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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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권율은 임진왜란 시기 활약한 조선의 무관으로,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을 승리로 이끌었다. 1593년 도원수로 승진하여 조선군을 총지휘했으며, 울산성 전투와 순천성 전투에서 지휘했으나 패했다. 긍정적인 평가와 더불어 이순신, 원균과의 갈등에 대한 책임론 등 부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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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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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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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권율 |
한자 이름 | 權慄 |
로마자 표기 | Gwon Yul |
다른 이름 | 언신(彦愼) 충장(忠莊) |
출생일 | 1537년 12월 28일 |
사망일 | 1599년 7월 6일 |
출생지 | 경기도, 조선 |
사망지 | 고양, 경기도, 조선 |
묘호 | 충장(忠莊) |
본관 | 안동(安東) |
배우자 | 조씨 부인 박씨 부인 |
자녀 | 권씨 부인, 권익경 (양자) |
아버지 | 권철 |
호 | 만취당(晩翠堂), 모악(暮嶽) |
최종 계급 | 정2품 팔도 도원수 |
주요 참전 전투/전쟁 | 임진왜란 정유재란 |
주요 전투 | 용인 전투 이치 전투 독성산성 전투 행주대첩 |
근무 | 예조정랑 호조정랑 의주목사 광주목사 전라도 순찰사 한성판윤 충청도 순찰사 팔도 도원수 |
학력 | 1582년(선조 15년) 식년문과 병과 급제 |
사당 | 경기 고양시 충장사(忠莊祠) 경기 고양시 기공사(紀功祠) 충남 금산군 충장사(忠莊祠) |
군사 경력 | |
소속 | 조선 |
복무 기간 | 불명 |
최종 계급 | 도원수 |
지휘 | 조선군 |
주요 전투 | 일본의 조선 침략 (1592~1598) 행주 전투 울산 전투 순천 전투 |
관직 및 벼슬 | |
직책 | 조선의 팔도 도원수 |
재임 기간 | 1593년 ~ 1599년 |
전임 | 김명원 |
직책 2 | 조선의 한성부판윤 |
재임 기간 2 | 1595년 ~ ? |
전임 2 | 유근 |
후임 2 | 신접 |
서훈 내역 | |
서훈 내역 | 1598년 7월 12일 좌찬성 겸 의금부사 대제학 추증 1604년 선무공신 1등 추록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 추봉 영의정 추증 |
기타 정보 | |
정당 | 무소속 |
2. 주요 전력
임진왜란 당시 조선군 도원수로서 조선군을 총지휘한 권율은 행주대첩을 이끈 장군으로 잘 알려져 있다. 1593년(선조 26) 음력 2월 12일, 3천 8백 명의 병력과 민간인들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을 공격해오는 3만 명의 왜군을 궤멸시켰다.[1] 금산군 이치(梨峙) 전투에서도 승리했다.[3] 그는 문과에 급제한 문관 출신이었다.[3]
시기 | 전투 | 적장 | 결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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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 6월 5일 | 용인 전투 | 패 | |
1593년(선조 26년) 2월 12일 | 행주산성 전투 | 우키다 히데이에 | 승 |
1593년(선조 26년) 6월 | 2차 진주성 전투 | 패 | |
1597년(선조 30년) | 칠천량 해전 | 패 | |
1597년(선조 30년) 12월 21일~ | 울산성 전투 | 가토 기요마사 | 패 |
1598년(선조 31년) 9월 19일~ | 순천성 전투 | 소니 나가마사 | 패 |
권율은 부유한 집안 출신이었으나, 어릴 적에는 공부보다 장난을 좋아했다. 아버지 친구에게 경서 구절에 대한 질문을 받고 대답하지 못해 부끄러움을 느껴 공부를 시작했지만, 관리가 될 생각은 없었다. 그러나 가족의 권유로 1582년(선조 15년) 문과 병종에 합격했다.
3. 생애
1592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류성룡의 추천으로 광주목사를 역임했고, 용인 전투에 참전했으나 패했다. 이후 전라도관찰사 겸 순찰사(감사, 전라도 군사령관)로 승진했다.
