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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선 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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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람선 봉기는 1418년 레러이가 베트남에서 명나라의 지배에 저항하여 일으킨 봉기이다. 1400년 호꾸이리가 쩐 왕조를 무너뜨리고 호 왕조를 세운 후 명나라는 쩐 왕조 부활을 명분으로 베트남을 침략하여 지배했다. 명나라는 가혹한 식민 정책을 펼쳤고, 이에 레러이는 반란을 결심하여 람선에서 봉기를 시작했다. 봉기는 초기에는 게릴라전을 중심으로 전개되었으며, 이후 응에안 및 남부 지역으로 진격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1426년 똣동-쭉동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면서 명나라 군대를 격파했고, 결국 1428년 명나라는 패배를 인정하고 철수했다. 레러이는 이후 레 왕조를 건국하고 베트남을 통치했으며, 람선 봉기는 베트남 민족의 정체성 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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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선 봉기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람선 봉기
람선 봉기
분쟁람선 봉기
기간1418년 2월 7일 – 1427년 12월 10일 (9년 10개월 3일)
장소자오지 성 (현재의 베트남 북부, 베트남 중부), 라오스
결과람선 반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 1명나라
교전 2란쌍 (1422년–1423년)
교전 3베트남 람선 반군
지휘관
명나라리안
팡정
천즈
리빈
차이푸
왕통
왕안라오
류성
무성
량밍
리칭
황푸
르느홋 르엉
람선 반군레러이
레탁
딘레
리찌엔
류년쭈
레삿
레응언
응우옌칙
팜반
찐카
팜반싸오
레반린
규모
람선 봉기 관련 전투

2. 역사적 배경

1400년까지 베트남은 쩐 왕조의 통치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쩐 왕조의 호꾸이리 장군이 군사력을 장악한 후 반란을 일으켜 자신이 직접 왕위에 올랐으며, 쩐 왕족들을 대부분 학살하였다. 살아남은 쩐 왕가의 잔존 세력은 명나라의 영락제에게 원병을 청했고, 영락제는 이 요청을 받아들여 베트남에 대군을 파병하여 쩐 왕조를 복구시키려 하였다. 명나라의 군대는 성공적으로 호꾸이리 장군이 세운 호 왕조를 거꾸러뜨린 후 쩐 왕조의 재건을 꾀했으나, 전쟁 도중 쩐 왕조의 후손들이 모두 죽어 왕실의 대가 끊기면서 이 기회에 아예 베트남을 중국의 통치 하에 두기로 결정하였다.

명나라 조정은 베트남 지역에 혹독한 약탈 정책과 식민화 정책을 동시에 시행했다. 비취옥, 황금, 전통 회화들이 대거 중국으로 반출되었고, 장인들은 중국으로 끌려갔다. 베트남에서 출판된 서적들이나 예술 작품들은 한 부만을 남기고 모두 불탔으며, 베트남인들이 제작한 문학 작품들이 대량으로 손실되거나 사라졌다. 이 때 레러이는 명나라 병사들에 의해 베트남 마을이 불타는 모습을 보고 반란을 일으켜 베트남인들을 해방시킬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명나라가 수도를 포함한 일부 지역들의 치안을 유지하고 행정 업무를 보기는 했으나, 여전히 베트남의 지방 지역들과 시골에는 거주민들의 심각한 반발로 인하여 거의 행정력이 미치지 못하던 상태였다. 이 때 1407년과 1413년에 반란이 일어났으나, 이 봉기들은 모두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영락제 치하의 명나라는 1407년 호 왕조를 멸망시키고 대우교지로 편입시켰다. 그러나 초기에 그들은 쩐 왕조의 전 구성원들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했는데, 그 지도자는 쩐 응오이 공이었다. 이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이후 베트남의 운동에 영감을 주었다. 1418년 레러이의 반란 이전까지 명나라 통치에 대항하여 1415년부터 1424년까지 총 31번의 봉기가 일어났다. 교지에 주둔한 명나라 군대는 최소 87,000명의 정규군으로 구성되었으며, 베트남 북부의 39개 성과 도시에 흩어져 있었다.

2. 1. 명나라의 베트남 침략과 지배 (제4차 중국의 베트남 지배)

1400년, 호꾸이리쩐 왕조를 무너뜨리고 호 왕조를 세웠으나, 명나라는 쩐 왕조 복위를 명분으로 베트남을 침공하였다. 영락제쩐 왕조의 잔존 세력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군을 파병, 호 왕조를 멸망시켰다. 그러나 전쟁 도중 쩐 왕조의 후손들이 모두 죽어 왕실의 대가 끊기면서, 명나라는 베트남을 직접 통치하기로 결정하였다.

