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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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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중군은 중국 역사상 여러 왕조에서 설치되었던 행정 구역이다. 진나라가 초나라를 정복한 후 설치되었으며, 한나라, 촉한, 서진, 수, 당나라 등을 거치며 그 명칭과 행정 구역이 변화했다. 한중군은 한나라 건국과 밀접한 관련이 있으며, 삼국 시대에는 촉한의 중요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지리적으로는 한수 유역의 한중 분지에 위치하며, 관중, 파촉, 장강 유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로서 군사적, 경제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현재는 중화인민공화국 산시성 한중 시를 중심으로 그 역사가 이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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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군
지도
기본 정보
국가중국
위치지금의 중국 산시 성 남부, 간쑤 성 동남부 일대
시대진나라 ~ 수나라
역사
설치진나라
폐지수나라
행정 구역
속현남정현
서향현
고안현
성고현
방릉현
상庸현
안양현
정군현
포중현
신성현
오저현
보성현
양현
진향현
고도현
개명현
금우현
석천현
흥세현

2. 역사

진나라파나라와 촉나라를 정복한 이후 기원전 312년에 초나라를 공격해 한중을 빼앗고 군을 설치했다. 치소는 남정현(지금의 한중 시)으로, 이곳은 서주가 망할 무렵 정 환공이 전사하면서 본국이 지금의 섬서성 화현 지역이던 정나라 백성 일부가 이곳으로 달아난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속현은 한중·서성(西成)·성고(成固)·상용(上庸)·양(鍚)·운양(鄖陽)·방릉(房陵)·저(沮)·순양(旬陽)·안양(安陽)·장리(長利)·무릉(武陵)이 있었다.[3]

기원전 206년 항우진나라를 멸하고 18제후왕을 세우면서 유방을 한왕으로 세우고 이 군을 파군·촉군과 함께 주었으며 나라 이름을 한(漢)으로 했고 서울도 이 군의 남정현에 두었다. 곧 한 왕조의 이름은 이 군에서 나온 것이다.[4] 항우는 원래 파군과 촉군만을 주려 했으나 장량항백을 움직여 한중까지도 받아낸 것이다.[5] 고제가 기원전 205년에 옹·새·적 삼진을 정복하면서 남정에서 옛 새나라의 약양으로 수도를 옮겼다.[6]

무제가 자사를 두면서 익주자사부에 속했다.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101,570호, 300,614명이 있었다.

이름한자대략적 위치비고
서성西城안캉시 서
순양旬陽안캉시 쉰양현북산(北山)에서 순수{旬水: 지금의 쉰허() 강}가 나와 남으로 면수로 들어간다.
남정南鄭한중시한산(旱山)에서 지수(池水)가 나와 동으로 한수로 들어간다.
포중襃中한중시 몐현 동도위가 한양향(漢陽鄕)에서 다스린다.
방릉房陵스옌시 팡현유산(淮山)에서 유수(淮水)[7]가 나와 동으로 중려(中廬)에서 면수로 들어간다.
안양安陽한중시 청구현·양현 북부?잠곡수(鬵谷水)가 남서에서 나와 북으로 한수로 들어간다.
성고成固한중시 청구현
면양沔陽한중시 몐현철관이 있다. 응소에 따르면 면수가 무도에서 나와 남동으로 강수로 들어간다.
[8]안캉시 바이허현
무릉武陵스옌시 주시현
상용上庸스옌시 주산현 남서
장리長利스옌시 윈시현 남서운관(鄖關)이 있다.



군의 이름을 신성군(新成郡)으로 고치고 다음 현의 이름을 고쳤다.

