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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전투 (159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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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상주 전투는 1592년 임진왜란 시기, 일본군의 북상 과정에서 조선군과 일본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이다. 일본군이 경상도 남부를 장악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하는 가운데, 조선 조정은 이일(李鎰)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상주 방어를 맡겼다. 그러나 이일이 상주에 도착했을 때, 상주 목사는 이미 도주한 상태였고, 이일은 급히 농민들을 징집하여 800명 규모의 병력을 구성했다. 훈련 부족과 지휘 체계의 혼란 속에서 이일은 일본군에 기습당해 패배했고, 이 전투의 패배로 조선군은 조령 방어선을 구축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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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주 전투 (1592년)
지도 정보
전투 정보
전투 이름상주 전투
일부임진왜란
날짜1592년 6월 3일 (그레고리력), 1592년 4월 25일 (음력)
장소경상북도 상주
결과일본의 승리, 상주 함락
교전 세력
교전국 1조선 왕국
교전국 2도요토미 정권
지휘관
지휘관 1이일(순변사), 이경류(방어사 겸 병조좌랑), 김수(경상도순찰사), 김해(상주목사), 권길(상주판관), 박지, 윤섬(교리)
지휘관 2고니시 유키나가, 소 요시토시, 마쓰라 시게노부, 오무라 요시아키, 고토 스미하루
병력 규모
병력 1농민군과 관군 800명, 또는 900명, 또는 6,000명, 또는 약 20,000명 (주민 포함 추정)
병력 216,700명 또는 1만 8300명 (최소 10,000 이상)
사상자 규모
사상자 1거의 전멸 (300명 전사 또는 1,000명 이상 사상 및 다수 포로)
사상자 2100여명 사상

2. 배경

임진왜란 발발 당시,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만 8700명의 왜군 제1부대는 경상도 남부 지방을 완전히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진격하고 있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상주로 내려보내며 일본군을 방어하려 했으나, 병력 부족과 지휘관들의 도주로 어려움을 겪었다.

부산에서 한성부(경성)로 향하는 길은 세 갈래가 있었는데, 그중 중로는 양산→밀양→청도→대구→인동→선산→상주→문경을 거쳐 조령을 넘어 도성에 이르는 길이었다. 상주성은 경상도에서 가장 중요한 거점이었다.

이일은 상주에서 900명 정도의 병력을 모았으나, 이들은 훈련받지 않은 농민들이었고 훈련시킬 시간도 부족했다.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은 선산을 통과하여 상주 인근의 장천에서 야영하며 척후병을 통해 조선군의 상황을 정찰하고 있었다.[4]

2. 1. 조선의 상황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만 8700명의 일본군 제1부대는 경상도 남부 지방을 함락시키고 파죽지세로 북진하고 있었다. 조선 조정은 이일을 순변사로 임명하여 상주로 급파, 일본군을 막으려 했으나 상황은 여의치 않았다.[4]

경상순찰사 김수는 대구에서 군사를 모아 이일과 합류하기로 했으나, 지휘관들이 도주하고 병력마저 부족하여 제대로 된 방어 태세를 갖추지 못했다. 박홍이각은 도망쳤고, 순찰사 김응서는 “제승방략”에 따라 문경 이하 주변 고을 수령들에게 명하여 대구에 군병을 집결시키고, 자신도 그곳에서 대기하며 중앙에서 장수가 파견되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소서행장이 이끄는 선봉대의 진격이 예상보다 빨라, 일본군이 압박해 온다는 보고에 막 모인 조선 장병들은 동요하여 밤 사이에 탈영했고, 싸우기도 전에 군대는 와해되었다.