1406년 11월, 명나라는 장보의 지휘 아래 20만 대군을 동원하여 베트남을 침공, 1407년 1월 22일 다방에서 호조군을 격파하고 동도(승룡)를 점령했다. 1407년 6월, 호 왕조가 멸망했음에도 불구하고, 각지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도산의 팜 응옥, 광녕의 레 응아, 동조의 팜 찐, 쩐 껫 등이 봉기를 일으켰으나 모두 실패했다. 특히 쩐 떠이의 봉기(1407년~1409년)와 쩐 뀌 꽛의 봉기(1409년~1414년)가 대규모였지만, 모두 내분으로 인해 실패하였다. 1415년부터 1424년까지 총 31번의 봉기가 일어났고, 명나라 군대는 최소 87,000명의 정규군으로 구성되어 베트남 북부의 39개 성과 도시에 흩어져 있었다.

명나라 조정은 베트남에 가혹한 식민 정책을 시행했다. 비취옥, 황금, 전통 회화들이 중국으로 반출되었고, 장인들은 중국으로 끌려갔다. 베트남에서 출판된 서적들이나 예술 작품들은 한 부만을 남기고 모두 불태워졌으며, 베트남인들이 제작한 문학 작품들이 대량으로 손실되거나 사라졌다. 장보는 분서 등을 포함한 동화 정책을 엄격하게 추진했으며, 수백 항목의 중과세를 부과했다. 민중의 불만은 날마다 높아져 갔다. 이러한 가혹한 수탈과 문화 말살 정책은 베트남인들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켰으며, 레러이는 명나라 병사들에 의해 베트남 마을이 불타는 모습을 보고 반란을 일으켜 베트남인들을 해방시킬 것을 결심했다고 한다.

2. 2. 초기 저항 운동

3. 봉기의 전개

레러이는 1418년 2월, 새해 바로 다음 날부터 탄호아에서 반란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레러이는 응우옌 가문을 포함한 탄호아 지역 유력 가문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레러이는 쩐 왕조의 재건을 기치로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고, 옛 왕의 친척을 새 왕으로 내세워 정통성을 확보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 친척은 얼마 후에 끌어내려졌고, 레러이가 전면적인 반란의 지도자로 추대되었다.

반란은 초기에 연승을 거두며 승기를 잡아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레러이의 군대는 근거지인 탄호아 지방에서는 명나라 군대에게 승리하였어도, 명나라와 전면전을 벌여 승리할 정도의 군세는 되지 못하였다. 결국 레러이는 게릴라전을 통하여 명나라를 쫓아내기로 결심하고, 산악 지대를 중심으로 전투를 펼쳤다.

이 당시의 영웅담은 레러이의 부하였던 레라이에 대한 이야기이다. 어느 날 레러이와 그의 군대가 명나라 대군에 둘러싸인 채로 산봉우리 위에 갇혀 궁지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자 레라이는 자신이 레러이의 옷을 입고 명나라 군대를 혼란시키겠다고 제안하였고, 그 틈을 타 본진과 레러이가 빠져나갈 것을 권유하였다. 레러이는 이 안을 따랐고, 레라이가 명나라 군대에게 돌격하며 시간을 벌어준 덕분에 안전하게 도망칠 수 있었다고 한다.

한편 레러이는 명나라 이외에도 또다른 적이 있었는데, 이들은 바로 라오스 지방의 소수민족들이었다. 이 민족들은 중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레러이에게 적대심을 품고 있었다. 레러이의 군대는 산발적으로 흩어져 있는 소수민족들을 처리할 수는 있었으나, 한꺼번에 마주할 정도의 군사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결국 이들은 소수민족들을 피하기 위해 산악 지대로 숨어 다녀야 했으며, 이로 인해 끊임없는 식량 부족에 시달렸기에 심지어 군마나 코끼리를 죽여 식량으로 써야 할 정도였다. 1422년에 상황이 급격히 악화되자 레러이는 명나라 군대와 평화협정을 맺었으나, 이후 상황이 호전되고 전열이 정비되자 1년 후에 이 협정을 깨고 전쟁을 재개하였다.

