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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남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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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불은 남송 말기의 관리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그는 가사도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몽골군이 악주를 공격했을 때 호남제형으로 다시 기용되어 민병을 조직하고 방비했다. 1275년, 몽골군이 담주를 함락시키려 하자, 그는 가족과 함께 자결하여 충절을 지켰다. 이불의 죽음 이후, 남송 조정은 그에게 충절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형주와 장사에 이충절공사가 세워져 그의 충절을 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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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불 (남송)
기본 정보
성명이불
자(字)양숙(揚叔)
시호충절(忠節)
출생1212년
사망1277년
사인자결
국적남송
출신지형주(衡州) 형양(衡陽)
벼슬권지형주군사(權知衡州軍事)
형주지주(衡州知州)
강서제형(江西制刑)
보장각직학사(寶章閣直學士)
강서안무사(江西安撫使)
생애
주요 활동원나라에 맞서 싸우다 자결

2. 생애

남송(南宋)의 관리였던 이불은 조상의 공적 덕분에 관직에 나아가 기양현(祁陽縣) 지현, 호남(湖南) 안무사(安撫使) 막관(幕官), 상담현(湘潭縣) 지현 등을 역임하며 능력을 인정받고 명성을 쌓았다.[5][6][7] 이후 중앙으로 진출하여 임안부의 부윤(府尹)이 되었으나,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재상 가사도(賈似道)의 눈 밖에 나 그의 모함으로 파직되기도 하였다.[8]

원(元)몽골군 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다시 기용되어 호남제형(湖南提刑)과 호남안무사(湖南安撫使)를 맡아 담주(潭州) 방어에 나섰다.[10] 그는 부족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직접 전투를 독려하며 몽골군에 맞서 싸웠으나,[11] 결국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몽골군에게 모욕당하지 않기 위해 부하에게 명하여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집에 불을 지르게 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하였다.[13][14]

2. 1. 초기 관력

형양(衡陽) 석고서원(石鼓書院) 이충절공사(李忠節公祠) 내의 이불 소상


이불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했다.[3] 성품이 강직하여 아첨하지 않았고,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일을 올바르고 민첩하게 처리하여 간사한 인물들이 그를 속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4]

조상의 공적 덕분에 일찍이 남안사호(南安司戶)라는 관직에 임명되었고, 이후 기양위(祁陽尉)를 지내며 기근 구제에 공을 세워 명성을 얻었다. 기양현(祁陽縣)의 지현(知縣)으로 있을 때는 고을을 잘 다스린 공으로 호남(湖南) 안무사(安撫使)의 막관(幕官)으로 발탁되었다.[5] 호남안무사 막관으로 임명된 후에는 영주(永州) 지역에서 오랫동안 관군에 저항하던 도적 무리를 성공적으로 토벌하였다. 당시 이불은 참의(參議) 등형(鄧炯)과 함께 병력 1,300명을 이끌고 도적 장시선(蔣時選)의 근거지를 공격하여 장시선 부자를 사로잡았고, 남은 무리는 스스로 흩어져 달아났다.[6] 이후 상담현(湘潭縣)의 지현(知縣)이 되었다. 상담현에서는 지역 유력자들이 전임 지현의 업무를 방해하곤 했으나, 이불은 이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호적을 조사하고 세금을 추가로 징수할 때 원칙대로 처리하여 세금과 노역 부담이 공평해졌다고 한다.[7]

2. 2. 가사도에게 미움을 사다

함형 원년(1265년), 이불은 임안부의 부윤(府尹)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남송 조정은 재상 가사도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전의 임안부윤들은 모든 일을 가사도에게 먼저 보고하고 그의 지시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불은 이러한 관행을 따르지 않고 가사도에게 별도로 보고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불의 태도는 권력자 가사도의 불만을 샀다. 특히 복왕부(福王府)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과 가사도의 집안 사람이 화공 무기를 무단으로 사용한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불은 가사도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결국 가사도는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간관(諫官) 황만석(黃萬石)을 시켜, 이불이 뇌물을 받았다는 거짓 죄목(탐장죄)을 씌워 탄핵하게 만들었다. 이 모함으로 인해 이불은 임안부윤 자리에서 파직되었다.[8] 하지만 실제 이불은 평생 청렴하게 생활하여 재산이 많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9]

2. 3. 몽골군에 항거하다

원(元)몽골군악주(鄂州)를 공격하자, 이불은 다시 기용되어 호남제형(湖南提刑)을 맡게 되었다. 당시 호남의 여러 현(縣)은 도적의 소요로 인해 백성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돌고 있었는데, 이불은 이들을 징발하고 무장시켜 스스로를 지키는 자경단을 조직하게 하였다. 또한, 민병들을 형양(衡陽) 일대로 다시 모아 방어 태세를 갖추도록 하였다. 가사도(賈似道)의 군대가 무호(蕪湖)에서 패배하자, 조정은 이불의 관직을 회복시켜 담주(潭州)를 관리하게 하면서 호남안무사(湖南安撫使)를 겸임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이때 호북(湖北)의 주군(州郡)은 이미 모두 몽골군에게 점령된 상태였으며, 이불은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부임하였다.[10]

