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파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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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을파소는 고구려 고국천왕 때 활약한 인물로, 국상(國相)에 임명되어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고 내정을 다졌다. 고국천왕은 외척의 반란을 진압한 후 인재를 천거받아 을파소를 중용했으며, 을파소는 흉년에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진대법 실시를 건의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산상왕 대에도 국상직을 유지했으며, 203년에 사망했다. 2024년 방영 예정인 드라마 《우씨왕후》에 등장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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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파소 - [인물]에 관한 문서 | |
|---|---|
| 을파소 | |
| 로마자 표기 | Eul Paso |
| 출생지 | 서압록곡 좌물촌 |
| 관직 | |
| 임기 | 191년~203년 |
| 대수 | 2대 |
| 국가 | 고구려 |
| 직책 | 국상 |
| 전임 | 명림답부 |
| 후임 | 고우루 |
| 생애 | |
| 출생 | 미상 |
| 사망 | 203년 |
2. 생애
고국천왕 13년(191년) 어비류와 좌가려의 반란 진압 후, 을파소는 중외대부와 우태(于台)를 거쳐 국상(재상)에 임명되었다. 기존 대신들과 외척들의 경계에도 불구하고 왕의 엄명 아래 국사에 헌신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내정을 안정시켰다.
194년 흉년으로 굶주린 백성들을 위해 진대법 실시에 큰 영향을 주었다. 삼국사기에는 을파소와 진대법의 관계가 명확히 나타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을파소가 진대법 실시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고국천왕 사후 산상왕 대에도 국상 자리를 유지하였다. 203년 왕이 아들을 얻지 못해 근심하자 "하늘의 명은 헤아릴 수 없으니, 기다리십시오"라고 진언하였다. 그해 8월 을파소가 죽자 많은 이가 슬퍼하였으며, 국상직은 고우루(高優婁)가 계승하였다.
2. 1. 초기 생애와 등용
고국천왕 13년(191년)에 외척인 어비류와 좌가려가 반란을 일으켰다. 고국천왕은 이를 진압한 후 4부에 영을 내려 인재를 천거하게 하였다. 4부에서는 동부의 안류를 천거하였고, 안류는 다시 유리왕 때 재상이었던 을소의 후손인 을파소를 천거하였다. 왕은 을파소를 중외대부(中畏大夫)와 우태(于台)로 임명하였다.을파소는 이 관직이 자신이 뜻하는 바를 하기에 충분치 못하다고 여겨 “저로써는 감히 왕명을 감당할 수 없으니, 폐하께서는 현명하고 어진 이를 가려내 높은 관직을 주어 대업을 이루소서”라고 하였다. 왕은 그 뜻을 알고 을파소를 국상(國相, 재상)으로 임명했다. 기존 대신들과 외척들이 을파소를 경계하자 왕은 국상에게 복종치 않는 자는 일족을 멸하겠다는 엄명을 내렸다.
이후 을파소가 국사에 지극정성으로 임하니 백성들이 편안해지고 내정이 안정되었다. 같은 해 10월, 고국천왕은 안류를 불러 을파소를 천거한 공을 치하하며 대사자(大使者)에 임명하였다.
2. 2. 국상으로서의 활동
고국천왕 13년(191년) 어비류와 좌가려의 반란을 진압한 후, 고국천왕은 4부에 인재를 천거하게 하였다. 동부의 안류는 을소의 후손인 을파소를 추천했고, 왕은 을파소를 중외대부와 우태(于台)에 임명했다.을파소는 자신의 뜻을 펼치기에 이 관직이 충분하지 않다고 생각하여 왕에게 더 현명한 인재를 등용할 것을 청했다. 왕은 그의 뜻을 이해하고 국상(國相, 재상)으로 임명했다. 기존 대신들과 외척들이 을파소를 경계하자 왕은 국상에게 복종하지 않으면 일족을 멸하겠다는 엄명을 내렸다.
이후 을파소는 국사에 헌신하여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고 내정을 안정시켰다. 같은 해 10월, 고국천왕은 안류를 대사자에 임명하여 을파소 천거에 대한 공을 치하했다.
3년 뒤인 194년,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주리자 왕은 백성들을 구휼하고, 봄부터 가을까지 곡식을 빌려주었다가 10월에 갚게 하는 진대법을 실시했다. 삼국사기에는 을파소와 진대법의 관계가 명확히 나타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을파소가 진대법 실시에 큰 영향을 준 것으로 평가된다.
고국천왕 사후 산상왕 대에도 을파소는 국상 자리를 유지했다. 203년 을파소가 사망하자 국상직은 고우루(高優婁)가 계승했다.
2. 3. 산상왕 대의 활동과 사망
산상왕 대에도 을파소는 국상 직위를 유지하였다. 산상왕 7년, 왕이 아들을 얻지 못해 근심하자 을파소는 "하늘의 명은 헤아릴 수 없으니, 기다리십시요"라고 진언하였다. 그해 8월 을파소가 죽자 많은 이가 슬퍼하였다. 국상직은 고우루(高優婁)가 계승하였다.3. 진대법 실시와 그 영향
194년 7월, 서리로 인해 백성들이 굶주리자 고국천왕은 이들을 구휼하고, 관리들에게 명하여 봄부터 가을까지 곡식을 빌려주고 10월에 갚게 하는 진대법을 시행하였다. 삼국사기에는 을파소와 진대법의 관계가 명확히 나타나 있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을파소가 진대법 실시에 큰 영향을 미친 것으로 평가된다.
진대법은 한국 역사에서 빈민 구제와 사회 안정을 위한 중요한 제도로 평가받는다. 을파소는 이러한 제도의 실시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여 백성들의 삶을 개선하고 고구려 사회의 안정을 도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4. 대중문화에서의 등장
4. 1. 드라마
2024년 TVING 드라마 우씨왕후에서 김무열과 안석현이 을파소 역을 연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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