1427년에는 반란이 베트남 전역으로 번졌으며, 베트남의 명나라 주둔군은 대거 죽거나 사로잡혔다. 한편 명나라에 새로 즉위한 선덕제는 이 전쟁을 최대한 빨리 끝내고 싶어했으나, 그의 관료들은 일격을 가해 반란군들을 쓸어버릴 것을 주장하였다. 결국 선덕제는 이에 굴복하여 10만 명의 대군을 보내 반란을 진압하고자 하였다. 이 원정은 시작부터 명나라에게 불리하게 돌아갔다. 명나라 군대를 이끌던 유성 장군은 후퇴하는 베트남 군대를 보자, 아무 생각도 없이 이들을 쫓아 결국 군대의 본진과 분리되었고, 베트남 군대에 포위된 후 목이 잘려 효수되었다. 또한 레러이의 수하들의 거짓 항복으로 인해 명나라 군대는 잘못된 정보들을 기반으로 한 전략들을 세웠고, 하노이 지방으로 들어가 대패를 당하는 등 연일 참혹한 패배를 이어갔다. 이 때 6만 명이 죽고 3만 명이 사로잡혔다고 한다.

명나라에 결정타를 입힌 것은 1426년에 일어난 똣동-쭉동 전투였다. 이후 1428년에 명나라는 패배를 시인할 수 밖에 없었다. 레러이는 사로잡힌 명나라 병사들과 관리들을 죽이는 대신 식량과 옷을 공급하여 명나라로 배를 통하여 실어보냈다. 이후 레러이는 왕위에 올라 레 왕조를 세웠고, 이 왕조는 이후 18세기까지 베트남을 지배하게 된다.

3. 1. 람선 봉기의 시작 (1418년)

1416년 초, 레러이는 롱애(탄호아)에서 봉기의 지도부 18명과 함께 선서회를 열고 선서문을 낭독했다. 1418년 2월 7일 (무술년 1월 2일), 레러이는 타인호아 람선에서 봉기를 일으키고 스스로를 '빈딘 브엉'(Bình Định Vương, 평정왕)이라 칭했다. 그는 응우옌 가문을 포함한 람선 지역 유력 가문들의 지지를 받았다.

레러이는 자신의 군대를 소규모 유격대 부대로 나누어 명나라 군대에 대항하여 게릴라(유격) 전술을 사용했다. 초기에는 명나라 군에 맞서 소규모 유격전을 중심으로 전개했다. 2월, 마 지(马骐) 장군 휘하의 명나라 군대가 람선을 공격했지만, 추 강 근처에서 람선 유격대에 의해 매복 공격을 받았다. 배신자는 명나라 군대를 람선으로 이끌어 레러이를 기습 공격하게 했으며, 레러이의 아홉 살 된 딸은 인질로 잡혀 영락제의 후궁으로 보내졌다.

1419년, 레러이의 군대는 람선 근처의 명나라 수비대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1420년 말, 유능한 명나라 지휘관 은 명나라 군대를 이끌고 므엉 토이를 공격했지만 패배했다. 람선 유격대는 나중에 상류 마 강을 장악했다.

다음 해, 장군 휘하의 대규모 명나라 군대가 람선 반군을 공격하기 위해 마 강 계곡으로 진격했다. 반대 방향에서는 란상에서 온 3만 명의 병력과 100마리의 코끼리를 갖춘 라오스 군대가 계곡 아래로 접근했다. 레러이는 처음에는 라오스 군대가 자신과 동맹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리 빈의 장교인 로 반 룯은 레러이를 경쟁자로 여겼다. 그는 라오스 군대를 설득하여 명나라와 합세하여 레러이를 공격하게 했다. 1422년, 전투 중 피로와 식량 부족으로 인해 레러이는 자신의 유격대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고, 금과 은을 지불하고 명나라 정부에 반란을 재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평화를 요구했다. 그런 다음 그는 람선으로 돌아갔다. 그 대가로 명나라는 그에게 식량과 농기구를 제공했다.

3. 2. 람선 지역에서의 전투 (1418년 ~ 1423년)

레러이는 1418년 뗏(음력설) 기간 동안 람선, 타인호아 성에서 명나라 통치에 대항하여 봉기 깃발을 올리고 스스로를 ''빈딘 브엉''(평정공)이라고 선포했다. 그는 자신의 군대를 소규모의 유격대 부대로 나누어 정규 명나라 부대에 대항하여 게릴라(유격) 전술을 사용했다.