덕우(德佑) 원년(1275년) 7월, 이불은 담주에 도착했다. 당시 담주의 군대는 대부분 다른 곳으로 징발된 상태였고, 몽골군의 선두 부대는 이미 상음(湘陰)과 익양(益陽) 등 여러 현으로 진입해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이불은 겨우 2천 명의 병력을 모아 유충효(劉孝忠)에게 군대를 통솔하도록 명령했다. 같은 해 10월, 몽골군이 서쪽 성벽(西壁)을 공격하자 유충효 등은 전력을 다해 맞서 싸웠고, 이불은 직접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를 독려하였다. 그는 부상당한 병사들을 직접 찾아가 위로하고, 매일 충의(忠義)의 도리를 강조하며 사기를 북돋았다. 전투 중 사망한 병사들의 시신은 한데 모아졌으며, 사람들은 성에 올라 용감히 싸웠다. 몽골군 중 항복하는 자들은 처형하여 병사들에게 보여주며 항전 의지를 다졌다.[11]

2. 4.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하다

섣달 그믐날 밤, 몽골군이 담주(潭州) 성루에 올랐으나 격퇴되지 못했다. 형주(衡州) 태수(太守) 윤곡(尹谷)은 온 가족과 함께 스스로 불을 질러 목숨을 끊었고, 참의(參議) 양진(楊震)은 꽃밭 연못에 몸을 던져 순국했다.[12] 이불은 웅상각(熊湘閣)에 앉아 부하인 심충(沈忠)을 불렀다. 그는 심충에게 자신의 가족을 먼저 죽여 몽골군에게 모욕당하는 것을 막으라고 명령했다. 심충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이불이 단호하게 지시하자 울면서 명령을 따랐다. 심충은 이불의 모든 가족을 칼로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이후 심충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자식을 죽인 뒤, 다시 불타는 이불의 집으로 와서 불길 속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13] 이불의 막료(幕僚)였던 차릉(茶陵) 출신 고응혁(顧應焱)과 안인(安仁) 출신 진억손(陈亿孙)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소식을 들은 담주 백성들 중에는 온 가족이 함께 자결하는 경우가 많아 성 안의 우물이 시신으로 가득 찼으며, 나무에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많았다고 전해진다. 한편, 오계명(吳繼明) 등 일부는 성을 들어 몽골군에 투항했다. 진의(陳毅)는 포위망을 뚫고 복건(福建)으로 탈출하려 했으나, 도중에 전사했다.[14]

3. 가족

이불의 조상은 광평(廣平, 현재 허베이성 융녠현) 출신이었으나 나중에 개봉(開封)으로 이주했다. 고조부 이승(李升)은 진사에 합격하였으며 청렴했다고 전해진다. 정강(靖康) 연간에 금(金) 군사가 이승의 부친을 죽이려 하자, 이승이 앞을 막아서 부친을 보호하려다 부자(父子)가 함께 살해당했다. 증조부 이춘(李椿) 대에 이르러 형주(衡州, 현재 후난성 헝양시)로 이주하였다.[16]


  • 아들: 이유손(李裕孫)[17]
  • 손자: 이보숙(李輔叔)[18]

4. 평가

남송 조정은 담주성에서 순국한 이불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여 단명전대학사(端明殿大學士) 직위를 추증하고 '충절(忠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15] 이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의 충성심이 후대에 귀감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평가이다.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후대에는 이불을 기리는 사당을 세우는 등 다양한 기념 사업이 이루어졌다.[19][21]

4. 1. 충절의 상징

담주성에서의 이불의 최후 소식이 남송 조정에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려 단명전대학사(端明殿大學士) 직위를 추증하고 '충절(忠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후대에 귀감이 되었다. 한편, 타지에 있어 화를 면한 이불의 아들 이유손(李裕孫)과 손자 이보숙(李輔叔)은 이후 남송의 이왕(二王)에 의해 복건으로 불려가 관직을 받았다.[15]

4. 2. 기념 사업


  • 형주성(衡州城) 남쪽에 위치한 금오산(金鰲山)의 이불 고택(李芾故宅)은 이불을 기리는 사당인 이충절공사(李忠節公祠)로 개축되었다. 이곳에는 이불의 부장 심충(沈忠)과 형양현령(衡阳縣令) 목연조(穆演祖)가 함께 모셔졌으며, 이후 석고산(石鼓山) 남쪽 기슭으로 옮겨졌다.[19] 그러나 1944년 형양보위전(衡陽保衛戰) 중에 석고서원(石鼓書院)과 함께 이충절공사는 일본군 비행기의 폭격으로 모두 파괴되었다. 시간이 흘러 2006년, 형양시(衡陽市)에서 석고서원을 다시 세우면서 이충절공사도 함께 중건하였다.[20]
  • 장사(長沙)의 웅상각(熊湘閣) 역시 이충절공사로 개축되어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21] 하지만 현재는 천심구(天心區)에 있는 노변정소학(路邊井小學) 안에 그 옛터만 남아 있다.[22]