이일은 한양에서 300명의 군사를 모아 내려갔으나, 도중에 병사들이 도망쳐 상주에는 극히 적은 수의 병력만이 남게 되었다.[4] 이일이 6월 2일(음력 4월 23일) 문경을 거쳐 상주에 도착했을 때, 상주 목사 김해는 이미 도망친 후였고, 판관 권길만이 상주를 지키고 있었다. 이일은 자신이 데려온 60명을 포함, 총 800명의 병력을 편성했으나, 이들은 대부분 훈련받지 않은 농민들이었다.[1]

이일은 부산에서 한성으로 향하는 일본군의 진격을 막는 임무를 받았지만, 그가 이끌던 부대는 훈련받지 않은 학생과 서기관들로 대부분 구성되어 있었다. 이들은 군 명단에는 있었지만 실제로는 없거나, 이미 사망했거나, 질병을 이유로 면제를 주장하는 병사들을 대신한 것이었다. 이일은 이들을 전투에 투입하는 대신 정예병만 데리고 현지 수비대에서 병력을 모집하려 했다. 그러나 상주에 도착했을 때, 수비대는 이미 고갈된 상태였다. 모든 병사들이 남쪽의 경상도 도읍인 대구를 방어하기 위해 소집되었기 때문이다. 병사가 없자 이일은 관청의 곡식을 이용하여 지역 농민들을 모집, 900명의 병력을 모았으나, 이들은 훈련받지 않은 폭도나 다름없었고, 훈련시킬 시간도 부족했다.

2. 2. 일본의 상황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1만 8700명의 일본군 제1번대는 파죽지세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들은 경상도 남부 지방을 완전히 함락시키고 밀양, 대구를 거쳐 선산까지 진출하며 낙동강을 건너 상주로 빠르게 진격하고 있었다. 일본군은 척후병을 통해 조선군의 상황을 면밀히 정찰하며 전투 준비를 철저히 하고 있었다.

3. 전투 과정

이일(李鎰)이 징집한 농민 병사 중 한 명이 일본군 선발대가 목격되었다고 보고했지만, 이일은 이를 믿지 않고 유언비어를 퍼뜨렸다는 이유로 처형했다. 그는 일본군이 부산에서 상주까지 단 10일 만에 진격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보고는 곧 사실로 확인되었고, 이일은 상주 뒤편 언덕에 군대를 배치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군대를 둘로 나누었다. 고니시와 마쓰라 시게노부(松浦鎮信)가 이끄는 첫 번째 그룹은 저항 없이 상주를 점령했다. 소 요시토시(宗義智), 오무라 요시아키(大村吉盛), 고토 모토츠구(後藤基次)가 이끄는 6,700명의 두 번째 그룹은 이일과 직접 대치하기 위해 진격했다. 이들은 숲을 통해 접근하여 조선 궁수들의 사정거리 밖에서 상황을 관찰했다. 조선군은 경고를 보내지 못했고, 일본군 선봉대가 숲에서 나타나 정찰병을 사살할 때까지 일본군의 접근을 알지 못했다. 일본군은 세 그룹으로 나뉘어 조선군을 급습했고, 훈련받지 못한 조선군은 50미터 거리에서 무너져 학살당했다.

4월 16일 순찰사로 임명된 이일(李鎰)은 군사 부족으로 4월 19일한성부를 출발하여 60명의 군관만 거느리고 진군했다. 4월 23일 상주성에 도착했으나, 상주목사 김개(金澥)는 도주하고 상주판관 권길(權吉)만 남아 있었고 병사는 없었다. 권길은 인근에서 농민 수백 명을 모았고, 이일은 관창을 열어 곡식을 나눠주고 피난민을 모아 수백 명을 병사로 삼았다. 이들을 합쳐 6,000명이 넘는 군세가 되었다.[4]

한편, 고니시 유키나가와 제1대는 선산을 통과하여 김천시 부근 장천에서 야영했다. 개녕 주민이 이를 알렸으나, 이일은 믿지 않고 "중을 현혹하는 자"라 하여 죽이려 했다. 개녕 주민은 통곡하며 감옥에 가두고 다음 날 아침 일본군이 오지 않으면 죽여 달라고 간청했다. 다음 날 아침 일본군이 나타나지 않자, 이 주민은 처형당했다.

