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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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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필은 고려 시대의 문신으로, 글재주와 행실로 명성이 높았다. 1143년 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었으며, 이후 지주사, 이부시랑, 추밀원부사, 비서감, 지추밀원사, 지문하성사 등을 역임하며 고위 관직에 올랐다. 1152년에는 수국사를 겸임하고, 두 차례 과거를 주관했으며, 태자태사를 겸직하기도 했다. 1155년에 사망했으며, 공숙이라는 시호를 받고 의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그의 강직한 성품은 정함의 관직 임명을 반대하여 끝까지 뜻을 굽히지 않은 일화에서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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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필
기본 정보
요팔의 문장
요팔의 문장
국가콜롬비아
카사나레 주
면적2771km²
해발고도945m
인구 (2018년)129,733명
시간대UTC-5
행정
시장Marco Tulio Ruiz Riaño
추가 정보
웹사이트요팔 공식 웹사이트

2. 생애

유필은 글재주와 행실이 뛰어나 명성이 높았으며, 훗날 두 차례 과거 시험관을 맡은 것으로 보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것으로 보인다.[1]

1143년(인종 21) 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만수절(萬壽節)을 축하하였다.[2] 1147년(의종 원년) 지주사(知奏事)·이부시랑(吏部侍郎)에 임명되었다.[3] 이듬해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과거를 주관했고[4], 같은 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1149년 비서감(秘書監), 1150년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1151년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임명되었고, 최유청, 문공원과 함께 최자영, 왕식, 김영부, 박소 등의 간관(諫官)을 이끌고 대궐문에 엎드려 정서의 죄를 왕에게 아뢰어 유배 보내도록 하였다. 같은 해 참지정사(參知政事)·판병부사(判兵部事),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1152년 수국사(修國史)를 겸직했고[3], 지공거(知貢擧)로서 다시 한번 과거를 주관했으며[4], 권신 김존중(金存中)의 건의로 태자태사(太子太師)를 겸직했다. 같은 해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수문전대학사(修文殿大學士)·판이부사(判吏部事)에 임명되었다가, 1155년 세상을 떠났다.[3]

사후 공숙(恭肅)이라는 시호를 받고 의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1]

2. 1. 초기 관직 생활

글재주와 행실로 명성이 있었다.[1] 후대에 두 차례 과거 시험관을 맡은 것으로 보아, 본인도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른 것으로 추정된다.

1143년(인종 21) 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만수절(萬壽節)을 축하하였다.[2] 1147년(의종 원년) 지주사(知奏事)·이부시랑(吏部侍郎)에 임명되었다.[3] 이듬해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과거를 주관했고,[4] 같은 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1149년(의종 3) 비서감(秘書監), 1150년(의종 4)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1151년(의종 5)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임명되었고, 최유청(崔惟淸)·문공원(文公元)과 함께 간관(諫官) 최자영(崔子英)·왕식(王軾)·김영부(金永夫)·박소 등을 데리고 대궐문에 엎드려, “정서대령후(大寧侯)와 친하게 지내며 자기 집에 불러다가 잔치를 베풀고 논다하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왕에게 아뢰어, 정서를 유배보내도록 했다. 같은 해 참지정사(參知政事)·판병부사(判兵部事),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1152년(의종 6) 수국사(修國史)를 겸직했고,[3] 지공거(知貢擧)로서 또다시 과거를 주관했으며,[4] 태자태사(太子太師)를 겸직했는데, 이는 권신 김존중(金存中)이 태자의 교육은 재상이 담당하도록 건의했기 때문이었다. 같은 해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수문전대학사(修文殿大學士)·판이부사(判吏部事)에 임명되었다가, 1155년(의종 9) 세상을 떠났다.[3]

사후에 공숙(恭肅)이라는 시호를 받고 의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1]

2. 2. 고위 관직 역임

글재주와 행실로 명성이 있었으며[1], 후에 두 차례 과거의 시험관을 맡은 점으로 보아 본인도 과거에 급제하여 출사하게 된 것으로 추정된다.

1143년(인종 21) 금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만수절(萬壽節)을 축하하였고[2], 1147년(의종 원년) 지주사(知奏事)·이부시랑(吏部侍郎)에 임명되었다.[3]

이듬해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과거를 주관했고[4], 같은 해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1149년(의종 3) 비서감(秘書監), 1150년(의종 4)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1151년(의종 5) 지문하성사(知門下省事)에 임명되었고, 최유청·문공원과 함께 간관(諫官) 최자영·왕식(王軾)·김영부·박소 등을 데리고 대궐문에 엎드려, “정서대령후와 친교를 맺고 자기 집에 불러다가 잔치를 베풀고 논다 하니 그 죄는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주장하여, 왕이 정서를 유배 보내도록 했다.

같은 해 참지정사(參知政事)·판병부사(判兵部事), 중서시랑평장사(中書侍郞平章事)에 차례로 임명되었다.

1152년(의종 6) 수국사(修國史)를 겸직했고[3], 지공거(知貢擧)로서 또다시 과거를 주관했으며[4], 태자태사(太子太師)를 겸직했는데, 이는 권신 김존중(金存中)이 태자의 교육은 재상이 담당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건의했기 때문이었다.

같은 해 문하시랑동중서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수문전대학사(修文殿大學士)·판이부사(判吏部事)에 임명되었다가, 1155년(의종 9) 사망하였다.[3]

2. 3. 사망

1155년(의종 9) 사망했다.[3]

사후 공숙(恭肅)이라는 시호를 받고 의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1]

3. 성품

천성이 강직하여 남에게 아첨하지 않았다.

4. 일화

왕이 내시 정함을 지후로 임명했을 때, 유필은 굳이 반대하며 고신에 서명하지 않았다. 왕이 여러 차례 설득했음에도 왕명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에, 정함은 유필이 죽을 때까지 그 관직을 받지 못했다.[1]

5. 가족 관계

관계이름비고
조부유고성(庾告成)검교태자첨사(檢校太子詹事)[5]
아버지유언경(庾彦卿)검교태자태사(檢校太子太師)[5]
첫째 부인안씨(安氏)[6]
장남유응규1131년 ~ 1175년, 공부시랑(工部侍郞)·삼사부사(三司副使)·태자소첨사(太子少詹事)
둘째 부인장씨(張氏)상의봉어(常衣奉御) 장찬(張贊)의 딸[7]
차남유자량1150년 ~ 1229년, 좌복야(左僕射)[8]


참조

[1] 서적 고려사 유응규전
[2] 문서 당시 관직은 미상이다.
[3] 서적 고려사 의종세가
[4] 서적 고려사 선거지
[5] 간행물 유응규 묘지명
[6] 서적 고려사 유석전
[7] 간행물 유자량 묘지명
[8] 문서 유필에게는 5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유필의 장남임이 확실한 유응규와 달리 유자량은 몇째 아들인지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본 문서에서는 편의상 차남으로 적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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