1593년 명나라 구원군이 도착하자 행주산성으로 진출, 행주산성 전투를 벌였다. 약 4,000명의 조선군으로 2만 명의 일본군과 싸웠으나, 버틸 수 없다고 판단하여 성에 불을 지르고 파주로 후퇴했다.
진주성 전투(2차)에서는 일본군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했으나, 일본군이 진주성으로 진격하자 함안으로 출전했다가 일본군의 총소리에 전군이 붕괴, 전주까지 후퇴했다.
이후 도원수에 임명되어 조선군 지휘를 맡았다. 정유재란 때 원균에게 일본군 공격을 명령했으나, 원균은 소극적이었다. 권율은 원균을 태형에 처하여 공격을 재촉했고, 원균은 출전했으나 역습을 받아 조선 수군은 궤멸되고 원균도 전사했다(칠천량 해전). 일본군이 전라도로 진격하자 권율은 싸우지 않고 후퇴, 전라도와 충청도는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일본군이 울산왜성 축성을 시작하자, 조선군은 명군과 함께 울산성 전투를 벌였다. 권율은 직접 지휘했으나 많은 사상자만 내고 패했다. 순천성 전투에서도 지휘를 맡았으나 패했다.
1599년 63세에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해 7월에 사망했다. 그는 전쟁 중 패배를 거듭했지만, 항상 적극적인 자세로 끈기 있게 전선을 유지했다. 방어전에 강했고, 결정적인 순간에 요충지 방어에 성공했다. 선조는 그를 존경했고, 그의 죽음에 이틀 동안 정무를 보지 못할 정도로 슬퍼했다. 사후 이순신, 원균과 함께 공 1등으로 평가받았다.시기 전투 적장 1593년 2월 10일 행주산성 전투 우키다 히데이에 1597년 12월 21일~ 울산성 전투 가토 기요마사 1598년 9월 19일~ 순천성 전투 고니시 유키나가
3. 1. 임진왜란 이전
1537년 경기도 강화부(훗날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권철이고, 어머니는 창녕 조씨(昌寧曺氏)이다. 1582년 46세의 늦은 나이로 처음 관직에 임명되었고, 1591년 의주 목사 등 여러 직책으로 승진했다.[1]
3. 1. 1. 출생과 가계
1537년(중종 32) 12월 28일 경기도 강화부(훗날의 인천광역시 강화군)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의정부영의정을 지낸 권철이고, 어머니는 창녕 조씨(昌寧曺氏)이다. 할아버지는 강화부사 권적(權勣)이고 도첨의(都僉議) 권보(權溥)의 8대손이다. 광흥창수를 지낸 권항, 호조좌랑 권개, 중추부동지사 권순 등은 그의 친형이다.
뒤에 한성부로 이사하여 생활했는데, 현재의 서울시 종로구 행촌동 독립문역 3번 출구와 사직터널 주변 일대에 그의 집이 있었다.
본부인 창녕 조씨(昌寧曺氏)는 딸 1명을 낳고 일찍 사망하였는데, 이 딸은 후일 이항복과 결혼한다. 상처한 그는 죽산 박씨, 박세형의 딸과 재혼하였다. 그는 권순(權恂)의 아들 권익경(權益慶)을 양자로 입양하였다.
그의 가계는 다음과 같다.
항목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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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 | |
형제 | |
배우자와 자녀 |
3. 1. 2. 과거 급제
권율은 안동 권씨 명문가 출신으로, 아버지는 영의정을 지낸 권철이다. 그러나 46세까지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582년 처음으로 조선 정부 관직에 임명되었고, 1591년 의주 목사 등 여러 직책으로 승진했다.[1]3. 2. 임진왜란 시기 활동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권율은 광주목사로 부임하였다. 선조가 북쪽으로 피난을 떠난 상황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의 군대가 올라온다는 소식을 듣고 경상도와 전라도에 진지를 구축할 것을 건의했으나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다.[5]임진왜란 발발 이후 권율은 여러 전투에 참여하여 활약했다. 주요 전투는 다음과 같다.
