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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통 (명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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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왕통은 명나라의 무장으로, 금향후 왕진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아 도지휘사가 되었다.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도독첨사로 승진했고, 1403년 무의백에 봉해졌다. 이후 요동 원정에 참여하는 등 활약했으나, 1426년 베트남 원정에서 레러이에게 대패하여, 강화 협상을 통해 명나라 군대의 철수를 이끌었다. 이 일로 인해 투옥되었으나, 1449년 경태제 즉위 후 다시 등용되어 북경을 지키는 데 공을 세웠다. 1452년 사망했다.

2. 생애

왕통은 금향후 왕진의 아들로 태어나 아버지의 관직을 이어받아 도지휘사가 되었다. 아버지의 군대를 이끌고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워 도독첨사로 승진했다. 1403년 5월, 영락제에 의해 무의백에 봉해졌으며, 세권을 받았다. 1409년에는 장릉 건설을 감독했고, 1413년 5월에는 성산후로 작위가 올라갔다. 1414년1422년에는 영락제의 막북 원정에 참여하여 각각 좌액과 우액을 지휘했다. 1418년에는 섬서 지역의 기근을 해결하는 임무를 맡았다.[1]

1424년, 홍희제가 즉위하자 왕통은 후부를 관장하고 태자태보의 지위를 받았다. 당시 베트남 북부에서 레러이가 세력을 확대하여 명나라에 저항하고 있었다. 1426년 4월, 선덕제는 왕통을 정이장군으로 임명하고 총병관으로서 군대를 이끌고 레러이를 토벌하게 했다. 왕통은 베트남에 도착하여 여러 갈래로 군대를 나누어 진격했으나, 똣동-쭉동 전투에서 크게 패하고 병부상서 진흡은 자결했다. 왕통은 부상을 입고 교주부로 돌아갔다. 레러이는 이 소식을 듣고 의안에서 정예병을 이끌고 동관을 포위했다. 왕통은 전의를 상실하고 레러이와 강화를 추진하여 청화 이남의 땅을 레러이에게 넘겨주려 했다.

1427년 2월, 레러이가 교주부성을 공격하자 왕통은 정예병을 이끌고 기습하여 레러이 군대를 격파하고 만여 명을 참수했다. 그러나 왕통은 추격을 허락하지 않았고, 레러이는 다시 세력을 회복하여 교주를 포위했다. 왕통은 레러이와 강화를 추진했고, 같은 해 10월 동관회서를 통해 레러이와 맹약을 맺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12월, 왕통은 흠주를 거쳐 광서로 철수했다. 이로써 명나라는 베트남에서 완전히 철수하게 되었다.

1428년, 왕통은 북경으로 돌아왔으나, 베트남 원정 실패의 책임을 지고 여러 신하들의 탄핵을 받아 사형을 선고받고 옥에 갇혔다. 세습 특권과 재산도 몰수되었다. 1439년, 정통제에 의해 특별 사면을 받아 평민이 되었으나, 1449년 경태제 즉위 후 도독첨사로 다시 기용되어 경사보위전(베이징)에 참여했다. 에센 타이시의 침공을 막은 공로로 도독동지로 승진하고 천수산을 지키게 되었으며, 몰수되었던 재산도 돌려받았다. 1452년 사망했다.

2. 1. 건문제, 영락제 시기

정난의 변 때 아버지 왕진(王眞)의 관직을 이어 도지휘사(都指揮使)가 되었고, 아버지의 부대를 이끌고 전투에 참여하여 공을 세워 도독첨사(都督僉事)로 승진했다. 아버지 왕진이 죽자 무의백(武義伯)으로 봉해졌으며, 녹(祿) 천 석(石)과 세권(世券)을 받았다.[2] 영락 원년(1403년) 5월의 일이었다.[1]

영락 7년(1409년), 장릉(長陵)을 건설하는 책임을 맡았다.[2] 영락 11년(1413년) 5월, 성산후(成山侯)로 작위가 올라갔다.[1] 영락 17년(1419년)에는 성산후로 봉해졌고, 봉록 2백 석을 더 받았다.[2]

영락 12년(1414년), 영락제의 막북 원정에 참여하여 좌액(左掖)을 통솔하였다.[1] 영락 18년(1420년)에도 영락제의 북벌에 참전하여 좌액을 통솔하였다.[2] 영락 16년(1418년)에는 섬서에서 기근이 발생하자 진휼을 담당했다.[1] 영락 20년(1422년)에는 다시 영락제를 따라 출새(出塞)하여 대군의 후미에서 행군하였고, 연이어 출새하며 우액(右掖)을 통솔하였다.[2]

