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타임라인 바로가기

홍난파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타임라인 바로가기

1. 개요

홍난파(본명: 홍영후, 1898년 ~ 1941년)는 대한민국의 작곡가, 바이올리니스트, 소설가, 언론인이다. <봉선화>, <고향의 봄> 등 다수의 가곡과 동요를 작곡했으며, 한국 최초의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었다.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이후 친일 행적으로 인해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 1941년 뇌결핵으로 사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동요 작곡가 - 윤극영
    윤극영은 "반달", "엄마야 누나야" 등을 작곡하고 색동회, 다리아회, 노래동무회 등 아동 문화 운동 단체를 조직하며 한국 동요 발전에 기여한 작곡가이자 음악 교육자이다.
  • 일제강점기의 지휘자 - 현제명
    현제명은 일제강점기 및 대한민국의 음악가로, 서양음악계에 영향을 끼치고 대한민국 음악 발전에 기여했으나, 친일 행적으로 논란이 있으며, 대표작으로 〈고향생각〉, 오페라 〈춘향전〉 등이 있다.
  • 일제강점기의 지휘자 - 안익태
    안익태는 대한민국의 작곡가이자 지휘자로, 애국가를 작곡하고 한국환상곡 등의 관현악곡을 남겼으나, 일제강점기 만주국 관련 음악 작곡으로 친일 논란이 있다.
  • 일제강점기의 음악 평론가 - 윤석중
    윤석중은 일제 강점기와 대한민국의 아동문학가로서, 아동문학 운동을 이끌고 수많은 동요와 동시집을 발표하며 한국 아동 문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 일제강점기의 음악 평론가 - 홍길선
    홍길선은 배재고등보통학교와 무사시노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수원양조주식회사 사장, 수원금융조합 조합장 등을 지낸 기업인이자 사회운동가, 정치인으로, 제헌 국회의원을 시작으로 민주국민당, 민주당 소속으로 제3대, 제4대, 제5대 국회의원을 역임하며 이승만 정권에 맞섰다.
홍난파 - [인물]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본명홍영후
한자 본명洪永厚
로마자 표기 본명Hong Yeong-hu
출생일1898년 4월 10일
출생지조선 경기도 남양군 둔지곶면 활초동
사망일1941년 8월 30일
사망지일제 강점기 경기도 경성부 휘경정 경성요양원
국적조선
종교개신교 (장로교)
음악 활동
장르서양 고전 음악
직업작곡가
지휘자
피아니스트
바이올리니스트
교육인
음악평론가
가족
아버지홍준
어머니전주 이씨
계모밀양 박씨
홍석후
조카홍옥임
홍성유
홍정임
홍종임
양자홍지유
배우자김상운 (사별)
이대형 (재혼)
기타 정보
서울에 있는 홍난파 생전의 집. 앞에 홍난파의 흉상이 있음.
서울에 있는 홍난파 생전의 집. 앞에 홍난파의 흉상이 있음.
관련 활동한국 근대 음악의 선구자
이름 정보
한글홍난파
한자洪蘭坡
일본어 가나こう・らんは
일본어 가타카나ホン・ナンパ
로마자 표기Hong Nan-pa

2. 생애

홍난파는 경기도 화성군 남양읍 화초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서울로 이사했다. 정동이화학당 근처에 살면서 정동 감리교회에 다녔고, 찬송가를 통해 서양 음악을 접했다.[9] [2][8][10] 황성기독교청년회(YMCA) 산하 중학교에서 바이올린을 배우고 음악 수업을 받았다. 조선정악전습소에서 김인식에게 성악과 바이올린을 배웠고, 졸업 후 조교로 채용되었다.[2]

1918년 동경음악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으나,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고자 귀국하여 학업을 중단했다. 3·1 운동 이후 다시 일본으로 갔지만, 독립운동 참여로 인해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귀국했다. 일본 체류 중에는 최초의 한국 음악 잡지인 "삼광(三光)"을 발간했다. 귀국 후에는 매일신보에서 기자로 일했고,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도 다녔다.[8]

1920년 김형준에게 의뢰하여 〈봉선화〉 노래의 가사를 만들었다. 1922년 경상악우회가 주도한 연악회(음악연구회)에 참여했다. 1925년 한국인 최초로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었고, 한국 최초의 음악 잡지인 "음악계(音樂界)"를 발간했으며, "창조"에 "음악만필(音樂漫筆)"을 기고했다. 1926년 구니타치 음악대학에 편입하여 도쿄 심포니 오케스트라(현 NHK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다. 1929년 졸업 후 귀국하여 연악회를 통해 "조선동요 100곡집" 제1권을 발간했다.[8]

1931년 조선 음악가 협회 창립 총회에서 상무 이사로 선임되었고,[18] 미국 셔우드 음악학교(Sherwood Conservatory of Music)에서 2년간 유학했다. 유학 중 도산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했다.[22] 그러나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늑막염에 시달려 귀국 후에도 건강이 좋지 않았다.[22]

1932년 흥사단에 단우 번호 266번으로 가입했다.[22] 귀국 후 경성보육학교 주임교수, 193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학 강사로 출강했다. 같은 해 <조선동요백곡집> 하편, <조선가요작곡집>을 발매하고, 최초의 실내 악단인 난파 트리오를 결성했으나,[17] 1936년 8월 조카의 사망으로 해체되었다.[17]

1934년 일본 빅터레코드사 경성지점 음악 주임으로 근무했고, 현제명과 작곡 발표회를 열었다. 그해 12월 27일 이대형과 재혼했고, 영화 음악, 신민요, 가요 등에 참여하며 나소운(羅素雲)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화여전 강사,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 활동하며 한국 최초의 관현악단인 경성방송 관현악단을 조직, 지휘했다. 1938년 한국 최초의 음악 평론집인 「음악만필」을 발행하였다.