시기 | 전투 | 결과 | 적장 |
---|---|---|---|
1593년 2월 10일 | 행주산성 전투 | 승리 | 우키다 히데이에 |
1597년 12월 21일~ | 울산성 전투 | 패배 | 가토 기요마사 |
1598년 9월 19일~ | 순천성 전투 | 패배 | 고니시 유키나가 |
1593년 행주대첩 승전의 공으로 도원수로 승진하여 조선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1] 1596년 도망병 즉결처분 사건으로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복권되어 이몽학의 난 진압에 참여했다.[1] 이후 한성부 판윤, 호조판서,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다시 도원수가 되었다.[1]
1597년 정유재란이 발발하자 명나라 장군 마귀와 함께 울산에서 일본군과 대진했으나, 명나라 군대 사령관 양호의 갑작스러운 퇴각령으로 철수했다.[1] 이후 순천 예교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려 했으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했다.[1]
3. 2. 1. 임진왜란 초기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광주목사로 발령받았다. 전라도 순찰사 이광과 방어사 곽영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권율도 광주목사로서 군병을 모집하였다. 곧 곽영의 휘하에 들어가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북진하다가 용인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병사들이 훈련을 제대로 받지 못한 오합지졸이라 패전하였다.[5]당시 도순찰사 이광이 수원과 용인으로 들어가 이곳에 진을 친 소규모의 일본군들을 기습공격하려 하자, 권율은 은신할 곳이 없고 평지인데다 당시 조선군의 훈련 상태와 병력의 수가 열악함을 이유로 극력 반대하며 차선책을 제시하였으나 이광은 듣지 않았다. 권율은 한성 도성이 멀지 않고 적의 규모가 큰데,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적은 수의 적과의 싸움으로 도내의 병력을 소모할 것이 아니라, 조강(祖江)을 건너 임진강을 막아서 서로(西路)를 튼튼히 하고, 군량미를 바로 운반할 수 있는 도로를 조선군이 확보한 다음에 적의 동태를 살피면서, 한편으로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옳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광은 그의 제안을 듣지 않고 공격령을 내려, 무모한 공격을 취해 대패하고 선봉장 이시지, 백광언 등을 비롯한 여러 장수들이 전사하고 군사가 전멸되었다. 이때 권율 혼자만이 휘하의 군사를 상당수 유지하였다. 권율은 남은 군사들을 추슬러 광주군으로 퇴각하여 뒤를 계획하였다. 다시 광주에 가서 1천여 명의 병력과 의병을 추가로 모집했다.[5] 이후 수원독성산성(禿城山城)에서 주둔하며 방어하였다.
3. 2. 2. 이치 전투
권율은 병사들을 이끌고 남원에 주둔하여 1천여 명의 의용군을 추가로 모집하였다. 광주(光州)로 가서 군병을 모집하고 남원으로 이동했다는 설도 있다.[5] 다시 북진, 금산군에서 전주로 들어오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가 이끄는 군사들을 만나, 이들이 올라올 길목을 찾았다. 동복현감 황진과 함께 전주 이치로 갔다.권율은 전라도 금산에서 전주로 진격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진산 인근 이치(梨峙, 배고개)에 진을 쳤다. 임시 도절제사 권율과 동복현감 황진이 이끄는 1천여 명의 조선군이 왜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이끄는 2천여 명의 대군과 맞서 싸워 승리한 전투로 일본의 전라도 진격 작전을 좌절시켰다. 이 승리로 왜군은 그 후 다시는 전라도를 넘보지 못하게 되었으며 권율은 전라감사로 승진하였다.[6] 당시 전쟁 도중 황진이 총탄에 맞아 조선군 사기가 저하되었지만, 기적적으로 병사들을 추슬러서 독려하여 고바야카와 군을 상당수 몰살시키게 된다. 1592년 가을 이치 전투에서 승전한 공로로 곧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었다.