양치(鍚治)


2. 1. 진나라와 초한쟁패기

진나라파나라와 촉나라를 정복한 이후 기원전 312년에 초나라를 공격해 한중을 빼앗고 군을 설치했다. 치소는 남정현(지금의 한중 시)으로, 이곳은 서주가 망할 무렵 정 환공이 전사하면서 본국이 지금의 섬서성 화현 지역이던 정나라 백성 일부가 이곳으로 달아난 데서 이름이 유래했다. 속현은 한중·서성(西成)·성고(成固)·상용(上庸)·양(鍚)·운양(鄖陽)·방릉(房陵)·저(沮)·순양(旬陽)·안양(安陽)·장리(長利)·무릉(武陵)이 있었다.[3]

기원전 206년 항우진나라를 멸하고 18제후왕을 세우면서 유방을 한왕으로 세우고 이 군을 파군·촉군과 함께 주었으며 나라 이름을 한(漢)으로 했고 서울도 이 군의 남정현에 두었다. 곧 한 왕조의 이름은 이 군에서 나온 것이다.[4] 항우는 원래 파군과 촉군만을 주려 했으나 장량항백을 움직여 한중까지도 받아낸 것이다.[5] 고제가 기원전 205년에 옹·새·적 삼진을 정복하면서 남정에서 옛 새나라의 약양으로 수도를 옮겼다.[6]

무제가 자사를 두면서 익주자사부에 속했다. 원시 2년(2년)의 인구조사에 따르면 101,570호, 300,614명이 있었다.

이름한자대략적 위치비고
서성西城안캉시 서
순양旬陽안캉시 쉰양현북산(北山)에서 순수{旬水: 지금의 쉰허() 강}가 나와 남으로 면수로 들어간다.
남정南鄭한중시한산(旱山)에서 지수(池水)가 나와 동으로 한수로 들어간다.
포중襃中한중시 몐현 동도위가 한양향(漢陽鄕)에서 다스린다.
방릉房陵스옌시 팡현유산(淮山)에서 유수(淮水)[7]가 나와 동으로 중려(中廬)에서 면수로 들어간다.
안양安陽한중시 청구현·양현 북부?잠곡수(鬵谷水)가 남서에서 나와 북으로 한수로 들어간다.
성고成固한중시 청구현
면양沔陽한중시 몐현철관이 있다. 응소에 따르면 면수가 무도에서 나와 남동으로 강수로 들어간다.
[8]안캉시 바이허현
무릉武陵스옌시 주시현
상용上庸스옌시 주산현 남서
장리長利스옌시 윈시현 남서운관(鄖關)이 있다.



군의 이름을 신성군(新成郡)으로 고치고 다음 현의 이름을 고쳤다.

양치(鍚治)



현한에서는 유가(劉嘉)에게 왕국으로 봉했으나, 유가의 수하에 있던 연잠(延岑)이 반란을 일으켜 유가를 쫓아내고 무안왕을 자칭해 연잠의 세력권으로 들어왔다. 연잠이 무도군으로 진격했으나 유가에게 진 틈을 타 공손술이 장악했다. 공손술이 망하면서 후한에 속했다.

9현 57,344호 267,402명을 거느렸다. 군전역이 후한말 방릉일대의 방릉군, 상용의 상용군, 그리고 서성군이 신설되었고 한중일대는 장로가 장악했다. 유비의 입촉이후 익주를 장악한 유비휘하에 있었지만 상용을 지켰던 맹달이 조위로 투항하면서 군의 동부지역에 위흥군이 신설되고 조위의 형주로 넘어갔다. 조위는 한중을 취하기 위해 조홍장합을 투입했으나 장비, 위연, 마초, 오란, 뇌동휘하의 촉군에 패하고 한중을 취하는데 실패했다.[9]

