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불 (남송)
1. 개요
이불은 남송 말기의 관리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그는 가사도의 미움을 받아 파직되었으나, 몽골군이 악주를 공격했을 때 호남제형으로 다시 기용되어 민병을 조직하고 방비했다. 1275년, 몽골군이 담주를 함락시키려 하자, 그는 가족과 함께 자결하여 충절을 지켰다. 이불의 죽음 이후, 남송 조정은 그에게 충절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형주와 장사에 이충절공사가 세워져 그의 충절을 기렸다.
-
남송 사람 -
조여우
조여우는 송나라 효종, 광종, 영종 시대의 재상으로, 효종의 신임을 받아 광종 폐위 후 영종을 옹립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나, 한탁주와의 대립으로 유배 중 사망 후 복권되었으며 주희를 옹호하여 송명리학 발전에 기여했다. -
1276년 사망 -
교황 그레고리오 10세
교황 그레고리오 10세는 1271년부터 1276년까지 재임한 184대 교황으로, 동서 교회 화합 노력, 제2차 리옹 공의회 개최, 몽골 제국과의 외교 관계 추진 등의 업적을 남겼다. -
1276년 사망 -
바실리 야로슬라비치
바실리 야로슬라비치는 야로슬라프 2세의 아들이자 알렉산드르 넵스키와 야로슬라프 3세의 동생으로, 1272년부터 블라디미르 대공으로 재임하며 노브고로드 지배 강화 실패와 킵차크 칸국 영향력 하 정치적 안정을 추구하다 후계자 없이 사망하여 조카 드미트리 알렉산드로비치가 대공위를 계승했다. -
생년 미상 -
손니 알리
손니 알리는 송가이 제국의 군주로서 니제르 강 유역을 장악한 후 팀북투와 젠네를 정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제국을 확장했으며, 전통 신앙과 이슬람교 조화, 법에 의한 국가 통제, 무역 확립 등 내치에도 힘썼다. -
생년 미상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2. 생애
남송(南宋)의 관리였던 이불은 조상의 공적 덕분에 관직에 나아가 기양현(祁陽縣) 지현, 호남(湖南) 안무사(安撫使) 막관(幕官), 상담현(湘潭縣) 지현 등을 역임하며 능력을 인정받고 명성을 쌓았다. 이후 중앙으로 진출하여 임안부의 부윤(府尹)이 되었으나, 당시 권력을 장악하고 있던 재상 가사도(賈似道)의 눈 밖에 나 그의 모함으로 파직되기도 하였다.
원(元)의 몽골군 침입이라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다시 기용되어 호남제형(湖南提刑)과 호남안무사(湖南安撫使)를 맡아 담주(潭州) 방어에 나섰다. 그는 부족한 병력에도 불구하고 직접 전투를 독려하며 몽골군에 맞서 싸웠으나, 결국 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몽골군에게 모욕당하지 않기 위해 부하에게 명하여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집에 불을 지르게 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하였다.
2.1. 초기 관력
이불은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영리했다. 성품이 강직하여 아첨하지 않았고, 권력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도 일을 올바르고 민첩하게 처리하여 간사한 인물들이 그를 속이지 못했다고 전해진다.
조상의 공적 덕분에 일찍이 남안사호(南安司戶)라는 관직에 임명되었고, 이후 기양위(祁陽尉)를 지내며 기근 구제에 공을 세워 명성을 얻었다. 기양현(祁陽縣)의 지현(知縣)으로 있을 때는 고을을 잘 다스린 공으로 호남(湖南) 안무사(安撫使)의 막관(幕官)으로 발탁되었다. 호남안무사 막관으로 임명된 후에는 영주(永州) 지역에서 오랫동안 관군에 저항하던 도적 무리를 성공적으로 토벌하였다. 당시 이불은 참의(參議) 등형(鄧炯)과 함께 병력 1,300명을 이끌고 도적 장시선(蔣時選)의 근거지를 공격하여 장시선 부자를 사로잡았고, 남은 무리는 스스로 흩어져 달아났다. 이후 상담현(湘潭縣)의 지현(知縣)이 되었다. 상담현에서는 지역 유력자들이 전임 지현의 업무를 방해하곤 했으나, 이불은 이들을 두려워하지 않고 호적을 조사하고 세금을 추가로 징수할 때 원칙대로 처리하여 세금과 노역 부담이 공평해졌다고 한다.