1936년 박영근, 이승연과 <코리아음악연구소>를 창설하고, <특선가요곡집>을 출간했다. 같은 해 이흥렬, 김태연과 성서 트리오를 결성했다.[17]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72일간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 "사상 전향에 관한 논문"을 제출하고, 1939년 이광수의 시에 곡을 붙인 <희망의 아침>을 발표했다. 매일신보에 <지나사변과 음악> 등을 게재하고,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으로 활동했다.[17]

일제 말기, 수양 동우회 사건 이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변절하거나 전향했다. 그의 딸은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늑막염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의 강요로 협조하는 글을 써야 했다고 증언했다.[22]

홍난파는 미국에서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늑막염을 앓다가 회복했지만,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된 후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병이 재발하여 크게 악화되었다. 1941년에는 적십자병원, 경성요양원(지금의 삼육서울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지만, 그해 8월 30일에 뇌결핵으로 경성요양원에서 별세하였다.[23]

2. 1. 생애 초기 (1898년 ~ 1918년)

홍난파(洪蘭坡, 본명: 홍영후)는 1898년 경기도 화성군 남양읍 화초리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서울로 이사하여 정동이화학당 근처에 살면서 정동 감리교회에 다녔고, 이를 통해 서양 음악인 찬송가를 접하게 되었다.[9] [2][8][10]

1910년 황성기독교청년회(황성 YMCA, Korean YMCA) 중학교에 입학하여 바이올린을 배우는 등 음악 수업을 받았다. 1918년 동경음악학교에 진학하고자 일본으로 건너갔으나, 삼일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하여 잠시 학업을 중단했다. 1년 후 다시 일본으로 갔지만, 독립운동 참여로 인해 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없어 귀국하였다. 일본 체류 중에는 한국 최초의 음악 잡지인 "삼광(三光)"을 발간했다.[8]

2. 1. 1. 출생과 가족

경기도 남양군 둔지곶면 활초동(현 화성시 남양읍 활초리)에서 남양 홍씨 토홍계 대호군공파 24세손으로 8남매 중 셋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16] 아버지 홍준은 국악에 조예가 깊어 온 가족이 함께 전통 악기를 연주했으며, 홍난파는 그 중 앙금을 연주했다.[17] 아버지는 아들에게 금파(錦坡), 난파(蘭坡) 등의 별호를 지어 주었다. 형 금파 홍석후는 구한 말의 양의사였고, 막내동생 홍민후는 해방 후 경남 합천군 삼가면에서 '백중약국'을 경영하며 인술을 베풀어 지역민들의 큰 존경을 받았다. 홍민후는 형편이 어려운 환자들에게는 약값을 받지 않고 무료로 약을 지어주었다.[16]

2. 1. 2. 서양 음악 입문

1899년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 서울로 이사한 후, 그는 교회를 다니게 되면서 서양 음악을 접하였다. 새문안교회에 다니면서 1911년세례를 받고 집사로서 성가대 활동을 하는 등 교회 활동을 적극적으로 하였다.[18]

1910년 중앙 기독교 청년회 중학부에 입학하였다. 중학과 재학 중 장난감 바이올린을 구입하여 숫자보를 사용하여 '도레미법'을 터득하였고,[16] 고학과 아르바이트로 7.5을 모아 바이올린을 구입하여 음악 연습을 시작했다. 1912년 조선 정악 전습소 서양악부 성악과에 입학하여 성악을 전공했고,[19] 당시 조선인 최초의 서양 음악 교사인 김인식의 지도를 받으며 공부하였다. 1913년 조선 정악전습소 성악과를 졸업하고 그 해 기악과에 입학, 이듬해에 중앙 기독교 청년회 중학과 졸업 및 기악과를 졸업하였다. 졸업 후 조선정악전습소의 보조교사로 잠시 있었다.[19]

어린 시절 서울 정동이화학당(梨花學堂) 근처에 살았기에 정동 감리교회에 다녔고, 서양 음악인 찬송가에 접할 수 있었다.[9] 15세에 당시 한국 유일의 음악 학교였던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과에 입학하여 김인식에게 성악과 바이올린을 배웠고, 졸업 후에는 같은 학교 조교로 채용되었다.[2]

2. 2. 음악 활동과 유학 (1915년 ~ 1931년)

홍난파는 어린 시절 서울로 이사하여 정동이화학당 근처에서 살았고, 정동 감리교회에 다니며 찬송가를 통해 서양 음악을 접했다.[9] [2][8][10] 1910년 황성기독교청년회(황성 YMCA, Korean YMCA) 산하 중학교에 입학하여 바이올린을 배우고 음악 수업을 받았다. 15세에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음악과에 입학하여 김인식에게 성악과 바이올린을 배웠고, 졸업 후에는 같은 학교 조교로 채용되었다.[2]