1418년 2월, 마 지(马骐) 장군 휘하의 명나라 군대가 람선을 공격했지만, 추 강 근처에서 람선 유격대에 의해 매복 공격을 받았다. 배신자는 명나라 군대를 람선으로 이끌어 레러이를 기습 공격하게 했으며, 레러이의 아홉 살 된 딸은 인질로 잡혀 영락제의 후궁으로 보내졌다.

1418년 중반, 명군은 찌린산을 공략하여 레러이를 포획하기 위해 병력을 동원했다. 위급한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레러이로 변장한 므엉족 출신 레라이가 결사대를 조직하여 명군의 포위를 뚫고, 스스로를 희생하여 레러이를 도망시켰다.

1419년, 레러이의 군대는 람선 근처의 명나라 수비대를 공격하여 점령했다. 1420년 말, 유능한 명나라 지휘관 은 명나라 군대를 이끌고 므엉 토이를 공격했지만 패배했다. 람선 유격대는 나중에 상류 마 강을 장악했다.

1421년 말, 장군 휘하의 대규모 명나라 군대가 람선 반군을 공격하기 위해 마 강 계곡으로 진격했다. 반대 방향에서는 란상에서 온 3만 명의 병력과 100마리의 코끼리를 갖춘 라오스 군대가 계곡 아래로 접근했다. 레러이는 처음에는 라오스 군대가 자신과 동맹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리 빈의 장교인 로 반 룯은 레러이를 경쟁자로 여겼다. 그는 라오스 군대를 설득하여 명나라와 합세하여 레러이를 공격하게 했다.

1422년, 전투 중 피로와 식량 부족으로 인해 레러이는 자신의 유격대를 해산할 수밖에 없었고, 금과 은을 지불하고 명나라 정부에 반란을 재개하지 않겠다는 약속을 하면서 평화를 요구했다. 그 대가로 명나라는 그에게 식량과 농기구를 제공했다. 의군에 심각한 식량 부족이 일어나, 레러이는 코끼리와 애마를 포함한 등을 잡아 군대를 먹여 살려야 했다.

1423년 5월, 의군은 람산의 근거지로 돌아갔다. 1423년 여름, 레러이는 잠정적 평화를 제안했고, 명군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3. 3. 응에안 및 남부 지역으로의 진격 (1424년 ~ 1425년)

응우옌 짜이는 타인호아의 산중을 탈출하여 토지가 넓고 지세가 험한 응에안으로 군대를 이동시켜, 거기에서 북쪽으로 돌아 동도를 공략할 것을 제안했다.[3] 레러이는 응우옌 짜이의 계획을 받아들여, 산길을 따라 응에안 서부로 행군했다. 1424년 10월 12일, 람선 의병은 다낌(타인호아 성토쑤언 현)의 명나라 군 주둔지를 급습하여 승리했다. 이어서 람강 상류의 차린성을 항복시켰다. 람선 의병은 가류(응에안 성아잉선 현)로 진격하여 가류·푸아이에서 쩐찌 군을 격파했다. 단기간 내에 응에안의 대부분이 해방되었고, 명나라는 응에안 성으로 철수하여 농성했다. 레러이는 응에안 성을 포위하는 동안 연쩌우로 쳐들어가 승리하고, 타인호아로 진격했다. 연쩌우, 타인호아 지역 전체가 한 달도 채 안 되어 해방되었다.[3] 1424년 12월, 람선 반군은 빈(Vinh) 성채를 점령했다.

1425년 8월, 레러이는 쩐 응우옌깐, 레 응언 등에게 응에안에서 신빈(꽝빈성, 꽝찌성 북부)으로 진격하도록 명령했다. 의군은 신속하게 명군을 격파하고 신빈과 순화를 해방했다.[3] 레 삿(Lê Sát)과 루우 냐인 추(Lưu Nhân Chú)는 타인 호아를 공격했다. 남부에서 쩐 응우옌 한(Trần Nguyên Hãn) 휘하의 람선군은 현대 꽝빈(Quảng Bình)에서 명나라 군대를 격파한 후, 현대 꽝찌(Quảng Trị)와 트어티엔을 통과하며 남부 지역을 장악했다. 1425년 말까지 람선 의군은 탄호아에서 하이반 고개에 걸친 광대한 지역을 해방했다. 명군은 고립되었고, 의군에 의해 포위된 성루 몇 곳만을 확보했을 뿐이었다.[3]

3. 4. 북부 진격과 주요 전투 (1426년 ~ 1427년)

1426년 9월, 레러이는 군대를 이끌고 북부로 진격하여 홍강 삼각주를 공략하고, 중월 국경으로 나아갔다. 레러이는 쩐 까오를 대월국의 왕으로 옹립하였다.