3. 2. 3. 독성산성 전투
1592년 한양으로 향해 북상하던 도중 수원 독산(禿山, 현 오산시)의 독성산성(禿旺山城)에 주둔하였다. 독왕산성은 물이 귀한 곳이었으며 우키다 히데이에가 이끄는 왜군은 독왕산성과 그 주변에 물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한 달간 성을 포위했다. 조선군 병력이 1만 명 정도가 수원 근처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왜병 총사령관 우키타(宇喜多秀家)는 후방과의 연락 및 군량미 등의 통로가 단절될 것을 우려하여 성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을 풀어 삼진(三陣)을 만들고 오산 등 여러 곳에 병력을 분산시켜 진을 치게 하고, 서로 오가게 하면서 독성산성의 아군을 성 밖으로 유인하려 했다. 그러나 권율은 성을 튼튼하게 하고, 병력을 나눠 지구전(持久戰)과 유격전을 하면서 일본군에 타격을 가하여 일본군의 서쪽 진군을 막았다.이때 권율은 산성 위에 군마들을 세워놓고 병사들로 하여금 말에게 쌀을 쏟아붓고 씻기게 하였다. 성 아래서 볼 때는 마치 풍부한 물로 말들을 씻기는 것 같이 보였다. 이에 왜군은 사기가 떨어져 포위를 풀고 우키타는 영책(營柵)을 불사르고 군사를 이끌고 한성으로 후퇴하였으며, 이때 일본군의 퇴각로를 알아내고 정예 기병 1천명을 먼저 매복시켜 퇴각하는 일본군을 베었다. 권율의 병사들은 나머지를 추격하여 왜군에 300 이상의 전사자를 내게 만들었다. 임진왜란이 끝난 후 선조는 권율의 병법을 높이 치하하여 독왕산성 정상에 세마대(洗馬臺, 말을 씻긴 곳)를 짓게 하여 오늘에 이른다. 선조는 이 소식을 듣고 전령을 통해 권율에게 어검(御劍)을 하사하여, 군률(軍律)을 세울 수 있게 권위를 부여하였다.
3. 2. 4. 행주대첩
1593년 2월 12일 3천 8백 명의 병력과 소수의 민간인들을 데리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을 공격해오는 3만 명의 왜군을 궤멸하고, 공격군을 패주시켰다.[1]권율은 조방장 조경(趙儆)을 보내 한성부 서쪽 주변에 물과 식량, 교통이 원활하면서도 매복, 웅거가 가능한 곳을 물색하도록 했고, 조경은 고양 행주산성 등을 후보지로 지목했다. 권율은 행주를 택하고 병력을 비밀리에 이동시켰다. 조경에게 명하여 2일간에 걸쳐 목책(木柵)을 완성하게 하고, 독성산성으로부터 군사를 건너가게 했다. 1만 군사를 신속하게 이동시키고 이동행렬이 왜군에게 포착되지 않게 하려고 독성산성에 목책과 소수의 군사만을 남겨, 많은 군사가 계속 남아 있는 것처럼 위장시킨 뒤 행주산성으로 옮겼다.[1]
수원 독왕산성에서 양천(陽川)으로 군사를 옮기고 방어선을 옮겨 병사를 나누어 지원하면서 한강 강줄기를 따라 한성부 서쪽 안현(鞍峴)으로 잠입할 생각을 했으나 부하 장수들이 만류하여 행주산성으로 가게 되었다. 수원에서 고양으로 이동하던 중 권율은 휘하 병 가운데 4천 명을 선발하여 서남쪽으로 은밀하게 내려보내 전라도병마절도사 선거이(宣居怡)에게 경기도 금천(衿川, 시흥시 북서부 및 서울 관악 주변)에 주둔하게 하고 한성부에서 산길을 넘어 내려오는 왜군을 상대하도록 하였다.[1]
권율과 그의 부대는 서울 근처의 낡은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김천일이 이끄는 향병과 처영이 이끄는 승병이 합류했지만, 행주에 주둔한 그의 전체 병력은 2,800명이 채 되지 않았다. 일본군 지휘관 가토 기요마사와 우키타 히데이에는 3만 명의 병력으로 행주산성을 공격하여 권율의 부대를 일거에 제압하려 했다. 직접 전선에서 공격을 이끈 적이 없는 우키타는 일본군을 이끌고 성으로 향했다. 행주산성 전투는 1593년 2월 12일 이른 아침에 시작되었다. 가토와 우키타 지휘하의 일본군은 소총으로 무장하고 성을 포위한 후 여러 차례 대규모 공격을 가했다. 그러나 권율의 부대와 성내의 민간인들은 격렬하게 저항하며 일본군에게 돌, 화살, 철환, 불타는 기름, 용융된 철을 던졌다.[1] 화차와 비격진천뢰|飛擊震天雷한국어라는 한국의 대인용 화약 무기와 폭발성 대포 포탄도 이 전투에서 사용되었다.[1] 1만 명이 넘는 사상자와 우키타, 이시다 미쓰나리, 기카와 히로이에 등의 고위 장군들이 부상을 입은 일본군은 퇴각하여 그 지역에서 도망쳤다.[1]
3. 2. 5. 도원수 승진과 활동