1918년 동경음악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일본으로 갔으나,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귀국하여 잠시 학업을 중단했다. 3·1 운동 이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갔으나, 독립운동 참여로 인해 학교에서 학업을 계속할 수 없게 되어 한국으로 돌아왔다. 일본 체류 중에는 최초의 한국 음악 잡지인 "삼광(三光)"을 발간했다. 귀국 후에는 매일신문사에서 기자로 일했고,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이 된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도 다녔다.[8]

1920년 김형준에게 의뢰하여 〈봉선화〉 노래의 가사를 만들었다. 1922년에는 경상악우회가 주도한 연악회(음악연구회)에 참여했다. 1925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었고, 한국 최초의 음악 잡지인 "음악계(音樂界)"를 발간했으며, "창조"에 "음악만필(音樂漫筆)"을 기고했다. 1926년에는 구니타치 음악대학에 편입하여 도쿄 심포니 오케스트라(현 NHK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주자로 활동했다. 1929년 졸업 후 한국으로 돌아와 연악회를 통해 "조선동요 100곡집" 제1권을 발간했다.[8]

2. 2. 1. 국내 활동과 첫 일본 유학

1915년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교사로 부임하여 《악전대요》, 《통속창가집》을 출간하였고, 《간이무답행진곡집》을 편찬하였다.[2] 그 해에 김상운과 18세의 나이로 결혼하였다. 홍난파의 형은 부친의 뜻에 따라 의학을 전공하게 되었고, 홍난파 또한 세브란스 의전에 입학(1916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브란스 의전에서 열린 성탄 축하 음악회에서 바이올린을 연주하였는데, 이는 그의 첫 공연 무대였고 큰 호응을 얻었다. 음악에 대한 애정 때문에 1년 만에 중퇴하고, 1917년 3년간 있던 조선정악전습소 서양악부 교사직을 사임하였다. 이듬해 1월 5일 장녀 홍숙임을 얻었으며, 1918년 일본에 유학하여 도쿄 우에노 음악학교 예과(預科)에 입학, 이듬해 3월 수료하였다.[16]

1919년 도쿄에서 예술 잡지 《삼광》을 창간하였으나, 경영난으로 4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그 해 본과 진학이 무산되자 귀국하여 경성악우회를 조직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16] 3·1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잠시 귀국하였으나, 3·1 운동 직후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복학을 신청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아 좌절하였다. 다시 귀국 후 그는 첫 작품 작곡에 몰입하였다.[8]

2. 2. 2. 〈봉선화〉 작곡과 소개

1920년 홍난파는 〈봉선화〉의 원곡인 〈애수〉를 작곡했다. 이후 김형준에게 부탁하여 〈애수〉에 가사를 붙였다.[8] 같은 해, 홍난파는 일제 강점기 조선인 최초로 공식적인 독주회를 열었다.[20] 1926년에는 김형준이 〈애수〉에 봉숭아를 소재로 하여 민족의 고난을 담은 시를 붙이면서 〈봉숭아〉가 되었다.[12]

2. 2. 3. 두 번째 일본 유학과 귀국

1918년 일본에 유학, 도쿄 우에노(上野)음악학교 예과(預科)에 입학하여 이듬해 3월 수료하였다.[16] 1919년 도쿄에서 예술 잡지인 <삼광>을 창간하였으나 경영난으로 4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16]

그 해 홍난파는 본과 진학이 무산되자 귀국하여 경성악우회를 조직하는 등 활동을 전개하였다.[16] 1919년 3·1 운동에 참여하기 위해 학업을 중단하고 잠시 귀국하였다.[16] 3·1 운동 직후 그는 다시 일본으로 돌아가 복학을 신청했으나 받아주지 않자 좌절하고 만다.[16]

1926년 5월 13일 부인 김상운과 사별하였으며, 다시 일본으로 유학가서 일본 도쿄 고등음악학원 야간반에 편입학하였다.[20] 도쿄 고등음악학원에 재학하면서 도쿄 교향악단(지금의 NHK 교향악단)의 제1바이올린 연주자로 입단했다.[20] 1929년 고등음악학원을 수료한 뒤 도쿄 교향악단을 사직하고 귀국했다.[20]

2. 3. 미국 유학과 귀국 후 활동 (1931년 ~ 1941년)

1931년 조선 음악가 협회 창립 총회에서 상무 이사로 선임되었고,[18] 그해 7월 성가대를 사임하고 미국 셔우드 음악학교(Sherwood Conservatory of Music)에서 2년간 유학했다. 이 유학은 미국으로 간 애인을 따라 간 것이라고 한다.[20] 유학 중 도산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했다.[22] 그러나 유학 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늑막염에 시달려 귀국 후에도 건강이 좋지 않았다.[22]

1932년 12월 8일 흥사단에 단우 번호 266번으로 가입했다.[22]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길에 로스앤젤레스 한인 교회에서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고, 지방 흥사단 대회에 참가했다. 1931년 일본 빅터레코드사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귀국 후 경성보육학교 주임교수, 193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학 강사로 출강했다. 같은 해 <조선동요백곡집> 하편, <조선가요작곡집>을 발매하고, 최초의 실내 악단인 난파 트리오를 결성했으나,[17] 1936년 8월 조카 홍성유의 사망으로 해체되었다.[17]

1934년 일본 빅터레코드사 경성지점 음악 주임으로 근무했고, 현제명과 작곡 발표회를 열었다. 그해 12월 27일 이대형과 재혼했고, 영화 음악, 신민요, 가요 등에 참여하며 나소운(羅素雲)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화여전 강사,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 활동하며 한국 최초의 관현악단인 경성방송 관현악단을 조직, 지휘했다.

