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령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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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령후 왕경은 고려 인종의 아들이자 의종의 동생으로, 1148년 후(侯)에 책봉되었으나, 환관들의 모함과 의종의 의심으로 인해 여러 차례 유배를 겪었다. 정함 등의 무고로 역모 혐의를 받거나 외척과의 친분으로 인해 억울한 누명을 쓰기도 했으며, 1157년 천안부로 유배된 후, 의종의 수레에 화살이 떨어진 사건에 연루되어 종들이 처형되는 등 불운한 삶을 살았다. 고려사에는 도량이 넓어 많은 사람들의 신망을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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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령후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작위 | 고려 인종의 왕자 |
휘 | 왕경(王暻) |
출생 | 1130년 |
사망 | 미상 (1167년 이후) |
아버지 | 인종 |
어머니 | 공예왕후 임씨 |
배우자 | 강릉공 왕온의 2녀 |
자녀 | 미상 |
2. 생애
대령후 왕경은 1148년(의종 2년) 후(侯)로 책봉되었으며, 성품이 관대하여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그러나 의종은 어머니 공예왕후가 대령후를 편애하는 것에 질투심을 느껴 그를 견제했다.
의종은 대령후가 역모를 꾸민다는 모함을 받았으나, 김존중의 도움으로 누명을 벗었다. 이후에도 의종은 여러 사건을 통해 대령후를 압박했다.
결국 1157년(의종 11년) 대령후는 천안부로 유배되었으며, 이후에도 계속해서 모함을 받았다. 의종은 도참설(圖讖說)을 믿고 동생들을 의심하여, 간신(諫臣)을 시켜 대령후를 탄핵하게 했다.
의종의 수레에 화살이 떨어지는 사건이 발생하자, 대령후 집안의 종들이 혹독한 고문 끝에 거짓 자백을 하기도 했다.
2. 1. 초기 생애와 책봉
대령후 왕경(王暻)은 1130년(인종 8년) 인종과 공예왕후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훗날 의종이 되는 형보다 동생이었다.[5] 1148년(의종 2년) 동생 왕호와 함께 '후'(侯)로 임명되어 대령후(大寧侯)로 책봉되었다.[6][7]어머니 공예왕후는 맏아들보다 대령후를 더 총애하여 인종의 후계자로 삼으려 했다. 이 때문에 의종은 어머니의 일족인 장흥 임씨와 대령후를 신뢰하지 않았다.[5] 의종은 대령후가 환관 정함(鄭함) 등과 함께 왕위를 찬탈하려 했다고 의심했다.[7] 그러나 김존중(金존중) 등의 조사 결과 혐의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졌다.[8]
이후에도 의종은 대령후를 견제하기 위해 여러 사건을 일으켰다. 공예왕후의 매형인 정서(鄭서)와 관련된 사건에서는 대령후의 가신들을 유배 보내기도 했다.[9] 1157년(의종 11년) 대령후는 천안부로 유배되었다.[10]
2. 2. 잦은 모함과 유배
1148년(의종 2년), 왕경은 후(侯)로 책봉되었으며, 도량이 넓어 사람들이 많이 따랐다. 환관 정함(鄭諴)은 대간(臺諫)을 모함하고자 산원(散員) 정수개(鄭壽開)를 꾀어 대성(臺省)과 대리(臺吏) 이빈(李份) 등이 의종에게 원한을 품고 왕경을 왕으로 추대하려는 역모를 꾸민다고 무고하게 했다. 의종은 속아서 관련자들을 제거하려 했으나 김존중(金存中)의 주청으로 조사 결과 혐의가 없었다. 정수개는 얼굴에 문신을 새기고 흑산도로, 이빈은 운제현(雲梯縣)으로 유배되었다. 정함은 죄를 피하려 외척과 조정 신하들이 대령후 집에 출입했다고 다시 참소하였다.[7],[8]김존중은 공예태후(恭睿太后)의 매서인 정서(鄭叙) 및 태후의 아우 임극정(任克正)과 사이가 나빴다. 정서는 대령후와 친하게 지냈는데, 김존중은 정함 등과 소문을 만들어 의종에게 보고했다.[9] 의종은 의아했지만, 재상 최유청(崔惟淸)·문공원(文公元)·유필(庾弼) 등은 간관(諫官) 최자영(崔子英)·왕식(王軾)·김영부(金永夫)·박소(朴翛) 등을 데리고 대궐문에 엎드려 정서의 죄를 주장했다.
어사대(御史臺)는 정서가 종실과 몰래 친교를 맺고 밤마다 술잔치를 열었다는 죄목으로 정서와 양벽(梁碧), 김의련(金義鍊), 유우(劉遇), 이시(李施)를 수감했다. 의종은 다섯 명을 용서하고 대령부를 없앴으며, 왕경의 종 김참(金旵)을 회인(懷仁)에, 악공(樂工) 최예(崔藝) 등은 곤장을 때려 유배보냈다. 대간은 다시 대궐문에 엎드려 다섯 명에 대한 벌을 청했고, 지대사(知臺事) 최윤의(崔允儀)는 왕의 처소로 들어와 간쟁했다. 이빈을 소환하고, 정서는 동래로[9], 양벽은 회진(會津)으로, 김의련은 청주로, 김참은 박도(撲島)로 곤장을 때려 유배보냈다.
1157년(의종 11년), 왕경은 천안부로 유배되고[10], 정서는 거제현으로 유배지를 옮겼다.[11] 최유청은 충주목사(忠州牧使)로, 임극정은 양주방어사(梁州防禦使), 정서의 매서 김이영(金貽永)은 지승평군사(知昇平郡事)로, 이작승은 남해현령(南海縣令)으로 좌천되었다.[11] 최예는 사면되어 개경(開京)으로 돌아왔으나 처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최예가 대령후 집에 드나든다고 처가 무고하여 의종은 최포칭(崔褎偁)에게 국문하게 했으나 혐의를 잡지 못했다.
