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척현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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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척현 전투는 임진왜란 당시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일본군의 전라도 진격을 막기 위해 김면의 의병과 관군이 벌인 전투이다. 1592년 8월 16일, 일본군은 우척현 고개를 넘으려 했으나, 매복하고 있던 조선 의병의 기습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고 후퇴했다. 이 전투의 패배로 고바야카와의 전라도 진격은 실패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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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척현 전투 - [전쟁]에 관한 문서 | |
---|---|
임진왜란 정보 | |
전체 | 임진왜란 |
분쟁 | 우척현 전투 |
날짜 | 1592년 8월 16일 (음력 7월 10일) |
장소 | 경상도 거창 우척현 |
결과 | 조선의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조선 |
교전국 2 | 도요토미 정권 |
지휘관 및 지도자 | |
지휘관 1 | 김면 정인홍 황응남 이형 |
지휘관 2 |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
병력 규모 | |
병력 1 | 의병 2000명 |
병력 2 | 별군 1500명 |
피해 규모 | |
피해상황 1 | 불명 |
피해상황 2 | 막대한 피해 |
2. 배경
임진왜란 당시 전라도로 침입하려는 일본군 장수들 중 제6진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만이 조선 군민들의 강력한 저항으로 전라도 진격 작전이 실패하고 있었다. 정암진 전투에서 첫 패전을 겪은 후 총공세를 감행했으나 1592년 8월 14일(음력 7월 8일) 본대가 이치 전투에서 권율에게 궤멸당했고, 부하 안코쿠지 에케이도 웅치 전투에서 조선군을 격파했으나 막대한 피해만 입고 철수했다. 결국 고바야카와는 8월 15일(음력 7월 9일) 경상도 김천에 주둔하던 1500명의 별군을 이끌고 경상도 거창을 거쳐 전라도 장수로 진격하기로 결정한다.
1592년 음력 7월 10일(8월 16일), 김면은 곽준, 문위, 윤경남, 박정번, 유중룡, 조종도 등 휘하 장수들과 함께 거창에서 군량을 모으고, 집안의 종 700명을 포함한 2000명의 의병을 모집했다. 또한 김성일이 보낸 만호 황응남, 판관 이형 등 관군과 합류하여 우척현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전투를 준비하였다.
3. 전투 과정
3. 1. 전투의 전개
1592년 8월 16일(음력 7월 10일) 일본군은 거창 북쪽 우척현에 당도했고, 조선군이 없자 고개를 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척현 고개에는 정인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김면의 의병들이 매복하고 있었다. 김면은 거창에서 군량을 모아 의병을 모집하고 김성일이 보내준 관군과도 합류해 전투를 준비했다. 일본군 선봉대가 고갯마루를 넘자 3면에서 활을 쏴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의병들의 계속된 공격에 일본군은 시체도 남겨둔 채 후퇴했고,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전라도 진격은 실패했다.
3. 1. 1. 조선 의병의 매복 작전
1592년 8월 16일(음력 7월 10일) 일본군은 거창 북쪽 우척현에 도착했고, 우척현에 조선군이 없자 고개를 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척현 고개에는 음력 5월 10일 정인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김면의 의병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면은 곽준, 문위, 윤경남, 박정번, 유중룡, 조종도 등의 휘하 장수들을 두고 거창에서 군량을 모아 4~5일간 집안의 종 700명을 포함한 총 2000명의 의병들을 모집하고, 김성일이 보내준 만호 황응남, 판관 이형 등의 관군과도 합류해 전투 준비를 했다. 일본군 선봉대가 고갯마루를 넘자 의병들은 3면에서 활을 쏴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일본군은 크게 당황했다. 그 동안 의병들이 계속 활을 쏴 일본군 대열은 완전히 붕괴되었다. 후퇴하던 일본군을 의병들이 추격하자 일본군은 시체도 남겨두고 철수했다. 결국 고바야카와 다카카게의 마지막 전라도 진격은 완전히 실패했고 더 이상 전라도에 들어갈 수가 없었다.
3. 1. 2. 의병과 관군의 협력
8월 16일 일본군은 거창 북쪽 우척현에 당도했고, 우척현에 조선군이 없자 우척현 고개를 넘기 시작했다. 그러나 우척현 고개에는 음력 5월 10일 정인홍과 함께 의병을 일으킨 김면의 의병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김면은 곽준, 문위, 윤경남, 박정번, 유중룡, 조종도 등의 휘하 장수들을 두고 거창에서 군량을 모아 4~5일간 집안의 종 700명을 포함한 총 2000명의 의병을 모집하고, 김성일이 보내준 만호 황응남, 판관 이형 등의 관군과도 합류해 전투 준비를 했다. 일본군 선봉대가 고갯마루를 넘자 일제히 3면에서 활을 쏴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일본군은 크게 당황하며 대열이 완전히 붕괴되었다. 의병들이 계속 활을 쏘자 후퇴하던 일본군은 시체도 남겨두고 철수했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섹션은 원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작성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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