이일은 800명 또는 900명 정도의 병력을 이끌고 상주성 북쪽 언덕에 진을 치고 강가에서 훈련했다.[1] 얼마 후, 일본군 정찰병으로 보이는 인영이 나타났다. 병사들은 개녕 주민의 최후에 겁을 먹어 장군에게 말하지 못했다.

정오경, 상주성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본 이일은 군관에게 확인을 명했으나, 군관은 일본군의 철포에 맞아 즉사했다. 조선 장병들이 사기를 잃은 상황에서 일본군은 대거 나타나 철포를 발포하며 도발했다. 조선군은 활로 응사했으나, 화살은 일본군에게 미치지 못했다.

일본군은 정면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대, 마쓰라 시게노부(松浦鎮信), 오무라 요시아키(大村喜前)·고토 모토츠구(五島純玄)의 부대가, 좌우에서는 다른 부대들이 공격했다. 후방에서는 소 요시토시(宗義智) 부대가 퇴로를 차단하려 하자, 이일은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도주했다. 이일의 군대는 궤멸되었고,[5] 300명이 전사했으며, 이경류(李慶流), 권길(權吉) 등 많은 군관이 전사하였다.[1]

전투 이전에 상주성은 이미 함락되었고, 종사관 박치(朴篪), 윤섬(尹暹)은 사망했으며, 왜학통사 경응순(景應舜)은 포로가 되었다.

3. 1. 이일의 실책

6월 2일(음력 4월 23일) 저녁, 개령 주민이 이일에게 일본군이 근방까지 왔다고 알렸으나, 이일은 이를 믿지 않고 오히려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는 이유로 그를 옥에 가두었다.[4] 6월 3일(음력 4월 24일)에도 적이 나타나지 않자, 이일은 그 개령 주민을 처형했다.[4]

이일은 일본군이 부산에서 상주까지 단 10일 만에 진격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4] 그러나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제1번대는 이미 5월 29일(음력 4월 19일) 밀양을 점령하고 5월 31일(음력 4월 21일) 대구를 거쳐 낙동강을 건너 선산에 진출한 상황이었다.[4]

이일은 상주성 북쪽 북천 강변에서 군사 훈련을 하면서도 적의 진출 상황을 알아보지 않았고, 주변에 보초도 세우지 않았다.[4] 반면 일본군은 여러 차례 척후병을 보내 조선군의 상황을 정찰하고 있었다.[4] 조선군 병사들은 일본군 척후병을 발견했지만, 아침에 처형당한 사람이 생각나 보고하지 못했다.[4]

훈련 중 상주성 안에서 검은 연기가 치솟자, 이일은 군관을 보내 확인하게 했다. 그러나 군관은 다리 밑에 숨어 있던 일본군 저격병에게 조총으로 저격당하고 목이 베이는 참사를 당했다.[4] 이는 조선군의 사기를 크게 떨어뜨렸다.

3. 2. 조선군의 패배

조선군은 일본군의 기습 공격과 조총 화력에 밀려 패배했다. 훈련이 부족했던 조선군은 활을 쏘며 저항했지만, 일본군의 포위 공격에 밀려 후퇴했다. 이일은 갑옷과 말을 버리고 도주했으며, 많은 조선군 병사들이 전사하거나 포로로 잡혔다.[5] 이경류, 권길 등 조선군 지휘관들이 전사하였다.[1]

전투 전, 조선군은 일본군의 접근을 파악하지 못하고 사기가 저하된 상태였다. 고니시 유키나가 (小西行長)와 마쓰라 시게노부(松浦鎮信)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는 저항 없이 상주를 점령했다. 소 요시토시(宗義智), 오무라 요시아키(大村吉盛), 고토 모토츠구(後藤基次)가 이끄는 6700명의 일본군은 이일의 조선군과 직접 대치했다.