1593년 6월, 행주대첩 승전의 공으로 도원수로 승진하여 조선군 최고사령관이 되었다.[1] 1596년(선조 29) 도망병을 즉결처분한 사건으로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가 복권되어 이몽학의 난 진압에 참여했다.[1] 그해 10월 한성부 판윤이 되고, 이후 호조판서, 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재차 도원수가 되었다.[1]1597년 정유재란 때 일본군을 상대하려 명나라 장군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 대진했으나, 도어사 양호(楊鎬)의 갑작스러운 퇴각령으로 철수했다.[1] 순천 예교(曳橋)에 주둔하던 일본군을 상대하려 했으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고 퇴각했다.[1]
시기 | 전투 | 결과 | 적장 |
---|---|---|---|
1593년 2월 10일 | 행주산성 전투 | 승리 | 우키다 히데이에 |
1597년 12월 21일~ | 울산성 전투 | 패배 | 가토 기요마사 |
1598년 9월 19일~ | 순천성 전투 | 패배 | 고니시 유키나가 |
3. 2. 6. 정유재란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도원수 권율은 해안가로 올라오는 일본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와 함께 울산에서 대진했으나, 총지휘관이었던 명나라 군대 사령관 양호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실패하고 철수하였다. 이어 순천 예교(曳橋)에 주둔한 왜군을 공격하려고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실패하였다. 한편 쉽게 적을 상대하지 못한다 하여 그해 10월 사헌부 등에서 그를 여러번 공격했지만 선조가 그를 신뢰하여 듣지 않았다.행주산성 전투 후, 명나라 만력제 황제와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 사이의 강화 회담이 시작될 때까지 권율은 자신의 자리를 유지했다.[1] 그 후 전라도로 이동했고, 그때부터 조선군의 총사령관인 도원수가 되었다.[1] 권율은 탈영병에 대한 가혹한 처우 때문에 잠시 파면되었지만, 이듬해 복직되었다.[1] 수군통제사 원균에게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과 싸울 것을 명령했으나, 이 전투는 일본군이 승리했다.[1] 그러나 이순신 제독은 도도 다카토라(藤堂高虎)가 이끄는 일본 수군을 명량 해전에서 격파할 수 있었다.[1] 1597년, 권율과 중국군 사령관 마귀는 울산에서 일본군과 싸울 계획을 세웠지만, 중국군 총사령관은 권율의 철수를 명령했다.[1] 그 후 권율은 순천에서 일본군을 공격하려 했지만, 그 계획은 다시 중국군에 의해 거부되었다.[1]
3. 3. 생애 후반
1598년 병으로 사직을 청했으나 선조가 만류하여 도성에 머물렀다. 1599년 7월 6일 병으로 사망했다.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이순신, 원균과 함께 선무공신 1등에 봉해졌다.시기 | 전투 | 적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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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 2월 10일 | 행주산성 전투 | 우키다 히데이에 |
1597년 12월 21일~ | 울산성 전투 | 가토 기요마사 |
1598년 9월 19일~ | 순천성 전투 | 고니시 유키나가 |
3. 4. 사후
1599년 사망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낭관(郞官)을 보내 조문하고, 그의 죽음을 슬퍼하며 이틀간 정사(政事)를 중단했다. 사후 의정부좌찬성 겸 판의금부사에 추증되었고, 훗날 의정부영의정 겸 영경연 홍문관 예문관 춘추관 관상감사(議政府領議政兼領經筳弘文館藝文館春秋館觀象監事) 세자사(世子師)에 추증되었다.1604년 이순신, 원균과 함께 선무공신 1등에 봉해졌으며,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충장(忠莊)의 시호가 내려졌고, 1841년(헌종 7) 고양군 행주에 기공사(紀功祠)가 건립되면서 기공사에도 제향되었다. 묘비문과 묘표음기는 사위 이항복이 짓고 썼으며, 행주대첩의 승리를 기념하여 최립은 고양 행주에 권원수행주비(權元帥幸州碑)를 세웠다.