2. 2. 홍희제, 선덕제 시기: 베트남 원정과 패배

홍희제가 즉위한 뒤 왕통은 후군도독부사(後軍都督府事)를 맡았고, 태자태보(太子太保)로 임명되었다.[3] 선덕 초, 교지총병관(交阯總兵官) 풍성후(豐城侯) 이빈이 병사하자 영창백(榮昌伯) 진지와 도독 방정이 참장(參將)으로서 베트남 지역을 대신 지켰으나, 모두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당시 람선 봉기를 일으킨 레러이는 세력을 확장하여 여러 군읍(郡邑)을 격파하고 장수와 관리를 살해했다. 진지가 출병하여 레러이와 맞섰으나 연패했고, 선덕제는 진지의 작위를 깎은 뒤 왕통에게 정이대장군(征夷將軍) 인장을 주고 군사를 이끌어 레러이를 토벌하게 했다.

레러이의 동생 레티엔(黎善)이 교주(交州)로 진격하자 도독(都督) 진준 등이 방어했다. 마침 왕통의 대군이 도착하자 명나라군은 길을 나누어 출격했다. 참장(參將) 마영이 탁텃현(石室縣)에서 기의군을 격파하자 왕통은 병사를 이끌고 마영과 합쳤으나, 닌교(寧橋)에서 매복에 걸려 크게 패하고 궤멸하였다. (똣동-쭉동 전투)[4] 왕통은 부상을 입고 퇴각하여 교주를 지켰는데, 레러이가 응에안(乂安)에서 소식을 듣고 직접 정예병을 이끌고 동관(東關)을 포위했다. 왕통은 기세가 꺾여 은밀히 사신을 보내 레러이에게 책봉을 요청하겠다고 약속하고, 타인호아(淸化) 이남의 땅을 레러이에게 넘겨주었다. 안찰사(按察使) 양시습(楊時習)이 불가하다고 하자 왕통은 큰 소리로 그를 꾸짖었다.[5]

선덕 2년(1427년) 2월, 레러이가 타인호아를 공격했다. 왕통은 정예병 5천 명을 이끌고 레러이를 기습하여 만여 명을 참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레러이는 두려워하며 철군하고자 했고, 명나라군의 여러 장수들은 승세를 타고 추격할 것을 청했다. 왕통은 3일 동안 출격하지 않았고, 그 사이에 레러이는 원기를 회복하여 사방에서 공격을 시작했고, 병사를 나누어 쓰엉강(昌江)과 르엉강(諒江)을 점령했다. 왕통은 병사를 내어 공격하지 않았다.[7] 이때 레러이가 화친을 요구하자 왕통은 레러이의 서신을 선덕제에게 올렸다. 당시 류승이 찔랑-쓰엉강 전투에서 기의군의 복병에 걸려 전군이 궤멸되었고, 목성(沐晟)의 부대 또한 수미현(水尾縣)에 도달한 뒤로는 전진하지 못했다. 왕통은 더욱 두려워하여 급히 레러이의 화친 요구 서신과 사죄를 드리는 표문을 함께 조정에 올렸다. (이후의 자세한 내용은 동관회서에서 다룬다.)

2. 2. 1. 똣동-쭉동 전투 (1426년)

선덕 초, 교지총병관(交阯總兵官) 풍성후(豐城侯) 이빈(李彬)이 병사하자 영창백(榮昌伯) 진지(陳智)와 도독 방정이 참장(參將)으로서 대신 베트남 지역을 지켰으나, 모두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당시 람선 봉기를 일으킨 레러이가 세력을 확대하여 연달아 군읍(郡邑)을 격파하고 장수와 관리를 죽였다. 진지가 출병하여 레러이와 맞섰으나 연패하였고, 선덕제는 진지의 작위를 깎은 뒤 왕통에게 정이대장군(征夷將軍)의 인을 차고 군사를 이끌어 레러이를 토벌하도록 하였다.[4]

레러이의 동생 레티엔(黎善)이 교주(交州)로 진격하자 도독(都督) 진준(陳濬) 등이 방어하였다. 마침 왕통의 대군이 도착하자 명나라군은 길을 나눠 출격하였다. 참장(參將) 마영(馬瑛)이 탁텃현(石室縣)에서 기의군을 격파하자 왕통은 병사를 이끌고 마영과 합쳤으나, 닌교(寧橋)에서 매복에 걸려 군사가 크게 패하고 궤멸하였다. 이를 똣동-쭉동 전투라고 하며, 전사자가 2~3만 명에 달하였다.[4] 왕통은 부상을 입고 퇴각하여 교주를 지켰는데, 레러이가 응에안(乂安)에서 그 소식을 듣고 직접 정예병을 이끌고 동관(東關)을 포위하였다. 왕통은 기세가 꺾여 은밀히 사신을 보내 레러이를 위하여 책봉을 요청하겠다고 허락하였으며, 타인호아(淸化) 이남의 땅을 레러이에게 귀속시켰다. 안찰사(按察使) 양시습(楊時習)이 불가하다고 하자 왕통은 큰 소리로 그를 꾸짖었다.[5]

