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선 (조선의 무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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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광선(1563~1616)은 조선의 무신으로, 임진왜란 시기 선조를 호종하고 이치 전투와 행주 대첩에서 큰 공을 세웠다. 1591년 무과에 급제하여 훈련원 현신교위에 임명되었으며, 임진왜란 중에는 선전관으로 활약하며 왜군을 격퇴했다. 행주대첩 승리에 기여하여 선무원종공신에 녹훈되었으며, 사후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97호로 지정된 유물이 있으며, 이광선, 동생 이광후, 숙부 이몽상은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일가족 삼충신으로 알려져 있다.
2. 생애 전반
2. 1. 유년 시절
함성군 이극해(李克諧)의 7세손으로 1563년(명종 18) 나주에서 참봉 이몽정(李夢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사촌(莎村) 최사물의 문하에서 동생 이광후(李光後)와 함께 경사(經史)를 익혀 학문이 뛰어났고, 문무(文武)의 재능을 겸비하여 용력(勇力)과 지략(智略)이 뛰어났다. 스승이 애지중지하고 보는 사람마다 절로 존경하여 복종하였다.
2. 2. 무과 급제
이광선은 1591년(선조 24) 10월 무과에 응시하여 300명 중 을과 15위로 급제하였다. 훈련원 현신교위에 임명되었다.
3. 임진왜란
3. 1. 선조 호종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으로 전국 방방곡곡이 왜군에게 유린되어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상황에 이르렀다. 부장으로서 4월 30일부터 6월 22일까지 대궐에서 의주까지 어가를 호위하니, 임금이 가상히 여기시고 특별히 선전관에 제수하면서 장검을 하사하였다. 의주의 행조가 삼남지방과 불통되자, 이광선은 임금의 명을 받은 선전관의 직분으로 단기로 동래에 달려가던 중 왜군에게 포위되었으나, 왜적의 목 수십 급을 베니 왜적들이 감히 범치 못하여 곧바로 호남 창의군진에 이르렀다.
3. 2. 이치 전투
이광선은 고인후(高因厚), 노인(魯認), 이충립(李忠立)과 함께 왜적을 토벌할 것을 모의하고, 권율 장군의 휘하에 들어가 1592년 7월 7일 웅치에서 왜군과 전투를 벌였다. 7월 8일에는 1천 5백 명의 군사를 이끌고 이치 전투에서 왜군을 격퇴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3. 3. 행주 대첩
1593년 2월 12일 권율 장군이 정병 2천 3백 명과 함께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에 들어가 토성을 쌓고 목책을 치고 있을 때, 평안도, 황해도에서 후퇴하는 왜군 3만 대군이 새벽에 총출동하여 행주산성을 포위하고 셋으로 나뉘어 교대하며 공격해 왔다. 그러나 산성이 높고 가파르며, 아군(조선군)이 고지대에서 활과 총통을 쏘고 돌을 던지며 결사 항전하였다. 전군이 죽음을 무릅쓰고 민, 관군, 승병, 부녀자까지 가담하여 왜군을 물리쳤다. 왜군은 전사자의 시체를 모아 태우고 달아났다. 2천 3백 명의 작은 군대로 3만 명의 왜군을 격퇴한 행주대첩으로 아군과 명군의 사기가 충천되고 왜군은 남쪽으로 퇴각하게 되어, 임금이 환도하게 되었으니 그 승전의 의의는 매우 크다. 임진왜란 종전 후 1602년(선조 35) 건공장군 소강진첨절제사 이광선은 그날의 승전을 기념하고 후대에 전하기 위해 전투 현장 덕양산 정상에 대첩비 건립을 주관하였다. 행주대첩 주요 인물 20인 중 한 사람으로 기록되었다.
3. 4. 난중일기
난중일기, 충무공유사, 이충무공전서 등에 따르면, 이광선은 1596년 5월 휴전 중에 왕명을 받든 선전관의 직분으로 한산도에 들어가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에게 왕명을 전하고 밤을 새우며 전술을 논하였다는 기록이 친동생 선전관 이광후와 함께 등재되었다.
3. 5. 소강진 첨절제사
임진왜란 종전 후, 이광선은 행주대첩에서 무공을 세운 사실이 알려져 선조는 그를 선략장군, 소위장군, 보공장군으로 차례로 제수하였다. 1601년 건공장군 소강진 수군첨절제사(종3품)에 제수되었다.
3. 6.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이광선은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큰 공을 세웠고, 1605년 나라가 평온을 되찾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의주로 파천하는 임금을 모시는 데에도 공을 세웠다.
4. 임진왜란 나주 개선장군
건공장군 이광선/李光先중국어(1563~1616)은 도원수 권율 장군 막하에서 이치대첩과 행주대첩에서 많은 전공으로 선무원종공신에 책록되고, 1609년(광해군 원년) 임진왜란 나주 개선장군(凱旋將軍)으로 향리에서 후학 양성에 매진하다가 1616년 8월 7일 향년 54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4. 1. 사후 관직
사후 병조참판에 추증되었고, 보령 호국사와 금산 금곡사에 배향되었다. 절혜지전으로 “함고(咸咎)”공 시호가 내려졌지만, 후세에 전하지 않은 것은 참으로 비통한 일이며, 식견이 있는 선현들은 이 사실을 매우 안타까워하였다.1602년 행주대첩비와 1866년 이치대첩비에 등재되었고, 1898년 전라도 어사 이승욱이 쓴 묘갈명, 1907년 후석 오준선이 쓴 행장에 관련 기록이 나타났다.
5. 일가족 삼충신
이광선은 1591년 (선조 24년) 신묘별시(辛卯別試) 무과에서 을과(乙科) 15위(16/300)로 급제하였다. 동생 이광후는 같은 해 신묘별시 무과 병과(丙科) 4위(39/300)로 급제하였다. 숙부 이몽상은 1589년(선조 22년) 기축증광시(己丑增廣試) 무과 병과(丙科) 11위(19/28)로 급제하였다. 이들은 모두 임진왜란에서 활약한 충신들이다.
6. 문화재 지정 등록
이광선(李光先, 1563~1616)의 선무원종공신녹권과 교지 및 고문서 총 12점은 그가 사망한 뒤 400여년이 지나 14세손 이재향(李載香)의 노력으로 도서관 서고에 있던 난중일기 등 새로운 자료가 발굴되면서, 그가 남긴 유물 총 12점이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297호로 지정 등록되었다.
2001년 향토민들과 후손들이 뜻을 모아 장군의 구국 충정을 기리는 이광선 장군 충의비(忠義碑)가 건립되었고, 2023년 군자감판관 이몽상, 임란공신 건공장군 이광선, 숙천부사 이광후 일문삼충유허비(一門三忠遺墟碑)를 건립하였다.
7. 문촌공 가계
이광선의 아버지는 참봉(參奉)을 지낸 이몽정(李夢禎)이다. 조부는 충순위(忠順衛) 이운(李雲)이며, 증조부는 현감(縣監) 이진충(李盡忠)이다. 처부는 강응성(姜應星)이다.
동생으로는 숙천부사(肅川府使)를 지내고 사후 관직이 추증된 이광후(李光後)와 이광립(李光立)이 있다. 숙부는 1589년 무과에 급제하여 군자감(軍資監) 판관(判官)을 역임한 이몽상(李夢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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