4. 평가
권율은 부유한 집안 출신으로, 어릴 적에는 공부보다 장난을 좋아했다. 아버지 친구에게 경서 구절에 대한 질문을 받고 대답하지 못해 부끄러움을 느낀 후 공부를 시작했지만, 관리가 될 생각은 없었다. 가족의 권유로 1582년(선조 15년) 문과 병종에 합격했다.
임진왜란 발발 후 류성룡의 추천으로 광주목사를 역임했고, 용인 전투에 참전했으나 패했다. 이후 전라도 관찰사 겸 순찰사로 승진했다. 1593년(선조 26년) 행주산성 전투에서 일본군과 싸웠으나 버틸 수 없다고 판단, 성에 불을 지르고 파주로 후퇴했다. 진주성 전투(2차)에서는 출격하여 맞서 싸울 것을 주장했으나, 일본군의 총소리에 전군이 붕괴되어 전주까지 후퇴했다.
도원수 임명 후 정유재란이 시작되자 원균에게 일본군 공격을 명령했으나, 소극적인 원균을 태형에 처하여 공격을 재촉했다. 이 때문에 원균은 출전, 일본 수군을 공격했지만 역습을 받아 조선 수군은 궤멸되고 원균도 전사했다(칠천량 해전). 권율은 일본군이 전라도로 진격하자 싸우지 않고 후퇴, 전라도와 충청도는 일본군에게 함락되었다.
울산왜성 축성 당시 명군과 함께 공격을 지휘했으나(울산성 전투) 많은 사상자를 내고 패주했다. 순천성 전투에서도 지휘를 맡았으나 패퇴했다.
1599년(선조 32년) 63세에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그해 7월 사망했다. 전쟁 중 패배를 거듭했지만, 적극적인 자세를 유지하며 끈기 있게 전선을 유지했다. 방어전에 강했고, 결정적인 순간에 요충지 방어에 성공했다. 선조는 그를 존경했고, 그의 죽음에 이틀 동안 정무를 보지 못할 정도로 슬퍼했다고 한다. 사후 이순신, 원균과 함께 공 1등으로 평가받았다.
권율이 참전한 주요 전투는 다음과 같다.
시기 | 전투 | 적장 |
---|---|---|
1593년(선조 26년) 2월 10일 | 행주산성 전투 | 우키다 히데이에 |
1597년(선조 30년) 12월 21일~ | 울산성 전투 | 가토 기요마사 |
1598년(선조 31년) 9월 19일~ | 순천성 전투 | 고니시 유키나가 |
4. 1. 긍정적 평가
임진왜란 시기 주요 전투에서 승리하여 국난 극복에 기여하였다. 특히 행주대첩에서는 3천 8백 명의 병력으로 3만 명의 왜군을 궤멸시키는 큰 공을 세웠다.[1] 뛰어난 군사적 전략과 리더십을 발휘하여 조선군을 지휘하고, 백성과 병사들을 독려하며 사기를 진작시켰다.[1]1593년 음력 2월 12일 행주산성 전투에서 3,800명의 병력으로 3만 명의 왜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으며, 이 승리로 도원수로 승진하여 조선군 최고 사령관이 되었다.[1] 1597년 정유재란 시기에는 명나라 장수 마귀와 함께 일본군에 맞섰으나, 명나라 장수들의 비협조로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1]
권율은 행주대첩 외에도 금산군 이치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여러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1] 그는 문과에 급제한 문관 출신이었지만, 무인으로서의 능력 또한 뛰어나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을 극복하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1] 청렴하고 강직한 성품으로 백성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되고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었다.[1]
다음은 권율이 참전한 주요 전투를 정리한 표이다.