2.2. 가사도에게 미움을 사다
함형 원년(1265년), 이불은 임안부의 부윤(府尹)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남송 조정은 재상 가사도가 정권을 장악하고 있었으며, 이전의 임안부윤들은 모든 일을 가사도에게 먼저 보고하고 그의 지시에 따라 처리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이불은 이러한 관행을 따르지 않고 가사도에게 별도로 보고하지 않았다.
이러한 이불의 태도는 권력자 가사도의 불만을 샀다. 특히 복왕부(福王府)에서 일어난 살인 사건과 가사도의 집안 사람이 화공 무기를 무단으로 사용한 사건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이불은 가사도와 갈등을 빚게 되었다. 결국 가사도는 자신의 영향력 아래 있는 간관(諫官) 황만석(黃萬石)을 시켜, 이불이 뇌물을 받았다는 거짓 죄목(탐장죄)을 씌워 탄핵하게 만들었다. 이 모함으로 인해 이불은 임안부윤 자리에서 파직되었다. 하지만 실제 이불은 평생 청렴하게 생활하여 재산이 많지 않았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2.3. 몽골군에 항거하다
원(元)의 몽골군이 악주(鄂州)를 공격하자, 이불은 다시 기용되어 호남제형(湖南提刑)을 맡게 되었다. 당시 호남의 여러 현(縣)은 도적의 소요로 인해 백성들이 삶의 터전을 잃고 떠돌고 있었는데, 이불은 이들을 징발하고 무장시켜 스스로를 지키는 자경단을 조직하게 하였다. 또한, 민병들을 형양(衡陽) 일대로 다시 모아 방어 태세를 갖추도록 하였다. 가사도(賈似道)의 군대가 무호(蕪湖)에서 패배하자, 조정은 이불의 관직을 회복시켜 담주(潭州)를 관리하게 하면서 호남안무사(湖南安撫使)를 겸임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이때 호북(湖北)의 주군(州郡)은 이미 모두 몽골군에게 점령된 상태였으며, 이불은 친구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위험을 무릅쓰고 부임하였다.
덕우(德佑) 원년(1275년) 7월, 이불은 담주에 도착했다. 당시 담주의 군대는 대부분 다른 곳으로 징발된 상태였고, 몽골군의 선두 부대는 이미 상음(湘陰)과 익양(益陽) 등 여러 현으로 진입해 있었다. 이러한 혼란 속에서 이불은 겨우 2천 명의 병력을 모아 유충효(劉孝忠)에게 군대를 통솔하도록 명령했다. 같은 해 10월, 몽골군이 서쪽 성벽(西壁)을 공격하자 유충효 등은 전력을 다해 맞서 싸웠고, 이불은 직접 위험을 무릅쓰고 전투를 독려하였다. 그는 부상당한 병사들을 직접 찾아가 위로하고, 매일 충의(忠義)의 도리를 강조하며 사기를 북돋았다. 전투 중 사망한 병사들의 시신은 한데 모아졌으며, 사람들은 성에 올라 용감히 싸웠다. 몽골군 중 항복하는 자들은 처형하여 병사들에게 보여주며 항전 의지를 다졌다.