1936년 박영근, 이승연과 <코리아음악연구소>를 창설하고, <특선가요곡집>을 출간했다. 같은 해 이흥렬, 김태연과 성서 트리오를 결성했다.[17]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72일간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 "사상 전향에 관한 논문"을 제출하고, 1939년 이광수의 시에 곡을 붙인 <희망의 아침>을 발표했다. 매일신보에 <지나사변과 음악> 등을 게재하고,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으로 활동했다.[17]

일제 말기, 수양 동우회 사건 이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변절하거나 전향했다. 그의 딸 홍정임은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늑막염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의 강요로 협조하는 글을 써야 했다고 증언했다.[22]

1938년 한국 최초의 음악 평론집인 「음악만필」을 발행하였다.

2. 3. 1. 미국 유학과 흥사단 활동

1931년 조선 음악가 협회 창립 총회에서 상무 이사로 선임되었다.[18] 그해 7월에 성가대를 사임하고 더 많은 것을 배우겠다는 생각으로 미국의 셔우드 음악학교(Sherwood Conservatory of Music)를 2년간 다녔다. 김을한이 지은 《그리운 사람들》(삼중당, 1991)에 따르면, 홍영후가 서울에서 음악 활동을 하던 무렵 K라는 애인이 있었는데, 그녀의 수양어머니가 홍난파의 애주를 문제 삼아 결혼을 매우 반대하였고, 그예 미국으로 모녀가 함께 돌아가자 그 뒤를 좇아 급하게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고 한다.[20]

이 기간 동안 홍영후는 도산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하게 되는데, 이 당시 흥사단은 미국에서 활동하던 독립 운동 단체였고, 미국에 있는 조선인의 가입을 이끌며 독립 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러나 홍영후의 미국 생활은 시련의 연속이었다. 수업료를 제때 내지 못해 분납해야 했고, 교통 사고로 늑골을 다치는 바람에 늑막염으로 고생했다. 귀국 후에도 잦은 병원 신세를 져야 할 정도로 건강이 나빠졌다. 흥사단은 그가 셔우드 음악학교를 수료할 때 축하해 주었고, 홍영후 또한 교통 사고 이후 "격려를 보낸 것에 대해 감사 드리며 변호사에게 사건을 위임하여 손해금을 받아 볼까 교섭중이다"는 편지로 화답하였다. 1932년 12월 8일 흥사단에 단우 번호 266번으로 가입했다.[22]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길에 오른 그는 로스앤젤레스의 한인 교회에서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었고, 지방 흥사단 대회에도 참가한 후 귀국하였다. 1931년 일본 빅터레코드사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2. 3. 2. 귀국 후 활동과 친일 행적

1931년 조선 음악가 협회 창립 총회에서 상무 이사로 선임되었다.[18] 그 해 7월 성가대를 사임하고 미국 셔우드 음악학교(Sherwood Conservatory of Music)에서 2년간 유학했다. 이 유학은 미국으로 간 애인을 따라 간 것이라고 한다.[20] 유학 중 도산 안창호가 이끄는 흥사단에 가입했다.[22] 그러나 유학 생활은 순탄치 않았고,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늑막염에 시달리며 귀국 후에도 건강이 좋지 않았다.[22]

1932년 12월 8일 흥사단에 단우 번호 266번으로 가입했다.[22] 미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길에 로스앤젤레스 한인 교회에서 바이올린 연주회를 열고, 지방 흥사단 대회에 참가했다. 1931년 일본 빅터레코드사 고문으로 위촉되었다. 귀국 후 경성보육학교 주임교수, 193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학 강사로 출강했다. 1933년 <조선동요백곡집> 하편, <조선가요작곡집>을 발매하고, 최초의 실내 악단인 난파 트리오를 결성했다.[17] 그러나 1936년 8월 조카 홍성유의 사망으로 난파 트리오는 해체되었다.[17]

1934년 일본 빅터레코드사 경성지점 음악 주임으로 근무했고, 현제명과 작곡 발표회를 열었다. 그 해 12월 27일 이대형과 재혼했고, 영화 음악, 신민요, 가요 등에 참여하며 나소운(羅素雲)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이화여전 강사, 경성중앙방송국 양악부 책임자로 활동하며 한국 최초의 관현악단인 경성방송 관현악단을 조직, 지휘했다. 1938년 <음악만필>을 발간했다.