시기 | 전투 | 적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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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3년(선조 26년) 2월 10일 | 행주산성 전투 | 우키다 히데이에 |
1597년(선조 30년) 12월 21일~ | 울산성 전투 | 가토 기요마사 |
1598년(선조 31년) 9월 19일~ | 순천성 전투 | 고니시 유키나가 |
4. 2. 부정적 평가
원균과의 갈등으로 조선 수군 전력 약화에 책임이 있다는 비판이 있다. 정유재란 당시 수군 통제사였던 원균에게 일본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원균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이자 곤장을 때려 강제로 출전시켰다. 결국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이 궤멸되고 원균도 전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1]명나라와의 협력이 미흡했다는 지적도 있다. 울산성 전투와 순천성 전투에서 명나라 군대와 함께 작전을 펼쳤지만, 결국 패배했다.[1]
잦은 패전과 후퇴도 부정적 평가의 요인이다. 임진왜란 초기 용인 전투에서 패배했고, 2차 진주성 전투에서는 일본군의 총소리에 놀라 전주까지 후퇴했다. 정유재란 때에도 일본군이 전라도로 진격하자 싸우지 않고 후퇴하여 전라도와 충청도를 적에게 내주었다.[1]
독단적인 결정과 가혹한 처벌도 문제점으로 지적된다. 원균에 대한 태형(笞刑)이 대표적인 사례이다.[1]
5.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비고 |
---|---|---|
아버지 | 권철 | |
어머니 | 창녕 조씨 | |
부인 | 창녕 조씨 | 군기시 첨정 조휘원(曹輝遠)의 딸, 24세에 사망 |
사위 | 이항복 | |
외손자 | 이성남(李星男) | 음서로 군수 역임 |
외손자 | 이정남(李井男) | 음서로 군수 역임 |
부인 | 죽산 박씨 | 1546년 ~ 1608년 2월, 강서 현령 박세형(朴世炯)의 딸 |
양자 | 권익경(權益慶) | 권순(權恂)의 아들, 음서로 현감 역임 |
양며느리 | 이광륜(李光輪)의 딸 | 권익경의 전처 |
양며느리 | 이정(李淨)의 딸 | 권익경의 후처 |
형 | 권항(權恒) | |
형 | 권개(權愷) | |
형 | 권순(權恂) |
6. 일화
오성[7] 이항복 집의 감나무 가지가 권율의 아버지 권철의 집(영역)으로 휘어 들어갔는데, 이 가지에 열린 감을 권철 집의 하인들이 따먹자 소년 이항복이 이 사실을 알고 꾸짖었다. 그러나 하인들은 오히려 감이 자신의 소유라고 우겼다. 어느 날 이항복은 권철이 있는 방문에 주먹을 찔러 넣고 "이 주먹이 누구의 주먹입니까?" 하고 물었다. 하인들이 이항복의 감을 훔쳐먹은 사실을 인지한 권철은 하인들을 단속하였고, 이항복의 영특함을 깨달아 아들인 권율에게 장차 이항복을 사위로 삼으라는 조언을 해주었다.[8][9][10]
장난기 많은 오성대감 이항복은 종종 고지식한 장인인 권율을 놀린 일이 있다고 한다. 청렴결백한 권율은 조복과 의관을 갖춰입으면서도 제대로 된 내의를 입지 못하고 늘 베잠방이 차림이었다고 한다. 왜란이 끝난 후 병조판서인 이항복과 도원수 권율이 선조 임금 앞에 대궐조회에 참석한 어느 무더운 여름날, 이항복은 선조에게 날씨가 너무 무더우니 모두들 관복을 벗고 조회를 하자고 제의하였다. 선조는 쾌히 승낙하고 신하들이 모두 관복을 벗었으나, 관복 아래 베잠방이 차림인 권율은 차마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임금의 명령을 받고 마지못해 관복을 벗고 베잠방이 차림을 드러내어 망신을 당한 권율에게 선조는 파안대소하며 비단과 무명을 하사했다고 한다.[11][12]
반대로 권율의 장난 역시 만만치 않았는데, 하루는 이항복이 여종에게 반해서 정을 통하고 있었다. 그래서 이항복은 권율에게 공부방이 필요하다고 했고, 권율은 즉시 이항복에게 공부방을 만들어줬다. 문제는 이항복이 여종과 정을 통하고 있다는 것을 권율이 알고 있어서, 어느 날 손님들을 많이 데리고 이항복의 공부방에 찾아왔다. 이에 이항복은 여종을 이불 속에 넣어 숨겼으나 권율이 이불을 치워버리자 벌거벗은 여종의 모습이 드러났고, 손님들은 웃음을 멈추지 못했다.[13]
