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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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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스촌은 일본 에히메현 우와지마시 서부의 고모부치 반도 중부에 위치했던 촌이다. 1889년 정촌제 시행으로 유스코우라 1개 촌이 유스촌이 되었으며, 어업과 농업을 중심으로 발전했다. 1958년 우와카이 촌에 합병되어 자치단체로서 소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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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스촌
기본 정보
자치체 명칭유스촌
한자 표기遊子村
요미가나유스무라
행정 구역
폐지일1958년 4월 1일
폐지 이유신설 합병
폐지 상세유스촌・시모나미촌・쇼엔촌・우지마촌・히즈시마촌 → 우와카이촌
현재의 자치체우와지마시
도도부현에히메현
기타우와군
인구2931명
인구 조사 시점1955년
인접 자치체쇼엔촌, 시모나미촌, 미우라촌
소재지기타우와군 유스촌 자(字) 아마자키
좌표33°09′49″N 132°22′30″E

2. 지리

우와지마시 서부의 우와해로 돌출된 고모부치 반도 중부에 자리 잡고 있다.[1] 반도의 등줄기(최고 지점 198m)를 경계로 시타바 촌과 마주하며, 반도 밑부분에서는 미우라 촌과 접한다. 우와지마시 시가지 중심부로부터 육로로는 약 27km, 해로로는 약 10km 떨어져 있다.

2. 1. 섬


  • 다카시마, 니와토리코지마, 후타나미지마, 아마야도지마, 류오지마, 미지마 모두 무인도이다.

2. 2. 촌명의 유래

반정(藩政) 초부터 遊子浦|유스우라jpn라고 불렸다.

3. 역사

유스촌은 에도 시대에는 우와지마 번에 속했으며, 여러 개의 작은 포구(지류)로 구성되어 있었다. 메이지 시대1889년 12월 15일, 정촌제 시행에 따라 유스코우라(遊子高浦)가 행정 구역 '''유스촌'''(遊子村)으로 성립되었다. 이후 1910년대에는 우와지마항을 잇는 항로가 잠시 기항하고 우와지마 운수의 기선이 취항하는 등 교통의 변화를 겪었다. 1958년 4월 1일, 쇼와 대합병 정책에 따라 인근의 시모나미 촌, 쇼우엔 촌, 토지마 촌, 히부리시마 촌과 통합되어 우와카이 촌이 신설되면서 유스촌은 자치단체로서 소멸하였다.

3. 1. 에도 시대

유스촌은 우와지마 번에 속해 있었다. 당시에는 明越浦|아케코시우라일본어, 矢之浦|야노우라일본어, 小矢之浦|코야노우라일본어, 雨崎浦|아마자키우라일본어, 番匠浦|반쇼우라일본어, 塩屋浦|시오야우라일본어, 水ケ浦|미즈카우라일본어, 津之浦|츠노우라일본어 등 8개의 지류(枝浦)가 있었고, 후에 高島|타카시마일본어가 추가되었다.

1691년(겐로쿠 4년)에는 해상에 있던 高島|타카시마일본어가 새로운 항구로 개발되었다.

그러나 1782년(텐메이 2년)에는 高島|타카시마일본어 주민 13가구가 쿠시마 浦白浜|우라시라하마일본어로 이주하면서 高島|타카시마일본어는 무인도가 되었다. 이는 물을 확보하기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전해진다.

3. 2. 메이지 시대 이후


  • 1889년 12월 15일, 정촌제 시행에 따라 유스코우라(遊子高浦) 1개 촌(浦)이 행정 구역으로서 '''유스촌'''(遊子村)이 되었다.
  • 1910년 우와지마항과 시모나다를 잇는 항로가 유스촌에 기항하기 시작했으나, 이듬해인 1911년 운항이 중단되었다.
  • 1912년에는 우와지마 운수의 기선이 취항하여 매일 아침과 저녁 두 차례 운항하였다.
  • 1958년 4월 1일, 쇼와 대합병 정책의 일환으로 인근의 시모나미 촌, 쇼우엔 촌, 토지마 촌, 히부리시마 촌 4개 촌과 통합되어 '''우와카이 촌'''(宇和海村)이 신설되었다. 이 합병으로 유스촌은 자치단체로서 소멸하였다.


유스촌은 이후 우와카이 촌의 일부로 존속하다가, 우와카이 촌이 1974년 4월 1일 우와지마시에 편입되면서 우와지마시 소속이 되었다. 최종적으로 2005년 8월 1일, 헤이세이 대합병을 통해 구 우와지마시, 미마정, 요시다정, 쓰시마정과 함께 새로운 우와지마시의 일부로 통합되었다.

3. 3. 행정 구역 변천

번정기우와지마 번에 속했다. 당시 아케코시우라, 야노우라, 코야노우라, 아마자키우라, 반쇼우라, 시오야우라, 미즈카우라, 츠노우라 등 8개의 지류가 있었으며, 후에 타카시마가 추가되었다. 1691년(겐로쿠 4년)에는 해상에 있던 타카시마가 새로운 항구로 개발되었다. 그러나 1782년(텐메이 2년), 물 확보의 어려움으로 인해 타카시마 주민 13가구가 쿠시마 우라시라하마로 이주하면서 타카시마는 무인도가 되었다.
메이지 이후1889년(메이지 22년) 12월 15일, 정촌제 시행에 따라 유스코우라 1개 촌(浦)이 그대로 '''유스촌'''이 되었다. 1910년(메이지 43년)에는 우와지마항-시모나다 항로가 유스촌에 기항했으나, 1911년(메이지 44년)까지만 운항되었다. 1912년(메이지 45년)부터는 우와지마 운수의 기선이 취항하여 아침, 저녁으로 2편 운항되었다.

