 사퇴했다.[8]

5. 2. 부실 경영 및 외환 위기

1980년대 쌍용그룹은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여 자동차 산업에 진출하고 외국 자동차 회사를 인수하였다. 그러나 1992년부터 쌍용자동차에서 큰 적자를 기록하고 막대한 빚을 떠안게 되었다. 결국 외환 위기를 맞아 그룹 구조조정을 실시, 1998년 쌍용제지(주)를 미국의 P&G에, 쌍용자동차(주)를 대우그룹에 매각하였다.[10] 1999년에는 쌍용투자증권(주)을 계열 분리하고, 쌍용정유의 지분과 경영권을 쌍용정유와 메리웨더에게 넘겼다. 2000년에는 쌍용중공업(현 STX)의 지분을 한누리투자증권 컨소시엄에 매각하고, 2001년에는 쌍용중공업(주), 쌍용엔지니어링(주), (주)텍스텍 등을 매각하여 계열 분리하였다.

김석준 당시 회장은 현금을 마련하기 위해 계열사 매각을 추진했는데, 자동차 부문은 삼성대우와 협상을 벌였다.[10] 1997년에는 현금 확보를 위해 쌍용제지를 P&G에 매각했다.[10] 김석원 전 회장은 이에 분노하여 국회의원직을 사퇴하고 회장직에 복귀했지만, 아시아 금융 위기로 인해 재벌들이 부채를 재융자하는 것이 불가능해졌고, 한국 경제는 위기에 처해 600억 달러 규모의 IMF 구제금융을 받게 되었다.[10] 1997년 말, 김석원은 증권회사까지 매각하면서 쌍용자동차를 경쟁사인 대우에 넘겼다.[10] 그러나 대우그룹은 부도 및 관련 비리 사건으로 해체되었고, 쌍용자동차는 2022년 KG그룹에 인수될 때까지 여러 기업의 소유를 거쳤다.

쌍용그룹은 이후에도 구조조정을 계속하여, 1998년 쌍용양회(Riverside Cement unit)를 텍사스 인더스트리즈(Texas Industries)에, 1999년 쌍용정유(SsangYong Oil Refining) 지분 일부를 사우디 아람코에 매각했다.[12] 1983년 인수한 두 개의 호텔과 용평리조트도 매각 대상이었다.[11] 2000년에는 쌍용양회 지분 일부가 도쿄에 본사를 둔 태평양시멘트(Taiheiyo Cement)에 팔렸다.

2002년 쌍용화재(현 흥국화재)를 중앙제지에 매각하고, 2003년 용평리조트를 세계일보에, 쌍용캐피탈과 남광토건을 계열 분리하였다. 2004년 3월 진방철강을 매각하고, 2006년 4월 쌍용건설이 분리되면서 쌍용그룹은 사실상 해체되었다. 김석원 전 회장은 2004년 쌍용양회 경영권을 내놓았다.[4]

참조

[1] 웹사이트 쌍용그룹 https://terms.naver.[...] 2022-05-29
[2] 서적 The Korean Automotive Industry, Volume 1: Beginnings to 1996 https://books.google[...] Palgrave Macmillan 2021-12-11
[3] 뉴스 How TK Group squeezed me out https://koreajoongan[...] 2015-06-25
[4] 뉴스 The building blocks of Korea https://koreajoongan[...] 2010-01-11
[5] 웹사이트 History 1976–1979: Establishment of Company https://www.s-oil.co[...] S-Oil Corporation
[6] 뉴스 Seoul Opposition Leaders Shocked at Gulf Oil's Illegal Payments https://www.nytimes.[...] 1975-05-18
[7] 뉴스 Koreans and Americans in Seoul Say Park Must Be Aware of Gifts https://www.nytimes.[...] 1976-11-08
[8] 뉴스 TK Group falls from grace https://koreajoongan[...] 2015-06-25
[9] 뉴스 Banishing Yoo Seong-min in 2015: A Copy of the Ousting of the Four in 1971 https://www.khan.co.[...] 2015-06-30
[10] 뉴스 Two Brothers Are Divided by Korean Economic Turmoil https://www.wsj.com/[...] 1998-12-08
[11] 뉴스 Seoul Survivor: Restructuring Of Ssangyong Gives It a Chance https://www.wsj.com/[...] 1997-12-24
[12] 뉴스 South Korea's Ssangyong to Sell Stake In Oil Refinery to Aramco https://www.wsj.com/[...] 1998-11-23
[13] 문서 현 한반도면
[14] 뉴스 [대구/경북]대구 프로축구팀 창단 힘들다 https://news.naver.c[...] 동아일보 2000-12-20
[15] 뉴스 재벌(財閥)들"이색(異色)업종"눈독 https://newslibrary.[...] 조선일보 1981-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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