2. 2. 2. 동관회서 (1427년)

홍희제가 즉위한 뒤 왕통은 후군도독부사(後軍都督府事)를 맡았고, 태자태보(太子太保)로 임명되었다.[3] 선덕 초, 교지총병관(交阯總兵官) 풍성후(豐城侯) 이빈(李彬)이 병사하자 영창백(榮昌伯) 진지(陳智)와 도독 방정이 참장(參將)으로서 베트남 지역을 대신 지켰으나, 모두 직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다. 당시 람선 봉기를 일으킨 레러이는 세력을 확장하여 여러 군읍(郡邑)을 격파하고 장수와 관리를 살해했다. 진지가 출병하여 레러이와 맞섰으나 연패했고, 선덕제는 진지의 작위를 깎은 뒤 왕통에게 정이대장군(征夷將軍) 인장을 주고 군사를 이끌어 레러이를 토벌하게 했다. 레러이의 동생 레티엔(黎善)이 교주(交州)로 진격하자 도독(都督) 진준(陳濬) 등이 방어했다. 마침 왕통의 대군이 도착하자 명나라군은 길을 나누어 출격했다. 참장(參將) 마영(馬瑛)이 탁텃현(石室縣)에서 기의군을 격파하자 왕통은 병사를 이끌고 마영과 합쳤으나, 닌교(寧橋)에서 매복에 걸려 크게 패하고 궤멸하였다. 이를 똣동-쭉동 전투라고 하며, 전사자가 2~3만 명에 달하였다.[4] 왕통은 부상을 입고 퇴각하여 교주를 지켰는데, 레러이가 응에안(乂安)에서 소식을 듣고 직접 정예병을 이끌고 동관(東關)을 포위했다. 왕통은 기세가 꺾여 은밀히 사신을 보내 레러이에게 책봉을 요청하겠다고 약속하고, 타인호아(淸化) 이남의 땅을 레러이에게 넘겨주었다. 안찰사(按察使) 양시습(楊時習)이 불가하다고 하자 왕통은 큰 소리로 그를 꾸짖었다.[5] 타인호아의 수장(守將) 나통(羅通) 또한 성을 버리지 않고 지휘(指揮) 타충(打忠)과 굳게 지켰다. 선덕제는 류승(柳升)에게 군사를 이끌고 돕게 했으나 도착하지 못했다.[6]

선덕 2년(1427년) 2월, 레러이가 타인호아를 공격했다. 왕통은 정예병 5천 명을 이끌고 레러이를 기습하여 만여 명을 참살하는 승리를 거두었다. 레러이는 두려워하며 철군하고자 했고, 명나라군의 여러 장수들은 승세를 타고 추격할 것을 청했다. 왕통은 3일 동안 출격하지 않았고, 그 사이에 레러이는 원기를 회복하여 사방에서 공격을 시작했고, 병사를 나누어 쓰엉강(昌江)과 르엉강(諒江)을 점령했다. 왕통은 병사를 내어 공격하지 않았다.[7] 이때 레러이가 화친을 요구하자 왕통은 레러이의 서신을 선덕제에게 올렸다. 당시 류승이 찔랑-쓰엉강 전투에서 기의군의 복병에 걸려 전군이 궤멸되었고, 목성(沐晟)의 부대 또한 수미현(水尾縣)에 도달한 뒤로는 전진하지 못했다. 왕통은 더욱 두려워하여 급히 레러이의 화친 요구 서신과 사죄를 드리는 표문을 함께 조정에 올렸다. 같은 해 10월, 왕통이 관리 및 군민들을 이끌고 성을 나서 레러이와 함께 단을 세우고 맹세했다. 이를 동관회서라고 하며, 양측은 철군하기로 약속했다. 왕통은 레러이에게 금라주단(錦羅綢緞)을 주었고, 레러이도 귀중한 재물을 감사의 의미로 왕통에게 주었다. 12월, 왕통이 태감(太監) 산수(山壽)와 진지 등으로 하여금 수로를 통해 흠주(欽州)로 돌아가게 했고, 자신은 육군을 이끌고 광서(廣西)로 돌아갔다. 남녕(南寧)에 도착한 뒤 선덕제가 그 일에 대해 알게 되었다. 당시 명나라 조정은 철군하는 일을 상의하고 있었고, 이에 교지를 포기하기로 확정했다. 제4차 중국의 베트남 지배 시기에 명나라는 전후로 병사 10만 명을 파견했고, 군자금은 이상이었으며, 물자를 수송하는 비용도 막대했으나 이때에 이르러 모두 종언을 고했다. 명나라로 돌아온 관리 및 군민들은 86,000여 명이었고, 전란에서 죽은 자는 수를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베트남의 토관(土官) 도꾸이중(陶季容), 쩐딘(陳汀) 등은 레러이로부터 추궁을 받을 것이 두려워서 달아나 스스로 명나라로 들어갔다.[8]