의종은 도참설(圖讖說)을 믿고 동생들과 불화하여 의심을 풀지 못했다. 간신(諫臣)을 시켜 대령후와 임극정 등의 죄상을 탄핵하게 하고, 태후가 구제할까 우려하여 태후를 보제사(普濟寺)로 옮기고 윤허한 척했다.
의종의 수레에 화살이 떨어진 변고가 생겼는데, 의종은 범인을 잡지 못했다며 재상들을 책망했다. 많은 사람이 체포되었고, 대령후 집안 종 나언(羅彦)·유성(有成)·황익(黃益) 등이 의심받아 거짓 자백을 했다.[12] 종친, 재상, 백관, 원로들은 대궐에 나아가 죄인 체포를 축하했다. 나언·유성·황익 및 유성의 처를 목베고, 견룡지유(牽龍指諭)와 순검지유(巡檢指諭) 14명을 시골로 유배보냈다.
2. 3. 유배 생활과 최후
1148년(의종 2년), 왕경은 그의 동생인 왕호[6]와 함께 '후'(侯)로 임명되었으며, 관대함으로 많은 사람들의 신뢰를 얻었다. 그러나 그의 맏형인 국왕은 그를 향한 어머니의 총애에 질투하여, 그가 환관 정함(鄭함), 정수개(鄭수개), 이빈(李빈)과 함께 왕위를 찬탈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비난하며 그에게 원한을 품었다. 왕경은 자신이 무죄이며 형의 왕위를 찬탈할 의사가 없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었다.[7] 이 일 이후, 의종은 관련된 사람들을 제거하려 했지만, 김존중(金존중)의 요청으로 사실 조사를 위해 관련 정부 관료들을 보냈고, 혐의는 나중에 입증되지 않았다. 그 후, 의종은 수개의 얼굴에 문신을 새기고 흑산도로 유배 보냈으며, 이빈은 운제군으로 유배 보냈다.[8]어사대에서 정서는 은밀히 왕족의 많은 구성원들과 친분을 맺고 매일 밤 술자리를 열었다.[9] 그는 심지어 그의 조력자인 양벽(楊벽), 김의련, 김우(劉우)의 도움을 받아 이시(李시)를 투옥했다. 한편, 그들은 모두 의종에게 용서받았지만, 의종은 대령부(大령府)를 폐지하고, 그의 종 김참(金참)을 화인으로 유배 보냈고, 최예(崔예)를 구타하고 유배 보냄으로써 왕경을 제거했다.
''대간''(臺諫)에서 왕경은 다시 궁궐 문 앞에서 엎드려 다섯 사람에 대한 처벌을 요구했으며, 심지어 최윤의 영의정도 왕의 처소로 달려가 다퉜다. 이를 알게 된 의종은 이빈을 개경으로 소환하고, 정서를 동래로[9], 양벽을 회진으로, 김의련을 청주로, 김참을 박도로 유배 보냈다.
1157년(의종 11년), 왕경은 천안부로 유배되었고[10], 정서는 거제현으로 유배되었다.[11] 한편, 최예는 사면되어 개경으로 돌아갈 수 있었는데, 그는 은밀히 반역자들을 만들어 왕경, 임극정 등을 탄핵했고, 왕대비에게 보제사(普濟寺)로 가도록 강요했다. 그 후, 많은 사람들이 잇달아 체포되었고, 대령후의 종들(나언(羅彦), 유성(有成), 황익(黃益) 포함)이 의심을 받아 거짓 자백을 할 때까지 심한 심문을 받았다.[12] 그들의 가족도 참수되었고, 대신, 관리, 왕족 원로들이 궁궐에 와서 범죄자 체포를 경례했다.
3.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
부왕 | 인종 (고려 17대 왕) |
모후 | 공예왕후 임씨 (1109년~1183년) |
형 | 의종 (고려 18대 왕) |
동생 | 명종 (고려 19대 왕, 익양후) |
동생 | 원경국사 |
동생 | 신종 (고려 20대 왕, 평량공) |
동생 | 승경궁주 - 공화후 왕영과 혼인 |
동생 | 덕녕궁주 - 강양공 왕감과 혼인 |
동생 | 창락궁주 - 신안후 왕성과 혼인 |
동생 | 영화궁주 - 소성후 왕공과 혼인 |
4. 평가
고려사에 따르면, 왕경은 도량이 있어서 많은 사람들의 신망을 얻었다고 한다.[13]
5. 대중 매체에서의 등장
참조
[1]
웹사이트
https://db.history.g[...]
2023-03-25
[2]
웹사이트
https://db.history.g[...]
2023-03-25
[3]
웹사이트
http://www.nhtimes.c[...]
2012-11-22
[4]
서적
https://books.google[...]
Taoreum
2009-09-27
[5]
간행물
Military Revolt in Koryŏ: The 1170 Coup d'État
https://muse.jhu.edu[...]
2024-05-05
[6]
웹사이트
https://db.history.g[...]
2023-03-25
[7]
웹사이트
https://db.history.g[...]
2023-03-25
[8]
웹사이트
https://db.history.g[...]
2023-03-25
[9]
웹사이트
https://db.history.g[...]
2023-03-25
[10]
웹사이트
https://db.history.g[...]
2023-03-25
[11]
웹사이트
https://db.history.g[...]
2023-03-25
[12]
웹사이트
https://db.history.g[...]
2023-03-25
[13]
문서
고려사 열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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