레러이는 군사를 셋으로 나누어 북진을 시작했다. 첫 번째 부대는 서북부를 해방하고 윈난에서 오는 명나라 원군을 막는 임무를 맡았다. 두 번째 부대는 이천(珥川, 홍강) 하류를 해방하고, 응에안에서 동관(東關, 하노이)으로 가는 적의 퇴로를 차단하며, 광시에서 오는 원군을 저지했다. 세 번째 부대는 동관으로 직진했다. 이들은 진군하는 곳마다 주민들의 열렬한 환영과 지원을 받았다. 명군은 수세에 몰려 동관성으로 퇴각하여 농성했다.

왕통이 이끄는 명나라 군대는 하노이 남쪽 닌 끼에우에서 베트남 반군에 반격했다. 1426년 똣동-쭉동 전투에서 54,000명의 명나라 군대가 3,000명 또는 6,000명의 베트남 군대와 교전하여 베트남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대부분의 명나라 화기와 무기가 노획되었다. 1426년 10월, 왕통이 지휘하는 5만 명의 원군이 동관에 들어오면서 명군은 10만 명의 병력이 되었다. 왕통은 주도권을 되찾기 위해 1426년11월 7일 고부(하노이시쯔엉미현)에 주둔하던 람선 의군 주력을 공격하기 위해 출진했다. 그러나 람선 의군은 쭝동(崒洞)・쭉동(祝洞)에 매복하여 명군을 대파했다. 명군은 5만 명 이상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1만 명 이상이 포로로 잡혔으며, 왕통은 부상을 입고 동관으로 도주했다. 병부상서 진흡은 장군 이량과 함께 전사했다.

1426년 12월 8일, 람선군은 홍강 삼각주에 위치한 명나라의 거점인 동관(하노이)을 포위하여 1427년 1월에 함락시켰다. 명나라 총사령관이자 기술자인 채복은 레러이에게 항복하고 베트남인들에게 공성 무기 제조법을 가르쳤다. 1427년 3월, 현재 박장시에 위치한 명나라의 쓰엉장 요새가 포위되었다. 명나라 포로와 탈주병들은 베트남군에게 원시적인 전차(fenwen che), 무슬림이 발명한 트레뷰셋 (Xiangyang pao 또는 Huihui pao), 그리고 수포(huopao)와 같은 공성 무기를 제조하고 발사할 수 있도록 도왔다. 포위는 6개월 동안 지속되었고 요새는 반군에게 함락되었다.

명나라 기병


1427년 3월 29일, 류승과 목생이 이끄는 약 12만 명의 중국 증원군이 윈난성과 광시성에서 교지(베트남)로 진격했다. 1427년 10월 상순, 명나라의 원군 15만 명이 두 갈래로 나뉘어 진격해 왔다. 유승이 지휘하는 부대는 광서에서 諒山(랑선) 방면으로 진격했고, 목성의 부대는 운남에서 河江(하장) 방면으로 진입했다. 람선 의병 지도부는, 적의 원군인 유승 군을 섬멸하기 위해 병력을 집중하기로 결정했다.

9월, 유승의 군대는 지 랑 전투에서 레러이에게 매복 공격을 받아 지휘관 유승이 참수되었다. 10월 8일, 유승이 지휘하는 부대가 支棱(지릉, 랑선 성찌어랑 현)의 험로 앞에 도착했을 때, 陳榴(쩐류)가 이끄는 의병에 의해 복병 지점까지 유인되었다. 유승은 의병이 던진 창에 맞아 전사했고, 명군은 대혼란에 빠졌다. 레짜이(黎察)·류인수(劉仁澍) 등은 이 기회를 틈타 공격하여 1만 명 이상의 적을 섬멸했다. 유승이 살해된 후, 부장 량밍이 지휘를 맡아 창장(昌江, 박장 성박장 시)으로 진군하게 되었다. 그러나 도중 芹站(근참)에서 잇따라 복병에 당해, 3만 명 이상이 추가로 섬멸되었고, 량밍도 전사했다. 병부상서 이경도 목을 매 자결했다. 명군 잔존 부대는 간신히 창장에 도달했지만, 들판에서 의병의 포위 공격을 받아 약 5만 명의 손실을 입었다.