2. 2. 3. 베트남 원정 실패의 결과

홍희제가 즉위한 뒤 왕통은 후군도독부사(後軍都督府事)를 맡았고, 태자태보(太子太保)로 임명되었다.[3] 선덕제 초, 교지총병관(交阯總兵官) 풍성후(豐城侯) 이빈이 사망하자 영창백(榮昌伯) 진지와 도독 방정이 베트남 지역을 대신 지켰으나, 람선 봉기를 일으킨 레러이에게 연패하였다. 선덕제는 왕통을 정이대장군(征夷將軍)으로 임명하여 레러이를 토벌하게 하였다. 레러이의 동생 레티엔(黎善)이 교주(交州)로 진격하자 도독(都督) 진준 등이 방어하였고, 왕통의 대군이 도착하여 명나라군은 길을 나누어 출격하였다. 참장(參將) 마영이 탁텃현(石室縣)에서 기의군을 격파하고 왕통과 합쳤으나, 닌교(寧橋)에서 매복에 걸려 크게 패하고 2~3만 명이 전사하였다. (똣동-쭉동 전투)[4] 왕통은 부상을 입고 교주로 퇴각하였고, 레러이는 정예병을 이끌고 동관(東關)을 포위하였다. 왕통은 은밀히 사신을 보내 레러이에게 책봉을 요청하고 타인호아(淸化) 이남의 땅을 레러이에게 넘겨주겠다고 하였다.[5]

선덕제 2년(1427년) 2월, 레러이타인호아를 공격하자 왕통은 정예병 5천 명을 이끌고 기습하여 만여 명을 참살하였다. 그러나 왕통은 추격을 주저하였고, 그 사이 레러이는 원기를 회복하여 반격하여 쓰엉강(昌江)과 르엉강(諒江)을 점령하였다. 레러이가 화친을 요구하자 왕통은 이를 선덕제에게 보고하였다. 류승이 찔랑-쓰엉강 전투에서 전멸하고, 목성의 부대도 진격하지 못하자, 왕통은 더욱 두려워하며 레러이와 화친하였다.[7] 같은 해 10월, 왕통은 관리 및 군민들을 이끌고 성을 나서 레러이와 맹세하였고(동관회서), 양측은 철군하기로 약속하였다. 왕통은 레러이에게 금라주단(錦羅綢緞)을, 레러이는 왕통에게 감사의 의미로 귀중한 재물을 주었다. 12월, 왕통은 태감(太監) 산수와 진지 등은 수로로, 자신은 육군을 이끌고 광서(廣西)로 돌아갔다.[8]

명나라는 제4차 중국의 베트남 지배 시기에 전후로 병사 10만 명을 파견하고, 군자금은 백만 석 이상을 소모하였으며, 물자 수송 비용도 막대하였으나 모두 실패로 끝났다. 명나라로 돌아온 관리 및 군민은 86,000여 명이었고, 전란에서 죽은 자는 셀 수 없을 정도였다. 베트남 토관(土官) 도꾸이중(陶季容), 쩐딘(陳汀) 등은 레러이에게 추궁받을 것이 두려워 명나라로 도망쳤다.[8] 선덕제 3년(1428년), 왕통은 경사로 돌아갔으나 탄핵을 받고 사형을 선고받아 하옥되었으며, 세권(世券)을 빼앗기고 가산이 몰수되었다.[9]

2. 3. 정통제, 경태제 시기

1439년, 정통제는 왕통을 특별 사면하여 백성으로 삼았다. 경태제 즉위 후, 왕통은 도독첨사(都督僉事)로 임용되어 경사보위전(베이징)에 참여하였다. 에센을 막아낸 공로로 도독동지(都督同知)로 승진하고 천수산을 지키게 되었으며, 가산 또한 회복되었다.[10] 1452년 임지에서 사망하였다.[10]

참조

[1] 서적 明史
[2] 서적 明史
[3] 서적 明史
[4] 서적 明史
[5] 서적 明史
[6] 서적 明史
[7] 서적 明史
[8] 서적 明史
[9] 서적 明史
[10] 서적 明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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