현명한자대략적 위치비고
남정현南鄭縣한중 시한중 전투가 발발했다.
성고현成固縣한중 시 청구현
서성현西城縣안캉시 서서성군의 치소가 있었다. 맹달이 조위로 투항하면서 같이 조위로 넘어갔다.
포중현襃中縣한중시 몐현 동
면양현沔陽縣한중시 몐현
안양현安陽縣한중시 청구현·양현 북부?서성군의 치소가 있었다. 맹달이 조위로 투항하면서 같이 조위로 넘어갔다.
양현[10][11]鍚縣안캉시 바이허현건안 20년(AD 215) 음력 7월, 에 설치된 상용군의 속현이었다.[12][13] 이후, 연강 원년(AD 220) 7월, 촉에서 자신의 부곡 4천여 가를 이끌고 위로 투항한 맹달을 위해, 상용(上庸), 방릉(房陵), 서성(西城)의 3군을 묶어 신성군(新城郡)을 만들고 그를 태수로 삼았다.[14] (魏) 태화 2년(AD 228) 정월, 신성군에서 양(鍚)을 떼어 양군(鍚郡)을 설치하고 상용(上庸)·무릉(武陵)·무(巫) 3현을 떼어 다시 상용군(上庸郡)을 설치했다. 태화 4년(AD 230) 2월, 상용군을 덜어서 양군에 편입했다. 경초(景初) 원년(AD 237) 여름 5월, 양군(鍚郡)의 상용(上庸)·안부(安富)와 위흥군(魏興郡)의 위양현(魏陽縣)을 떼어, 또 다시 상용군(上庸郡)을 설치한 후, 나머지 양군 전체를 위흥군에 편입시켰다.
상용현上庸縣스옌시 주산현 남서괴기(蒯祺)를 죽인 맹달이 장악했다.
방릉현房陵縣스옌시 팡현후한말 신설된 방릉군의 치소가 있던 곳이다. 219년(건안 24년) 맹달이 방릉태수 괴기를 이곳에서 죽였다.


古くは梁州에 속했고, 전국시대에 (秦)에 병합되었다. 기원전 325년, 한중군으로 명명되어 남정현에 군치가 설치되었다. 일시 초(楚)에 빼앗겼으나 기원전 312년에 회복했다.

진을 멸망시킨 항우유방을 ''관중''이 아닌, ''한중''에 봉했다. 유방은 한중에서 한신을 등용하여 천하 통일의 발판을 마련했다. 유방은 「한왕」(「한중왕」의 약칭)을 자칭했고, 항우를 죽이고 제위에 오르자 국호를 한으로 했다. 전한 대에는 익주에 속했다. 왕망 때 신성군으로 개칭되었다가, 후한이 건국되자 한중군으로 되돌려졌다.

후한 시대에도 익주에 속했다. 후한 말 황건의 난으로 오두미도장로가 한녕(남정)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왕국을 세웠다.

이후 조조유비에게 협공당한 장로는 조조에게 항복했고, 조조는 하후연을 주둔시켰다. 그러나 황충이 이끄는 유비 군은 하후연을 죽이고 한중을 차지했다. 유비는 한중왕에 즉위하고, 후한이 선양하자 「한」 황제로 즉위했다(, 촉한). 유비 사후 제갈량이 한중에 주둔하며 북벌 거점으로 삼았다. 263년 위가 촉을 멸망시킨 후 한중을 포함한 익주는 위의 지배를 받았다. 265년 위는 에 선양했다. 280년에 멸망시킨 서진은 梁州를 부활시켜 한중군을 소속시켰다.

남북조 시대에는 남조와 북조의 접경 지역으로, 소속이 자주 바뀌었다. 시대에 한천군으로 개칭했다가 때 복구되었고, 梁州 관할 구역이 한중군만 남으면서 梁州로 개명되었다. 덕종 시대 절도사 반란으로 덕종이 한중에 임시 수도를 두면서 흥원부로 개칭되었다. 북송 때 흥원부는 利州路 치소가 되어 주변의 成都府路・梓州路・夔州路와 함께 「四川路」로 불렸다. 이후 금에 빼앗겼으나, 몽골 제국이 남하하며 흥원부를 점령, 금 영토 남쪽으로 돌아 남북에서 협공하여 금 멸망에 기여했다. 원 시대에는 흥원로가 설치되고, 四川에서 분리되어 섬서성에 편입되었다.

1370년 홍무제는 흥원로를 「한중부」로 개칭, 당 이후 단절된 한중 명칭을 부활시켰다. 1601년 만력제 아들 瑞王 주상호를 南鄭에 봉했다. 시대에도 한중부 명칭은 유지되었고, 신해혁명 후 잠시 「한중로」가 설치되었다가 陝西省에 재통합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 성립 후 1949년 南鄭을 분할, 중심부를 南鄭市로 했다. 1953년 南鄭市는 한중시로 개명되었다. 1958년 褒城 일부를 편입했다. 1964년 市制가 폐지되어 漢中縣이 되었다가 1981년 복구되었다.