1958년(쇼와 33년) 4월 1일, 쇼와 대합병 정책에 따라 시모나미 촌, 쇼우엔 촌, 토지마 촌, 히부리시마 촌의 4개 촌과 합병하여 '''우와카이 촌'''이 신설되면서, 유스촌은 자치단체로서 소멸하였다. 이후 우와카이 촌은 1974년(쇼와 49년) 4월 1일 우와지마시에 편입되었고, 2005년(헤이세이 17년) 8월 1일에는 우와지마시가 미마정, 요시다정, 츠시마정과 합병하여 현재의 우와지마시가 되었다.

4. 지역

원래 유스촌은 별도의 하위 행정 구역인 대자(大字) 없이 하나의 마을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후 우와해 마을에 편입되면서 '대자 유스'가 되었다.

마을의 주요 행정 기능은 '아마자키'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촌장(庄屋)이 아마자키에 거주했으며, 마을사무소 역시 이곳에 설치되었다. 우와해 마을로 편입된 후에도 읍사무소는 계속해서 아마자키에 자리 잡았다.

세대수 변화
연도세대수
1911년402호
1955년422세대


5. 산업

유스촌의 주요 산업은 어업농업이다. 과거 정어리 어업이 중심이었으나, 쇼와 30년대(1955년~1964년) 정어리 흉어를 겪으며 쇠퇴하였다. 우와해촌으로 통합된 이후인 쇼와 30년대 후반부터는 진주방어류 양식이 도입되어 오늘날의 주력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1]

농업은 본래 자급자족을 위한 고구마, 보리 재배 위주였으나, 이후 온주밀감과 조기 수확 감자 재배로 전환되었다. 특히 미즈노우라 지역의 다랭이논은 돌담을 쌓아 만든 독특한 경관으로 유명하며, 현재는 중요한 관광 자원이자 생활 문화 자원으로 여겨진다.[1]

5. 1. 어업

원래 정어리 어업을 중심으로 한 어촌이었으며, 멸치 등을 가공하여 출하했다. 쇼와 시대 초기까지는 해변 끌그물을 이용한 어업이 이루어졌다. 쇼와 10년대 초에는 미즈노우라 지역에 원해 어업용 그물이 도입되었고, 1943년(쇼와 18년)경에는 자루 그물이 도입되면서 경영 규모가 점차 커졌다.

유스촌은 부락 단위의 공동 경영 체제로 비교적 일찍 전환한 마을로 알려져 있다. 쇼와 20년대 중반에는 번정 시대부터 이어져 온 13개의 그물 주인이 있었다. 그러나 쇼와 30년대에 들어서면서 정어리 어획량이 급격히 줄어드는 흉어를 겪게 되었고, 이로 인해 그물 주인들의 파산이 잇따랐다. 결국 1961년(쇼와 36년)에는 전통적인 그물 어업이 사라지게 되었다.

우와해촌으로 통합된 이후인 쇼와 30년대 후반부터는 진주방어류 양식이 새롭게 도입되었으며, 이것이 오늘날 유스촌의 주력 산업으로 자리 잡았다.

5. 2. 농업

기본적으로 어촌이었기 때문에 농업은 자급자족 형태를 띠었다. 여름에는 고구마를, 겨울에는 보리를 주로 재배했다. 고구마가 도입되면서 마을 주민들의 생활이 안정되었고, 농업에 종사하는 가구의 비율도 점차 늘어났다. 시간이 흐르면서 온주밀감과 조기 수확 감자가 새로운 주력 작물로 자리 잡으며 기존의 보리와 고구마 재배를 대체하게 되었다.

특히 '''미즈노우라'''(현재는 '''미즈가우라'''로도 표기) 지역의 다랭이논은 유스촌 농업의 특징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이곳의 농민들은 산 정상 부근(해발 50m~90m)까지 돌담을 쌓아 다랭이논을 개간했으며, 마치 "하늘에 닿아 밭을 일구는" 듯한 독특한 경관을 만들어냈다. 이 다랭이논에서는 주로 감자를 재배했으며, 오늘날에는 그 아름다운 풍경과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중요한 관광 명소이자 생활 문화 자원으로 여겨지고 있다.

6. 교통

해로의 경우, 유스촌에서 우와지마항까지는 蔣淵|장위안일본어 반도를 크게 돌아가야 했다. 육로는 1968년이 되어서야 우와지마 시내 중심가와 연결되었으며, 그 이전까지는 매우 불편했다.

우와해 연안 지역은 메이지 시대부터 연안 항로망이 발달했다. 서쪽으로 돌출된 蔣淵|장위안일본어 반도에 위치한 유스촌에도 배가 정기적으로 오갔다. 메이지 40년대(1907년~1911년)에는 외부 자본에 의해 개설된 우와지마-시모나다 항로가 유스촌에도 기항하기 시작했으며, 이 항로는 이후 우와지마 운수로 넘어갔다. 현재도 다른 회사에 의해 이 항로가 운항되고 있다.

7. 출신 인물


  • 사키야마 센베: 1927년(쇼와 2년)부터 1960년(쇼와 35년)까지 촌장, 어업협동조합 조합장, 농업협동조합 조합장 등을 역임했으며, 어망의 공동 경영화를 추진한 공적이 있다.

8. 문화 및 민속


  • 이사 춤(諫踊り일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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