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잠
1. 개요
연잠은 후한 시대의 군벌로, 유가에게 항복했다가 반란을 일으켜 무안왕을 칭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그는 등우, 풍이, 주우 등 후한의 장수들과 대립하며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를 거듭했다. 이후 공손술에게 귀순하여 대사마가 되었으나, 결국 오한에게 항복한 후 일족과 함께 죽임을 당했다. 연잠은 뛰어난 용병술로 명성이 높았으며, "죽음 속에서 삶을 구한다"는 그의 말은 고사성어로 전해진다.
| 이름 | 연잠(延岑) |
|---|---|
| 작위 | 무안왕 (자칭) |
| 재위 | 25년 ~ ? |
| 작위2 | 성가의 여령왕 |
| 재위2 | 29년 - 36년 |
| 군주2 | 공손술 |
| 배우자 | 진풍의 딸 |
| 사망일 | 36년 음력 11월 |
| 사망지 | 청두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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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년 사망 -
공손술
공손술은 전한 시대 인물로, 신나라 멸망 후 촉 지역에서 세력을 키워 성가를 건국하고 황제를 칭했으며, 후한과의 전쟁에서 패배하여 성가가 멸망했다. -
36년 사망 -
왕상 (후한)
왕상은 후한 초기의 장군으로, 신나라 말기에 녹림군에 가담하여 하강병을 이끌었으며 유연과의 협력으로 후한 건국에 기여하고 광무제 유수에게 항복한 후 여러 벼슬을 지내며 공을 세웠다. -
샹양시 출신 -
후한 광무제
후한 광무제는 전한 경제의 후손으로 신나라 멸망 후 후한을 건국하여 중국을 통일했으며, 검소한 통치와 유교 진흥을 통해 국가를 안정시키고 주변 국가들과 관계를 맺었다. -
샹양시 출신 -
맹호연
당나라의 시인 맹호연은 왕유와 함께 성당 시대 대표적인 산수시인으로, 샹양에 대한 애정을 시에 담아 벼슬에 뜻을 두었으나 이루지 못하고 자연을 벗 삼아 작품 활동에 전념하며 소박하고 섬세한 시풍으로 후대와 한국 문학에 영향을 주었다. -
생년 미상 -
손니 알리
손니 알리는 송가이 제국의 군주로서 니제르 강 유역을 장악한 후 팀북투와 젠네를 정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제국을 확장했으며, 전통 신앙과 이슬람교 조화, 법에 의한 국가 통제, 무역 확립 등 내치에도 힘썼다. -
생년 미상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2. 생애
연잠은 중국 신나라 말기 ~ 후한 초기의 군웅이다. 처음에는 현한의 유가에게 항복했으나, 25년 반란을 일으켜 한중군을 점령하고 스스로 무안왕(武安王)을 칭하며 독자 세력을 구축했다. 이후 적미, 후한 광무제 등 여러 세력과 싸우며 관중 일대를 떠돌았으나, 풍이, 경감, 주우 등 광무제의 장수들에게 연이어 패배하며 세력을 잃었다. 결국 성가의 공손술에게 귀순하여 대사마 겸 여녕왕(汝寧王)에 봉해졌고, 36년 성나라가 후한에 멸망할 때 공손술 사후 항복했으나 오한에게 처형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2.1. 떠돌이 군벌
경시 원년(23년), 연잠은 현한의 대장군 유가에게 남양군 관군현에서 패하여 항복했다. 그러나 경시 3년(25년) 2월, 연잠은 반란을 일으켜 당시 한중왕이었던 유가를 한중군의 수도 남정에서 포위하여 몰아내고, 한중 지역을 장악한 뒤 스스로 무안왕(武安王)이라 칭했다.