2. 2. 삼국시대

현한에서는 유가에게 왕국으로 봉했으나, 유가의 수하에 있던 연잠이 반란을 일으켜 유가를 쫓아내고 무안왕을 자칭해 연잠의 세력권으로 들어왔다. 연잠이 무도군으로 진격했으나 유가에게 진 틈을 타 공손술이 장악했다. 공손술이 망하면서 후한에 속했다.[9]

9현 57,344호 267,402명을 거느렸다. 군 전역이 후한말 방릉일대의 방릉군, 상용의 상용군, 그리고 서성군이 신설되었고 한중일대는 장로가 장악했다. 유비의 입촉이후 익주를 장악한 유비휘하에 있었지만 상용을 지켰던 맹달이 조위로 투항하면서 군의 동부지역에 위흥군이 신설되고 조위의 형주로 넘어갔다. 조위는 한중을 취하기 위해 조홍장합을 투입했으나 장비, 위연, 마초, 오란, 뇌동휘하의 촉군에 패하고 한중을 취하는데 실패했다.[9]

무도군, 음평군과 함께 촉한의 최북단에 있던 군이었기 때문에 제갈량의 북벌, 강유의 북벌시기 북벌을 위한 전초기지가 되었다. 이로 인해 조위와 촉한의 국경분쟁이 빈발했다.

263년 촉한의 멸망이후 조위는 익주의 북동부지역에 양주를 신설했는데, 한중군은 이때 양주로 소속이 이관되었다. 서진 혜제시기 과거 한중군에 속했던 위흥군, 신성군, 그리고 상용군이 양주로 옮겨졌다. 8현 15,000호를 거느렸다. 영가의 난이후 성한이 파촉지방을 점령하면서 성한의 땅으로 편입되었다.[15]

2. 3. 남북조 시대, 수, 당

263년 촉한의 멸망이후 조위는 익주의 북동부지역에 양주를 신설했는데, 한중군은 이때 양주로 소속이 이관되었다. 서진 혜제시기 과거 한중군에 속했던 위흥군, 신성군, 그리고 상용군이 양주로 옮겨졌다. 8현 15,000호를 거느렸다. 영가의 난이후 성한이 파촉지방을 점령하면서 성한의 땅으로 편입되었다.[15]

현명한자대략적 위치비고
남정현南鄭縣
포지현蒲池縣한중 시 포핑현과 안캉 시 닝산현 사이황금현에서 분리신설되었다.
포중현襃中縣rowspan="4" |진서에서는 포중현(褒中縣)으로 기록되어있다.
면양현沔陽縣서진건국이후 본래의 이름으로 돌아왔다.
성고현成固縣
서향현西鄕縣281년(태강 2년)에 남향현에서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되었다.[16]
황금현黃金縣한중 시 양 현 동남 금수진(金水镇)
흥도현興道縣



347년(동진 목제 영화 3년), 환온이 성한을 멸망시키며 동진의 관할지로 편입되었다. 373년(동진 효무제 영강 원년), 전진이 파촉을 재점령하면서 전진이 차지하게 되었으나 비수대전에서 참패를 겪은 전진이 몰락한 틈을 타 동진이 다시 통치하게 되었다. 390년(태원 15년) 양주자사 주경표가 자사부를 두며 양주의 속군이 되었다. 무도군지역을 통치했던 저족국가 구지와 인접했기 때문에 구지와 동진 및 유송과의 교류가 이뤄지기도 했다. 유송대 한중군은 4현 1,786호 10,334명을 거느렸다.[16][17]

현명한자종류비고
남정현南鄭縣현령(縣令)
성고현成固縣
면양현沔陽縣
서향현西鄕縣



서상용현(西上庸縣)을 본군의 속현으로 삼았다.