일본군은 숲을 통해 접근하여 조선 궁수들의 사정거리 밖에서 상황을 관찰했다. 조선군은 이이에게 경고하지 못했고, 일본군 선봉대가 숲에서 나타나 정찰병을 사살할 때까지 일본군의 접근을 알지 못했다. 일본군은 세 그룹으로 나뉘어 조선군을 급습했고, 50미터 거리에서 훈련받지 못한 조선군은 붕괴되어 학살당했다.

정오경, 상주성에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것을 본 이일은 군관에게 확인을 명했으나, 군관은 일본군의 철포(鐵砲)에 맞아 즉사했다. 조선 장병들이 사기를 잃은 상황에서 일본군은 대거 나타나 철포를 발포하며 도발했다. 조선군은 활로 응사했으나, 화살은 일본군에게 미치지 못했다.

일본군은 정면에서 고니시 유키나가대, 마쓰라 시게노부(松浦鎮信), 오무라 요시아키(大村喜前)·고토 모토츠구(五島純玄)의 부대가, 좌우에서는 다른 부대들이 공격했다. 후방에서는 소 요시토시(宗義智) 부대가 퇴로를 차단하려 하자, 이일은 포위될 것을 우려하여 도주했다. 이일의 군대는 궤멸되었고,[5] 300명이 전사했다. 방어사 겸 병조좌랑 이경류(李慶流)와 상주판관 권길(權吉) 등 많은 군관이 전사하였다.[1]

전투 이전에 상주성은 이미 함락되었고, 종사관(從事官) 박치(朴篪), 윤섬(尹暹)은 사망했으며, 왜학통사(倭學通事) 경응순(景應舜)은 포로가 되었다.

4. 전투의 결과 및 영향

이일은 조령을 넘어 신립 장군에게 합류했고, 일본군은 충주로 진격했다.

4. 1. 조선

이 광경을 본 조선군은 전투를 시작하기도 전에 사기가 떨어졌고, 일본군은 대규모 기습 공격을 하여 조총을 쏘며 접근했다. 조선군은 활을 쏘았으나 후퇴하였고, 곧 일본군이 포위하여 사면 압박해 결국 이일은 도망쳤다. 남아서 싸우던 군사들은 모두 전사했다. 이일과 군관 2명만이 조령의 조방장 변기와 충주의 신립 진영으로 후퇴했다.

이일은 갑옷과 말을 버리고 북쪽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일본군에 효과적으로 저항할 수 있었던 전략적 요충지인 조령을 지나 신립 장군에게 합류했다.

이일은 문경에 도착하여 패배를 보고하는 문서를 올렸다. 그리고는 조령으로 물러났는데, 거기서 신립의 군대가 충주에 있다는 것을 알고 충주로 향했다.[1]

4. 2. 일본

小西行長일본어은 전투가 끝나자, 종씨(宗氏)의 가신이자 예조참판(외무차관)인 이덕형에게 보낼 편지를 경응순에게 주어 석방하고, 충주에서의 회견을 요청했다.[1] 이덕형을 통해 조선 국왕에게 항복을 요구할 작정이었다.[1]

참조

[1] 서적 (제목 미상) (출판사 미상) 1924
[2] 문서 李鎰軍の総勢ではなく襲撃を受けた時の人数
[3] 서적 完訳フロイス日本史5 豊臣秀吉篇Ⅱ
[4] 간행물 宣祖修正實録 25年 4月 14日 "鎰又發倉廩, 誘募散民, 得數百人, 倉卒徧伍, 合兵僅六千餘人。" http://sillok.histor[...]
[5] 간행물 宣祖修正實録 25年 4月 14日 "倭入尙州, 李鎰兵潰走還。" http://sillok.histor[...]
[6] 문서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승문원의 관료(종 5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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