1936년 박영근, 이승연과 <코리아음악연구소>를 창설하고, <특선가요곡집>을 출간했다. 같은 해 이흥렬, 김태연과 성서 트리오를 결성했다.[17]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종로경찰서에 검거되어 72일간 옥고를 치렀다. 석방 후 "사상 전향에 관한 논문"을 제출하고, 1939년 이광수의 시에 곡을 붙인 <희망의 아침>을 발표했다. 매일신보에 <지나사변과 음악> 등을 게재하고,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으로 활동했다.[17]

일제 말기, 수양 동우회 사건 이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변절하거나 전향했다. 그의 딸 홍정임은 인터뷰에서 아버지가 늑막염으로 건강이 좋지 않은 상태에서 일본의 강요로 협조하는 글을 써야 했다고 증언했다.[22]

1938년 한국 최초의 음악 평론집인 음악잡지 「음악만필」을 발행하였다.

2. 4. 죽음 (1941년)

홍영후는 미국에서 당한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늑막염을 앓다가 회복했지만, 수양 동우회 사건으로 체포된 후 일본 경찰의 고문으로 병이 재발하여 크게 악화되었다. 1941년에는 적십자병원, 경성요양원(지금의 삼육서울병원)을 오가며 치료를 받았지만, 그해 8월 30일에 결핵균이 머리로 들어가 뇌결핵으로 이어져 경성요양원에서 별세하였다.[23]

그는 "내가 죽거든 꼭 연미복을 입혀서 화장(火葬)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3. 작품

23세 때 작곡한 〈봉선화〉와 〈성불사의 밤〉, 〈옛동산에 올라〉, 〈고향의 봄〉, 〈고향 생각〉 등 십여 곡의 가곡을 남겼고, 이 중 〈봉선화〉와 〈사공의 노래〉를 제외한 대부분의 가곡은 이은상 시인의 시에 곡을 붙인 것이다. 후세의 많은 사람들에게도 친숙한 〈나뭇잎〉, 〈개구리〉를 비롯하여 111개의 동요를 작곡하였고, 〈애수〉, 〈로망스〉 등 8개의 기악곡을 발표하였으며 여러 곡의 영화 음악을 작곡하는 천재적 재능을 발휘하였다. 저서에는 《세계의 음악》, 《조선 가요백곡집》과 단편 소설집 《처녀의 혼》, 《향일초》, 《폭풍우가 지난 후》 등이 있다.

1920년 4월, 단편 소설 "천녀혼(天女魂)"의 마지막 페이지에 바이올린곡 "애수(哀愁)"의 악보를 넣었다.[8] 봉선화 노래의 가사는 김형준에게 의뢰했다. 1925년에는 한국인 최초로 바이올린 독주회를 열었고, 한국 최초의 음악 잡지인 "음악계(音樂界)"를 발간했다.[8] 또한 "창조"에 "음악만필(音樂漫筆)"을 기고했다. 1929년에는 연악회를 통해 "조선동요 100곡집" 제1권을 발간했다.[8]

4. 사후

1954년 난파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조선동요 100곡집'을 재간행하였다.[19] 1965년 10월 25일 대한민국 정부는 홍난파에게 문화 훈장을 추서하였다. 1968년 수원 팔달산에 노래비가 세워졌고, 1969년 8월 30일 홍난파 추모일을 맞아 예총 경기도지회가 ‘난파음악제’를 연 이래 해마다 계속되고 있다.[20] 2004년 9월 4일 그가 살던 집(종로구 홍파동 소재)이 등록문화재 90호로 지정되어 현재 홍난파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집 앞에는 그의 흉상이 서 있다.

홍난파 노래비


그러나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의 친일 행적으로 인해 친일파 708인 명단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될 예정이었으나, 유족 측의 소송으로 유보되었다가 2010년 유족 측이 소송을 취하하면서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등재되었다.[24][25] 2017년 12월에는 대한민국 행정안전부 과거사 관련 업무 지원단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보유편》이 출간되었다.

4. 1. 친일 행적 논란과 평가

홍난파는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 관련자로 지목되어 종로경찰서 경찰에 의해 검거되었다. 72일 동안 옥고를 치른 후 석방되었으나, 애국가요대회에서 <정의의 개가>, <공군의 가(歌)>를 작곡하였다. 이후 "사상 전향에 관한 논문"을 제출하고, 1939년에는 변절한 문학가 이광수의 시에 곡을 붙여 <희망의 아침>을 발표하였다. 매일신보에 <지나사변과 음악> 등을 게재하고, 1940년 국민총력조선연맹 문화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하였다.[17]

일제 말기 전시 체제(중일 전쟁태평양 전쟁) 하에서 일제 총독부는 모든 분야에 걸쳐 억압을 가했으며, 당시 옥중에 갇혔던 정치범이나 독립운동지사들은 전향서를 써야만 석방될 수 있었다. 수양 동우회 사건 이후 많은 독립운동가들이 변절하거나 전향하였다. 홍난파의 딸 홍정임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1954년 난파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조선동요 100곡집'을 재간행하였다.[19] 1965년 10월 25일 대한민국 정부는 홍난파에게 문화 훈장을 추서하였다. 1968년 수원 팔달산에 노래비가 세워졌고, 1969년 8월 30일 홍난파 추모일을 맞아 예총 경기도지회가 ‘난파음악제’를 연 이래 해마다 계속되고 있다.[20] 2004년 9월 4일 그가 살던 집(종로구 홍파동 소재)이 등록문화재 90호로 지정되어 현재 홍난파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집 앞에는 그의 흉상이 있다.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의 친일 행적으로 인해 홍난파는 친일파 708인 명단,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될 예정이었으나, 2009년 11월 26일 홍난파 유족이 제기한 친일행위조사결과 통지처분 효력정지 신청이 서울행정법원에서 받아들여져 유보 결정되었다. 당시 재판부는 "홍난파의 행위를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더 따져봐야 하기 때문에 본안 소송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해당 처분의 효력을 중지한다"고 밝혔다.[24]

