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규남 (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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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규남은 일제강점기 및 한국 전쟁 시기에 활동한 대한민국의 가수이다. 본명은 윤건혁이며,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일본 유학 후 피아노를 전공했다. 1933년 임헌익이라는 이름으로 데뷔하여 신민요풍 음악을 불렀으며, 이후 이규남이라는 예명으로 활동하며 홍난파의 지원을 받아 빅타레코드에서 음반을 발표했다. 대표곡으로는 〈진주라 천리 길〉, 〈장모님전 상서〉 등이 있으나, 한국 전쟁 중 월북하여 오랫동안 금기시되었다. 일제강점기 말에는 친일 가요를 부르기도 했으며,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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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규남 (가수)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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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본명 | 윤건혁 |
출생 | 1910년 |
출생지 | 충청남도 연기 |
사망 | 1974년 |
직업 | 가수 |
장르 | 트로트 |
활동 시기 | 1932년 ~ 1950년 |
2. 생애
충청남도 연기군 출신으로 본명은 윤건혁이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일본에 유학하여 피아노를 공부하였다. 1933년 '임헌익'이라는 이름으로 가수로 데뷔했으며, 1936년부터는 '이규남'이라는 예명을 사용하며 활동했다.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동하며 〈진주라 천리 길〉(1941), 〈장모님전 상서〉(1938) 등 여러 인기곡을 남겼다.
그러나 일제 강점기 말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군사우편〉(1942), 〈승전가〉(1943) 등 친일 가요를 불러 전쟁을 선전하는 데 동원되기도 했다.[1][2]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다.
한국 전쟁 중 북한으로 갔으며, 이 때문에 대한민국에서는 그의 존재와 노래가 오랫동안 언급되지 못하고 잊혔다. 북한에서는 작곡과 무대예술 분야에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지나, 이후의 자세한 행적은 알려지지 않았다.
2. 1. 초기 활동 (1932~1936)
충청남도 연기군 출신으로, 본명은 윤건혁이다. 휘문고등보통학교를 졸업한 후 일본으로 유학하여 정식으로 피아노를 공부하고 돌아온 엘리트였다. 1932년경부터 일본에서 활동을 시작했으며, 1933년에는 '''임헌익'''(林憲翼)이라는 이름으로 콜럼비아레코드에서 첫 음반을 발표하며 가수로 데뷔했다. 초기에 취입한 노래는 신민요풍의 음악들이었다.이후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활발한 가수 활동을 펼쳤다. 일본에서는 南邦雄|미나미 쿠니오일본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임헌익 대신 이규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36년 빅타레코드에서 음반을 내면서부터이다.
2. 2. 전성기 (1936~1945)
1936년 빅타레코드에서 음반을 내면서부터 '''이규남'''이라는 예명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빅타레코드에서 활동할 당시 작곡가 홍난파는 이규남을 아껴 여러 곡을 직접 작곡해주었다. 이 시기 이규남은 한국과 일본을 오가면서 활발한 가수 활동을 펼쳐 많은 인기를 누렸다. 일본에서는 미나미 쿠니오(南邦雄)라는 이름을 사용했다.이규남이 부른 총 140여 곡의 가요 중에는 이 시기에 발표된 인기곡이 많다. 1938년에는 만요 분야의 히트작인 〈장모님전 상서〉를 발표했으며, 1941년에는 그의 대표작으로 꼽히는 〈진주라 천리 길〉을 발표했다. 같은 해 다시 콜럼비아레코드사의 전속가수가 되었다.
특히 〈진주라 천리 길〉은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도나우 강의 잔물결〉 선율로 시작하는 세련된 곡이었으나, 작사가 조명암과 작곡가 리면상이 모두 월북하면서 오랫동안 금지곡으로 묶여 있었다.
일제 강점기 말기인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군국가요를 부르기도 했다(관련 내용 참고). 한국 전쟁 중 북한으로 가면서 그의 활동과 노래는 오랫동안 대중에게 잊히게 되었다.
2. 2. 1. 친일 행적
이규남이 활동하던 일제 강점기 말기는 태평양 전쟁으로 인해 군국가요가 널리 불리던 시기였다. 이규남 역시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 속에서 친일 가요 보급에 참여했다.[1] 그는 콜럼비아레코드사 소속으로 〈군사우편〉(1942)과 〈승전가〉(1943) 같은 노래를 발표했다. 또한 일본어 군국가요인 〈열사의 맹서(熱砂の誓い일본어〉도 불렀다.〈군사우편〉은 병사가 되어 죽는 것이 소원이며, 장렬히 전사한 뒤 부모에게 피 묻은 적삼 하나만 보내겠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노래는 후에 월북한 조명암이 작사하고 리면상이 작곡했다. 〈승전가〉는 태평양 전쟁을 찬양하고 일본의 승리를 기원하는 가사로 이루어져 있다.[2]
이러한 행적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발표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인 부문에 포함되었다.
2. 3. 월북과 이후 (1945~?)
한국 전쟁 중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가면서 오랫동안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는 동안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특히 대표작 〈진주라 천리 길〉(1941)은 월북 작사가인 조명암이 작사하고 작곡 역시 월북 작곡가 리면상이 맡은 곡이라 금지곡으로 묶여 있었다. 이 노래는 〈사의 찬미〉처럼 이오시프 이바노비치의 〈도나우 강의 잔물결〉 선율로 시작되는 세련된 곡이다.조명암은 월북 후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고, 리면상은 조선음악가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까지 올라 북조선에서 성공한 대표적인 음악인들이다. 이규남도 이들과 같이 북조선에서 순탄한 삶을 살면서 작곡과 무대예술 분야에서 활동한 것으로 전해지나 자세한 행적은 알 수 없다.
참조
[1]
뉴스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된 유행가, ‘군국가요’ 다시 보기 (30)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4-02-09
[2]
뉴스
"나랏님을 위해 죽는 것이 소원" - 일제 침략전쟁에 동원된 유행가 ‘군국가요’ 다시 보기 (28)-<군사우편>
http://www.ohmynews.[...]
오마이뉴스
2004-0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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