참조

[1] 서적 송인전기자료색인(宋人傳記資料索引)
[2] 뉴스 "[衡阳] 了不起的衡阳人丨李芾:仰面青天哭断云" http://hunan.voc.com[...] 衡阳日报 2016-12-10
[3] 서적 《宋史·李芾传》:李芾字叔章,其先广平人。芾生而聪警。
[4] 서적 《宋史·李芾传》:芾为人刚介,不畏强御,临事精敏,奸猾不能欺。
[5] 서적 《宋史·李芾传》:初以荫补安南司户,辟祁阳尉,出振荒,即有声。摄祁阳县,县大治,辟湖南安抚司幕官。
[6] 서적 《宋史·李芾传》:时盗起永州,招之,岁余不下。芾与参议邓炯提千三百人破其巢,禽贼魁蒋时选父子以归,余党遂平。
[7] 서적 《宋史·李芾传》:摄湘潭县,县多大家,前令束手不敢犯,芾稽籍出赋,不避贵势,赋役大均。
[8] 서적 《宋史·李芾传》:咸淳元年,入知临安府。时贾似道当国,前尹事无巨细先关白始行。芾独无所问。福王府有迫人死者,似道力为营救,芾以书往复辩论,竟置诸法。尝出阅火具(火攻战具),民有不为具者,问之,曰:“似道家人也。”立杖之。似道大怒,使台臣黄万石诬以赃罪,罢之。
[9] 서적 《宋史·李芾传》:平生居官廉,家无余赀。
[10] 서적 《宋史·李芾传》:大军(元兵)取鄂州,始起为湖南提刑。时郡县盗扰,民多奔窜,芾令所部发民兵自卫,县予一皂帜,令曰:“作乱者斩帜下。”民始帖然。乃号召发兵,择壮士三千人,使土豪尹奋忠将之勤王,别召民兵集衡阳为守备。未几,似道兵溃芜湖,乃复芾官,知谭州兼湖南安抚使。时湖北州郡皆已归附,其友劝芾勿行,芾泣曰:“吾岂昧于谋身哉?第以世受国恩,今幸用我,我以家许国矣。”时其所爱女死,一恸而行。
[11] 서적 《宋史·李芾传》:德佑元年七月,至潭州,潭州兵调且尽,游骑已入湘阴、益阳诸县,仓卒召募不满三千人,命刘孝忠统诸军。十月兵攻西壁,孝忠辈奋战,芾亲冒矢石以督之。有中伤者,躬自抚劳,日以忠义勉其将士。死伤相藉,人犹饮血乘城殊死战。有来招降者,芾杀之以徇。
[12] 서적 《宋史·李芾传》:十二月,城圍益急,孝忠中炮,風不能起,諸將泣請曰:“事急矣,吾屬為國死可也,如民何?”芾罵曰:“國家平時所以厚養汝者,為今日也。汝第死守,有後言者吾先戮汝。”除夕,大兵登城,戰少卻,旋蟻附而登,衡守尹穀及其家人自焚,芾命酒酹之。因留賓佐會飲,夜傳令,猶手書“盡忠”字為號。飲達旦,諸賓佐出,參議楊震赴園池死。
[13] 서적 《宋史·李芾传》:芾坐熊湘閣召帳下沈忠遺之金曰:“吾力竭,分當死,吾家人亦不可辱於俘,汝盡殺之,而後殺我。”忠伏地扣頭,辭以不能,芾固命之,忠泣而諾,取酒飲其家人盡醉,乃遍刃之。芾亦引頸受刃。忠縱火焚其居,還家殺其妻子,復至火所,大慟,舉身投地,乃自刎。
[14] 서적 《宋史·李芾传》:幕屬茶陵顧應焱、安仁陳億孫皆死。潭民聞之,多舉家自盡,城無虛井,縊林木者累累相比。繼明等以城降,陳毅潰圍,將奔閩,中道戰死。
[15] 서적 《宋史·李芾传》:芾初至潭,遣其子裕孫出,曰:“存汝以奉祀也。”其孫輔叔時亦親迎於溫,皆得不死。二王悉詔入閩官之。
[16] 서적 《宋史·李芾传》:其先廣平人,中徙汴。高祖升起進士,為吏有廉名。靖康中,金人破汴,以刃迫其父,升前捍之,與父俱死。曾祖椿徙家衡州,遂為衡人。
[17] 서적 《宋史·李芾传》:芾初至潭,遣其子裕孫出,曰:“存汝以奉祀也。”
[18] 서적 《宋史·李芾传》:其孫輔叔時亦親迎於溫,皆得不死。
[19] 웹인용 석고서원 http://www.0734fdc.c[...] null 2017-04-18
[20] 뉴스 外地游客前来石鼓书院瞻仰李忠节公祠 http://www.hydst.com[...] 衡阳广电网 2016-12-24
[21] 서적 《长沙市志》:占元年(1275),元军攻打长沙,守将李芾率军民守城三月,矢尽粮绝。城破之日,全家十九口及部属沈忠等在熊湘阁尽皆死节,军民殉难者不可胜数。后人将熊湘阁改为李忠节公祠以供祭祀。
[22] 뉴스 古长沙有3700多口井 http://news.sina.com[...] 潇湘晨报 2004-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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