연잠은 무도군으로 달아난 유가를 추격했으나, 경시제의 장수 주공후(柱功侯) 이보에게 격파당하고 천수군으로 물러났다. 그 사이 비어있던 남정은 공손술이 보낸 부장 후단(侯丹)에게 점령되었다. 유가는 이보를 재상으로 삼아 후단을 공격했으나 실패하고 무도군으로 후퇴했다. 연잠은 유가와 계속 교전하다가 산관(散關)을 넘어 우부풍 진창(陳倉)현까지 이르렀으나, 유가의 추격을 받아 다시 패했다.
이후 연잠은 경조윤 두릉현에 주둔했다. 25년 9월, 장안에 입성한 적미의 장수 방안(逄安)이 10만 대군을 이끌고 공격해오자, 연잠은 이전의 적이었던 이보와 손을 잡고 수만 명의 군사로 맞섰다. 첫 전투에서는 패배하여 만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이보는 적미에 투항했으나, 연잠은 흩어진 군사를 수습했다. 이보가 몰래 편지를 보내 내부에서 호응하겠다고 하자, 연잠은 다시 적미군을 도발했다. 방안 등이 진영을 비우고 공격에 나서자 이보가 그 사이 진영을 점령했고, 싸움에 지쳐 돌아온 적미군은 진영이 함락된 것을 보고 혼란에 빠져 달아나다가 강물에 빠지는 등 10만여 명의 병력을 잃었다.
연잠은 남전현을 거점으로 삼아 후한 광무제의 장수이자 사도였던 등우를 격퇴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적미처럼 포악했다는 평가가 있으며, 한때 연합했던 유가와 이보는 좌풍익 운양현에 주둔하다가 등우의 권고를 받아들여 광무제에게 투항했다.
광무제는 삼보 지역 평정에 어려움을 겪는 등우 대신 풍이를 파견했다. 당시 관중에는 연잠을 비롯한 여러 군웅들이 자립하여 장군을 칭하고 있었는데, 연잠은 무안왕을 자칭하며 주목과 태수를 임명하는 등 관중 지역에 세력을 굳히려 했다. 건무 3년(27년) 4월, 풍이가 진군해오자 연잠은 장안현의 장한(張邯), 호(鄠)현의 임량(任良)과 연합하여 상림원(上林院)에서 풍이를 공격했으나 크게 패하여 수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 이 패배로 관중의 여러 군웅들과 연잠의 부하들이 풍이에게 투항했다. 연잠은 달아나 홍농군 석현(析縣)을 공격했지만, 풍이가 보낸 복한장군(復漢將軍) 등엽(鄧曄)과 보한장군(輔漢將軍) 우광(于匡)에게 다시 대패하여 장군 소신(蘇臣) 등 8천여 명이 항복했다. 결국 연잠은 무관(武關)을 통해 남양군으로 도주했다.
남양군에 도착한 연잠은 몇 개의 성을 함락시키고 양(穰)현 사람 두홍(杜弘)을 휘하에 두었다. 그러나 같은 해 6월, 양현에서 광무제의 장수 경감의 공격을 받아 대패했다. 이 전투에서 3천여 명이 목숨을 잃고 5천여 명이 포로로 잡혔으며, 두홍도 경감에게 항복했다. 연잠은 동양(東陽)취로 달아나 진풍의 장수 장성(張成)과 합류했다. 하지만 그해 겨울, 광무제의 건위대장군(建威大將軍) 주우(朱祐)와 채준(祭遵)의 공격을 받아 또다시 패배했고, 장성은 전사했으며 연잠은 진풍에게로 도망쳤다. 이후 연잠은 이릉(夷陵)의 군웅 전융과 함께 진풍의 사위가 되었다.
건무 4년(28년) 봄, 연잠은 순양현을 공격했으나 등엽과 우광을 이끌고 온 등우에게 등(鄧)현에서 격파당했다. 무당(武當)까지 쫓겨가 다시 패배한 연잠은 결국 한중으로 달아났다.