지아오즈에서 벌어진 길어진 전쟁과 명나라 군대의 심각한 상황은 제국의 자원을 고갈시켜 타협으로 이어졌다. 1427년 12월 29일, 왕통은 "영원한 우정의 엄숙한 맹세"와 함께 질서정연한 철수라는 응우옌 짜이의 조건을 수락했다. 레러이는 사자를 보내, 지릉에서의 전리품을 목성의 진영에 보냈다. 전리품을 본 목성은 유승의 패배를 알고, 본국으로 급히 도망쳐 돌아갔다. 유승과 목성의 원군이 완전히 괴멸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동관(東關)에 있던 왕통(王通)은 급히 화해를 요청했다. 1428년1월 3일, 명군의 마지막 부대가 국경을 넘어 본국으로 귀환했다.

4. 봉기의 결과

1427년, 람선 봉기가 베트남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베트남 주둔 명나라군은 대거 죽거나 사로잡혔다. 새로 즉위한 선덕제는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했으나, 결국 10만 대군을 보내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이 원정은 똣동-쭉동 전투에서 명나라군이 대패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명나라는 1428년에 패배를 인정하고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레러이는 포로로 잡은 명나라 병사들과 관리들에게 식량과 옷을 제공하여 배편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레러이는 왕위에 올라 레 왕조를 건국하였고, 레 왕조는 이후 18세기까지 베트남을 지배하였다.

4. 1. 명나라의 철수와 레 왕조 건국 (1428년)

1427년, 람선 봉기가 베트남 전역으로 확산되면서 베트남 주둔 명나라군은 대거 죽거나 사로잡혔다. 새로 즉위한 선덕제는 전쟁을 빨리 끝내고 싶어했으나, 결국 10만 대군을 보내 진압하려 했다. 그러나 이 원정은 똣동-쭉동 전투에서 명나라군이 대패하면서 실패로 돌아갔다. 명나라는 1428년에 패배를 인정하고 베트남에서 철수했다. 레러이는 포로로 잡은 명나라 병사들과 관리들에게 식량과 옷을 제공하여 배편으로 돌려보냈다. 이후 레러이는 왕위에 올라 레 왕조를 건국하였고, 레 왕조는 이후 18세기까지 베트남을 지배하였다.

4. 2. 레 왕조의 통치와 대월 국호 회복

5. 주요 인물

5. 1. 람선 봉기군

5. 2. 명나라 측 인물

6. 역사적 의의 및 평가

6. 1. 베트남 민족 정체성 형성

6. 2. 동아시아 국제 질서 변화

6. 3. 한국과의 관계

7. 전설

전설에 의하면 1428년 초, 레러이호안끼엠호(還劍湖, 환검호)에서 배를 타고 있던 중 황금 거북을 만났다.[1] 당시 레러이는 용왕이 내려준 마법 검 투언 티엔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거북이 검을 돌려달라고 하자 원래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마음으로 호수에 검을 던졌다.[1] 이후 레러이는 호수 이름을 '검을 돌려준 호수'라는 뜻의 '호안끼엠'으로 명명했다.[1] 북속기 시대에 레러이는 이 검을 이용해 수적으로 우세한 명나라군을 물리쳤으며, 검을 돌려받은 거북은 현재 호수에 살면서 자신이 지키는 데 도움을 준 나라를 돌보고 있다고 전해진다.[1]

7. 1. 호안끼엠 호수와 거북이 전설

전설에 의하면 1428년 초, 레러이호안끼엠호(還劍湖, 환검호)에서 배를 타고 있던 중 황금 거북을 만났다.[1] 당시 레러이는 용왕이 내려준 마법 검 투언 티엔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거북이 검을 돌려달라고 하자 원래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마음으로 호수에 검을 던졌다.[1] 이후 레러이는 호수 이름을 '검을 돌려준 호수'라는 뜻의 '호안끼엠'으로 명명했다.[1] 북속기 시대에 레러이는 이 검을 이용해 수적으로 우세한 명나라군을 물리쳤으며, 검을 돌려받은 거북은 현재 호수에 살면서 자신이 지키는 데 도움을 준 나라를 돌보고 있다고 전해진다.[1]

참조

[1] 웹사이트 Discover the Legendary Vietnamese Tale of Le Loi, the Magic Sword, and the Giant Turtle https://medium.com/i[...] 2023-04-04
[2] 서적 ベトナム史略 巻14 藍山蜂起
[3] 서적 ベトナム史略 巻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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