2010년 11월 4일 홍난파 유족이 행정안전부 장관을 상대로 낸 소송 선고를 하루 앞두고 소송 취하 의사를 밝혔고, 행정안전부가 이에 동의하면서 재판이 종결되었다. 이에 따라 유족이 제기했던 친일행위조사결과 통지처분 효력정지 신청 결정이 무효가 되어 홍난파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실리게 되었다.[25]

2017년 12월, 대한민국 행정안전부 과거사 관련 업무 지원단에 의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보유편》이 출간되었다. 여기에는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이유서, 김성수·방응모에 관한 친일반민족행위 결정에 관한 판결문이 수록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군가 등을 작곡한 사실 등으로 인해 2008년 4월, 민족문제연구소는 그를 친일인명사전에 등재하였다.[12] 경기도에서 열리는 「난파음악제」 웹사이트에는 “친일파의 이름을 딴 음악제를 개최하다니, 도대체 무슨 생각인가”라는 항의가 쇄도하였다.[12] 유족의 소송으로 2009년 11월 27일 발표된 친일파 명단 제3기(1937년-1945년)에서는 제외되었으나,[13] 2010년 판결에 따라 다시 등재되었다.[14]

4. 2. 기념 사업과 논란

1954년 난파기념사업회가 설립되어 '조선동요 100곡집'을 재간행하였다.[19] 1965년 10월 25일 대한민국 정부는 홍난파에게 문화 훈장을 추서하였다. 1968년 수원 팔달산에 노래비가 세워졌고, 1969년 8월 30일 홍난파의 추모일을 맞아 예총 경기도지회가 ‘난파음악제’를 연 이래 해마다 계속되고 있다.[20] 또한 그가 살던 집(종로구 홍파동 소재)이 2004년 9월 4일 등록문화재 90호로 지정되었으며 현재 홍난파 기념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집 앞에는 그의 흉상이 서 있다.

수양동우회 사건 이후에 있었던 친일 행적으로 인해 홍난파는 친일파 708인 명단,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될 예정이었지만, 2009년 11월 26일 홍난파의 유족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상대로 낸 친일행위조사결과 통지처분 효력정지 신청이 서울행정법원에서 받아들여지면서 유보 결정되었다. 당시 재판부는 "홍난파의 행위를 일본에 적극적으로 협력한 것으로 볼 수 있는지 더 따져봐야 하기 때문에 본안 소송 결과가 나올 때까지 해당 처분의 효력을 중지한다"고 말했다.[24] 2010년 11월 4일 홍난파의 유족이 행정안전부 장관을 상대로 낸 소송의 선고(2010년 11월 5일)를 하루 앞둔 상황에서 소송 취하 의사를 밝혔고 행정안전부가 이에 동의하면서 재판이 종결되었다. 이에 따라 홍난파의 유족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를 상대로 낸 친일행위조사결과 통지처분 효력정지 신청을 받아들인 법원의 결정이 무효가 되었고, 홍난파는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실리게 되었다.[25]

홍난파가 1897년에 남양 활초리에서 태어나 기념사업 권리 문제로 논란을 빚었던 화성시단국대학교와 유품을 놓고 신경전을 벌이고 있다. 2006년부터 181.5억을 들여 활초동 4m2 부지에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기념관, 야외음악당, 공원 등을 갖춘 홍난파 꽃동산 조성사업을 추진해왔는데, 연고권을 들어 단국대학교 측에 유품을 넘겨줄 것을 요구하고 있다.[20] 하지만 단국대 측은 "홍난파의 유품을 화성시에 넘겨줄 계획이 전혀 없다"고 했다. 단국대 관계자는 "2009년에 화성시가 한 차례 공문을 보내온 바 있지만 거절했다"며 "유품을 기증받아 지금까지 전시·보존을 해 왔고, 죽전캠퍼스에 박물관 증축이 끝나면 다시 정상적으로 전시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논란이 가중되자 단국대학교에서는 "기증받을 때 계셨던 학교 관계자 대부분이 세상을 떠났거나 학교에 남아있지 않기에 기증자 몇 명이 언제 어떤 이유로 유품을 학교에 전달한 것인지 확인하기 어렵다"라고 밝히면서 유품들은 모두 학교 재산으로 등록되어 있다고 못을 박고 어이없는 요구에 적극 대응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26] 또한 1984년 단국대학교 한남동 캠퍼스 내 난파기념 음악관에서 유품을 전시할 때 홍난파 선생의 따님도 참석했었다고 전하면서, 유품은 2007년 8월 30일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에서 용인시로 이전되어 옮겨진 음악관이 확장되는 대로 전시하기로 하였다. 단국대학교2013년 3월 13일 경기도 용인시 수지구 죽전동에 있는 신축한 캠퍼스에 전용 난파음악관을 마련하고 별실에 홍난파의 유품을 전시한 '난파 홍영후 전시실'을 개관했다. 유족으로 난파 선생의 조카인 홍건유 전 포스코 부회장, 외손자 홍익표 전 연성대학 부총장 등이 참석하였다.[26][27][28] 난파음악관의 전시실에는 2011년 문화재청으로부터 등록문화재 제479호로 지정된 동판 동요악보원판 51개를 비롯, 홍난파가 생전에 사용하던 바이올린 등 그의 음악적 삶이 담긴 수필 등 약 420여 점이 전시되었다.[28]