이순신과 경쟁심을 가지고 있던 원균은 수시로 수군통제사인 이순신과 마찰을 일으키곤 하였다. 이에 원균은 수군이 아닌 육군으로 전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냉철하게 전황을 읽고 있던 이순신과는 다르게 수군 단독으로 왜를 격파할 수 있다고 수차례 조정에 장계를 하였고, 이순신을 견제하려는 선조의 심중과 맞아떨어져 이순신의 후임으로 통제사직에 임명된다.[14]
하지만 원균은 부임 이후 이순신의 수군 단독출병 불가의 판단이 옳았음을 알고 말을 바꿔 수륙 병진을 주장하였다. 이 과정에서 원균은 조선의 군사동원력이 17만 명을 모은 임진년보다 크게 떨어진 상황인데도 30만은 동원할 수 있다고 하고, 섬인 가덕도까지 육군이 몰아치면 된다는 현실을 무시한 주장을 했다.[15]
이에 권율은 비밀 장계를 올려 원균의 주장대로 육군을 움직이긴 어려움을 전하였다. 한편 조정에서 수군에게 원하는 것은 수군의 전면적인 부산포 진격이 아닌, 무력시위를 전개하여 일본이 보급선 유지에 불안감을 가지게 하는 것이었으나, 원균은 이조차도 하지 못하다가 원균이 부임 전과는 달리 이런저런 핑계로 칠천량으로 출동하지 않자 원균을 곤장으로 다스렸다. 권율에게 곤장을 맞은 후 원균은 전 병력을 끌고 출전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참패를 당하고 그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7. 기타
8. 관련 작품
권율 장군을 다룬 작품은 다음과 같다.
종류 | 제목 | 방영/개봉 연도 | 방송사/제작사 | 권율 역 배우 |
---|---|---|---|---|
드라마 | 조선왕조 오백년 - 임진왜란 | 1985년~1986년 | MBC | 홍계일 |
드라마 | 불멸의 이순신 | 2004년~2005년 | KBS1 | 김영기 |
드라마 | 징비록 | 2015년 | KBS1 | 김영기 |
영화 | 명량 | 2014년 | 남경읍 | |
영화 | 노량: 죽음의 바다 | 2023년 | 남경읍 |
위 표는 하위 섹션의 내용을 표 형식으로 정리한 것이다. 하위 섹션과 중복되지만, 가독성을 위해 표 형식을 유지했다.
8. 1. 드라마
- 《조선왕조 오백년 - 임진왜란》 (MBC, 1985년~1986년, 배우:홍계일)
- 《불멸의 이순신》 (KBS1, 2004년~2005년, 배우:김영기)
- 《징비록》 (KBS1, 2015년, 배우:김영기)
8. 2. 영화
참조
[1]
논문
2008
[2]
서적
豊臣秀吉合戦総覧
新人物往来社
[3]
간행물
宣祖修正実録・宣祖30年8月己未条
http://sillok.histor[...]
[4]
웹사이트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http://people.aks.ac[...]
[5]
백과사전
글로벌세계대백과
[6]
간행물
조선왕조실록
1592-07-22
[7]
설화
오성과 한음
[8]
서적
韓國口碑文學大系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0-1988
[9]
웹사이트
네이트 백과사전 오성과 한음설화
http://100.nate.com/[...]
[10]
뉴스
장윤옥의 창 오성의 감나무와 전자정부
http://www.dt.co.kr/[...]
디지털타임스
2007-06-04
[11]
뉴스
장인 권율을 왕 앞에서 놀린 이항복의 재치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6-12-09
[12]
웹인용
이항복
http://blog.korea.kr[...]
2008-02-23
[13]
뉴스
배한철의 한국초상화 톺아보기]조선의 대표적 음담패설집에 대유학자의 이름이 하나둘…
https://news.naver.c[...]
매일경제
2017-03-09
[14]
간행물
조선왕조실록
1597-01-22
[15]
간행물
조선왕조실록
1597-04-19
[16]
뉴스
이순신, 원균을 ‘흉악한 도적’에 비유
http://www.hani.co.k[...]
한겨레
2008-04-02
[17]
서적
조선의 왕과 신하 부국강병을 논하다
살림
2007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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