2.2. 성나라의 제후왕
건무 5년(29년) 6월, 진풍이 멸망하자 전융과 함께 성가의 공손술에게 항복했다. 공손술은 연잠을 대사마로 임명하고 여녕왕(汝寧王)으로 봉했다. 이 시기까지 연잠의 잔당이 음(陰)·찬(酇)·축양(築陽) 세 현에서 활동하고 있었으나, 후한의 주우가 이를 평정했다.
건무 6년(30년), 외효가 공손술에게 복속하자, 기도위 형한(荊邯)은 광무제와 천하를 다툴 계책으로 연잠에게 한중(漢中)을 나와 관중(關中) 일대를 평정하고 전융에게도 별도로 출진할 것을 건의했다. 연잠은 전융과 함께 공을 세우고자 했으나, 촉(蜀) 사람들은 먼 원정을 꺼렸고 공손술 또한 연잠 등을 의심하여 이 계획은 실행되지 못했다.
같은 해 여름, 광무제의 장수 이통이 파간장군(破姦將軍) 후진(侯進), 포로장군(捕虜將軍) 왕패 등 10여 영(營)을 이끌고 한중의 연잠을 공격했다. 공손술은 구원군을 보냈지만, 한중군 서성현(西城縣)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패배했다.
건무 11년(35년), 후한의 장수 잠팽이 평곡(平曲)을 점령하고 많은 군량을 확보하자, 공손술은 연잠에게 여유, 왕원, 공손회 등과 함께 광한현(廣漢縣)과 자중현(資中縣) 일대에서 잠팽 군을 요격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잠팽은 일부 병력으로 연잠 군을 상대하게 하는 척하면서 주력 부대를 이끌고 도강(都江)을 건너 황석(黃石)을 지키던 후단(侯丹)을 격파했다. 잠팽 군은 신속하게 무양(武陽)현을 함락시키고 정예 기병을 성도(成都) 근처 광도현(廣都縣)까지 진격시켰다. 잠팽이 예상치 못하게 후방에 나타나자 촉 지역은 크게 동요했고, 공손술은 "무슨 신이라도 된 것이냐?"라며 놀랐다고 전해진다. 한편, 연잠은 장궁의 기습 공격을 받아 침수(沈水)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크게 패하여 1만여 명의 병사가 물에 빠져 목숨을 잃었다.
2.3. 최후
건무 12년(36년) 9월, 오한이 이끄는 후한군이 성도(成都)까지 진격해오자, 공손술은 연잠에게 대책을 물었다. 연잠은 "남자라면 마땅히 죽을 위기 속에서도 살 길을 찾아야지(原文: 男兒當死中求生), 재물을 아껴서는 안 됩니다."라고 진언했다. 이에 공손술은 자신의 재산을 풀어 5천여 명의 결사대를 모집했다. 연잠은 이 결사대를 이끌고 오한의 군대를 기습하여 크게 무찔렀다. 이 전투에서 오한은 물에 빠져 말꼬리를 잡고 겨우 목숨을 건졌다고 전해진다.
같은 해 11월, 후한의 장수 장궁이 성도의 함문(咸門)을 공격해오자, 연잠은 공손술의 명을 받아 맞서 싸워 세 번 모두 승리했다. 그러나 계속된 전투와 보급 부족으로 병사들이 지쳐있던 상황에서 후한군의 기습 공격을 받아 공손술의 군대는 크게 혼란에 빠졌다. 이 전투에서 공손술은 중상을 입고 성 안으로 후퇴했으며, 그날 밤 연잠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사망했다.
공손술이 죽은 다음 날, 연잠은 오한에게 항복했다. 하지만 오한은 항복을 받아들이지 않고 연잠을 비롯한 공손술의 남은 세력과 그 일족들을 모두 처형했다.
3. 평가
연잠은 당시에도 용병에 뛰어난 무장으로 평판이 높았으며, 같은 시기에 활약한 소무로부터도 그 군사적 능력을 인정받았다. 또한, 공손술에게 말한 "죽음 속에서 삶을 구한다"는 말은 고사성어로 남아, 현대에도 사어가 되지 않고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