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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 (순양회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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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가(劉嘉)는 후한 초기의 인물로,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나 남돈군 유흠에게 길러졌다. 유현(경시제)을 따라 녹림군을 이끌고, 경시제가 한중왕으로 봉하고 부위대장군을 맡겼다. 연잠의 반란으로 세력이 약화되었으나, 적미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하고 광무제에게 귀순하여 천승태수를 지냈다. 이후 순양후에 봉해졌으며, 광무제의 신하인 가복, 진준, 내흡 등이 유가를 섬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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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 (순양회후)

2. 생애

유가는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나 성품이 어질고 도타웠다. 남돈군 유흠에게서 아들처럼 길러졌고, 유흠의 아들 유인과 함께 장안으로 유학해 서경춘추를 배웠다.

유현이 거병했을 때 그를 따랐고, 녹림군의 평림병과 신시병을 끌어들였다.[4] 경시제 즉위 후에는 흥덕후(興德侯)에 봉해지고 대장군이 되었다. 경시 2년(25년)에는 한중왕에 봉해지고 부위대장군(扶威大將軍)에 임명되어 남정에 도읍을 두었다.

경시 3년(26년), 연잠이 모반을 일으켜 남정성을 포위하자, 패주하고 한중군을 빼앗겼다. 이후 공손술의 장군 후단과 적미군 등 여러 세력과 전투를 벌였다.

후한 광무제는 등우를 통해 유가에게 항복을 권유했고, 내흡의 권유를 받아들여 광무제에게 항복했다. 건무 3년(27년), 낙양에 이르렀고, 이후 광무제의 정벌에 종군했다. 천승태수를 지내다가 건무 6년(30년) 병으로 은퇴했다. 건무 13년(37년), 순양후에 봉해졌고, 가을에 아들 유장(劉廧)은 황리후(黃李侯)에 봉해졌다. 건무 15년(39년)에 죽어 시호를 회라 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경시제 정권에서의 활동

어려서 고아가 되었으나 성품이 어질고 도타워, 남돈군 유흠에게서 아들처럼 길러졌고, 유흠의 아들 유인과 함께 장안으로 유학해 서경춘추를 배웠다.

23년, 유현이 거병했을 때 그를 따랐고, 유인의 명령으로 녹림군의 평림병과 신시병을 끌어들였다.[4] 그러나 이들이 소장안취에서 졌을 때 처자식이 해를 당했다. 경시제 즉위 후 편장군(偏將軍)이 됐고, 유인이 완을 함락하자 흥덕(興德侯)에 봉해지고 대장군이 됐다. 남양군 관군현에서 연잠을 쳐서 항복시켰다. 경시 2년(25년), 경시제가 장안으로 천도한 후 제후왕들을 세우면서 한중왕에 봉해지고 부위대장군(扶威大將軍)에 임명돼 절을 지니고[지절(持節)] 남정(현재의 한중 시)에 도읍을 두니, 무리가 수십만 명이 되었다. 경시제를 잠깐 섬겼다가 칭탈하고 떠난 내흡이 자기 아내의 오빠이기에 사람을 보내 한중으로 불러왔다.[5]

2. 2. 연잠과의 대립과 적미군과의 전투

경시 3년(26년), 연잠이 모반을 일으켜 한중의 남정성을 포위하자, 유가는 무도군으로 패주하고 한중군을 빼앗겼다. 연잠은 무도군까지 진격했으나 경시제의 주공장군(柱功將軍) 이보에게 격파되어 천수군으로 달아났다.[1] 그 사이 공손술의 장군 후단이 남정성을 점령했다. 유가는 흩어진 병졸을 모아 재상으로 삼은 이보와 함께 후단과 싸웠으나 불리하여 무도군의 하지현과 하변현에 주둔했다. 또 연잠과 연이어 싸워 그를 진창현으로 몰아냈다.[4]

적미군의 영향권 하에 있던 관중에 들어간 유가와 연잠은 각각 적미군의 공격을 받게 된다. 경시제 정권에서 양왕(穰王)을 지낸[2] 요담이 18만을 이끌고 공격해 오자, 유가는 곡구현에서 이들을 대파하고 손수 요담을 베어 운양현까지 진격했다. 한편 이보는 두릉현에 주둔한 연잠과 연합하여 방안이 이끄는 적미군을 무찔렀다.[7]

2. 3. 광무제에게 귀순과 이후 활동

후한 광무제는 등우를 시켜 서쪽으로 진군하게 했다. 등우는 연잠과 싸웠으나 패배했고, 이보 등은 형세를 관망하려 했다. 광무제는 유가가 본래 소박하고 착한 사람임을 알고 등우를 통해 항복을 권유했다.[3] 내흡의 권유를 받아들인 유가는 등우를 통해 광무제에게 항복했다.

건무 3년(27년), 낙양에 도착하여 광무제의 정벌에 종군했고 천승태수가 되었다. 건무 6년(30년), 병으로 은퇴하고 경사로 왔다. 건무 13년(37년), 순양후에 봉해졌다. 건무 15년(39년)에 사망하여 시호를 회(懷)라 하였다.

3. 광무제의 양신들과 유가

가복과 진준은 본래 유가(劉嘉)의 사람이었는데, 유가가 하북 원정 중인 광무제에게 보내 광무제를 섬기게 했다. 이들은 광무제의 공신 28명을 일컫는 운대 28장에 속한다. 운대 28장은 아니지만 역시 광무제의 공신인 내흡 역시 유가를 먼저 섬겼다.[1]

참조

[1] 문서 延岑は、恐らくは更始政権で漢中王に任命された劉嘉に随従して、漢中入りしたのであろう。
[2] 서적 後漢書
[3] 서적 後漢書
[4] 서적 후한서
[5] 서적 후한서
[6] 서적 후한서
[7] 서적 후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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