2.4. 스스로 목숨을 끊어 순국하다
섣달 그믐날 밤, 몽골군이 담주(潭州) 성루에 올랐으나 격퇴되지 못했다. 형주(衡州) 태수(太守) 윤곡(尹谷)은 온 가족과 함께 스스로 불을 질러 목숨을 끊었고, 참의(參議) 양진(楊震)은 꽃밭 연못에 몸을 던져 순국했다. 이불은 웅상각(熊湘閣)에 앉아 부하인 심충(沈忠)을 불렀다. 그는 심충에게 자신의 가족을 먼저 죽여 몽골군에게 모욕당하는 것을 막으라고 명령했다. 심충은 처음에는 거절했으나, 이불이 단호하게 지시하자 울면서 명령을 따랐다. 심충은 이불의 모든 가족을 칼로 죽이고 집에 불을 질렀다. 이후 심충은 자신의 집으로 돌아가 아내와 자식을 죽인 뒤, 다시 불타는 이불의 집으로 와서 불길 속에 몸을 던져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불의 막료(幕僚)였던 차릉(茶陵) 출신 고응혁(顧應焱)과 안인(安仁) 출신 진억손(陈亿孙) 역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이 소식을 들은 담주 백성들 중에는 온 가족이 함께 자결하는 경우가 많아 성 안의 우물이 시신으로 가득 찼으며, 나무에 목을 매어 죽는 사람도 많았다고 전해진다. 한편, 오계명(吳繼明) 등 일부는 성을 들어 몽골군에 투항했다. 진의(陳毅)는 포위망을 뚫고 복건(福建)으로 탈출하려 했으나, 도중에 전사했다.
3. 가족
이불의 조상은 광평(廣平, 현재 허베이성 융녠현) 출신이었으나 나중에 개봉(開封)으로 이주했다. 고조부 이승(李升)은 진사에 합격하였으며 청렴했다고 전해진다. 정강(靖康) 연간에 금(金) 군사가 이승의 부친을 죽이려 하자, 이승이 앞을 막아서 부친을 보호하려다 부자(父子)가 함께 살해당했다. 증조부 이춘(李椿) 대에 이르러 형주(衡州, 현재 후난성 헝양시)로 이주하였다.
* 아들: 이유손(李裕孫)
* 손자: 이보숙(李輔叔)
4. 평가
남송 조정은 담주성에서 순국한 이불의 충절을 높이 평가하여 단명전대학사(端明殿大學士) 직위를 추증하고 '충절(忠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의 충성심이 후대에 귀감이 되었음을 보여주는 평가이다. 이러한 평가를 바탕으로, 후대에는 이불을 기리는 사당을 세우는 등 다양한 기념 사업이 이루어졌다.
4.1. 충절의 상징
담주성에서의 이불의 최후 소식이 남송 조정에 전해지자, 조정에서는 그의 충절을 기려 단명전대학사(端明殿大學士) 직위를 추증하고 '충절(忠節)'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이는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그의 충성심을 높이 평가한 것으로, 후대에 귀감이 되었다. 한편, 타지에 있어 화를 면한 이불의 아들 이유손(李裕孫)과 손자 이보숙(李輔叔)은 이후 남송의 이왕(二王)에 의해 복건으로 불려가 관직을 받았다.
4.2. 기념 사업
* 형주성(衡州城) 남쪽에 위치한 금오산(金鰲山)의 이불 고택(李芾故宅)은 이불을 기리는 사당인 이충절공사(李忠節公祠)로 개축되었다. 이곳에는 이불의 부장 심충(沈忠)과 형양현령(衡阳縣令) 목연조(穆演祖)가 함께 모셔졌으며, 이후 석고산(石鼓山) 남쪽 기슭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1944년 형양보위전(衡陽保衛戰) 중에 석고서원(石鼓書院)과 함께 이충절공사는 일본군 비행기의 폭격으로 모두 파괴되었다. 시간이 흘러 2006년, 형양시(衡陽市)에서 석고서원을 다시 세우면서 이충절공사도 함께 중건하였다.
* 장사(長沙)의 웅상각(熊湘閣) 역시 이충절공사로 개축되어 제사를 지내는 공간으로 사용되었다. 하지만 현재는 천심구(天心區)에 있는 노변정소학(路邊井小學) 안에 그 옛터만 남아 있다.