5. 일화

홍난파는 어릴 적 서울로 이사하여 정동이화학당 근처에 살면서 찬송가를 통해 서양 음악을 접했다.[9] [2][8][10] 1910년 황성기독교청년회(현 YMCA) 중학교에 입학하여 바이올린을 배우기 시작했고, 15세에는 조선정악전습소에서 성악과 바이올린을 배웠다.[2]

1918년 동경음악학교에 진학했으나, 삼일 운동 참여를 위해 귀국하여 학업을 중단했다. 이후 다시 일본으로 갔지만 독립운동 참여로 인해 학업을 계속할 수 없었다.[8] 1920년에는 단편 소설 "천녀혼(天女魂)"에 바이올린 곡 "애수(哀愁)" 악보를 수록했고, 김형준에게 가사를 의뢰해 "봉선화"를 만들었다. 1925년에는 한국 최초로 바이올린 독주회를 개최하고, 음악 잡지 "음악계(音樂界)"를 발간했다.[8] 1926년 구니타치 음악대학에 편입하여 NHK 교향악단의 전신인 도쿄 심포니 오케스트라에서 활동했다. 1929년 귀국 후에는 "조선동요 100곡집" 제1권을 발간했다.[8]

서울 사직동에 있던 홍난파의 옛 집

5. 1. 윤치호와의 관계

홍난파는 자신의 형 이비인후과 의사 홍석후 외에도 조선의 계몽사상가, 사회사업가 윤치호가 다달이 송금하는 100KRW으로 학비와 용돈을 조달하였다.

그는 윤치호에게 250KRW짜리 바이올린을 사도록 돈을 더 부쳐달라고 요청했다가 거절당했다.[29] 홍난파는 다시 편지를 써서 구두쇠의 죄악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조선의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자기 재능을 계발할 만한 아무런 수단이 없는 조선의 천재들과 영웅들의 운명을 비관했다. 그는 볼셰비키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정당한 약탈자들이라고 강변하고 부자들이 혼자서 자기 재산을 누릴 수 없는 때가 곧 올 것이라 했다.[29]

윤치호는 이를 협박으로 받아들이고, 조선 청년들의 사치, 허영심을 개탄하였다. 1921년 2월 6일에 쓴 윤치호의 일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홍영후의 편지를 읽고 부아가 치밀어 올랐다. 작년 1~2월쯤 도쿄에 가서 음악을 공부할 수 있게 도와달라고 그가 간청한 적이 있다. 그래서 그에게 100KRW을 주었다. 9월 언제쯤인가 또다시 수표로 100KRW을 주었다. 나중에 50KRW을 더 주어서, 유학비용으로 모두 250KRW을 대주었다.
한 달 전 그가 다시 편지를 보내와 바이올린을 사게 250KRW을 보내달라고 청했다. 공부하는 중에 250KRW짜리 바이올린을 사는 건 내 아들이나 동생이라도 절대로 승낙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부탁을 들어줄 수 없다고 답장을 썼다.
남에게 돈을 받아 공부하면서 생활비 전액을 대달라고 하는 것이나, 고학생이 250KRW짜리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 한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발상이었다. 그런데 오늘 배달된 편지에서, 그는 구두쇠의 죄악에 대해 내게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다. 그는 조선의 부자들이 가난한 사람들을 억압하고 있다고 비난하고, 자기 재능을 계발할 만한 아무런 수단이 없는 조선의 천재와 영웅들의 운명을 비관했다.한국어

홍난파는 윤치호에게 계속 후원을 받았는데, 하루는 윤치호에게 바이올린을 살 비용을 달라고 하였으나 거절하였다. 윤치호는 '남에게서 돈을 받아 공부하면서 생활비 전액을 대달라고 하는 것이나, 고학생이 250KRW짜리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한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발상'이라고 본 것이다.