수나라에서는 개황초 '''양주(梁州)'''를 설치했고 대업초 '''한천군(漢川郡)'''으로 개명했다. 8현 11,918호를 거느렸다.[18]

현명한자대략적 위치비고
남정현南鄭縣한중 시서위의 현인 백운현(白雲縣)을 통폐합했다. 황우산(黃牛山)과 용강산(龍岡山)이 있다.
서현西縣한중 시 몐 현 무후진일대대업초 적총현(勣塚縣)에서 서현으로 개명되었다. 관관, 정군산, 백뢰산(白牢山), 가정산(街亭山), 파총산(嶓塚山)이 있다. 한수가 있다.
포성현褒城縣한중 시 한타이 구 종영진 서개황초 포내현(褒內縣)으로 불렸으나 인수 9년에 지금의 이름으로 개명했다. 관관과 여랑산(女郞山)이 있다.
성고현城固縣한중 시 청구 현
흥세현興勢縣한중 시 양 현개황초 당성군(儻城郡)을 폐지하면서 일반 현으로 격하되었다.
서향현西鄕縣한중 시 시샹 현양주(洋州)와 양천군(洋川郡)이 있었으나 주와 군은 각각 대업초, 개황초에 폐지되었다. 대업초 풍녕현(豐寧縣)에서 서향현으로 개명되었다. 북주때 회창현을 통폐합했다. 양수(洋水)가 있다.
황금현黃金縣한중 시 양 현 금수진 고소촌일대
난강현難江縣바중 시 난장 현북주에서 집주(集州)와 평상군(平桑郡)을 두었으나 군은 개황초에 폐지되었고 주는 대업초에 폐지되었다.


2. 4. 송, 원, 명, 청

2. 5. 중화인민공화국

3. 지리

진령산맥과 대바산맥 사이의 고립된 분지인 '''한중 분지'''는 한수가 동서로 흐르는 지역이다. 한수와 그 지류인 포수, 서수 등이 분지를 비옥하게 만들며, 한수의 중간에 위치해 "한중"이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경제적으로 풍요롭지는 않지만, 북쪽의 위수 분지(관중), 남쪽의 사천 분지(파촉), 동쪽의 장강 유역을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따라서 관중이나 파촉을 지배하는 세력에게 한중은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광의의 촉 또는 한중은 좁은 의미의 촉(成都 일대), 파(중경 일대)와 함께 이 지역을 모두 포함한다.

4. 행정 구역

참조

[1] 서적 漢書 ちくま学芸文庫
[2] 서적 漢書 ちくま学芸文庫
[3] 서적 秦代政区地理 社会科学文献出版社 2009-01-01
[4] 서적 사기
[5] 서적 사기
[6] 서적 한서
[7] 문서 淮는 維의 통자로 쓰였다.
[8] 서적 원화군현지
[9] 웹사이트 후한서 지 제22 군국5 익주 한중군 https://zh.wikisourc[...]
[10] 서적 원화군현지
[11] 문서 속한서 군국지를 비롯하여, 발굴된 봉니 등의 유물로 봐도 이미 예전부터 양(鍚)을 錫으로 오기했다.
[12] 서적 삼국지 위서 무제기
[13] 문서 당시 상용군은 형주에 속하였다.
[14] 문서 자치통감에서는 연강 원년(AD 220) 7월, 신성태수가 된 것으로 기록하였으나, 위략에서는 같은 해 6월의 일이라고 기록하였고 다른 사서에서는 선양 직후의 일로 기록하나 대략 선양 즈음의 일로 봄직하다.
[15] 웹사이트 진서 지 제4 지리지 上 양주 한중군 https://zh.wikisourc[...]
[16] 웹사이트 송서 지 제27 주군지 3 양주 한중군 https://zh.wikisourc[...]
[17] 웹사이트 송서 열전 제58 약양청수저열전 https://zh.wikisourc[...]
[18] 웹사이트 수서 지 제29 지리지 上 양주 한천군 https://zh.wikisourc[...]
[19] 서적 평진객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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