그러자 홍영후는 윤치호에게 구두쇠의 죄악에 대한 설교를 하며 볼셰비키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정당한 약탈자들이라고 강변하고 부자들이 혼자서 자기 재산을 누릴 수 없는 때가 곧 올 거라고 주장했다. 분개한 윤치호는 홍영후를 가리켜 '조선 청년들의 수준과 은혜에 보답하는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녀석'이라고 혹평하였다.[30]

5. 2. 연미복 유언

홍난파는 윤치호에게 계속 후원을 받았는데, 하루는 윤치호에게 바이올린을 살 비용을 달라고 하였으나 거절당했다. 윤치호는 '남에게서 돈을 받아 공부하면서 생활비 전액을 대달라고 하는 것이나, 고학생이 250JPY짜리 바이올린을 갖고 싶어한다는 건 도저히 말도 안 되는 발상'이라고 보았다.[30]

그러자 홍영후는 윤치호에게 구두쇠의 죄악에 대한 설교를 하며 볼셰비키들과 공산주의자들이 정당한 약탈자들이라고 강변하고 부자들이 혼자서 자기 재산을 누릴 수 없는 때가 곧 올 거라고 주장했다. 분개한 윤치호는 홍영후를 가리켜 '조선 청년들의 수준과 은혜에 보답하는 그들의 마음이 어떤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녀석'이라고 혹평하였다.[30]

그러나 홍영후는 이때 느꼈던 구두쇠의 죄악과 부자에게 제한적으로 받았던 감정을 잊지 못해 훗날 유언까지 남겼다. 유족은 생전의 약속대로 연주하던 바이올린과 대표작들의 악보 등 총 116종 900여 점의 유품을 단국대학교에 기증하였다. 홍난파의 유품 대부분은 단국대학교가 소장하고 있다.[26]

홍난파가 경성중앙라디오방송국 양악부(洋樂部)의 총책임자로서 경성교향악단의 지휘자로 있을 때, 그는 〈조선동요100곡집〉이라는 악곡집을 만들면서 음악운동에 최선을 다하였다. 그러나 1937년 흥사단 사건의 관련자로서 수감되고, 1941년에서야 비로소 꿈에 그리던 교향악단의 초연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초연 전 긴 옥살이와 병약한 심신에 건강이 나빠져 몸져 누워 숨을 거두기 직전 사경을 헤맬 때, 그는 자신의 부인에게 "얼른 연미복을 가져오라"고 했다고 한다. 결국 그 일이 무리임을 알자, "자신은 연미복을 입혀 화장하라"고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BAKS: british association for korean studies https://web.archive.[...]
[2] 웹사이트 ko:홍난파 (洪蘭坡) http://100.empas.com[...] Empas / EncyKorea 2015-09-30
[3] 서적 Perspectives on Korean Music
[4] 웹사이트 Korean Traditional Music Goes Fusion https://web.archive.[...] Monthly Magazine SEOUL 2014-03-09
[5] 웹사이트 Korean Modern Music http://www.asianinfo[...]
[6] 웹사이트 Kee Man Chang https://web.archive.[...] 2008-10-05
[7] 웹사이트 ko:홍난파 (洪蘭坡) https://web.archive.[...] Doosan Encyclopedia 2015-09-30
[8] 웹사이트 ko:홍난파 (洪蘭坡) http://100.empas.com[...] Empas / Britannica 2015-09-30
[9] 웹사이트 Ewha Academy
[10] 웹사이트 ko:홍난파 https://web.archive.[...] Suwon City Government 2008-09-30
[11] 웹사이트 홍난파(洪蘭坡) http://encykorea.aks[...] 2022-07-18
[12] 뉴스 【コラム】「親日派」洪蘭坡の断罪は正しいのか(下) http://www.chosunonl[...] 朝鮮日報 2008-11-14
[13] 뉴스 朴正煕・洪蘭坡、親日名簿から除外 https://japanese.joi[...] 中央日報 2009-11-30
[14] 웹사이트 홍난파 친일명단 오를듯…후손 행정소송 취하 https://www.hankyung[...] 2010-11-09
[15] 서적 이것이 한국 최초 삼문 1995-11-01
[16] 간행물 홍난파 기념관 자료 발췌
[17] 웹사이트 평화의 집/명곡해설 홍난파 http://user.chol.com[...]
[18] 웹사이트 교회음악의 선구자 홍난파 http://cafe313.daum.[...]
[19] 웹사이트 홍난파 - Daum 백과사전 http://enc.daum.net/[...]
[20] 서적 수원 사람들은 어떻게 살았을까 수원문화원 2003-08-15
[21] 웹사이트 홍난파의 <봉선화> http://k.daum.net/qn[...]
[22] 뉴스 재미있는 홍영후 이야기7 http://ihsnews.com/n[...] 화성신문 2007-02-02
[23] 뉴스 재미있는 홍난파 이야기9 - 홍난파의 죽음 http://ihsnews.com/n[...] 화성신문 2007-03-03
[24] 뉴스 법원 "홍난파 친일명단 포함 유보" 결정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09-11-26
[25] 뉴스 홍난파 친일명단 오를듯…후손 행정소송 취하 https://news.naver.c[...] 연합뉴스 2010-11-09
[26] 뉴스 화성市와 단국대, 홍난파 유품 놓고 신경전 벌인다는데… http://news.chosun.c[...] 조선일보 2012-02-17
[27] 뉴스 단국대 죽전캠퍼스, ‘홍난파’ 유품 한 자리에.. http://www.fnnews.co[...] 파이낸셜뉴스 2013-03-15
[28] 서적 홍난파 음악연구 민속원 2010-10-30
[29] 일기 윤치호일기 1921-02-06
[30] 뉴스 그는 왜 친일의 길을 걸었나(윤치호 일기로 본 일제강점기 지식인의 내면) http://weekly.chosun[...] 주간조선 2013-03-15

관련 사건 타임라인

( 최근 20개의 뉴스만 표기 됩니다. )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